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은 영어로 Reformation Theology가 아니라 Reformed theology입니다. 수동태 형인 Reformed입니다. 개혁주의는 칼빈주의와 같은 용어인데, 칼빈은 칼빈주의라는 표현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 중 루터와 칼빈 이외에 쯔빙글리가 있는데요. 루터를 빼고 쯔빙글리의 신학도 개혁주의에 포함됩니다. 쯔빙글리의 개혁주의에 대한 기여도를 감안하면 칼빈주의라는 말보다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짧게 줄이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입니다. 개혁신학의 골자와 특징을 8개 포인트로 압축한 사전적인 설명을 구분선 아래에 올리오니 많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초신자나 이 글이 어려운 분들은 소제목과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읽으시며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독특한 신학 전통. 일반적으로 이 신학의 근원은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으로 대표되는 스위스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이들은 ‘튤립’('TULIP)이라는 두문자어(acronym)를 사용하여 개혁신학을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구별하지만, 이 '튤립'에 속한 일부 교리들이 표현되는 방식, 특히 대중적인 수준에서 표현되는 방식은 개혁파의 다수가 지닌 관점을 실제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튤립'에 속한 항목들에만 초점을 둘 경우, 이 전통의 다른 여러 핵심적인 특징이 경시되게 된다. 루터파 등의 다른 종교개혁 전통과 함께, 개혁신학은 모든 신학과 신앙생활의 근원이자 목표로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우선시하는 다섯 개의 '오직'을 따른다('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그리스도'). 아래에 제시한 여덟 항목은 개혁신학이 지닌 고유한 특징들을 폭넓게 기술한 것이다.
첫째, 개혁신학은 정경적(canonical)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독특한 특별 계시로서, 모든 신학적 성찰의 표준 또는 규범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일반 계시 역시 개혁신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신자들이 구원과 삶을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데 성경은 으뜸가는 방편이 된다. 실제로 '개혁파'라는 명칭은, 무엇보다도 이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믿음과 실천에 더 충실히 반영하기 위한 개혁과 재구성에 늘 열려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개혁신학은 창조 중심적(creational)이다.
이 전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진리를 중시하며, 창조 세계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우리의 신체와 아울러 모든 지상적인(earthy) 것들을 포함한 이 물질 세계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선하게 지음 받은 실재이다. 그리고 그 창조의 정점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있다. 바로 그런 관점 때문에, 개혁파 전통에서는 예를 들어 (직업) 소명(론)과 일반 은혜의 역할, 환경에 대한 청지기적 자세, 생산성의 가치를 비롯하여 신체적인 피조물의 삶이 지닌 특징들을 늘 귀히 여긴다.
셋째, 개혁신학은 포괄적(comprehensive)이다.
이 전통은 이같이 창조를 명확히 강조하므로, 죄와 구속의 교리들 역시 전인적인 방식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죄는 선한 창조 세계를 파괴하고 변질시켰으며, 이에 따라 인간성 전체(지성, 의지, 감정, 신체)와 인간이 맺는 관계 전체(하나님, 이웃, 창조 세계와의), 그리고 우주 전체(이 우주 역시 구속을 바라며 신음한다)에 영향을 미쳤다. 개혁신학은 이렇듯 죄가 이 세상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변질시키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누리면서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 세계를 부패시키는 죄의 결과들에 저항하면서 긴장 속에 살아가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 역시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그리고 성령에 의해 그분의 새 창조 사역을 수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죄가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듯이,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세계 속에 있는 모든 균열과 상처 위에자신의 사랑을 베푸시며 그분의 백성을 신적인 은혜의 움직임 속으로 이끌어 들이신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몸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창조의 사역이 (우리의 지성을 밝히고 의지를 해방시키며, 감정을 일깨우는) 내적인 실재일 뿐 아니라 물리적이고 사회적이며, 우주적인 실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안다. 이 새 창조의 사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넷째, 개혁신학은 언약적(covenantal)이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백성뿐 아니라 나머지 창조 세계와도 맺으신 언약 관계와 구속사에 대하여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를 제시한다. 이 언약의 드라마 내에는 여러 막이 있지만(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님, 교회, 새 창조), 일반적으로 개혁파 전통 내의 성경신학은 그 막들 사이에 유기적관계가 있다고 인식한다. 곧 그 각각의 막들은 그 드라마의 핵심인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미리 드러내거나, 또는 그 핵심에서 뒤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성경에 관한 이 언약적 독법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모두 식별할 수 있다. 곧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각 부분의 특성을 둔화시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개혁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centered)이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확고히 고백하는 한편, 성자의 중심성을 자주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성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성자를 통해 가장 뚜렷이 계시되시며, 신자들은 성령의 교제를 통해 성자께 연합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위대한 중보자이시며,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자신을 가장 온전히 계시하신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류 사이의 화목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이해의 틀을 상실하면 신학적인 사유와 목회적인 성찰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 전통은 예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을 확언할 때, 종종 그리스도 중심적인방식으로 그 진리를 체계화한다. 개혁자들은 주로 신적 본질에 관한 추상적인 가설과 형이상학적인 가정이나, 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과 이룰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논할 때, 그 논의를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계셨으며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 결부시켰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눈물, 그리고 그분의 부활로 드러난 능력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만일 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경우,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는 다른 핵심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쉽게 왜곡되며 문제 있는 것이 된다.
여섯째, 개혁신학은 조화를 추구한다(concordant).
앞서 언급한 언약 신학과 구속사적 접근방식에서,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며 인간들은 그분 앞에서 참된 책임을 지닌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초칼뱅주의적인 관점과는 달리, 개혁신학은 일반적으로 구원과 섭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온전한 책임 사이에 신비로운 조화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는 원죄와 변함없는 은혜의 필요성을 통해 이해된다. 예를 들어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그 믿는 일을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그리할 힘을 얻은 인간인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그분이 명하신 바를 또한 이루어 주시므로, 이 조화의 역학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독특한 관계가 있음을 함의한다.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순종할 힘을 주며 또한 지속하게끔 이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행하심과 인간의 행위 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를 남김없이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성경에서 확증되는 정도까지 양자를 모두 인정하려 한다.
일곱째, 개혁신학은 신앙 고백적(confessional)이다.
개혁신학은 보편적인 기독교 전통 내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스위스와 독일,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도르트 신조, 벨직 신앙 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 등의 신앙 고백서와 교리문답이 지닌 독특한 특징들을 옹호한다. 개혁과 신앙 고백서들은 고전적인 정통 신조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고전의 내용과 조화를 이루지만, 그 속에는 종교개혁의 기여점들 역시 반영되어 있다. 그런 점들 가운데는 칭의와 성화의 유기적 관계, 성찬에 있어 화체설을 거부하고 기념설이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선을 선호하는 특징, 선지자, 제사장과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 율법의세 가지 용법, 그리고 선택과 양자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한 교리들 등이 포함된다. 이 신앙 고백서의 토대 위에서, 개혁신학이 최상의 형태로 표현될 경우 보편성과 독특성을 모두 간직할 수 있다.
여덟째이자 마지막으로, 개혁신학은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contextual).
이 전통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주권을 각 문화적 상황 속에 있는 삶의 모든 영역에 연관시키려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공적 예배에서 일상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그 영향 아래 놓이게끔 하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개혁신학은 포괄적인 세계관을 진술하며, 이는 창조와 정경, 신조와 신앙 고백서들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난 것이다. 동시에 그 세계관은 늘 구체적인 정황에 관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모든 사상을 해석할 뿐 아니라 그 영광에 모든 행위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많은 이들이 개혁신학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세 개의 다리로 지탱되는 의자에 비유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는 곧 교리와 경건, 문화적 참여이다. 개혁과 전통 내부의 각 흐름들은 이 중 어느 하나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자신들의 신학'을 표현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 세 요소 모두 그 신학을 지탱하는 구조의 일부로 머무른다.
켈리 M. 캐픽 등, 『개혁신학 용어사전』, pp.11~13.
첫댓글 TULIP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lDw/7
튤립만 단편적으로 보면 안 되겠네요. 오늘 포스팅처럼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다섯 개의 오직 = 5 sola
아래 포스팅의 하단 부분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lDw/4
튤립과 다섯 개의 오직을 종합적으로 다룬 좋은 포스팅이었습니다.
다시 잘 읽고 더 이해를 했습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아래 포스팅과 댓글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4cZ/82
칼빈이 말한 율법의 세 가지 용법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분류를 함께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유기적 관계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DR0/27
공감과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가합니다.
저는 처음 읽는 글이라서 정독을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
아래 글과 그 연재물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4cZ/61
코럼데오님 쓴 연재물을 찾아서 다시 잘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잘 찾아서 다 읽겠습니다.
정경
아래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https://cafe.daum.net/1107/YcL1/19
역시 고전적인 신앙고백서에 안정적인 가르침과 진리가 있네요.
@노베 공감합니다!
@노베 공감합니다22.
개혁신학을 잘 정리한 글을 읽고 큰 도움을 받습니다.
격려와 공감의 댓글에 감사합니다.
개혁신학의 8가지 특징을 이렇게 읽어보니 좋습니다. 좋은 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시간 내서 더 읽어볼게요.
안녕하세요 장코뱅님
개혁신학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혁신학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함은 주로 칼빈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결함을 바로 잡고 개혁신학이 한번 더 Reformed 되면 좋겠습니다.
제가 글을 올려 드릴테니 한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왕에 올리신다면 초신자와 기존의 틀을 가진 분들을 배려해 주시는 방향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코뱅 지난 번에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드렸고
이번에는 칼빈의 글에 대한 저의 이해를 말씀드립니다.
저는 칼빈은 위대한 신학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어련히 잘 했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직접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칼빈의 책을 구하기가 어렵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보고 싶어졌고 찾아 보니
영어로 된 기독교강요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강요를 보니 세례에 대한 부분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를 통해 세례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글을 보시고
제가 칼빈의 글을 곡해해서 비판한다고 생각되시면 말씀해 주십시요.
만약에 제가 칼빈의 문제를 잘 지적했다면
초신자나 기존의 틀을 가진 분들도 아셔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