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최씨(江陵崔氏)에는, 시조를 달리하기 때문에, 서로 혼인을 할 수 있는 세 본(本)이 있다. 곧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경주계(慶州系)인 강릉최씨(江陵崔氏) 부마공 최문한 附馬公 崔文漢)의 강화계(江華系)인 강릉최씨(江陵崔氏), 그리고 대경공(大卿公 崔欣奉)의 전주계 강릉최씨(全州系 江陵崔氏)가 있다.
최필달계(崔必達系) 시조는 최필달(崔必達), 고려태조를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영첨의정승 삼중대광(領僉議政丞 三重大匡)에 오르고 경흥(慶興)(강릉(江陵)의 별칭)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져 강릉이 본관(本貫)이 되었다. 그는 고려초기 학문을 정립하고 예(禮)를 가르쳤던 문무(文武) 겸비의 학자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상계(上系)에 관한 기록이 없지만 우리나라 범최씨(汎崔氏)의 도시조(都始祖)는 신라 최의 6촌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최문한계(崔文漢系) 최문한(崔文漢)이 강릉최씨(江陵崔氏)의 최문한(崔文漢)계의 시조이다. 고려충숙왕의 사위로 나라가 망하자 강릉(江陵) 마상리(馬上里)에 은거(隱居)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선계(先系)는 고려때 문과(文科)에 올라 위국공(偉國公)이 된 최전(崔佃)이다.
본관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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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계(崔必達系)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濊國)이다. 한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라 불렀고 고구려조에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으면 신라 경덕왕 때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 고려조 태조 19년에 동원경(東原京)이라 하였고, 그뒤 여러번 바뀌었다가 원종 1년에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충렬왕 34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공양왕 1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면 세조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1928년 읍으로 승격, 1995년 시로 되었고 강릉군(江陵郡)은 옛 명주군(溟州郡)으로 돌아갔다. 주요 성씨로 최(崔) ㆍ 김(金) ㆍ 유(劉) ㆍ 문(文) ㆍ 박(朴) ㆍ 어(魚) ㆍ왕(王) ㆍ 함(咸)씨 등이 있었다. |
파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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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계(崔必達系) 낭장공파(郞將公派) ㆍ 양근파(楊根派) ㆍ 비인공파(庇仁公派) ㆍ 용연동파(龍淵洞派) ㆍ 행정파(杏亭派) ㆍ 안동파(安東派) ㆍ 수헌공파(睡軒公派) ㆍ 문정공파(文正公派) ㆍ 해창공파(海窓公派) 춘천파(春川派) ㆍ 황주파(黃州派) ㆍ 고성파(高城派) ㆍ 정선파(旌善派) ㆍ 생원공파(生員公派) ㆍ 신리파(新里派) ㆍ 경성파(鏡城派) ㆍ 태안파(泰安派) ㆍ 제학공파(提學公派) ㆍ 충주파(忠州派) ㆍ 장단파(長湍派) ㆍ 냉정파(冷井派) ㆍ 의주파(義州派) ㆍ 덕원파(德源派) ㆍ 능주파(綾州派) ㆍ 사간공파(司諫公派) 최문한계(崔文漢系) 부사공파(府使公派) ㆍ 통정공파(通政公派) ㆍ 참봉공파(參奉公派) ㆍ 훈도공파(訓導公派) ㆍ 참의공파(參議公派) ㆍ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ㆍ (진사공파(형))(進士公派(泂)) ㆍ 판서공파(判書公派) ㆍ 교수공파(敎授公派) ㆍ 부정공파(副正公派) ㆍ (진사공파(호))(進士公派(浩)) ㆍ 참판공파(參判公派)
주요 세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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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계(崔必達系) 시조 최필달(崔必達)이 고려초 경주(慶州)에서 강릉(江陵)으로 온 이래, 10여대까지는 명주군성산면위초리(溟州郡城山面渭村里)로부터 강릉시대전동(江陵市大田洞) 조산(助山)에 이르는 구릉지대에서 살았다. 차츰 자속이 늘면서 그 동족으로 부채골모양 삶의 터전을 넓혀 간 것 같다. 23세 의일(義一)대에 동해안 강릉시초당동(江陵市草堂洞)에 닿게 되어, 후일 집성촌의 하나를 이루었다. 그 후로는 계속 남북으로 길게 퍼져, 오늘에 와서는 강릉(江陵) ㆍ 명주(溟州) 일원은 물론 북으로 양양(襄陽), 남으로 삼척(三陟) ㆍ 울진(蔚珍)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강릉(江陵)의 본향을 떠난 대표적인 파(派)의 몇 경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대관령을 넘은 이는 16세 천유(天濡) ㆍ 천계(天啓) 형제인데, 천유(天濡)는 한성판윤(漢城判尹)에다 아들 암(庵)ㆍ점(店) 역시 문과(文科)에 올라 경직(京職)에 있게 되어 그 자손들은 지금 경기도 일원에 살고 있으며, 천계(天啓)는 과거에 급제한 뒤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지내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등과(登科)한 뒤 압록강 방어진에 배치된 까닭에 의주파(義州派)를 이룬다. 16세 안봉(安鳳)의 후예는 기선파(旗善派)인데, 정선군동면화암리(旌善郡東面畵岩里)에 특히 많이 모여 산다. 그의 아우 안귀(安龜)의 후예는 함경남도 문주(文州) ㆍ 길주(吉州)에 주로 산다. 그이 아우 안해(安海)의 후예는 육진(六鎭)개척에 참여, 처음 종성(鐘城)에 이주하였다가 나중에 경성(鏡城)으로 물러나 정착하였는데, 이를 경성파(鏡城派)라 한다. 19세 매창공(梅窓公) 세절(世節)이 형조(刑曹)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르므로 자연히 강릉(江陵)을 떠나 서울로 오고, 그 증속 중의 하나인 기벽(基鐴)이 광해군때 인목대비폐모항소문으로 금고형을 받아 원주(原州) 호매곡(好梅谷)’으로 왔는데, 그 마을 이름은 기벽(基鐴)의 아호 ‘매곡(梅谷)’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그는 인조반정 뒤 신원(伸寃)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원주(原州)에서 둘째 아들 문활(文活)과 함께 의명을 일으켜 강화도(江華島)에 근왕(勤王)한 일이 있어, 원주 일원이 그 후손들의 주거지가 된다. (증이참(贈使參) 기벽(基鐴)은 최규하(崔圭夏) 전(前)대통령의 11대조이다.) 그의 큰아들 문오(文澳)(문과(文科)군수), 둘째아들 문활(文活)(문과(文科) ㆍ 증좌승지(贈左承旨))의 후손은 원주 일원에, 새째아들 문발(文潑)(시인(詩人))의 후손은 횡성군서원면압곡리(橫城郡書院面鴨谷里)에, 넷째아들 문식(文湜)(문과(文科) ㆍ 예참(禮參))의 후손은 원주(原州) ㆍ 상주(尙州)에 세거(世居)한다. 19세 세덕(世德)의 자손은 춘성군 신동면 정족리(春城郡 新東面 鼎足里)를 비롯하여 춘천(春川) ㆍ 춘성(春城) 일원에 터를 누려왔다. 20세 수미(壽嵋)의 후손은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읍 북산동(善山郡 善山邑 北山洞)을 세거지로 한다. 20세 증영의정(贈領義政) 수성(壽城)의 자손은 강릉(江陵) ㆍ 진위(振威)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
씨족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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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달계(崔必達系) ‘고려사(高麗史)’를 들춰 보면 숱한 최(崔)씨들이 역사를 수놓고 있다. 그러나 강릉최씨(江陵崔氏)가 배출한 명현으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인물은 극히 드물다. 고려조에 번성을 누렸던 가문이었기에 쇠퇴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선조에 대한 기록도 많이 흩어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시조의 4세손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최숭언(崔崇彦), 충렬왕 9년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명주군(溟州郡)에 봉해졌던 최한주(崔漢柱), 삼사(三司)(고려 때의 관청) ㆍ 좌윤(左尹)(종3품)을 지낸 최원량(崔元亮) 등이 고려조에 돋본는 강릉최씨의 인물들이다. 최한주(崔漢柱)는 일본 정벌 당시 항해중이던 선박이 태풍으로 암초에 걸려 침몰 직전의 위기에 있을 때 바다로 뛰어내려 암초를 깨뜨리고 배와 장졸들을 구출해 냈다는 전설적인 장수. 이밖의 인물로는 최복하(崔卜河) (한성부윤(漢城府尹)ㆍ 대사간(大司諫)), 최천유(崔天濡)(한성판윤(漢城判尹) ㆍ 정2품), 최천계(崔天啓)(평안도(平安道)절도사 ㆍ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이 있다. 조선조에는 강릉최씨(江陵崔氏)가 배출한 문과 급제자 수는 37명. 최(崔)씨 가운데는 전주(全州) ㆍ 해주(海州) ㆍ 경주최씨(慶州崔氏) 다음으로 랭킹 4위. 최치운(崔致雲) 일가는 조선조에서 강릉최씨(江陵崔氏)를 빛낸 명문이다. 치운(致雲)은 태종(太宗) 17년 문과에 급제, 공(工), 형(刑), 이조(吏曹)참판, 집현전, 직제학 들을 지냈다. 전후 다섯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하면 외교에 공이 있었다.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서 큰일이 있을 때나 판결하기 어려운 형옥(刑獄)이 있을 때는 왕이 친히 불러 자문을 청했던 명신이었다. 평생동안 지나치게 술을 즐겨 세종이 친필로 “절주(節酒)”하라는 글을 내리는 그 글을 병에 붙여 놀고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성풍을 자 말해 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해 임금의 명을 받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어떤 관가(官家)의 대살나무 울타리 밑에 밥덩이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긴 여정으로 허기진 탓도 있었지만 농부가 땀흘려 수확한 쌀을 버린다는 것이 아까왔다. 이에 치운(致雲)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채를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줍는체하면서 밥덩이를 주워 냉큼 삼켰다. 이때 지나가던 관상쟁이가 이광경을 보고 “선생의 골상(骨相)에는 조상의 숨은 德이 많이 있는 터인데 오늘 밥덩이를 주운 일도 그 음덕(蔭德)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치하했다. 일국을 대표하는 사신(종2품)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전혀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던 치운(致雲)의 소탈한 성품을 잘 말해 주는 얘기라고 후손들은 자랑한다. 그는 사람을 알아보는 선견지명도 대단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태어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치운(致雲)은 우연히 그를 보고 장차 큰일을 할 신동(神童)이라며 “이 아이의 이름을 내가 마땅히 지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치운이 지어준 이름이 <시습(時習)>이었다. 매월당(梅月堂) 자신 또한 장성한 후에 “ 저 태어난 지 8개월밖에 안 된 아기 때에 이미 스스로 글을 깨쳤으면 척조(戚祖)이신 최치운(崔致雲)이 나를 시습(時習)이라고 이름지어 줬다”고 술회했다 한다. 최치운(崔致雲)의 둘째아들 최응현(崔應賢)은 <효(孝)>를 위해 벼슬을 사양했던 유명한 효자였다. 단종(端宗) 1년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종9품), 박사(博士)(정7품), 성균관(成均館)의 사성(司成)(종3품)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고향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를 모두 사양하고 강릉훈도(江陵訓導)(종9품)에 만족했다한다. 성종(成宗) 11년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을 지어 놓고 산소를 지키기 3년, 그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다고 한다. 모친의 3년상을 마친 후 드디어 그는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종3품)에 천거되었으며 성종(成宗) 19년 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를 거쳐 충청도관찰사(종2품)로 발탁되었다. 이때 성종은 다음과 같은 교유문(敎諭文)을 내렸다. “옛말에 충신은 효자의 문에서 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임금과 어버이는 하나이기 때뭉이다. 그런데 경(卿) (응현(應現))은 학식이 넓고 재질이 뛰어나 일찍이 문단(文壇)울 휩쓸어 그 명성이 대단하므로 대신들이 앞을 다투어 <조정의 명신(名臣)이 될분이 노모의 효양에만 정성을 다할 뿐 벼슬이나 영달에는 뜻이 없어 시골에만 머문 지 20년이나 된다>는 천거의 말을 하게 되었다. 작금의 충청일도(忠淸一道)의 의옥(疑獄)과 송사(訟事)를 살펴볼 때 타도(他道)보다 유독 빈번한데 그 까닭이 관찰사의 역량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져 경(卿)은 능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성종(成宗)의 그에 대한 신임과 기대가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잘 말해 주는 교유문(敎諭文)이다. 이후 연산군(燕山君) 3년에는 대사헌(大司憲)을 두 번째로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 직전 연산(燕山)의 폭정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바람에 왕의 비위를 거슬려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그러나 연산군(燕山君) 6년에 세 번째로 대사헌(大司憲)에 귀임되었다. 이렇듯 그는 전후 3차례에 걸쳐 오늘날 사법부의 검찰총장직 임무를 수행했던 명신이었다. 이후 강원도(江原道)관찰사 ㆍ 형조참판(刑曹參判) ㆍ 도총관(都摠管)(정2품)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정사를 처리할 수 없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강릉(江陵)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어쪄면 연산(燕山)의 폭정 밑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당대의 문장이었던 김종직(金宗直)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가 충청도(忠淸道)관찰사로 떠날 때 김종직(金宗直)이 다음과 같은 찬양시를 지어주었다 한다. “이름 널리 알려져 숭앙(崇仰)받는 분이, 최공(崔公)이 바로 그런 분이네.” 사람 됨됨이가 어릴 적부터, 조그만 일엔 얽매이지 않았지. 순풍미속(淳風美俗)은 길들이기 쉽지만 천시성력(天時星歷) 응용하려면 물맑을 때까지 붙들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을……. 남녘땅에 체류(滯留)함을 한(恨)할 길 없는 이유는, 먼 훗날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 재상(宰相)자리에 오를 것을 기대하니까.” 그에 대한 김종직(金宗直)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말해 주는 시(詩)다. 그의 셋째 아들이 중종조(中宗朝)에 형(刑) ㆍ 호조(戶曹)판서 등을 역임했던 최세절(崔世節)이다. 그는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별시(別試)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수재였다. 그러나 하도 어지러웠던 시대라 과거에 부정이 있었던지 그 해에 등장한 합격자 발표가 일시 보류된채 진상조사가 진행되어 오던 중 중종(中宗)반정을 맞았다. 이 때문에 최세절(崔世節) 등이 등과는 자연 취소될 위기에 놓였으나 중종원년(1506) 최세절 등이 중심이 되어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신등은 등과 출신으로서 비록 얼마 안되는 효(效)도 남기지 못했지만 문반(文班)의 일원으로서 갈출 바를 갖추고 그 이력을 쌓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榜)을 파(罷)하고 직(職)을 거두는 바람에 한낱 포의지사(布衣之士)가 되었으니 유관(儒冠)을 쓰고 성균관(成均館)에 나가려 하여도 후배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물러나서 전무(田畝)에 엎드리려 하여도 평화로운 세상에 버린 물건이 될 것이 뻔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들은 밤낮 기가 죽어서 아홉 군데의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길을 열어주는 문지기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
역대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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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최필달(崔必達)(시호(諡號):충무공(忠武公) ㆍ 경원군(慶原君) ㆍ 영첨의좌승상(領僉議左政丞)) 최숭언(崔崇彦)(명주부원군(溟洲府院君)) 최한주(崔漢柱)(명주군(溟州君) ㆍ 정당문학(政堂文學)) 최문옥(崔文沃)(랑부(郞將)) 최정(崔靖)(문하시랑(門下侍郞)) 최겸(崔謙)(문하시랑(門下侍郞)) 최치안(崔致安)(상장군(上將軍)) 최복하(崔卜河)(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최원량(崔元亮)(영성군사(寧城郡事)) 최극림(崔克霖)(고려조 용인현감(龍仁縣監)) 최온(崔溫)(고려조 성군주부(成均主簿))
▲조선조 최암(崔庵)(부사(府事)) 최치운(崔致雲)(자(字):백경(伯卿) ㆍ 호(號) : 경호(鏡湖) ㆍ 이조참판(吏曹參判) 최천유(崔天濡)(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최명손(崔命孫)(교리(校理)) 최자호(崔自湖)(이조판서(吏曹判書)) 최자점(崔自霑)(정언(正言)) 최진(崔璡)(자(字) : 차옥(次玉) ㆍ 대사헌(大司憲)) 최필숭(崔必崇)(자(字) : 사겸(思謙) ㆍ 주부(主簿) 최환(崔瑍)(자(字) : 중문(仲文) ㆍ 사성(司成)) 최응현(崔應賢)(자(字) : 보신(寶臣) ㆍ 호(號) : 수재(睡齋) ㆍ 병조판서(兵曹判書)) 최수성(崔壽峸)(자(字) : 하진(河鎭) ㆍ 호(號) : 원정(猿亭) ㆍ 시호(諡號) : 문정(文正) ㆍ 학자(學者)) 최세절(崔世節)(호(號) : 매창(梅窓) ㆍ 참판(參判)) 최연(崔演)(자(字) : 연지(演之) ㆍ 호(號) : 양재(良齋) ㆍ 시호(諡號) : 문양(文襄) ㆍ 판서(判書)) 최세건(崔世楗)(현감(縣監)) 최수(崔琇)(자(字) : (숙화(叔和) 현감(縣監)) 최문활(崔文活)(자(字) : 달원(達源) ㆍ 군수(郡守)) 최천단(崔天端)(공조참의(工曹參議)) 최광필(崔光弼)(자(字) : 정로(廷老) 정랑(正郞)) 최배천(崔配天)(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최기백(崔基銆)(자(字) : 자무(子武) 호(號) 동명(東溟) ㆍ 사예(司藝)) 최중일(崔仲一)(사예(司藝)) 최기인(崔起仁)(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최수(崔琇)(전적(田籍)) 최문오(崔文澳)(자(字) : 청원(淸源) ㆍ 장령(掌令)) 최완(崔浣)(자(字) :호연(浩然) ㆍ 군수(郡守) 최문식(崔文湜)(자(字) : 정원(正源) 호(號) : 성헌(省軒) ㆍ 대사간(大司諫)) 최운부(崔雲傅)(한림(翰林)) 최운우(崔雲遇)(호(號) : 도경(蹈景) ㆍ 왕자사부(王子師傅)) 최정용(崔廷龍)(자(字) : 순경(舜卿) ㆍ 부사(府使)) 최우태(崔宇泰)(자(字) : 회원(會元) ㆍ 군수(郡守)) 최상은(崔相殷)(자(字) : 탕경(湯景) ㆍ 호(號) : 앙지(仰止) ㆍ 좌랑(左郞)) 최규태(崔逵泰)(자(字) : 달부(達夫) ㆍ 장령(掌令)) 최일성(崔一星)(자(字) : 찬보(燦甫) ㆍ 판관(判官)) 최일규(崔一奎)(자(字) : 찬오(燦五) ㆍ 좌랑(佐郞)) 최대윤(崔大潤)(자(字) : 성화(聖化) ㆍ 좌랑(佐郞)) 최세건(崔世楗)(판서(判書)) 최준주(崔俊周)(義兵將) 최해녕(崔海寧)(자(字) : 사안(士安) ㆍ 현감(縣監) 최■(崔■)(자(字) : 유명(惟明) ㆍ 시호(諡號) : 희경(僖景) ㆍ 참찬(參贊) 최문발(崔文潑)(호(號) : 취석(醉石) ㆍ 학자(學者)) 최천계(崔天啓)(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 최주삼(崔柱三)(漢城府左尹) 최점(崔店)(한림감찰(翰林監察)) 최미(崔楣)(대사헌(大司憲)) 최지건(崔至健)(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최지강(崔至剛)(만포진수군절도사(滿浦鎭水軍節度使)) 최진광(崔鎭光)(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최세번(崔世蕃)(함창현감(咸昌縣監)) 최수강(崔壽江)(비인현감(庇仁縣監)) 최인언(崔仁彦)(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최익령(崔益齡)(왕자사부(王子師傅)) 최세충(崔世忠)(현령(縣令)) 최계후(崔啓後)(호조참의(戶曹參議)) 최두명(崔斗明)(문경현감(聞慶縣監)) 최성두(崔星斗)(황간군수(黃簡郡守)) 최병식(崔炳湜)(회녕군수(會寧郡守)) 최윤(崔允)(조선조 승정원사포서사포(承政院司圃署司圃)) 최자호(崔自湖)(이조판서(吏曹判書)) 최자점(崔自霑)(호(號) : 괴헌(槐軒) ㆍ 홍문교리(弘文校理)홍문제학(弘文提學)) 최세환(崔世桓)(생원(生員)) 최세건(崔世楗)(비안현감강성군(比安縣監江城郡)) 최항(崔沆)(중학관훈도(中學舘訓導)) 최관(崔灌)(참의(參議)) 최찬(崔澯)(충순위조위장군(忠順衛昭威將軍)) 최진(崔津)(남양부사(南陽府使)) 최의(崔漪)(승정원부승지(承政院副承旨)) 최홍(崔泓)(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최형(崔泂)(진사(進士)) 최연(崔演)(호(號) : 양제(良齊) 참판양관제학(參判兩舘提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 최담(崔澹)(교수(敎授)) 최옥(崔沃)(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최호(崔湖)(진사(進士)) 최순(崔洵)(형조참판충순위소위장군(刑曹參判忠順衛昭威將軍) 최운기(崔雲起)(동부도사(東部都事)) 최언침(崔彦琛)(진사(進士)) 최운윤(崔雲潤)(진사(進士)) 최운보(崔雲溥)(홍문관한림(弘文館翰林)) 최운광(崔雲廣)(선무랑사복시주부(宣務郞司僕寺主簿)) 최운우(崔雲遇)(현감 왕자사부(縣監 王子師傅) 최운길(崔雲吉)(생원(生員) 최운흘(崔雲屹)(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최용(崔瑢)(진사(進士)) 최현(崔玹)(진사(進士)) 최순원(崔舜元)(생원(生員)) 최구현(崔九鉉)(진사(進士)) 최방선(崔邦璿)(진사(進士)) 최석현(崔錫鉉)(진사(進士)) 최성하(崔成河)(생원(生員)) 최서하(崔瑞河)(생원(生員)) 최해웅(崔海雄)(진사(進士)) 최찬두(崔燦斗)(진사(進士)) 최문길(崔文吉)(궁내군주사(宮內郡主事)) 최운영(崔雲嶸)(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최상현(崔尙賢)(진사(進士)) 최응천(崔應天)(호(號) : 제촌(濟村) ㆍ 진주목사(晉州牧使)) 최유성(崔有成)(권지훈속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 최경성(崔景成)(무과첨추(武科僉樞))
▲근대(近代) 최독옥(崔燉玉)(독립운동가) 최신집(崔頣集)(독립운동가) 최돈거(崔焞巨)(독립운동가) 최진규(崔晉圭)(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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