14장(B)
그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책을 집어 들고 그 끔찍한 일을 잊으려 애썼다. 하지86들이 앉아서 호박 구슬을 세고, 터번을 두른 상인들이 장식 술이 달린 기다란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며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던 곳인 스미르나의 작은 카페에 들락거리며 날아다니는 제비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햇빛이 안 드는 외로운 망명지에서 화강암의 눈물을 흘리는,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에 관해서도 읽었다. 오벨리스크는 연꽃에 덮인 강렬한 햇빛의 나일 강 곁으로, 스핑크스가 있고 장미꽃처럼 붉은 따오기와 황금빛 발톱을 가진 흰 독수리와 김이 피어오르는 녹색 진창 위를 기어 다니는 담청색 작은 눈동자를 지닌 악어들이 있는 나일 강 곁으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다. 또한 키스 자국으로 얼룩진 대리석에서 음악을 끌어내며, 고티에가 콘트랄도 음성에 비교했던 기묘한 조각상, 즉 루브르의 반암(班岩)실에 웅크리고 있는 '매혹적인 괴물'87에 대해 노래한 시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점점 신경이 예민해졌고, 발작적으로 끔찍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앨런 캠벨이 영국에 없으면 어쩌나?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릴것이다. 어쩌면 오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가 오지 않으면 어쩌지? 매 순간이 대단히 중요했다.
한 때,그러니까 5년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 친밀한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끝나고 말았다. 이제 사교계에서 서로 만나면 도리언 그레이만 미소를 지을 뿐 앨런 캠벨은 결코 웃는 법이 없었다.
앨런 캠벨은 시각 예술에 대한 안목이 없으며, 시에 대한 미적 감각도 도리언에게서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대단히 영리한 젊은이였다. 그는 유독 과학에 대한 지적 열정이 대단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며 보냈다. 자연과학 우등 졸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그는 화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개인 실험실을 갖추고 하루 종일 그곳에 틀어박혀 지내곤 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의회에 입성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데다, 화학자는 약이나 처방해주는 사람쯤으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에 몹시 골치아파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대부분의 아마추어들 보다 훨씬 더 훌륭히 연주했다. 사실 그와 도리언이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음악이었다. 물론 음악 외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도리언의 독특한 매력도 그 계기가 되었다.
사실 도리언은 자신만의 매력을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발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매력을 발산했다.
두 사람은 버크셔(Berkshire) 부인의 저택에서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던 날 밤에 처음 만났고. 그날 이후로 오페라극장은 물론이고 훌륭한 음악이 연주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항상 함께 다니곤 했다. 그들의 친분은 1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캠벨은 언제나 셀비 로열이나 그로스브너 광장에 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그에게도 도리언 그레이는 인생에서 경이롭고 매혹적인 모든 것의 전형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다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어느 파티든 도리언 그레이가 참석하기만 하면 캠벨은 일찌감치 자리를 뜨는 것 같다는 말들이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시작했다.
캠벨 역시 변했다. 때로는 이상할 정도로 우울해져 음악을 듣는 것조차 꺼려하는 듯 보였고, 누군가 연주를 청하기라도 하면 과학 연구에 몰두하느라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연주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생물학에 관심을 갖는 듯했고, 특별히 호기심을 끄는 실험과 관련해서 어느 과학 평론지에 한두 차례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도리언 그레이가 기다리는 사람이 그였다. 도리언은 시시각각 시계를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몹시 초조해졌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 갇힌 아름다운 동물처럼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내지 않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두 손이 이상할 정도로 몹시 차가웠다.
결국 불안감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이 거대한 광풍에 휩쓸려 절벽이 벌리고 있는 삐죽삐죽한 아가리의 어두운 심연속으로 빨려드는 동안, 시간은 납으로 된 두 발을 끌면서 기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 그는 마치 뇌의 시각 영역을 없애버리고 안구를 안공 속으로 되돌려 넣으려는 듯, 몸서리치며 뜨거운 눈꺼플을 축축한 손으로 짓눌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두뇌는 제 나름의 양식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 살을 찌웠고, 공포로 기괴해진 상상력은 살아 있는 짐승처럼 고통을 못 견뎌 온몸을 뒤틀고 비트는가 하면, 무대 위의 천한 꼭두각시 인형처럼 춤을 추면서 움직이는 가면사이로 이를 드러내고 히죽거렸다.
그렇다. 느리게 호흡하던 눈먼 괴물은 더 이상 기어오지 않았다. 그러자 시간이 죽어버렸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재빠르게 앞으로 질주하더니, 시간의 무덤에서 소름 끼치는 미래를 끄집어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것에서 엄습하는 엄청난 공포에 그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마침내 문이 열리더니, 하인이 들어왔다. 그는 멍한 눈빛으로 하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캠벨 씨가 오셨습니다, 나리." 하인이 말했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고, 두 뺨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프랜시스, 당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그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렸던 기분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앨런 캠벨이 아주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다소 창백했는데, 새까만 머리카락과 검은 눈썹 때문에 더욱더 두드러져 보였다.
"앨런! 자네. 이렇게 올 줄 알았어. 와줘서 정말 고마워."
"그레이, 자네 집에 다시는 오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생사가 걸린 문제라기에 온 거야."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했다. 도리언을 쳐다보는 침착하고 엄중한 시선에는 경멸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아스트라한 모직 외투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신을 환영하는 도리언의 제스쳐에 무관심한 척하는 것 같았다.
"그래, 앨런. 생사가 걸린 문제야. 게다가 여러 사람의 생사가 걸린 문제지. 자, 앉아."
캠벨은 탁자 옆 의자에 앉았고, 도리언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리언의 시선에는 무한한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캠벨이 하게 될 일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6, 메카 순례를 마친 남자 이슬람교도
*87, 그리스 신화에서 남녀 양성을 지닌 인물인 헤르마프로디토스의 그리스 조각상을 복제한 로마의 조각상
첫댓글 도리언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꿍꿍이 수작이 궁금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점점 파국으로.....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