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⑲ 오두막 은거와 ‘맑고 향기롭게
강원도 오두막 살면서 맑고 향기로운 세상 꿈꾸다
저작활동으로 명성 점점 높아지자
수행 어려워 조용한 곳으로 옮겨
정기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종교편향 비판글 투고
‘맑고 향기롭게’ 주창해 세상 정화
법정스님은 1992년 봄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 외부에 일체 자신의 거처를 공개하지 않는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2020년 2월호 <맑고 향기롭게> 회보에는 “1992년 4월 19일 저작 활동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로 인하여,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정든 불일암을 뒤로 하고, 강원도 오대산 중턱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류산방(水流山房)’이란 현판을 달고 홀로 수행정진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전민이 살다가 간 오두막은 스님과 인연 있는 재가불자의 제공으로 이루어졌다.
법정스님이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거처로 마련한 강원도 오두막. 화전민이 살다가 떠난 집을 개조해서 살았다.
김영사가 발간한 <간다, 봐라>에는 법정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불자가 오두막을 제공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래 전 저희 부부가 뉴욕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문명을 벗어난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장소를 물색하다 찾아낸 곳이 강원도 첩첩산중 화전민이 살던 인연터였습니다. 그곳은 땔감과 아궁이, 흐르는 개울물, 범바위가 집터를 둘러싼 오지였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봄날, 스님께서 법련사(송광사 서울 분원)법회를 마치시고 갑작스레 움막구경을 오셨습니다. 도량을 한 바퀴 도시더니 ‘이 오두막은 부처님께서 내 말년을 위해 감추어 놓은 회향처’라 하셨고, 곧바로 나뭇광에 있는 소나무 피죽을 톱질해 먹으로 ‘水流山房(수류산방)’이라 쓴 현판을 걸으셨습니다.”
불일암에 기거하면서도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법정스님은 처음 불일암으로 내려갔을 때와 사뭇 달라진 환경에 피로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과 교감하며 자신을 관조하는 법정스님의 불교생태주의적 사유는 학창시절 명산대찰을 유랑하며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출가할 당시에도 깊은 산중을 찾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향했었다. 그곳은 숲이 있는 곳으로 법정스님은 자신이 머물 궁극의 자리로 보았고, 그곳의 자연과 자신을 합일시키기 위해 만년에 머물 자리로 택했다.
법정스님은 산새와 바람과 물소리가 몸 속의 세포를 깨우는 산사의 숲과 운명 같은 인연을 맺고 다양한 숲을 찾아가기도 했다. 특히 2001년과 2002년에는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월든(Walden)>을 읽고 미국 월든 숲을 찾아가기도 했다.
강원도 오두막에 머물던 법정스님은 가끔씩 세상과 소통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던 1993년 7월15자 <동아일보>에 세상을 들썩거리게 한 칼럼을 싣는다.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독립기념관에 들러 보았다. 한 가지 일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존경하는 원로화가로부터 작년에 들은 말인데.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 정원에 대해서 관계기관으로부터 자문이 있어,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련을 심도록 했다. 그래서 화가가 몸소 나서서 멀리 지방에까지 내려가 어렵사리 구해다가 심었다. 그 후 연이 잘 크는지 보기 위해 가 보았더니. 아 이 무슨 변고인가, 연은 어디로 가고 빈 못만 덩그러니 있더라는 것. 그래 무슨 일이 있어 빈 연못으로 있는지 그 까닭을 알아봤더니, 새로 바뀐 관리책임자 되는 사람이 왜 이런 곳에 불교의 꽃을 심어 놓았느냐고 화를 내면서 당장 뽑아 치워버리라고 해서 그리 됐다는 것이다. … 이런 현상은 독립기념관만이 아니고 경북궁과 창덕궁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꽃에게 물어보라. 꽃이 무슨 종교에 소속된 예속물인가. 불교경전에서 연꽃을 비유로 드는 것은 어지럽고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다. 불교신자들은 연꽃보다 오히려 백합이나 장미꽃을 더 많이 불전에 공양하고 있는 실정이다.아, 연못에서 연꽃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김영한 보살의 희사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 된 길상사의 1997년 창건 모습.
이 글은 종교편향 사건으로 비화되어 일파만파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는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였던 김영삼 정부 시절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결국 연꽃을 다시 심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법정스님은 당시 상당한 심적 변화를 겪었으며 그 고민의 결과물로 나온 게 ‘맑고 향기롭게’ 시민모임 주창으로 보인다.
‘맑고 향기롭게’ 홈페이지에는 발족이야기가 실려 있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던 법정스님은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 정진하던 중 1993년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만으로 독립기념관, 창덕궁 부용정 연못의 연꽃이 모두 없어지는 기막힌 현실에 아연실색하며 ‘살벌하고 삭막한 현실에 푸근하고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우면 어떨까’하는 소박한 생각으로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했다.”
‘연못에 연꽃이 없었다’라는 글을 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법정스님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시주의 은혜로 살아온 출가사문으로 살아오며 ‘생전 밥값은 하고 가야겠기에 이 일 한가지만은 꼭 하고 싶다.’며 모임을 발족하여,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라는 아홉 가지 실천덕목을 바탕으로, 1994년 3월 26일 구룡사에서 첫 출발모임을 가졌다. 이후 전국 대중 강연회를 시작으로 연꽃 스티커를 나누며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지에서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이끌어 주셨고, 현재에도 많은 회원들이 동참하고 있다.” - ‘맑고 향기롭게’ 홈페이지에서
이 과정에서 법정스님은 서울 길상사를 기증받아 ‘맑고 향기롭게’ 시민모임의 근본도량으로 삼는다. 길상사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198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LA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김영한 보살(1999년 작고함)이 자신의 소유인 대원각 대지 7000여 평(23,140m²)과 건물(40여 동) 일체를 불교의 수행도량으로 바꾸어 달라며 기증할 뜻을 밝힌다. 당시 법정은 “평생 주지노릇 해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주지가 될 생각은 없다”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1994년에 들어 법정스님이 주창한 대 사회 계몽운동인 ‘맑고 향기롭게’ 시민모임이 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김영한 보살의 네 차례의 기증의사를 사양하던 법정스님은 수락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법회에서 법정스님의 인사말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시민모임에는 법정스님의 사상이 그대로 녹아 있다. 1994년 ‘맑고 향기롭게’ 발족 때 법정스님은 강연을 통해 취지를 밝힌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두 가지 일을 스스로 실행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관리, 감시하여 행여라도 욕심냄이 없도록 삿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콩 반쪽이라도 나눠 갖는 실천행이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어야 한다. 이 두 길을 함께 하고자 여러분께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제안하는 바이다.”
법정스님이 주창한 ‘맑고 향기롭게’ 시민모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본래 모습 그대로,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아가기 위한 활동이다. 또한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고 자연을 보존, 보호하는 일 등 구체적인 실천행을 도모하여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불교신문3634호/2020년12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