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결사 인도순례 21일차] 세계 첫 여성 성직자 탄생한 성평등 성지에 들다
비구니스님들 선두서 순례단 이끌며 바이샬리 도착
아난다 간청으로 비구니교단 성립한 대림정사 순례
3·1절 맞아 순례단 전원 태극기·인도국기 들고 행선
상월결사 인도순례 ‘생명존중, 붓다의 길을 걷다’가 3월1일 21일차를 맞아 바이샬리에 닿았다.
석가족 여인들이 스스로 삭발하고 부처님의 뒤를 따랐다.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에 이르기까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여정은 여성 출가를 둘러싼 부처님과 여인들의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마하빠자빠띠는 아난다의 옷자락에 매달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화한 아난다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수행하면 남자와 같은 수행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다네.”
“수다원과를 얻고, 사다함과를 얻고, 아나함과를 얻고, 아라한과를 현생에서 증득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아난다여.”
“부처님, 만일 여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면 그 첫 번째 기회를 마하빠자빠띠께 주십시오.”
눈을 감고 말씀이 없던 부처님께서 마침내 바이샬리 대림정사에서 아난다의 간청을 받아들여 여성 출가를 허락하셨다.
하지푸르를 떠나 도착한 바이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상월결사 인도순례 ‘생명존중, 붓다의 길을 걷다’가 3월1일 21일차를 맞아 바이샬리에 닿았다. 하지푸르를 떠나 도착한 바이샬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도시다. 릿차위족이 세운 밧지연맹의 수도였던 바이샬리는 수행자 싯다르타가 첫 스승인 알라라깔라마를 만난 곳이고, 성도 후에는 다섯 번째와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셨다. 여성 출가를 처음으로 허락하신 곳도, 원숭이에게 꿀 공양을 받은 곳도, 가뭄을 퇴치하는 이적을 보이신 곳도 바이샬리였다. 무엇보다 바이샬리에서 3개월 후 열반하실 것임을 처음으로 공표하셨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100여년 후에는 이곳에서 경전의 2차 결집이 단행되기도 했다.
7세기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바이샬리의 여러 유적에는 부처님과 유마거사의 행적을 기념한 수많은 탑이 세워져 있었음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바이샬리성 유적에 대한 기록과 함께 '유마경' 설법지 기념탑, 근본팔탑 유적지, 대림정사의 아쇼카 석주와 갖가지 일화를 기념하는 탑, 유마힐의 집터 탑, 열반 예고 탑, 암바팔리 망고동산 탑을 비롯해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르로 떠나며 바이샬리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곳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
이날 순례는 비구니스님들이 앞장섰다. 교단 최초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성평등 운동의 시발이 된 바이샬리에 가까워질수록 비구니스님들의 표정에는 각별함이 묻어났다.
불상 이운도 비구니스님들이 맡아 돌아가며 품에 모셨다.
이날 순례는 비구니스님들이 앞장섰다. 교단 최초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성평등 운동의 시발이 된 바이샬리에 가까워질수록 비구니스님들의 표정에는 각별함이 묻어났다. 불상 이운도 비구니스님들이 맡아 돌아가며 품에 모셨다. 매일 불상 이운을 발원했던 본오 스님도 비구니스님들에게 바이샬리가 갖는 각별함을 잘 알기에 이날은 기꺼이 양보했다.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신 것은 뿌리 깊은 인도 계급 사회의 근본을 흔든 것이다. 그만큼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역사학자들이 부처님을 혁명가·해방자로도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600년 전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지만, 세계적인 종교 가운에 여성이 보조역할이 아닌, 종교의식을 직접 집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종교는 오늘날까지도 불교 외에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비구니스님들에게 부처님의 은혜는 지중하다.
특히 이날은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을 공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 국민이 만세운동에 나섰던 3·1일절임을 감안해, 마지막 여정에는 순례단 전원이 태극기와 인도국기를 들고 걸었다.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의 아픔을 겪었던 과거를 함께 기억하며 다시는 침략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평화와 생명존중의 사회가 되기를 기원했다.
이날은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을 공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 국민이 만세운동에 나섰던 3·1일절임을 감안해, 마지막 여정에는 순례단 전원이 태극기와 인도국기를 들고 걸었다.
오늘 순례길에는 가장 많은 인원의 인도 경찰들이 함께하며 순례단을 외호했다. 전날 회주 자승 스님은 마을 대표와 경찰서장, 보건소 관계자들에게 팔만대장경 경판과 108염주를 선물하며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런 이유에선지 길은 험하고 차들로 위험했지만, 경찰들의 도움으로 여느 때보다 안전했다.
이날 첫 번째로 부처님을 품에 안고 걸었던 묘수 스님은 “부처님 재세시 인도사회를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세 번이나 거절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그럼에도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고, 지금 출가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기는 순례길에 동행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감격스럽다”고 소감을 전했다.
원해 스님은 “부처님 당시 우리가 걸어온 이 거리에는 출가를 발심한 여성들로 가득했을 것”이라며 “그 위대한 성지를 부처님을 품에 모시고 걷는다는 게 가슴 뿌듯하고 기뻤다”고 미소를 지었다.
덕진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 대로 세상의 모든 차별이 사라지기를 기원했다. “2600여년 전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결정한 이곳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환희심이 솟는다”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곳곳에 전해져 모두가 평등한 정토가 되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불제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비구니스님들의 발걸음에 맞춰 이날 오전 회향지인 근본사리탑터에 도착했다.
근본사리탑은 부처님 입멸 후 8등분 된 사리를 분배받은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에 의해 세워졌다. 1958년 발굴로 부처님의 사리탑임이 확인됐고, 기단부에서는 유골이 아닌 유회(遺灰) 사리가 발견됐다.
순례단은 비구니스님들의 발걸음에 맞춰 이날 오전 회향지인 근본사리탑터에 도착했다. 근본사리탑은 부처님 입멸 후 8등분 된 사리를 분배받은 바이샬리의 릿챠위족에 의해 세워졌다. 1958년 발굴로 부처님의 사리탑임이 확인됐고, 기단부에서는 유골이 아닌 유회(遺灰) 사리가 발견됐다. 사리탑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옛 사람들이 부처님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사리는 현재 파트나의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오후에는 대림정사를 참배했다. 대림정사는 죽림정사, 기원정사에 이은 교단의 세 번째 도량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몇 해가 지나 바이샬리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기근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당시 이 나라를 다스리던 릿챠위왕은 수소문 끝에 부처님께 사신을 보냈다. 당시 라즈기르에 머무시던 부처님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강을 건너 바이샬리를 찾았다. 부처님과 비구들이 강어귀에 이르자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바이샬리에 도착해 게송을 외우자 성 내의 삿된 기운이 모두 사라지며 기근과 질병은 사라졌다. 이를 고맙게 여긴 릿차위족은 부처님께서 좀 더 오래 머무실 수 있도록 정사를 짓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대림정사다.
대림정사에는 여성 출가를 눈물로 호소했던 다문제일 아난다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으며, 가장 완벽한 상태의 아쇼카 석주가 옛 모습 그래도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최초로 승인, 비구니 승가가 탄생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뒤를 따라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걸어온 마하빠자빠띠와 석가족 여인들을 지켜본 아난다는 대림정사에 머물고 계시던 부처님에게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후일 아난다는 바이샬리에서 입적했으며 대림정사에는 아난다의 공덕을 기려 그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조성됐다.
아난다의 사리탑 앞으로는 인도 전역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상태로 보존돼 있는 아쇼카왕 석주가 남아있다. 특히 석주 위의 사자상은 입멸을 예고하고 떠나신 부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듯 북쪽의 쿠시나가르를 향하고 앉아 있어 더 깊은 애잔함이 묻어 난다.
대림정사에서는 유주무주 고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석이 마련됐다.
상월결사 인도순례에 동참 중인 비구니 스님들.
대림정사에서는 이태경 불자의 설판으로 모친 서춘희 여사의 1주기 및 3·1절을 맞아 한국과 인도의 호국영령 그리고 우크라이나·튀트키예 희생자 등의 유주무주 고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법석이 마련됐다. 대변인 종호 스님은 “부처님께서 주석했던 성스러운 자리에서 한국과 인도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 전쟁과 지진으로 희생당한 분들을 천도하는 시간을 갖게 돼 의미가 깊다”며 “영가들의 극락왕생과 더불어 상월결사 인도순례단이 걷고 있는 생명존중의 길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아 정진하자”고 말했다.
순례단은 내일 바이샬리를 떠나 열반성지인 쿠시나가르로 향한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서 입멸을 예고하신 후 걸어 가셨던 그 길이다. 부처님께서 가장 아꼈던 도시 바이샬리를 떠나시자 릿챠위족은 다시는 부처님을 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계속 부처님의 뒤를 따라가며 눈물을 흘렸다. 그 슬픈 열반의 길이 지금 순례단 앞에 아련히 놓여있다.
바이샬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671호 / 2023년 3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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