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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와 보어의 문장
출처 : https://www.royalsociety.org.nz/research/yin-and-yang-bohrs-complementarity-and-inclusive-knowledge/
1. 물리학, 화학, 생물학
물리학은 물질을 작은 단위로 잘게 쪼개어 연구하면 전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환원주의1) 학문이다.2) 이러한 관점에서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작은 원자로 쪼개고 원자 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면 유기체에서 구현되는 생명 현상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의 성질을 규명하는 양자역학3)이 밝힌 미시세계의 법칙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경험과 직관은 원자보다 훨씬 큰 거시세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 체계에 익숙한 우리가 원자 이하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잘게 쪼갠 부분을 이해하여 전체의 특성을 파악하는 환원주의적 관점을 유기체에 적용하여 생명 현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나마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어 과학자들의 상상력을 현실로 입증하고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공리(약속)4)에서 출발하는 수학은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도 아니고 수학의 진위 여부는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으므로5) 과학자가 수식으로 풀어낸 미시세계의 규칙들을 대중이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례로, 1920년대 이후 양자역학자들은 미시세계의 소립자들(전자, 양성자, 중성자, 광자 등등)이 모두 입자이면서 파동임을 실험6)과 수식7)을 통해 입증했다. 하지만 세상에 ‘입자’와 ‘파동’이라는 각각의 개념은 있어도 ‘입자파동’이란 복합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입자이면서 파동인 그 무언가가 ‘나’를 포함한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요소라는 물리학자들의 견해를 일상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의 이해와 관계없이 이들이 이끌어낸 물리학의 발전은 다른 과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을 탐구하는 무기화학에 몰두하던 화학은 양자역학 이후 생명체의 구성 요소를 탐구하는 유기화학으로 학문의 범위를 넓혔고, 유기화학의 발전은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부터 생명이 있는 유기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화학자들의 믿음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이때부터 화학자들은 경이롭게만 느꼈던 생명체가 원자의 배열 상태가 복잡하다는 것 말고는 무기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화학자들의 생각은 필연적으로 생물학의 변화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과거 생물학자들의 주된 업무는 오지를 탐험하며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 그 종류를 나열하고 분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화학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생물학에 영향을 미치자, 생물학자들은 드디어 생명체의 내부 구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8)
생물학자들은 심장의 펌프질과 혈액의 순환, 신경의 구조와 신경 전달의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생명의 최소단위라고 생각했던 세포 내부에 복잡하고 정교한 화학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음도 발견했다.
생화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일컫는 호흡의 과정, 즉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에서 산소와 포도당을 이용하여 에너지 화폐인 ATP를 생산하는 크렙스 회로9)도 양자역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아직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10)
2. 중첩(重疊)
물리학이 이끌어낸 엄청난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선구자인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은 공통된 난관에 봉착한다. 미시의 세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들이 가졌던 근원적 질문인 ‘생명의 신비’를 규명할 수도, 생명체가 가진 ‘의식의 근원’을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서 ‘살아 있는 물질과 죽은 물질 간의 차이’에 대해 선배 학자인 보어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보어는 인간이 가진 의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명체와 물질의 구별이 쉽지 않음을 강조하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물질이 절대 가질 수 없는 ‘총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보어가 말한 ‘총체성’이란 무엇일까?
보어는 원자, 분자로 이루어진 생명이 없는 물질은 외적인 방해만 없다면 시간이 흘러도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정적인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생명체는 물질처럼 원자와 분자로 구성됐음에도 정적인 구조물이 아니며,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한정된 시간 동안 물질이 ‘흐르는’ 형상을 이루려는 경향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물질은 정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나, 생명체는 물질이 흐르는 형태를 이루려고 한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 말을 보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질의 세계는 먼저 일어난 선행 사건이 원인이 되어 뒤따르는 상황을 결정하는 ‘인과론’11)이 적용되는 세계이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유기체는 자기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즉 유기체의 세계는 사건의 발생이 유기체의 목표에 따라 결정되는 ‘목적론’12)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물질과 생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은 인과론만 적용되는 것이 맞지만, 생명을 가진 유기체는 인과론과 목적론이 둘 다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기체의 구성 성분은 물질과 같은 원자와 분자이므로 물질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개별 입자들은 인과론을 따르고, 의식 또는 의도의 측면에서 생명을 관찰하면 유기체는 자기 결정에 따라 행동하므로 목적론을 따르기 때문이다.
보어가 설명하고자 했던 총체성이란 결국 물질계의 법칙인 인과론과 살아있는 개체에서 통용되는 목적론이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유기체 안에 ‘중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3)
3.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y)
인과론과 목적론이란 상반된 물리법칙이 어떻게 하나의 생명체 안에 중첩될 수 있을까?
우리는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생물을 경험하며 형성된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생명’, ‘신진대사’, ‘호흡’, ‘치유’와 같은 단어는 우리가 생명체를 다루며 인식한 개념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신경계의 전기적 신호’나 ‘물질의 합성과 분해’와 같은 물질과 관련된 언어로 생명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물질에 적용되는 물리학적, 화학적 법칙이 생명체에도 제한 없이 통용된다고 생각한다.
생명체를 ‘살아있거나’, ‘살아있지 않은’ 상반된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관찰 방식은 서로 모순된다. 동일한 개체를 한번은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은 생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특성과 생명이 없는 무기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총체적 존재이다.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대칭적으로 인식하고 상호 대립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인류가 경험을 통해 습득한 대칭적 인식체계로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방법도, 표현할 언어도 없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편의를 위해 평소 사용하던 인식체계를 그대로 적용하여 생명체를 관찰했고 우리의 입맛대로 때론 물질로, 때론 생명으로 다뤄왔다.
물체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은 인간이 창조한 관념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로 물질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명을 얻는지 관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셔츠의 단추가 끝에서 잘 맞아떨어지길 바라는 것과 같다.
앞서 보어가 말한 ‘중첩’이란 개념도 우리가 물질과 생명을 구별하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관측과 관계없이 태초부터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었듯, 생명체는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물질이면서 동시에 생명이었다.
중첩된 것은 우리의 사고일 뿐 입자와 파동이 중첩된 것이 아니며, 물질과 생명이 중첩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체계가 둘로 나뉘어 있어 둘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당시 보어는 이러한 우리의 모순된 인식 체계가 잘못됐다거나 둘 중 하나의 관점이 우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기체를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생명으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은 관찰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 상호 보완적이며,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 관점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한다.14)
보어가 말한 관찰 상황의 ‘상보성’은 우리가 가진 인식 체계의 한계 때문에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두 관념이 단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모두 필요함을 보여주는 적절한 용어였다.15)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물질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대화는 둘의 관계나 의식의 기원을 밝히기보다는 생명체의 특성과 그것을 탐구하는 우리의 관점만을 논하고 아쉽게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후 또 한 명의 천재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 우리가 궁금해 마지않는 생명의 비밀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5편에 계속)
[참고 문헌]
1) https://en.wikipedia.org/wiki/Reductionism
환원주의
2) https://iep.utm.edu/reduction-and-emergence-in-chemistry/
화학의 환원과 창발
3)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B9780323908009000226
양자 생물학의 근본적인 측면
4)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xioms
공리 목록
5) 리처드 파인만, 로버트 레이턴, 매슈 샌즈, 박병철 역.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Vol 1. 도서출판 승산. 2004. P 3-1
6) https://en.wikipedia.org/wiki/Double-slit_experiment
이중 슬릿 실험
7) https://en.wikipedia.org/wiki/Wave%E2%80%93particle_duality
파동-입자 이중성
8)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839811/
양자 물리학과 생물학의 만남
9) https://en.wikipedia.org/wiki/Citric_acid_cycle
크렙스 회로(TCA cycle)
10) 리처드 파인만, 로버트 레이턴, 매슈 샌즈, 박병철 역.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Vol 1. 도서출판 승산. 2004. P 37-2 - 37-7
11) https://en.wikipedia.org/wiki/Causality
인과론
12) https://en.wikipedia.org/wiki/Teleology
목적론
13)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영미 역. 부분과 전체. 서커스 출판 상회. 2016. P 207 – 209.
14)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유영미 역. 부분과 전체. 서커스 출판 상회. 2016. P 210 – 212.
15)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978-3-031-10654-5_3
상보성의 기원
첫댓글 잘읽겠습니다
너무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또 기대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ㆍ
물질의 세계 비물질의 세계 그리고 진실의 세계
판도라의 상자가 어떻게 펼쳐질지 사뭇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
잘읽었습니다
돌은 돌이고 사람은 사람
인간에게는 영과 혼이 있습니다
다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