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산 자락에서 김해평야를 굽어보며 자리하고 있는 장유암은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사찰에 전하는 가락고찰장유암중수비문(駕洛古刹長遊庵重修碑文)의 기록에 따르면, 장유암은 서기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누이 허씨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최초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창건 후 수선(修繕)의 내용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질지왕(451~492) 때 장유화상의 수도처를 재건하고 사리탑을 복원하여 세웠다고 한다.
그 뒤의 연혁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김해부사 김맹현(金孟賢) 등이 1469년(예종 1)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불모산 장유사는 선종(禪宗)에 속한다"라고 적고 있어 이 시기에도 법등을 이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불타버리고 말았으며, 그 뒤 중창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어느 시기엔가 운파(雲坡)ㆍ영담(映潭)ㆍ만허(万虛) 등의 스님이 머물며 중건ㆍ중수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당시 주지인 활해상인(活海上人)이 김해에 거주하는 청신녀 구품화(九品華)의 대시주로 법당과 동서 요사를 중건하고 장유화상사리탑 주변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이 불사는 1931년 봄에 시작하여 1935년 겨울에 낙성을 보았는데, 5년 동안의 중건은 그간 퇴락했던 도량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사리 중건되었으나 광복 후 6.25사변으로 인해 또다시 완전히 소실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그 뒤 수십년이 지나 1982년에 당시 주지인 화엄(華嚴) 스님이 인법당과 칠성각ㆍ염불당ㆍ종각 등을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1994년 보월(寶月) 스님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1998년에는 범종각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2년에는 경흥(慶興)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장유사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체계적인 신도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자료출처:전통사찰관광안내
장유암 나무아미타불석
장유암 공덕비
장유암 사천왕상
장유암 사천왕상
장유암 범종각과 천왕문
장유암 지장보살상
장유암 전경
장유암에서 바라다본 전경
장유암 요사
장유암 대웅전
장유암 요사
장유암 대웅전내
장유암 대웅전내 신중탱
장유암 석재들
장유암 삼성각
장유암 삼성각내 칠성탱
장유암 삼성각내 산신탱
장유암 삼성각내 독성탱
장유화상비
장유화상사리탑
문화재자료 제31호
팔각사리탑은 가락국 수로왕의 처남인 장유화상(허보옥)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조물로서 가락국 제8대 질지왕(451-492) 재위중 장유암 재건당시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1500여년의 오랜 세월속에 여러번의 전환으로 암자와 관계 유물들은 거의 소실되고 사리탑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 사리탑은 그 제작 수법으로 보아 려말선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1915년 5월 선포화상의 원력으로 현재의 장유암 사옥이 중건되면서 탑의 보호를 위한 석조 난간을 설치하고 아울러 가락국사 장유화상사적비를 건립하여 불모산 개창주의 뜻을 후세에 기리도록 하였다. 현상으로 보아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나 상륜 일부는 결실된 것을 보수하였다.
장유암 찾아가는 길
김해시내 터미널에서 장유행 버스(노선이 여러개임)를 타고, 장유면보건소(정확한 확인이 필요함)에서 하차하여, 장유폭포행 버스(노선확인 바람, 버스종점임)를 갈아타고 종점에 이르면, 장유폭포 입구입구를 통과하여 길좋은 아스팔트길로 계속 오르면(약4km)장유암(사)를 만나게 된다. 차량이 다니는 길이지만 기존의 안내대로 가는 것보다 훨씬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