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시편이 성경 속의 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은 비록 구약성경 안에 위치해 있지만 신약성경을 포함한 성경들 속의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이 중요하지만 시편의 신학과 메시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사야서와 더불어) 시편을 많이 인용하였습니다. 아래 포스팅은 트렘퍼 롱맨의 『최신 구약개론』에서 시편에서 신약으로의 접근 부분을 모드 타자 쳐 올리는 것이오니 구분선 아래에서 읽고 은혜와 도움을 함께 받으면 좋겠습니다.
(시편에서) 신약으로의 접근
누가복음 24장은 부활 후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겁을 먹은 자신의 제자들을 만나신다. 그들은 그의 등장에 놀랐다. 그들의 의심에 대한 응답으로 그는 성경에 호소하신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44절). 우리의 현재의 연구를 위해서 중요한 점은 바로 시편에 대한 언급이다.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편이라고 부르는 책만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히브리 정경상의 세 번째 부분을 포괄해서 언급하신 것이 분명하다(Beckwith 1985, 111-12). 그렇지만 이 언급이 시편 자체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역시 자명하다. 예수님은 시편이 자기를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의 오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성취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시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과 시편 사이의 이러한 연결점을 인식했다. 신약에 인용된 빈도수에 있어서 시편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사야서밖에 없다(Harman 1968; Kistemaker 1985). 물론 신약은 꼭 기독론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가르침들에 대해서도 증거를 대기 위해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논거들을 확증하기 위해 시편으로부터 많은 구절들을 빌려오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하나님이 온전히 참되시고(4절, 시51:4의 인용), 인간은 철저히 죄인(10b-18절)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사야서로부터 도출한 짧은 문단을 포함해서 시편의 많은 시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흥미가 있는 점은 대부분의 경우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상세한 논의는 하만과 키스트메이커(Harman and Kistemaker)를 참고하라. 우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하나의 간단한 예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을 하면서, 예수님의 버림받으심과 존귀케 되심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는 시편 118:22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들이 되었느니라"(행 4:11). 예수는 버려졌지만, 결국 건물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시편이 좁은 의미에서의 예언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유파들은 시편의 몇 개의 아주 중요한 시들은 구약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야와만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2, 16, 22, 69, 110편 등이 이러한 시들이다. 물론 이 시들은 신약의 기자들이 다른 어떤 시들보다 더 자주 인용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들 역시 구약적인 맥락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시편 2편은 등극시가 분명하며(Craigie 1983, 64-69), 시편 69편 시편 기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예언적인 말씀일 수가 없다(5절).
그러면 어떻게 시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수 있었는가? 시편의 시들과 예수님 사이의 연결은 두 가지 전제적 사항들에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사항은 시편 기자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이다. 많은 시들의 화자는 다윗적인 왕이다. 또한 다윗적인 왕이 시의 초점인 경우도 자주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의 왕이란 직분에 대한 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점에 유념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간으로서 반영하고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치자로 세웠기 때문에 그는 통치를 한다. 이것은 특히 다윗의 경우에 그러한데, 하나님은 그와 특별한 언약을 맺고(삼하 7장), 그의 왕권 및 왕조를 확립시켜 주셨다. 따라서 시편의 그렇게도 많은 시들이 이스라엘의 왕정제도,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다윗 및 그의 왕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신약으로 눈길을 들릴 때 우리는 다윗의 한 후손이 보좌에서 영원히 좌정할 것이라는 다윗 언약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된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는 바울에 따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롬 1:3) 분이시다.
따라서 누가복음 1:31-33(참고, 시 89:3-4)은 마리아에게 주어진 다음과 같은 축복을 기록하고 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또한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시편에서 고대되었다. 시편의 시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며, 삼위일체의 제2위로서 예수는 우리의 찬양과 탄식에 대한 적절한 대상이 되신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의 패턴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는 첫 장에서 그는 예수와 관련해서 시편 102:25-27을 포함시켰다(히브리서 1:8을 보라):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10-12) |
구약의 맥락에서는 이 시는 여호와를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그러나 신약의 시각 속에서는 이 시는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으로서의 찬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라는 것에 기초해서 정당하게 예수께 드리어진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과 신약의 예들을 따라서 우리는 시편을 정당성을 가지고 기독론적으로 읽을 수 있다. 클라우니(Clowney, 1973년과 1978년)는 기독교인으로서 시편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면서도 아주 시사적인 글을 썼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시편이 예수의 기도(히2:12)이자 예수께 드려지는 기도로 읽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예수의 노래들로서의 찬양시들은 그의 영화로움을 나타내주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불릴 수 있다. 또한 애가들은 그의 낮아지심을 나타내며(또한 신약의 기자들에 의해서 그런 식으로 적용되어졌으며), 다른 한편 현대의 기독교인들의 고난의 표현으로서 그에게 기도로 드려질 수 있다.
트렘퍼 롱맨 3세•레이 딜러드, 『최신 구약개론』, pp.199~201.
첫댓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한자로 비하(卑下)로 표현합니다. 요약하면, 1.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탄생 2.구세주의 고난 3.구세주의 죽음 4.구세주의 장사(葬事) 5.구세주께서 음부로 내려가심 등입니다. <-- 벌코프 조직신학
다시 읽어도 도움이 되는 댓글입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영어로 exaltation이고 벌쿠프 조직신학은 승귀로도 표현합니다. 요약하면, 1.부활 2.승천 3.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4.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등입니다. <-- 벌코프 조직신학(개론x)
다시 잘 요약해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에 관해서 아래 포스팅을 읽으면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1107/YcL1/32
좋아요. 잘 읽고 도움 받았던 포스팅입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어제 올린 손세훈 교수의 시편 1편의 내용과도 연결이 되어 공부가 톡톡히 됩니다.
시편이 이사야서와 함께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고 하니 성경 속의 성경이라 할만 하네요. 시편이 예수의 기도이고, 예수님께 드려지는 찬양과 탄원으로서의 기도로 읽혀질 수 있다는 클라우니의 해석이 놀라움과 감동을 줍니다. 찬양시와 애가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낮아지심을 말하며 기독교인들의 고난과도 연결된다고 하니 시편을 애송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네, 그 포스팅을 보고서, 특히 루터 왈 시편은 성경 속의 성경이다! 에 착안하여 책을 읽다가 올린 것입니다.
네, 저도 공부가 톡톡히 되네요!
누가복음 24:44도 중요하네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예수를 가리켜 기록되었다는 예수님 자신의 증언을 분명히 밝히시고 있군요.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예로 보입니다.
사실 교인들이 세대주의의 오염 물질을 많이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오염물질은 율법과 복음의 분리, 구약과 신약의 대립 구분 같은 것인데요.
신약성경에 많은 구약의 구절과 율법이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의식법, 재판법은 폐하여졌지만 도덕법은 신약에 계승되고 오히려 도 강화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은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성결교에서 분파한 이재록, 오순절 비주류에서 분파한 김기동, 성서침례교회에서 분파한 이송오 등이 도덕률폐기론의 입장에 있는데, 그들의 근본 바탕에 세대주의가 깔려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코뱅 좋은 댓글입니다. 분별하는 데에 잘 참고하겠습니다.
@장코뱅 많이 공감이 되는 내용입니다.
시편 89편 말씀이 예수님의 탄생 말씀에도 인용된 것을 보면서 새삼 시편의 은혜에 감탄을 합니다.
좋은 포스팅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격려와 공감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