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주요명소
보탑사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로 고려시대 큰 절터로만 전해오던 연곡리 비립동에 21 세기를 앞두고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동시에 전통목조 건축문화를 재현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문화민족의 긍지를 심어주기위해 건립했다.
1991년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고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회 감독아래 1992년 5월에 착공하여 건축한 것으로, 1층에는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시고 2층에는 경전을 모셨으며 3층에는 미륵3존불을 모셨다.
보탑사라 이름한 뜻은 법화경 견보탑품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다보여래께서 증명하고 찬탄하기 위해 칠보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신 것과 관련, 그에 미치지는 못 하지만 보배탑을 세움으로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심어주는 자비심으로 가득 채우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라 한다.
진천읍 연곡리 비립동 483 보탑사 043-533-6865
진천 왜가리도래지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 뒷편의 약 1,000년쯤 된 은행나무에 매년 3월부터 둥지를
틀고 번식하다가 11월에 대만 등지로 날아가는 왜가리 도래지이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곳에 왜가리가 서식한 지는 이미 수백 년 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이 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약 100년 전부터 이다.
이 곳은 1973년도까지만 해도 백로와 왜가리가 같이 있었으나 현재는 왜가리만 날아들고
있다.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 문화체육과 043-539-3603~5
만뢰산
이 이름은 고구려시대에 지명을 본따서 그대로 붙인 이름으로 추측된다. 높이는 611m이다. 만노산·이흘산이라고도 불린다. 주능선은 충청북도와 충청남도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정상에는 화가 최양호가 제작한 장승이 세워져 있다. 이 장승은 한자 뫼 산(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진천에서 가장 높은 산을 상징한다.
산행 제1코스는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에서 시작한다. 하수문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절골이 나오며 계곡 능선길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면 정상이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1984년에 세운 삼각점이 박혀 있다. 시야에 연곡저수지와 몽각산(403m)이 전망된다. 하산은 정상에서 동쪽으로 난 주능선을 따라 540봉을 거쳐 연곡리 쪽으로 내려가거나 남쪽 연곡지를 통하여 내려온다. 연곡리 보련마을 쪽 하산은 남쪽으로 정상의 헬기장을 가로지른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보련마을에 도착하며, 이곳에는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404)와 보탑사 삼층목탑이 볼거리이다. 계속 내려가면 연곡지가 나온다. 연곡지는 겨울철 얼음낚시로 유명한 곳으로, 작은 길을 40분 정도 내려가면 김유신의 탄생지에 닿게 된다. 산행거리는 6.8㎞이고 약 3시간 20분이 소요된다.
제2코스는 연곡리 보련마을이 산행기점이 된다. 마을 왼쪽으로 올라가면 천수탑과 기도터를 지나며 주능선에서 오른쪽으로 따라가면 정상이다. 하산은 동북쪽으로 난 능선길을 따라 540봉을 거쳐 남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산행거리는 7.5㎞ 거리이며 약 2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백곡면 대문리와 성대리는 마을 전체가 안개꽃 단지이다. 이곳에는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404) 등 많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산 2-9일원 문화체육과 043-539-3623
백곡저수지
동양에서 유일하게 싸이폰식저수지(1949)였으나 80년대초 저수지 제방확장 축조사업으로 싸이폰시설은 수몰되었다. 저수지의 규모를 보면 진천군과 음성군 유역에 필요한 농수량을 보급할 수 있도록 3089ha를 개발하고 총 저수지량 2,200만톤, 만수 면적 232ha, 제방높이 27m, 길이 410m 수문식 물넘이 4운(澐) 최대 배수량 833톤/sec이나 된다.
진천의 3대 낚시터(백곡, 초평, 덕산)의 하나로 교통이 편리하고 잉어의 입질이 좋아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진천군 진천읍 건송리 한국농촌공사 진천지사 043-533-2441
농다리(진천농교)
사력 암질의 붉은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다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돌다리이 다. 다리는 사력암질의 자석을 쌓아 놓은 다리로서, 당초에는 28칸의 교각이었으나 현재는 25칸만 남아 있다. 지방유형문화재 28호로서 길이는 93.6m, 폭 3.6m, 교각 1.2m 정도이며, 교각 사이의 내폭은 80cm 내외이다.
석회등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쌓았는데도 견고하며 장마가 져도 유실됨이 없이 원형을 유 지하고 있다. 이 다리는 고려 고종때의 권신, 임연장군이 놓았다는 돌다리로 규모도 크고 축조술도 특이 하다. 임장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세금천 건 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하자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으니 여인이 말하기를 "아 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입니다" 하니 장군은 여인의 효성이 지극함 과 그 정경이 딱하여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고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하루 아침에 다 리를 놓아 부인이 무사히 건너도록 하였다 한다.
그 때 용마는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하며 용마의 바끈이 끊어져 떨어 진 돌을 그대로 두었는데 이것이 용바위라 전해지고 있다. 또 다른 전설을 보면, 나라안에 변고가 일어날 때는 이 다리가 몇일을 두고 운다고 하는데 한일합방 당시와 6.25 동란 당시에도 이 다리가 몇일동안 울었기 때문에 부락민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문화체육과 043-539-3725
배티성지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활용되었으나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 천주교 박해의 정도를 가늠케한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 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 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 현재 이곳 배티에는 신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던 옹기점과 무명순교자의 묘 만이 남아있다. 한편 배티성지에서는 배티성지개발 후원회를 조직 교회사연구소와 피정의 집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문화체육과 043-539-3622
영수사
영수사는 비지정문화재로 1977년 단국대학 학술조사 연구반에 의해 문화재 가치를 인정 받 은 사찰이며 목조(나무)로 되어있다. 고려 태조 원년 (918년)에 증통국사가 창건하였으며 근세 조선 순조 30년 (1831년)에 지방 민의 후원으로 주증 요익이란 분이 다시 짓고 고종 5년에 또다시 이 한이 고쳤다.
이 절은 진천의 명산의 하나인 두타산의 영기를 받아 만병통치의 약수가 흐르고 있어 이곳 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한 여름에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때문에 더 욱 붐비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정기가 서린 곳에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신주들이 모이지 않을 수가 없으며, 사찰이 서지 않을 수 없는 당연한 명당으로 알려졌다.
이 곳에는 1977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44호로 지정된 괘불이 있는데, 이 괘 불은 길이가 875.5㎝, 폭이 579㎝로 모시에 그렸으며 진천읍 연곡리 백연암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모시(저포)에 채색으로 그린 이 불화는 석가모니불이 인도의 영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 사한 심인법사의 발원에 따라 화공 비거 명옥, 소읍 현욱, 법능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산 542번지 영수사 043-534-0966
연곡저수지
진천읍 상계리에 있는 김유신탄생지를 들러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조용한 저수지를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이 연곡저수지이다. 연곡 저수지는 총 저수량 920톤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주변 자연환경이 아늑하고 고요해서 혼자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으며 겨울이면 가족들이나 연인 들끼리 얼음낚시를 즐기러 많은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또한 연곡저수지를 지나 약 20분 정도 숲길을 걸어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보탑사가 위 치해 있는데 이 곳에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다는 3층 목탑 (통일대탑)이 있어 내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가 주변 경관을 시원하게 둘러볼 수 있다.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문화체육과 관광담당부서 043-539-3224
진천 태권도박물관
진천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1995년 12월에 준공하여 1996년 5월에 개관하였으며, 우리의 민속자료(의식주 생활용구와 농기구)와 농경생활을 시기별로 전시하여 조상들의 얼을 새기는 삶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2층에는 화랑의 고장 진천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태권도박물관을 개관 운영함으로서 태권도의 역사정립과 정통성 확보에 기여 화랑,태권정신의 계승 발전을 통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의 올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 하고자 운영하고 있다. 향후 2,000㎡(지하 1층, 지상 2층) 태권도박물관을 신축할 예정이다. 화랑, 태권정신의 발원지 진천의 역할 제고와 태권도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태권문화사업 추진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기대효과를 가지고 있다.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108-1 향토민속자료전시관 2층 진천 태권도박물관 043-539-3543
김유신장군 탄생지 및 태실
이곳은 흥무왕 김유신 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3세손이다.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만노: 진천의 옛이름)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아들로 진평 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 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 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으며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 을 완수하여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지금의 계양(桂陽) 마을 입구에 장군터(태수 관저가 있던 곳)라 불리워지는 곳에 1983년에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이곳에서 북서 방향 2㎞ 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 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 있으며, 무술 연습을 했다고 전해오는 투구바위와 치 마대가 있다.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18 문화체육과 043-539-3624
진천종박물관
진천종박물관은 한국 종의 연구, 수집, 전시, 보존은 물론 기획전시, 교육 및 다양한 활동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한국 종의 예술적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고자 2005년 9월 개관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조사된 진천 석장리 고대 철생산 유적지가 있는 진천에 건립되어 그 의미가 깊다. 진천 석장리는 한국최초로 4세기대로 편년되는 고대제철로의 실례(實例)가 발견되었다는점을 들 때 금속공예의 제작도 가능하였음을 의미한다. 진천 인근 지역인 청주 운천동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범종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의 용두사지 철당간도 남아있다.고대 유적 가운데 최대규모의 제철로를 소유했던 진천에 금속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범종의 문화를 기리는 종박물관의 건립은 필연적 인연이라 하겠다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710 043-539-3847~8
정송강사
정송강사는 송강 정철선생(1536∼1593)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지방기념물 9호이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에 우암 송시열이 지금의 묘소로 자리를 정하고 그의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를 창건하였으나 규모가 작아 1979년에 전면 신축정화하였다.
사당은 목조19평 맞배지붕이고 유물전시관은 시멘트32평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 송강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송강선생의 은배, 옥배 그리고 연행일기 65일분과 친필편지 등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송강사(1976년 지방기념물 9호로 지정) 왼쪽에는 마른 억새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3백여m 타고 오르다보면 송강의 묘소가 나온다.
* 시대 - 조선 현종 6년. 1979-1981년 중건 * 규모 - 사당(19평), 유물전시관(32평) * 재료 - 시멘트 및 목조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 정송강사 관리사무소 043-532-0878
진천 신헌고택
신헌 1810(순조10)-1888(고종25)무신외교가. 자는 국빈, 호는 위당, 초명은 관호. 본관은 은 평산훈련대장 홍주의 손자, 의직의 아들, 금위영 대장이 되어 1849년 (철종즉위)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가 진찰한 죄로 섬에 위리 안치되었다. 1854년 무주에 이배, 1857년 풀려 나왔다. 1862년 통제사가 되고, 1864년에 형조,병조의 판서를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다. 1866년 총융사로 병인양요때 강화의 염창을 수비, 난이 끝난 후 좌참찬겸 훈련대장을 지내고 수뢰포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되었다.
1868년 어영대장이 되고 행지삼군부사, 공조 판서를 역임. 1874년(고종 11) 진무사가 되어 강화연안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 해 판중추부사로서 전권대관이 되어 일본의 전권 변리대신 구로다와 강화에서 병자수호조약을,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한미 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고, 이 해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에 뛰어났고, 묵란을 잘 그렸다.
시호는 장숙.
신헌고택 건립당초에는 ㄱ자형으로된 사랑채와 행랑채,안채,중문등있었으나, 사랑채, 행랑채는 근년에 해체하여 진천읍내의 길상사를 중수하는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ㄱ자형의 안채 주변에는 동남쪽으로 중문과 광채가 있고,주위로는 막돌로 쌓은 담장이 장방형을 이루면서 이어져 있다. 안채는 가운데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마루전면에는 4분합문을 달았다.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 진천군청 043-539-3114
진천 산수리 백제요지
소형은 산능선 가까이에, 대형은 그보다 아래쪽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조사된 가마의 구조는 모두 수직연소실과 토기를 놓았던 소성실로 구성된 반지하식의 등요이다. 1986년도에 시행된 중부고속도로 건설구간의 문화유적조사 중 대전 한남대학교 발굴단이 발견하여 다음 해에 발굴조사된 서기 4세기경의 백제토기 요지군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8기의 토기요지가 조사되었는데 길이 3m내외 소형이 4기, 8m내외의 대형이 4기였다. 소형은 능선 바로 가까이에 대형은 그보다 약간 아래 경사 면에 위치해 있었다. 기본 구조는 모두 같아 아궁이의 바로 밑이 불때는 곳인 수직식 연소실과 토기를 놓았던 연소실로 구성된 등요였다.
그러나 소형은 바닥과 벽이 지하로 들어가 지하에 설치된 완전 지하식이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기편(土器片)이 수집되었는데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打捺紋土器-두드림무늬토기)가 백제토기로 발전되어 갔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 경사면을 이용할 수 있는 완만한 야산이 발달되어 있는 이 일대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토기의 모태가 된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요지(打捺紋土器窯址)들이 분포되어 있다. 토기 태토(胎土)로 쓸 수 있는 양질의 점토산지도 인근 미호천변 속칭 '어지미'들에서 확인되었는데 이 일대에서는 서기 기원전후 무렵부터 타날문토기요지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196-3 진천군청 043-733-3900
연곡리석비(연곡리사지)
연곡리 사지는 진천읍 연곡리 비립마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당시의 절이름이 나 연대, 훼손년대 등을 알 수 없다. 현재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고, 그 인근의 연곡리 석비(백비) 등을 통하여 고려 때 절터로 추측된다. 현재 이곳에는 삼선포교원의 보탑사가 있다.
진천읍 연곡리 비립동에 있는 "연곡리 석비"는 비석에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라고도 하 며 비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마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건립연대 는 알 수 없으나, 조형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 또는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좌대는 거북 모양이고 이수는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인데, 그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높이는 212.5cm, 폭 111.8cm, 두께는 22.2cm 이며, 1964년 9월 3일 보물 제 404호로 지정 되었다. 석비 옆에는 석불좌상과 사리탑으로 추측되는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앞에는 전통적인 공법으로 목탑을 재현하는 등 현대의 불교 유적이라고 할 수 있 는 보탑사가 건립되어 많은 참배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4번지 문화체육과 043-539-3624
숭렬사(이상설생가)
지정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개최되어 이완용,박제순등의 찬성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되어 땅을치며 통곡하였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043-539-3725
용화사
용화사(龍華寺)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뽀얀 먼지를 휘날리며 수많은 왜적들이 진천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들의 눈에 엄청나게 큰 장수같이 보이는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왜적들은 순간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큰 장수가 달려와서 칼을 휘두른다면 진영은 풍비박산이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큰 장수와 싸움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심하던 왜장은 마침내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수많은 왜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용화사 석불입상에 얽힌 전설로 진천의 옛 읍지인『상산지(常山誌)』 고적(古蹟)조에 전하는 것이다.
전국토가 왜적의 총칼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을 때 왜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진천을 지켜내었다는 석불입상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진천의 수호신으로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진천의 수호신이 머무르는 이 용화사는 안타깝게도 언제 누가 창건했고, 원래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예전의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용화사 경내에 우뚝 서 있는 석불입상은 왜적을 물리쳐 진천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전설은 사람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공양을 올리게 했고, 마침내 1946년 용화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창건되기에 이른 것이다.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 번지 043-533-3024
성림사
성림사(成林寺)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산98번지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오래전부터 성림사가 자리한 곳은 진천 제일의 명당으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1960년대 쯤 한 노인이 전국을 순회하는 어느 지관(地官)으로부터 고기록(古記錄)을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지관은 진천의 불처당(佛處堂)이라는 이곳을 다녀갔는데 바로 성림사 자리가 문무목상(文武牧相)이 날 곳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적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1965년에 전해산(全海山) 스님이 고려시대 조성된 마애여래좌상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터에 새로 절을 창건하니 오늘날 성림사(成林寺)입니다. 해산스님께서는 지관의 계시(啓示) 때문에 누군가가 무덤을 쓰려는 것을 막고, 쓸쓸하게 폐허를 지키고 있는 부처님(마애여래좌상)을 공양하기 위해 창건이라는 원력(願力)을 세우신 것입니다. 해산 스님의 창건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 성림사는 혜묵) 스님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중창 되었습니다.
퇴락했던 가람은 윤기가 흐르고, 부처님(마애여래좌상)을 위한 향화(香火)와 공양(供養)은 끊이지 않습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보는 들판은 아주 평온합니다. 들판에서 올려다보는 성림사 또한 고요합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아무런 욕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저 맑은 마음만 샘솟게 합니다. 옛 사람이 이야기한 명당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산 98 043-537-4618
대흥사
진천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또한 맑은 물과 기름진 너른 벌판이 있어 하늘이 내린 곳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진천을 한눈에 굽어보고자하면 봉화산 중턱에 자리한 대흥사가 제격이다.
대흥사는 고려시대의 절터로서 조선후기에 참의 벼슬을 하던 조중우(趙重愚)가 창건하고 영은암이라 했던 것을 1907년에 다시 조창호(趙昌鎬)가 중건한 사찰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흩어져 있는 대부분의 작은 사찰들이 그러하듯이 근래까지도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으나 200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가람을 일신하고 있다.
옹색했던 터전은 넓직한 도량으로 변모를 했고, 겨우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법당과 당우(堂宇)는 아름다운 처마곡선을 뽐내고 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정법수호(正法守護)와 포교의 수선도량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렇듯 새롭게 변모한 대흥사에 들러 가만히 찌든 자신을 내려놓아보자.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진천벌판을 내려 보다보면 새로운 무엇인가가 용솟음 칠 것이다.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 32 043-533-2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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