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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를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따라 구축해 보면 마치 두 복음서의 기록에 차이(충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historical reliability)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두 복음서의 기록이 역사적으로 일치하며 따라서 성경의 무오성이 잘 유지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주후’(AD)의 기원
지금 우리의 햇수 계산 방식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를 원년으로 한다. 즉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을 ‘주전’(Before Christ: 영어로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뜻)이라 하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를 ‘주후’(Anno Domini: 라틴어로 '주님의 해'라는 뜻)라고 하여 햇수를 계산한다. 이러한 연대 기술 방식은 주후 6세기 초 로마에서 활동했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만든 것이다. 그는 신학, 수학, 천문학 등에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인데, 주후 525년에 교황 요한 1세(523-526년 재위)가 그에게 부활절의 정확한 연대를 계산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연대기를 도입하였다.
사실 고대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왕의 연호(무슨 왕 몇 년)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로마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주후 284-305년 재위)의 즉위 연대를 기원으로 하는 마르티르(Martry)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를 매우 심하게 박해했던 왕이었기에 교황은 그러한 왕의 연호를 부활절 연대 계산에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여 당시의 대학자였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로 하여금 진정한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로마제국의 기원 연도와 예수님의 생애를 비교 연구하였고 이렇게 산출된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로마제국 건국으로부터 754년 후였음을 발견하였다(로마제국은 주전 753년 4월 21일에 건국되었음). 그리하여 그는 A.U.C.(ab urbe condita[도시(로마) 건설 이후]) 754년을 주후 1년으로 계산하였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예수님의 탄생 연도를 잘못 계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성경과 고대 문헌을 연구한 후에 예수님이 적어도 주전 4년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았다. 즉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해는 A.U.C. 754년이 아니라 적어도 A.U.C. 750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A.U.C. 750년을 주후 1년으로 계산했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중대한 계산상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해도 후대의 사람들이 이 연대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주후’(AD) 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고 이제 와서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던 까닭에 오늘날까지 그냥 일반화되어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는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마 2:1에 따르면 예수님은 헤롯대왕(Herod the Great)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나셨다. 헤롯대왕은 주전 37년부터 주전 4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하다가 주전 4년에 죽었다. 이는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Antiquities, 17.6.4). 특히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헤롯이 죽던 해에 월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주전 4년 3월 12일에 실제로 월식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헤롯의 사망 연대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적어도 주전 4년 이전에 태어나신 것이 된다. 게다가 마 2:16에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헤롯 대왕에게 와서 이스라엘에 왕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전하자 헤롯 대왕이 듣고 베들레헴에 사는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헤롯 대왕이 동방박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나이를 두 살 이하로 보았다는 뜻이다. 즉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적어도 그때로부터 약 1-2년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전 6-4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마 2:22은 이때 예수님께서 부모와 함께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헤롯의 아들로서 주후 6년까지 사마리아와 유다를 통치한 헤롯 아켈라오 왕 때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셨다고 기록한다.
한편, 눅 2:1에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배경을 설명하면서 로마 황제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31-AD 14년 재임)가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로마 황제가 이러한 호적등록령을 내린 것은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서 눅 2:2은 이 호적등록령이 구레뇨(Quirinius)가 수리아(Syria)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된 것은 주후 6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주후 6년 이후에 태어나신 것이 되어 마태복음의 기록(헤롯 대왕의 죽음 이전)과 맞지 않게 된다. 단지 몇 년의 차이라면 모르겠지만 거의 1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대하여 마태복음의 기록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누가복음의 기록이 옳은 것인가?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 연도에 있어서 마태복음의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비평학자들의 공격 표적이 되어 왔다. 그들은 누가가 마태의 기록(예수님이 헤롯 대왕 때 태어난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눅 1:5을 볼 때 누가는 예수님께서 헤롯대왕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나셨음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역사가로서 주의 깊게 모든 자료들을 검토한 후에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한 누가가(눅 1:1-4) 당시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역사를 모를 리가 없다.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 여러 해결책들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한 제안들 중에서 가장 만족스런 것은 성경의 역사적 신빙성(historical reliability)을 주장하는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에 제시된 것으로, 눅 2:2에서 ‘처음’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프로토스’가 잘못 번역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 구절에서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first) 한 것이라’는 말은 원래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기 전에(before) 한 것이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헬라어 ‘프로토스’는 ‘처음’이라는 뜻과 ‘전에’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에’로 번역되어야 하며 그렇게 볼 경우에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실제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주전 4년경에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었으며(누가는 이때의 인구조사를 잘 알고 있었다. 행 5:37) 이때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기 전이었다.
게다가 주후 6년경에는 갈릴리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등록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헤롯 대왕이 이미 죽고 헤롯의 세 아들들이 나라를 나누어서 다스리고 있었던 때였다. 당시에 갈릴리는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렸고 유대는 헤롯 아켈라오가 다스렸다. 그런데 호적등록령의 목적은 세금을 걷는 것이었고 따라서 각 지역은 별도의 세금을 걷었던 상황이었으므로 갈릴리에 사는 요셉과 마리아가 유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등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후 6년 이후에 태어나셨다고 보는 것은 정황상으로도 옳지 않다. 결국 우리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에 차이가 없으며, 우리는 이들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자료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이 주전 6-4년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12월 25일이 예수님의 탄생 날짜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져 있듯이 이 날은 고대 로마제국에서 임의로 정한 날짜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정황을 통해서 살펴 볼 때 예수님은 봄이나 여름에 태어나셨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목자들이 날씨가 따뜻한 늦봄이나 여름에만 들판에서 밤을 지새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찾아 온 것은 성탄 당일이나 그 직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헤롯이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음을 고려할 때 동방박사들이 방문한 때는 예수님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아마 몇 개월 후)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방박사가 세 명이라는 증거도 없다. 그들이 세 개의 선물을 바쳤다고 해서 세 명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맞지 않다.
성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어나심이 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신 메시아가 오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예수님의 오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게 된다(롬 14:17). <고신대/ 황원하목사>
BC와 AD,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8세기(672/673-735) 영국의 역사가이며 후에 교회의 박사로 추앙된 Bede가 자신의 역사기록에서 BC와 AD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물론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의 탄생이전)를 말하는 것이고 AD는 (ANNO DOMINI) 즉 주님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즉 고대의 문헌들과 전통 및 자료들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탄생 연대를 추정하여 AD 1년으로 잡았다. 고대 요세프스의 기록이나 타키투스, 헤로도투스 등의 로마역사가들의 기록 등을 참조하여 연대를 추정하여 제기된 것이 AD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학계의 연구와 역사학계의 연구에 의해 예수님의 탄생이 BC 3년-AD 6년까지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Bede가 추정한 AD1년을 기준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연대 즉 정확한 AD1년이 언제인지는 아직 명확히 규정되지는 않았다.그렇다면, 만약 이렇게 AD가 불분명하다면 이후 연도를 매기는 AD *년이라는 것도 틀린 것이 아닌가?위에서 언급된 혼란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연대 기록이 3년 혹은 7년이 늦어지거나 빨라지지는 않는다. AD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일정한 해로 잡고 그 해를 AD1년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어느 해이건 간에 AD1년은 연대구분으로서의 AD1년이다.
예수님의 탄생연도에 따라 시대가 앞당겨지고 늦춰지는 것은 아니다. 즉 규정한 AD1년을 기준으로 삼아 313년째 된 해에 콘스탄티누스의 신교의 자유법령이 선포된 것이지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313년에 선포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AD *년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우리는 AD 2005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부연하면 우리가 예수님 탄생 2005년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AD 2005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AD1년이 언제인가 즉 예수님의 탄생이 언제인가라는 주제의 혼란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역사성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의 탄생시점이 BC3년부터 AD7년 어간이라는 것으로 인해 정확한 해를 정하기 어렵다는 것 뿐이다.
20세기에 와서 BC와 AD라는 구분이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해서 BCE와 CE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BCE는 Before Common era이고 CE는 Common era이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Before Christian era와 Christian era라고도 불린다.그러면 Christian era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Christian era는 527년경 로마에 살았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라는 스케테 출신 수도사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건설 후 753년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해를 그의 연대기에서 1년으로 잡고 이 해를 '주님의'("of the Lord") 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말하는 A.D.와 같다. 그는 그 다음 해 즉 AD 1년을 Ante Christum (A.C. 그리스도 이전) 혹은 Before Christ (B.C.)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문제는 AC 혹은 BC와 '주님의' 해 사이에 공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탄생이 AD1년 보다 3년 앞선 BC 3년 즉 로마창건 후 760년이라고 생각하여 그 해를 원년으로 삼았다. 그의 Christian Era에 대한 생각은 이태리에서 먼저 채택되었고 기독교 제국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AD 1000년에 이르러서야 유럽에서 사용되었고 14세기 중엽후까지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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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와 목자
동방박사들은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이었다. 페르시아의 학자들이요, 현자들이요, 엘리트들이었다. 동방의 왕들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다. 대개 이들은 움직일 때마다 안전을 위해 12명 이상이 그룹을 지어 다녔다. 그러므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만으로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확실치 않다. 이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다가 별을 따라 먼 길을 여행해 베들레헴까지 갔다. 혹자는 2년 이상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열심히 연구하다가 치밀한 준비를 거쳐 아기 예수를 스스로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목자들은 형편없이 무식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소나 양과 같은 짐승들과 뒹굴다 보니까 옷은 언제나 땀냄새로 진동했고 먹는 것도 변변치 못했다. 늘 집을 떠나 들판을 전전하면서 외로움을 잊기 위해 음주와 음담패설에 젖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천사가 알려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귀인 동방박사들은 천체를 연구하다가 스스로 예수 탄생을 알게 되었지만 천민 목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천사를 직접 보내셔서 알려주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를 능동적으로 발견한 사람들이었다면, 목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전적인 은혜로, 수동적으로 발견되어진 사람들이었다
동방박사형과 목자형 신앙인이 있다. 전자는 치밀한 준비와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자주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이다.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점수(漸修) 지향적인 신앙인인 셈이다. 숱한 이지적인 엘리트들이 이 진영에 속한다. 후자는 자발적인 노력 없이 순식간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피동적으로 진리에 이끌리는 사람이다. 돈오(頓悟) 지향적인 신앙인인 셈이다. 대개 지적으로 순박한 대중들이 이 캠프에 속한다.
존 웨슬리의 경우 1738년 5월24일 영국 올더스게이트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기 전까지 동방박사형 구도자였다. 옥스퍼드의 최고 지성인으로서 인간적인 성결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다. 이와 같은 자의 발견적인 의(義) 추구는 조지아 주 사바나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소 앞에 수레를 세우듯이 성화를 의인화에 앞세운 결과였다. 경건과 자비의 실천이 의인화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선결조건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진 회심 이후에 비로소 그 순서를 재정렬시켰다. 칭의를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100%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보았던 것이다. 비로소 수동적 목자형 은총 체험을 능동적 동방박사형 구도(求道) 앞에 두었던 것이다
베들레헴의 별은 역사적 사실이다
동방박사들이 본 별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동방 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의 별은 신화나 동화와 같이 꾸며 낸 이야기인가, 박사들에게만 보인 기적인가, 아니면 역사적·과학적 사실인가. 매년 이맘때면 성탄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을 보며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은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추억들과 새벽송을 돌 때 대문 위에 걸려 있는 삼태성을 바라보며 동방 박사 세 사람을 연상하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성경에 베들레헴의 별에 대한 기록은 마태복음 2장 1∼11절에만 4번 나온다. 4번이나 사실적으로 기재된 것을 볼 때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예수님의 전기를 기록한 복음서 중 마태복음은 특별히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했다. '별'은 높음의 의미와 더불어 왕을 상징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24:17)" 하신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왕으로 탄생하셨고 특별한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난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넷째 날,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창1:14∼18). 여기서 '별들이 이룬 징조'란 무엇일까? 성서는 점성술을 엄중 금지(신17:2∼7)하고 있으므로 별들의 징조는 점성술이 아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19:1)" 하신 말씀과 같이 하늘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보여 주며 별자리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구원과 심판의 징조들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메릴린 히키의 「하늘의 징조」 참조). 여기 베들레헴의 별은 예수님의 탄생과 인류 구원의 징조로서 성탄의 밤하늘을 말없이 밝힌 것이다.
그 별은 크고 밝게 빛난 별이었는가?
외경 중 '야고보의 원복음서'와 '이그나시우스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19번째 편지'에는 "크고 밝고 신비로운 별"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헤롯은 물론 유대인들도 그 별을 인지하지 못한 것(마2:7)"으로 보인다.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다(사9:2)"는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참 빛(요1:9)이요, 생명의 빛(요8:12)이요,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밝은 빛이다. 베들레헴의 별도 예수님처럼 큰 빛을 발했는지, 아니면 성화 속의 모습과는 달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신(사53:2)" 예수님의 겉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시력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별은 약 1,500∼2,000개이다. 그 중 베들레헴의 별은 초대 교회의 전승과 찬송가의 가사 대로 크고 밝은 별이었는지는 모르나, 누구든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특별하게 밝은 별인 것 같지는 않다.
항상 볼 수 있는 별 중 가장 밝은 별은 금성과 시리우스이며, 특별한 시기에 밝게 빛나는 별로는 혜성, 신성, 초신성(별이 폭발하며 밝게 빛나는 별), 이성상합(2개의 별이 서로 겹쳐지며 밝게 빛나는 현상), 유성(별똥별) 등이 있는데, 그중 베들레헴의 별은 어느 것일까?
천문학자 케플러가 발견한 베들레헴의 별
베들레헴의 별에 대하여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체를 연구한 천문학자는 케플러이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는 루터교 목사가 되려고 할 정도로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프라하로 와서 천문학을 연구하였으며 별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밝힘으로 점성술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행성 운동의 3법칙(타원 운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공전 주기의 법칙)을 발견한 후 그는 "나의 발견으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만 높아지게 하시고 나의 이름은 쇠하게 하소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의 발견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기초가 되었으며 인공위성 궤도에도 적용되고 있다.
그는 많은 시간을 드려 베들레헴의 별에 대하여 집중 연구했으며 BC 7년 5월, 10월 및 12월 목성과 토성이 물고기자리에서 3번 이성상합을 이루며 밝게 빛을 발한 사실을 계산해 냈다. 목성은 '왕'의 별이며 토성은 가나안 지방의 방패 유대 민족의 수호성(구원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물고기는 익투스의 의미와 같이 메시아(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그는 이 이성상합이 바로 베들레헴의 별로서 "유대인의 왕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탄생의 징조"라고 믿었으며, "나는 신학자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 천문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다.
현대과학 의해 밝혀지는 신비
천문학자 케플러는 베들레헴 별애 대해 최초로 과학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이성상합이 베들레헴의 별이라고 지목했다.
컴퓨터에 의한 계산과 별의 이동 경로를 천정에 비추며 확인하는 프로젝터인 플라네타륨(천상의·천체 투영기) 조사 결과, 3차례 합은 BC 7년 5월 29일, 9월 29일 및 12월 4일에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추측하면, BC 7년 5월 29일 목성(왕)과 토성(구원자)이 물고기자리(메시아)에서 약 1도(달 지름의 2배) 거리로 근접하여 빛을 발하는 1차합을 보고 동방 박사들은 유대 땅에 왕이 탄생하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두 행성이 서로 멀어지다가 8월초부터 다시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박사들은 구세주 탄생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로움으로 여행 준비를 시작한 것 같으며 마침내 9월 29일 2차합이 이루어지자 이들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약 2달 동안 900km의 먼 거리를 여행한 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당시의 유대왕인 헤롯을 만났으나 왕궁에는 최근에 왕자가 태어난 사실이 없음을 알고 크게 실망했을 것이며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에 따라 12월 4일, 왕궁을 나서는 순간 3차합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본 박사들은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마2:10).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남쪽으로 약 8∼10km를 걸어 아기 예수 계신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별은 완전한 3차합을 이룬 상태로 머물러 있었으므로(마2:9), 박사들은 그 집의 아기가 바로 메시아임을 깨닫고 그 분에게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이다(마2:11).
케플러는 약 400년 전에 이 사실을 밝혔지만 최근에는 컴퓨터와 천체 관측 기술의 향상으로 더 많은 연구와 제안들이 이루어 졌다. 캠브리지 대학의 헨프리즈, 스페인 천체물리연구소의 마르키저(저서 「베들레헴의 별」), 천체물리학 박사 마이클 몰나(저서 「베들레헴의 별-동방 박사의 유산」) 등의 저서를 보면 더 큰 은혜가 넘치리라.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의 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사람들이 우상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세의 시신과 법궤와 성경 원본을 감추신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의 별도 그 흔적을 지우시고 비밀에 부치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는 다시금 하늘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며(마24:29∼30), 예수님은 어둠의 권세를 이기는 '광명한 새벽별(계22:16)'로 다시 오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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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언제 탄생하셨나?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와 Mass(미사)의 합성어이며 동방 박사들이나 목자들처럼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날이다. 서방교회는 2세기부터 12월 25일(북방지역의 수목제날. 당시의 동지. 태양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가 떠오르는 '태양의 탄생일')을 빛이신 예수님의 탄생일(요1:9∼10)로 지켰으며, 동방교회는 여섯째 날에 첫 사람 아담을 창조 하셨으므로 1월 6일을 둘째 아담(고전15:45∼47)이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삼았다.
AD 525년 디오니시우스는 기발하게도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을 역산하여 예수 탄생 기원을 계산하였으며, 로마기원 753년을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주전) 1년으로 하였고, 로마기원 754년을 AD(Anno Domini, 주님의 해·주후) 1년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옥타비아누스란 이름으로 재위한 기간을 빠트렸고, 기원 원년 없이 BC 1년에서 AD 1년으로 바로 건너뜀으로 다시 1년을 빠트렸으며, 이 문제는 약 1,500년 후인 지난 2,000년도에 Y2K라는 컴퓨터상의 대 혼란을 야기하였다.
예수님의 탄생 시점은 헤롯왕이 죽기 전이며(마2:19), 베들레헴에서 어린아이들을 학살하기 이전이다(마2:16). 마리아가 아구스도의 영을 따라 호적 하러 갔을 때이며(눅2:1),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처음 한 것이다(눅2:2). 동방에서 그의 별이 나타났을 때이다(마2:1∼2). 예수님은 30세쯤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으며(눅3:23), 3년 간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때에서 역산하면 탄생 시점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1:26), 요한이 배태된 때는 아비야 반열이 대제사장 직무를 행할 때이었다(눅1:5-8).
헤롯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에 유대 왕으로 있었으며,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그가 죽은 해에 월식이 있었고, 월식 후에 그의 아들 안티파텔을 죽였고, 5일 이상 지난 후에 여리고에서 죽었으며, 애도기간(7일)이 지난 이후에 유월절이 있었다. 플라네타륨으로 유대지방에서 볼 수 있었던 월식을 조사한 결과 BC 4년 3월 12일 밤에서 13일 새벽 사이에 월식이 있었다. 그해 유월절은 4월 11일이었으므로 헤롯은 BC 4년 3월 17일에서 4월 4일 사이에 죽었으며, 예수님은 BC 4년 이전에 태어나신 것이다.
베들레헴 부근의 2살 이하의 아이들을 학살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작은 마을이었으므로 학살자 수가 많지 않아 기록에 없는 것 같음) 그 시점을 알 수 없으나, 헤롯이 죽은 후 예수님의 가족들이 애굽에서 돌아올 때 학살의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갈릴리에 정착한 것을 보면 헤롯은 아기들을 학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즉 1∼3년 이내에) 죽은 것 같다.
당시 예수님은 6개월∼1년 된 아기였을 것이므로 헤롯이 죽은 해에서 이 기간들을 감하면 예수님은 BC 7∼5년에 태어나신 것이다. 목자들이 경배드릴 때 예수님은 갓난 아기(눅2:16)였으며, 축사 안의 구유에 누워 계셨다(눅2:16). 그러나 동방 박사들이 경배드릴 때의 예수님은 어린 아기(무릎으로 기거나 아장아장 걸을 수 있는 아기, 마2:11)였으며 집에 계셨다(마2:11).
예수님 탄생은 12월 아닌 5월
터툴리안의 기록에 의하면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는 BC 27∼AD 14년 사이의 로마 황제였다. 당시 유대는 수리아 총독 산하에 있었으며, 수리아 지방의 호적조사는 BC 9년에 명을 내려 BC 8∼6년에 시행 되였다.
람세이 교수는 최근 발견된 고대 기록에 의거 "구레뇨는 그의 재임기간 중 2번 수리아 지방의 인구조사를 하였으며, 첫 인구조사는 BC 7∼6년에 시행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는 성경의 기록 "첫 인구조사 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눅2:2)"과 일치한다.
BC 7년 수리아 총독은 퀸틸리우스이었고, BC 6∼5년에는 사트루니우스였으나, 구나덴시아 전쟁의 지휘권을 갖고 있던 구레뇨는 아구스도 황제의 특명으로 총독 교체기간 전후에 총책임자(특사, 성경의 총독과 동일 의미)로서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 "구레뇨는 AD 6∼9년에 수리아 총독을 하였으며 AD 7년에 호적조사를 하였다"는 요세푸스의 기록과 예수님의 탄생 시기가 맞지 않아 곤혹스러웠으나, 구레뇨는 몇 차례 수리아 총독을 하였음과 이것은 그의 2차 인구조사 기록(행5:37)임이 밝혀졌다.
케플러가 발견한 베들레헴의 별(BC 7년 5월 29일 출현)은 그의 생전에는 당시의 역사 기록과 맞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인 'BC 7년 탄생 설'과 정확히 맞다. 더구나 예수님 탄생 당시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떼를 방목하던 정황(눅2:8, 12월엔 불가능하나 5월은 적기)과도 일치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유월절 전날인 금요일이었으며 음력 보름날이었다. 플라네타륨 조사 결과 만월과 금요일과 유월절 전날이 겹친 날은 AD 30년 4월 7일이다. 서양 사람들은 예수님이 '13일의 금요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으나 플라네타륨 조사 결과 이런 날과 유월절 전날이 겹친 적은 없으므로 나중에 지어낸 거짓말임이 밝혀졌다.
여기서 약 3년 전인 AD 26∼27년경, 즉 예수님이 30세쯤 되셨을 때(여기 30세쯤의 의미는 30세로 단정한 것이 아니라 30대를 의미한다)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눅3:23). 예수님이 BC 7년에 탄생하셨다면 33∼34세 되셨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37세 때인 AD 30년 4월 7일에 돌아 가셨으며 당일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뒤인 AD 30년 4월 9일, 주일 날 새벽에 부활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크리스마스 변천사
2000년전 이 땅에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우주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 기록되어 그날을 기념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흔히 성탄절이라 부르며 달력에 빨간색 표시가 되어 '노는날'로 지정되기까지는 그 탄생의과정과 의미를 모르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베들레헴 구유에 누우신 날부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뉴밀레니엄의 한가운데 이르기까지 Christmas의 변천사(?)를 알아보겠습니다.
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으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생일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도들은 특정일을 지정하여 예수님 오심을 기념하게 되었죠. Christmas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초기 기독교도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 이교도들의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일 거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이 축제는 274년 로마황제 'Aurelian'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보고 이날을 기념하여 농업을 주관하는 'Saturnalia'라고 불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동지절(12월 24 일 - 다음해 1월 6일)을 최고의 명절로 지켰었답니다. 그러던 것을 고대 교회의 로마 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대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지에 관한 풍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국마다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12월 22일에 팥죽을 쑤어 문설주에 바르고 먹는 등 악귀를 물리치려는 척사의 관습이 있지요.)
Christmas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월 25일을 Christmas로 지키기 전에는 1월 6일을 Christmas로 지켰는데 이는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날을 기념하여 현현일(Epiphany)로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Christmas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롤리스(379년), 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력 기원의 시원이 되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가 533년 부활절표를 작성할 때 계산한 데서 비롯된 시력기원의 기점인 예수님의 탄생은 실제로는 현재보다 4년이 앞당겨진 것이지요.)
Christmas가 오면 곳곳에 Merry Christmas라고 써 놓은 것을 보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X-MAS라고 쓴 것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 표기를 영어의 X(엑스)로 생각하여 혹자는 'X-MAS'는 잘못된 표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엑스마스'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X'자는 영어 알파벳의 'X'자가 아닙니다. 헬라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자인 '크스'자로서 이 뒤에다 MAS자를 붙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표기는 X-MAS로 할 수 있지만 읽을 때에는 반드시 'Christmas'라고 해야 합니다. 만일 이것을 표기한 대로 '엑스마스'라고 읽는다면 완전히 본 뜻과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지난 날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들은 표기대로의 'X-MAS'를 지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수학에서는 미지수의 표기를 X, Y, Z로 표시합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뜻으로 성탄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하나의 축제로 지낸 우리들의 Christmas는 곧 '엑스마스'였던 것입니다.
이제 12월 25일은 진정한 Christmas로서 지켜야 하겠습니다.
Christmas와 함께 오래도록 지켜 내려 오는 전통과 관습이 있는데 Christmas 장작, Christmas를 상징하는 빨간 열매가 달린 초록색 담장이(Holly), Santa Claus, 마구간 등이 그것입니다. 자세히 알아보면 이들 관습의 많은 부분이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이것은 본래 12월 25일이 이교도의 축제일인데 이것을 기독교의 축일로 바꾸었기 때문에 이교도의 전통과 관습이 기독교의 관습에 그대로 남아있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