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회사〉
‘생각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김영호 (함석헌‧씨사상연구원장)
이 학술마당은 세 가지 일에 즈음하여 거행되는 행사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탄신(1901.3.13), 그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발표(1958) 50주년, 그리고 그가 남긴 생각의 틀(사상)과 실천론을 연구하는 우리 ‘연구회’의 ‘연구원’으로서의 새 출발이 그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20세기의 새벽에 태어나 (진정 우리시대의 ‘원효’(元曉)였습니다) 21세기를 준비하는 시점까지 살다간 그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씨이었습니다. ‘맨 사람’임을 자처하는 그에게 이름이나 호는 군더더기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그에게 호를 붙여준다면 ‘씨’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마치 간디에게 마하트마(大我)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처럼).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가 던진 ‘생각하는 백성’이라는 화두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더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말은 그 당시 정치상황이 ‘생각을 못하는 국민’이기 때문에 어두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경고가 민중의 가슴에 꽂혀 기폭제가 되어 민중의 양심을 휘저어 종국에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 아는 대로 5.16으로 그 뜻이 무참히 짓밟히고 그는 다시 ‘싸우는 평화주의자’, 투쟁하는 비폭력주의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날 윤리와 도덕성이 무시된 사회와 정권을 갖게 된 것은 군사혁명에 대한 평가가 정리되지 못한 데에 큰 원인이 있습니다. 비록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불가피하게 화염병과 돌 같은 도구와 분신으로 저항했다고 하더라도 민주화 운동은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 성공한 비폭력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폭력 앞에서 작은 폭력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민주화의 길을 닦고 큰 로드맵을 제시한 셈입니다. 이러한 시국상황이 그를 더 깊은 사색으로 몰고 가서 오늘 그의 풍부한 말씀과 글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마치 예수의 수난처럼, 우리가 그의 희생으로 큰 덕을 덤더기로 보고 있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냥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생각’은 요컨대 ‘깨달음’에 상당하는 말로서 깨달음으로 가는 사색, 사유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그는 그 주제 글에서 처음 부분부터 ‘깨달음’을 거듭 (첫 쪽에서 네 번이나) 말합니다. (6.25 같은 역사적 사건의) 숨은 뜻을 곰곰이 깊이 잘 ‘생각해 본다’는(110쪽)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사유에 상당하는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뜻’은 신의 영역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뜻이다”, 110쪽). 중생의 구원을 사유하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을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표정은 한국인의 사유와 마음의 원형적 표출이었을 것입니다. 함석헌은 그러한 마음과 사유를 드러냈습니다.
참된 종교적 ‘사유’는 이처럼 이기적인 사사로운 생각이 아닌, ‘나’(自己, ego)의식이 빠진 순수사고입니다. 모든 사고(thought)는 주체와 대상을 전제로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고 기술된 명제 속에도 대상이 암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 자체를 부정하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지향하는 명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바로 이러한 경지입니다. 그래서 참 ‘생각’은 ‘생각(生覺)’입니다. 깨달음은 이기적 자기를 벗어나서야 가능합니다. 유신론 종교에서는 ‘신의 뜻대로 하소서’의 영역입니다. 사유(思惟)의 ‘유(惟)’는 ‘사(思)’와 같은 뜻이기도 하지만 ‘오직, 오로지’(唯, 獨)의 뜻도 갖고 있습니다. 주체(나)와 객체(너)를 뺀 사고 자체만 오롯이 있는 형태입니다.
이 같은 사유형식은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요소입니다. 함석헌은 그래서 나보다 너를 걱정하는 사랑, 인, 자비를 강조한 성서와 고전들을 좋아하고 주석, 인용했습니다. 사랑은 자기-버림이며 ‘자기-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고, (노자의) 무위(無爲)는 행위를 하지말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연의 이치에 맡기고 자기-의식이니 의도가 내포되지 않은 순수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장자의) 좌망(坐忘)이나 심재(心齋)도 나를 비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가 또한 열심히 주석한 힌두교성전 『바가바드 기타』는 자기-이익(self-interest)이 배제된 무욕(無慾)행위(desireless action)를 강조합니다.
함석헌자신은 어느 누구보다 사사로움 없이 평생 공공하게 살아간 분이었습니다. 무사함과 공공함 두 가지를 다 아우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우리자신은 공사다망(公私多忙)하게 산다고 하겠지만, 대공무사(大公無私), 멸사봉공(滅私奉公)까지는 몰라도 선공후사(先公後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오늘 자본주의 시장경제 소비자로서 우리가 몰입되어 있는 물욕, 명예욕, 권세욕과는 무관하게 살아간 분입니다. 철저히 공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사리(私利)사욕보다 공의(公義)를 앞 세웠습니다. 전체를 개인보다 앞세웠습니다. 전체가 살아야 개인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산 모든 시대와 비민주적 정권에서 투옥, 핍박당한 사실이 그 한 증거입니다. 그 점에서 그는 희귀종입니다. 만세의 귀감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문을 구할만한 나라의 어른을 찾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그리운 것입니다. 인생을 마감할 때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느냐의 최종평가는 그 사람의 ‘공생(公生)기간 -(빼기) 사생(私生)기간’의 등식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두뇌 속에 각인되어 기억될 그 사람의 가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되도록 공생활에 몸을 바치는 것이 슬기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씨’과 『씨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늘에서 정신의 심층에서 길어낸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도용하거나 팔아먹어서는 안 될 공유자산입니다. 이 글에서도 함석헌은 ‘말을 파는 자’, ‘진리를 파는 자’, ‘하나님을 팔아 더럽히는 자’(120)를 가차없이 나무랍니다. 대개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한 함석헌을 팔고있지나 않는지 반성해봐야 합니다. 그를 팔아 글을 써서 업적을 세우고 ‘말을 파는 자’, 그를 팔아 이름을 드높이고, 그를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에 속하지 않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누가 나서라 하기 전에 스스로 앞에 나서서 자기 명리만 챙기는 자, 외식(外飾)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묵묵히 그를 본 따서 사는 씨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참회를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참회하는 민족이어야 산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함석헌을 팔아먹지 말자!)
씨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동기에서 나와야 합니다. 함석헌이 내보인 공인정신에 투철하게 배이고 그의 생각과 사상의 근본 뜻을 파악하고 나서야 씨의 소리를 말하고 남에게 전달할 자격이 있습니다. 독창적인 그의 사상을 단순한 사제관계나 세속인연에 연결시키거나 접목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상품처럼 상업화시키는 일은 그의 ‘맨 사람’ 정신에 어긋나는 짓일 것입니다. 기업이나 개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씨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사사로운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미 그는 이 글에서 ‘씨’을 심어놓았습니다. 그의 덕에 우리는 우리 각자 속에 씨을 배태하고 양육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대문입니다. 그는 씨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였습니다. 이것을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일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반세기 전에 함석헌선생이 짚어냈던 문제들은 아직도 타당하고 유효합니다. 그대로 남아있거나 다른 형태로 오히려 심화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남북분단은 말할 것도 없고 동서까지 심리적 차원 이상으로 갈려있는 데다가 그가 걱정하던 중산층 형성(111쪽)도 양극화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인 통일정신, 독립정신, 신앙정신도 (폭넓은 의미로) 크게 자라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탄하던 고구려의 역사적, 정신적 위상도 중국이 벌이고 있는 동북공정에 의하여 무너지고 어쩌면 통일까지 방해하여 옛 고구려의 한반도 고토지역이 중국에 귀속되는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함석헌은 이 글에서 또한 우리 민족 속에서 ‘위대한 종교’, ‘새 종교’, ‘참 종교’의 출현을 대망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생각의 간난’,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을 한탄하고, ‘깊은 종교’, ‘생각하는 민족’, ‘철학하는 백성’이 되어야함을 역설했습니다. 민족주의의 문제와 관련해서, “민족국가 시대에 제 노릇을 못하고 남의 종이 됐기 때문에 그 다음 시대에도 다른 데 종으로 팔리는 수밖에 없었다”(111)는 데서 그가 혹시 좁은 민족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참 이(利)는 의(義)다”(119)는 말씀 속에 맹자의 분별적 발상을 유기적으로 혁명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나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점을 오늘 이 학술마당에서 여러 분야전문가들이 명쾌하게 짚어낼 것입니다. 오늘 논의될 분야들은 함석헌이 평소에 늘 강조해온 종교(철학), 교육, 정치(경제), 신앙, 통일의 주제입니다. 주제에서 말하는 “생각하는 백성”은 두 가지를 함축합니다. 함석헌이 50년전에 제시한 잣대와 ‘깨달은 백성’의 시각입니다. 두 가지 입장에서 볼 때 우리사회는 어디로 지향해 가야 하는가. 물론 두 가지는 결국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분들은 학문만이 아니라 의식과 행동 면에서 점점 소수화하는 이 사회의 거울이요 양심입니다. 각기 교육, 사회운동, 언론 활동을 통해서 다소간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먹물 지식인들이 아니고 함석헌의 정신에 부합하여 활동하는 이들입니다. 이 분들은 우리가 세워가야 할 씨종교, 씨교육, 씨경제, 씨통일의 기틀을 놓을 사상가들입니다. 이 분들이 앞으로의 우리의 연구 활동과 씨의 소리 리바이벌에 사심 없이 참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20세기의 이 땅의 대표적 사상가로 요즘 부쩍 부각되고 있는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 보급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 산하에 ‘씨사상 연구회’를 설치하고 여러 학자들이 작년까지 연구, 발표해 왔습니다. 이제는 연구의 영역과 수준을 확대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고 명칭을 함석헌‧씨사상연구원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씨’은 함석헌의 독창적인 대표적 사상이지만 그것으로만 그의 사상 전체를 다 아우를 수 없다는 관점에서 이름을 앞에 붙인 것입니다. 함석헌은 어떤 이념이나 종교에 가두어놓기에는 너무 큰 ‘코끼리’요 ‘큰 바위 얼굴’입니다. 그의 사상을 연구, 보급하기 위해서 다각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통로와 방편이 활용되어야 합니다.
영원의 바닷가에서 우려나오는 그의 소리를 우리 속에서 다시 살려내서 씨의 소리로 내보내야 할 몫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소리내는 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전 현충원 묘소에서 들려오는 그의 요청입니다. 그가 깔아놓은 바탕을 잃지 않고 그 위에 소리의 탑이 솟아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여러분들의 물심양면의 협조가 이 연구원의 발전에 필요합니다. 이 기구는 기본조건이 갖추어진 모두에게 열려있는 마당입니다. 우리사회는 해묵은 관계(연줄)망(지연, 학연/학벌, 혈연/족벌에다가 종교연/종벌, 재연/재벌까지)에 갇혀 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다시 드러났듯이 틀이 더욱 더 견고해지는 형국입니다. 이 조직화한 거대한 악의 그물을 벗어나기 위해서 모든 씨들이 함께 가야 합니다. 그의 말씀이 다시 가슴에 울립니다: “씨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하지 않습니다.” 씨들의 적선(積善)을 기다립니다. 획일주의적이고 독선적으로 되기 쉬운 집단사고가 아닌 민주적, 씨주의적 집합적 사고와 공동노력이 필요합니다. 비현실적 사상을 논하는 먹물들, ‘폴리페서’(정치교수)에게만 맡겨둘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지성, 실천하는 씨이 필요합니다. 사회와 세계의 현실은 연구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한 대로 소리를 내질러야 합니다. 대들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연구원의 꿈은 함석헌이 꿈꾼 비폭력주의적, 반국가주의적, 전체론적, 열린 민족공동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론을 안출해내는 싱크탱크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함석헌이 꿈꾼 이 땅과 세계의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기구(‘함석헌평화재단’과 같은)의 수립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함석헌’을 내걸고 공공하고 떳떳한 목적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표방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있겠습니까. 동원할 인재는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몇 분 와 계시지만 오래동안 쌓은 지식과 포부를 활용하는 공동체를 기다리는 젊은 준비된 유능한 예비교수들, 무소속 인문학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을 모아 연구를 시키는 기구들이 곳곳에 생겨나야 합니다. 우리 연구원이 그 한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모금 (적선) 캠패인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희망제작소에서 하고 있는 재산/수익/유산 (1/100) 기부 캠패인 같은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모든 여러분의 협조와 성원을 기다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