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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교의 재정립 ***
** 유대교를 바로 세우다
** 목차 1. 유대교의 아버지, 에스라 2. 안식일 준수 3. 안식일의 의미 4. 안식년과 희년 5. 예루살렘과 바빌론에 민족의 기틀을 마련하다 6. <토라>의 완성 7. 성전과 함께 존재한 시너고그 8. 고난과 역경을 통해 은혜를 받다 |
1. 유대교의 아버지, 에스라
* 에스라서 1. 저자 : 에스라 2. 기록연대 : 주전(BC) 444년경 이후 3. 주제: 유다인들의 귀환과 성전재건 4. 주요인물 : 스룹바벨, 에스라 5. 기록목적 :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을 통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또 포로 귀환 이후에 진행된 제2성전의 건축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 6. 개요: 역대하의 마지막 부분과 곧장 연결되는 본서는 오래전에 바벨론 땅의 포로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또 어떻게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 대적자들의 방해가 극렬했지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성전을 건축한 사실이 감동적이다. 7. 내용: 1. 유대인들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하다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 정복 후 맨 먼저 한 일은 바빌론 족의 포로가 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을 모두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제국답게 지배를 받는 각 민족의 종교와 행정자치를 허용했다. 유대민족에게도 자율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 왕의 포고로 유대인의 귀향이 허용되었다. 이른바 ‘고레스 칙령’이다. 황폐한 유다 왕국의 영토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유대인들이 돌아가서 땅을 개간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고레스 칙령은 꿈같은 소식이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해방자로 추앙을 받았다. 유대민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간을 역사에서는 바빌론 유수기라 부른다. 기원전 586~538년 사이다. 당시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15만 명 가운데 1차로 4만여 명이 기원전 537년 다윗 왕가에 속한 세스바살(Sheshbazzar)의 영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은 유대인들은 터키나 동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세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어렵게 살아남은 현지의 유대인들과 합류해 함께 살았다. 무역상으로 성공한 잔류 유대인들은 돈을 모아 귀환하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정착 경비를 지원했다. 이른바 시오니즘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바빌론이 약탈했던 성전의 온갖 제기들도 갖고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고레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귀환자들의 성전 재건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고향에 남아 있던 가난한 유대인들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이라 불렸는데, 이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 에돔인, 아람인과 힘을 합쳐 귀환자들이 성벽 쌓는 일을 방해했다.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 귀향자들도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은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바사왕국(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제국의 영토 2. 2차 귀환과 성전 재건 고레스 왕의 아들 다리우스 왕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기원전 520년에 유대인들의 2차 귀환이 있었다. 인솔자 제룹바벨(Zerubbabel)은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귀환한 사람 가운데는 많은 사제와 서기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는 새로운 유대교 정통파가 출현한다. 신전 재건사업도 시작되었다. 새 신전은 솔로몬 때 지었던 신전보다는 훨씬 수수하게 지어졌다. 사마리아인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재건공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마침내 다리우스 왕 6년 곧 기원전 515년에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성전이 파괴된 뒤 꼭 70년 되던 해였다. 솔로몬 왕의 첫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이었다. 이 시기부터 유다 왕국은 제사장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자치령의 나라가 된다. 제2예루살렘 성전 고레스칙령이 새겨진 원통형 문서, 1879년 바벨탑 남쪽 서원에서 발견, 영국, 런던박물관 |
바빌론 유대인들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로 돌아왔다. 기원전 444년 에스라와 기원전 428년 느헤미야에 의해 3차와 4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에스라와 함께 온 유대인들은 1천 8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금 100달란트와 은 750달란트 등 큰돈을 갖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당시 바빌론 유대인들이 통상으로 많은 돈을 번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44년경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돌아왔다. 에스라는 사제인 동시에 서기였다. 에스라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실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마디로 종교생활이 엉망이었다. 신전제사는 제사장 부족인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집행되고 일반인들은 사제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지원하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인근의 이방인들과 결혼해 민족 혈통의 순수성과 유대교 신앙의 정통성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겪고 멸망하게 된 원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뒤에 온 느헤미야와 힘을 합쳐 유대 사회의 개혁에 앞장선다. 개혁의 핵심은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 《토라》의 편집 완성, 모세 율법의 준수’였다. 먼저 유대인의 정체성 확립과 유대교 부흥을 위해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인을 모두 파기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보이나 당시 상황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다지려는 의도는 다시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지켜감으로써 시련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이 사건을 ‘에스라 개혁’이라 부른다.
2. 안식일 준수
에스라는 모세 율법 준수를 위해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성문을 닫고 상인들은 장사를 못하게 했다. 그리고 매주 안식일과 일요일 그리고 목요일에 《토라》를 읽도록 했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sabath)’라는 말은 ‘그만두다’라는 의미다. 그날은 모든 노동과 일이 금지된다. 특히 불을 사용하는 일을 금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요리라든가 설거지도 할 수 없다. 무엇을 하려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행위는 십계명을 어기는 짓이다. 당연히 짐 나르는 일도 못하고, 설혹 남의 것이라도 해도 말을 탈 수 없었다.
현대에 와서 불은 스위치나 버튼으로 대체되었다. 스위치를 켜거나 버튼 누르는 것이 일의 시작이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 스위치를 켜거나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당연히 전등은 물론 TV나 컴퓨터를 켤 수 없다. 자동차 시동을 걸어도 안 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자동차를 타지 못하고 회당에 걸어간다. 요리하는 일,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끄는 일도 안 된다. 심지어 승강기 단추도 누르지 못한다. 그들은 “안식일이야말로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표시”라고 믿었다.
〈출애굽기〉 20장에는 “네 문 안에 유하는 것은 다 쉬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동물도 안식일에는 쉬게 했다. 관리들이 이런 금지사항을 단속했다. 그들은 식사에 관한 금기에 대해서는 더 엄격했다. 식사는 하느님과의 친교였으므로, 허용된 종류의 음식 재료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 와서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일, 임산부를 돕는 일, 정당방위를 위한 행동은 허용하고 있다. 미국 개혁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동차 타는 것은 허용하는 추세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안식일에 손발 쓰는 일은 안 되지만 부부간의 성교 같은 일은 허용된다. 성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깨끗하고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다처제인 이슬람교에서는 9월 한 달 라마단 기간 낮에는 섹스가 금지된다. 성을 더러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했는데도 성에 대한 시각은 정반대인 것이 흥미롭다.
3. 안식일의 의미
당시는 일주일 내내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든 때였다. 휴식의 날을 따로 정해 하루 종일 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 하느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창조 기념일이다. 하느님께서 6일간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에 쉬셨다. 그리고 그 쉬는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해 축복했다. 이처럼 인간도 안식일에 쉬면서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우주 만물을 창조한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동시에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인간중심의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통해서 하느님은 그의 백성과 교제하면서 그들을 거룩하게 한다. 안식일은 ‘쉬는 날’일 뿐만 아니라 ‘거룩히 지켜야 할 날’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은 가차 없이 죽였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매우 엄격해서 마카비 시대 신심 깊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안식일을 목숨 걸고 지켰다.
안식일 개념은 이후 1천5백 년이 더 흘러서야 로마제국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방인들도 일주일에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다. 안식일 제도는 노동의 피로를 풀고 삶의 기쁨을 증가시키는, 유대인의 위대한 공헌 가운데 하나다. 유대인들이 인류에게 ‘휴식의 날’이라는 개념을 선물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지킨 유대인 덕에 인류는 엿새간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일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안식일(Sabbath , 安息日) 1. 요약 유대교, 가톨릭과 개신교 등 여러 교단과 교파에서 일을 하지 않고 쉬면서 예배를 드리는 날. 성경 창세기에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한 후 7일 째에 신이 안식을 취한 날에서 기원한다. 안식일 준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지만, 탈무드는 생명이나 건강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경우 유예될 수 있는 일의 종류를 따로 규정하기도 한다. 가톨릭과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는 초대 교회의 전통과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일요일을 안식일로 기념하여 휴식과 예배의 날로 기념하지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고 있다. 2. 개요 유대교와 유대교에 기원한 가톨릭, 개신교 등 여러 교단과 교파에서 휴식과 예배의 날로 기념하는 날. 유대인들이 성경과 그들의 유일신이 내린 계명에 따라 지켰던 안식일에 기원을 두고 있다. <창세기>에서 신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한 후 7일째 되는 날을 안식한 데에서 유래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오랜 역사 가운데 단결을 유지해왔다. 유대교에서 기원한 가톨릭과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전통을 따르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6일을 일하고 하루를 휴일로 삼는 관행과 관례로 발전했다. 3. 유래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종교적 의무였으나, 그래도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수시로 일깨워주곤 했다. 안식일 준수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했던 40년 동안 안식일에는 만나(하늘에서 내려온 음식)를 거두지 않게 하려고 그 전날에는 2배의 만나를 내려주었다. 마카베오 시대(BC 2세기)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무기를 들고 방어를 하느니 차라리 살육당하는 편을 택할 정도로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켰으나 그렇게 하다가는 멸종당할 수도 있음을 깨닫고는 안식일에 다시 공격해오면 싸우기로 결정했다. 탈무드는 이 결정을 인정했으며, 생명이나 건강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경우, 39가지 금지된 노동이 유예된다고 말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4. 유대교의 안식일 유대 종교력에서 셰바트(유대 민력에서 5월) 말일과 니산(7월) 초하루 사이에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안식일이 4번 있다. 이들 안식일의 특수한 이름은 그날에 낭독하는 마프티르(Mafṭir:정해진 토라 일과 가운데 마지막 부분) 대신에 토라의 다른 부분을 추가로 낭독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이 4번의 안식일에는 각기 독특한 하프타라를 부른다. 아달월 1일 혹은 그 전에 오는 셰칼림('세겔들'이라는 뜻) 안식일은 세금을 가리키며, 〈출애굽기〉 30장 11~16절을 본문으로 삼는다. 자크호르('기억하다'라는 뜻)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신명기〉 25장 17~19절을 낭독하며 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광야에서 아말렉에게 어떻게 공격 받았는지를 기억한다. 이 안식일 전에는 부림절이 있다. 파라('붉은 암소'라는 뜻) 안식일에는 〈민수기〉 19장 1~22절을 근거로 유월절(페사흐)을 지키기 위해 의식을 통해 정결을 얻으라고 훈계한다. 하호데시('그 달'이라는 뜻) 안식일은 유월절 바로 전에 오는데 낭독하는 본문은 〈출애굽기〉 12장 1~20절이다. 이 4번의 안식일을 가리켜 '아르바 파라시요트'(4번의 성서 낭독)라고 부른다. 유월절 바로 앞에 오는 안식일은 샤바트 하가돌(큰 안식일)이라고 부른다. 다음의 세 안식일은 그날에 낭송되는 하프타라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따서 이름을 붙인다. 샤바트 하존(이사 1:1)은 아브월 9일(티샤베 아브) 이전이며 금식일이다. 샤바트 나하무(이사 40:1)는 아브월 9일 이후이며, 샤바트 슈바(호세 14:2)는 욤 키푸르(대속죄일) 바로 앞에 온다. 마지막으로 샤바트 베레시트(시작의 안식일)가 있는데, 토라를 낭독하는 1년 주기가 끝나고 〈창세기〉 1장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는 날이다. 샤바트 시라(노래의 안식일)는 〈출애굽기〉 15장, 즉 모세가 부른 승리의 노래를 낭독하는 순서에 온다. '홀하모헤드'(중간의 날들)는 유월절과 초막절 사이에 온다. 안식일의 전통유대인의 가정에서는 금요일 저녁 해지기 전 주부가 하얀 안식일 초를 켜놓고 축복기도를 하고, 키두시(Qiddush:성화의 축복)를 낭송한 다음 안식일 음식을 먹는다. 다음날 아침에도 간추린 키두시를 낭송하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아침 식사를 한다. 특별한 축복기도(하브달라)로 안식일을 마치는데, 이 기도는 구별(안식일과 나머지 6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빛과 어둠의 구별) 개념을 강조한다. 유대교의 풍습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아침 예배를 드릴 때 토라의 한 부분을 낭독하며, 하프타라(Hafṭara:예언서에서 발췌한 내용) 찬송이 이어진다. 〈시편〉도 안식일 날 예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안식일 아침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전 주일에 13번째 생일을 맞은 유대인 소년은 관례에 따라 바르 미츠바(종교적 성년식)를 치르며, 하프타 찬송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에도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숙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파 유대인들의 관습은 다양하며,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안식일에 여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몇 가지 규정을 수정하려고 한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일요일에 회당예배를 드린다. 가톨릭과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초대 교회의 전통과 예수의 부활이 이루어진 날이라는 의미에 따라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고 하여 안식일로 지키며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는 토요일을 휴식과 예배의 날로 지킨다. 폴 귀스타브 도레, 회당에서 가르치심 폴 귀스타브 도레( Paul Gustave Doré), 1832-1883년), 프랑스의 삽화가 판화작가 외경을 포함한 성서의 내용들을 소재로 한 판화로 유명하며, 당시 자본가들 사이에서 도레의 그림을 걸어두는게 유행일 정도로 인기를 받았다. 대한민국에는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구스타브 도레의 성경판화》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또한 동화 <빨간 두건>, <장화신은 고양이> 등의 삽화를 그린 삽화가이기도 하다. |
* 안식일 고대 이스라엘 초창기부터 종교의식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은 월력에 따라 주간의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냈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휴식과 예배의 날이었다. 안식일은 천지창조 때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 쉬시며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고 축복하신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금요일 저녁 해가 질 때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에 끝나는 안식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해 따로 떼어 놓은 기쁘고 거룩한 날이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종이나 외국인, 가축들도 모두 일상의 노동을 중지하고 쉬었다. 그 대신 거룩한 모임과 예배의 시간을 가졌는데 제물을 바치고 제단에 빵을 차려 놓거나 예언자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안식일에 관한 규정은 율법의 십계명 안에 담겨 있다.5)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권고를 계속적으로 되풀이하고 있고 이날을 더럽힌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까지 명시한 것으로 보아 이날이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예언자들은 내적인 헌신과 윤리적인 문제들은 다 제쳐 두고 안식일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려던 사람들을 호되게 질책했다. 안식일은 천지창조 때의 일곱째 날을 기념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것과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출해 주신 것을 기억하는 날이었다. 그런 면에서 안식일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를 나타내는 증거로서, 이스라엘의 각 세대에게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들의 뿌리를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기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신약 시대에 와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율법을 읽고 배웠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이방인들과 구별되고 진정한 유다인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서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면서, 거기에 관계되는 해서는 안 될 몇 가지 내용들을 전해 주고 있지만 , 1세기경에는 안식일 휴식 규정 안에 해서는 안 될 일들에 관한 목록들이 무척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씨 뿌리기, 추수하기, 건물을 짓거나 부수기, 사냥, 요리, 청소, 불을 피우거나 끄기, 매듭을 묶거나 풀기 등 몇 십 가지 정도였지만 점차 각 행동에 관한 규정이 세분화되어 덧붙여지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수백 가지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매듭을 묶는 것에 관한 금지 조항은 너무 막연해서 어떤 종류의 매듭은 금지되고 어떤 매듭은 괜찮은지까지도 정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는 얼마까지인지 등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세하게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신약 성경을 보면 안식일 규정 때문에 예수님과 특히 바리사이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야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기본적으로는 안식일 법을 존중하고 따르셨다. 하지만 안식일 법을 놓고,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세부적인 조항에 집착하여 그 근본정신을 흩트려 놓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비난하셨다. 그리고 안식일 법이 어떤 경우에도 인간 존중이나 자비 또는 사랑의 원칙보다 우선할 수 없음을 가르치셨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형식적인 엄격주의를 고수하고 집착함으로써 안식일이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심오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안식일 규정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식일을 사람들에게 휴식과 기쁨을 주는 날이라기보다 오히려 부담만 안겨 주는 날이 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안식일의 핵심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한때 안식일 모임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로 이용되기도 했다. 신약의 공동체는 안식일이 갖고있던 구약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간 첫날에 거행했고 그날을 주님의 날이라 불렀다. 신약의 백성에게는 안식일이나 율법의 다른 조항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실재의 그림자로 여겨졌고 안식일은 앞으로 누리게 될 천상 안식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
사자를 죽인 삼손, 피터 폴 루벤스, 1628년 |
4. 안식년과 희년
안식년과 희년 또한 안식일과 마찬가지 개념이다. 유대인에게 적용된 율법은 노예에게도 적용되어, 노예도 7년만 일하면 해방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그리고 50년이 되는 희년에는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빚이 면제되며 모든 사람에게 해방이 선포된다. 율법 정신의 최고 목적은 정의와 평등의 실현에 있다. 안식년과 희년 법은 사회적 불평등을 정기적으로 해소하는 장점을 지녔다.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은 공동체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인에게도 많은 숙제를 내주고 있다. 안식년과 희년은 아직 이방인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도로 앞으로 인류가 본받아야 할 제도다. 특히 안식년은 일자리를 나눌 수 있는 귀한 제도다. 기업, 정부, 근로자가 삼분의 일씩 부담해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면 일거에 청년실업이 해소될 수 있다.
느헤미야의 사회개혁과 에스라의 영적개혁으로 사라져가던 유대인의 정체성과 생명력이 다시 살아났다. 백성들이 《토라》를 읽기 시작하면서 민족과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에스라의 가르침에 따라 금식하고 회개한 후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로 맹세했다.
* 희년(禧年, jubilee, יובל, yobel)은 성경에 나오는 규정으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희년은 7월 10일 속죄일에 선포되었다. 유대인들은 분배받은 땅을 기업(基業, Inheritance)이라고 하여 영구히 팔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땅의 매매는 희년까지 한시적으로만 이루어졌고 희년 전이라도 매도자가 원할 경우 언제든지 매도자, 혹은 매도자의 친족이 희년까지 남은 기간에 따라 정당한 값을 치르고 땅 무르기가 허용되었다. 1. 희년에 대한 성서적 근거 및 어원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백성들에게 상속의 땅을 분배하셨다. 태어날때부터 먹고 살도록 하신 것. 그리고 안식년과 희년에는 빚을 탕감해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희년에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하심으로써 재물이 백성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셨다. 생각해보라. 빚이 계속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동족간에 이자도 받지 말라고 하였다. 구약성서 안에 전승된 이스라엘 전승들은 대개 고대 근동 지방에서 통용되었던 다양한 관습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희년은 신학적 성격에 있어서 고대 근동의 관습법들과는 전혀 다른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띤 법이다. 즉 희년에 이루어지는 땅과 집 회복, 노예 해방, 채무 면제에 대한 요구는 고대 근동 세계의 수많은 사회개혁 시도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이러한 사회개혁 요구를 항상 주기적으로 제도화하려고 한 것은 오로지 희년제도뿐이었다. 우리말 '희년'이란 영어: jubilee'를 번역한 것이고, jubilee는 히브리어: יובל, yobel 요벨을 음역한 것이다. 요벨은 수양의 뿔을 의미한다.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이 독특한 50번째 해가 되면 요벨 나팔을 불며 희년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2. 희년에 일어나는 일 희년이 되면 땅과 집이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노예가 해방되며 부채가 면제되었다. 1) 땅 회복과 자유 선포 희년이 되면 전국 모든 거민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각자 상속받은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희년이 되기 전이라도 땅 무르기를 할 수 있다. 만일 한 유대인이 가난해서 소유지를 팔아야 할 경우에 우선 '기업 무를 자'가 나서야 했다. 이는 가까운 친척 중 하나가 그 땅을 산 사람에게 땅을 살 때 치른 액수를 물어주고 그 땅을 다시 되찾아서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줌으로써 대가족이나 지파의 연대감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만일 그러한 '기업 무를 자'가 없거나, 있다 해도 그 자신이 그것을 되돌려 살 만한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그 땅을 판 사람 자신이 나중에 그것에 필요한 액수를 조달할 능력이 되면 그 땅을 되돌려 살 수 있었다. 이 액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낮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희년이 될 때까지 그 땅에서 수확할 수 있는 금액을 치르면 되기 때문이다. 되돌려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도 희년이 되면 무조건 자기 땅으로 회복되었다. 2)집 회복 일반인의 집은 1년 안에 무르지 않으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레위인의 집은 언제든지 회복된다. 3)노예 해방 희년이 되면 모든 유대인 노예들은 해방된다. 4)부채 면제 안식년에 빚을 면제해 주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역시 빚이 면제 된다. 또한 유대인끼리는 이자 없이 대부해 주어야 한다. 3. 예수와 희년 누가 복음서 4장 18,19절은 예수가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로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예수와 구약성서의 깊은 관계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본 구절은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신약성서 누가 복음서 말씀은 예수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늘 하던 대로 회당에서 말씀을 읽을 차례가 되자 맨 처음 펴서 읽은 성서이야기로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데다가, 특히 예수는 21절에서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 예수가 낭독한 원전에 보다 가까운 구약 이사야서를 살펴보면, 우선 야훼의 영이 예수에게 내린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은 구약 이사야서에 같거나 유사한 표현들이 몇 군데 나오는데 '아름다운 소식'(이사야 40장 9절, 10절), '좋은 소식'(이사야 52장 7절) 등으로 표현되며 그 소식의 핵심 내용은 40장의 경우 '야훼가 장차 강한 자로 임함으로써 친히 그 팔로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이고 52장의 경우 '야훼가 통치한다'는 내용으로 '야훼가 통치하는 나라'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도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 즉 야훼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복음서 4장 17절)는 외침을 바탕으로 사역을 시작하였으며 공생애 대부분 동안 '하느님 나라' 즉, 야훼의 나라를 역설했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라는 표현이다. 이때 자유는 히브리어로 '드로르'라는 표현인데, 바로 구약의 안식일 관련 규정 중 포로를 해방하는 내용으로써 희년의 자유 선포, 즉 희년의 나팔이 울리면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기 땅과 가족에게로 복귀하라는 선언을 의미한다. 특히 에제키엘 46장 16~18절에서는 회복된 나라의 이상으로 '희년의 선포'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는 앞의 '야훼의 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4. 희년 주기에 대해(49년설과 50년설) 희년 주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있는데, 7번의 안식년 다음 해를 희년으로 보는 견해와 7번째 안식년을 대안식년(super-sabbath), 즉 희년으로 보는 견해, 두 가지다. 1) 50년 주기설는 구절을 근간으로 한다. Lesetre, Paton, Delitschz, Strack 등의 학자들이 지지하며 전통적으로 지지받는 견해이다. 2) 49년 주기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부차적으로 2년 연속되는 땅 휴경이 가져오게 될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하는 Wetzstein, Kugler, North 등의 학자들의 견해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참고로 희년의 선포일은 희년을 맞이하는 해의 일곱 번째 달의 열 번째 되는 날(대속죄일)로, 이 날 양각나팔이 울려 퍼지면, 기업(Inheritance)이 원주인에게 회복되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자유가 선포된다. 5. 희년 절기(음력 7월 10일) 이스라엘의 월력은 한국의 음력과 비슷하다. 이스라엘은 한국보다 1달 빠르다. 7월 10일에 뿔나팔을 크게 불며 희년을 선포하게 된다. 이어서 7월 15일부터 초막절이 시작된다. 구약성경의 7월 10일은 한국 음력 8월 10일이 된다. 즉 한국의 명절 추석(음력 8월 15일)이 시작되기 5일 전에 희년 나팔을 분 것이다. 1988년 9월 서울올림픽대회에 참가하였던 이스라엘 선수들은 대회 기간 중에 있었던 우리 민속 명절 추석 행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들의 초막절과 한국의 민속 명절 추석이 같은 날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폴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항의> |
5. 예루살렘과 바빌론에 민족의 기틀을 마련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바빌론 두 곳에 민족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곳에 모여 사는 것보다 흩어져 사는 게 서로 상부상조할 기회도 많고 특히 외침을 당했을 경우 민족말살의 위험이 적고 전쟁 수행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예루살렘과 뉴욕에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 간의 관계와 흡사하다. 이후 1천 5백 년간 바빌론은 유대인 커뮤니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와 바빌론 언어인 아람어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바빌론에는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을 그곳에서 보내 아람어가 모국어처럼 사용되었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가까운 같은 셈어족의 언어다. 초기 바빌론 《탈무드》도 아람어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의 공용어도 아람어였다. 중세 이후 아람어에 히브리어가 섞인 일종의 아람어 방언이 유대인 학자들의 일상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도 전통을 고수하는 랍비는 글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쓴다.
또 이때부터 이재에 밝은 유대인들은 항상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에 몰려 살았다. 그리스 · 로마시대에는 지중해 해상교역의 중심 항구 알렉산드리아 1백 만 인구의 거의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에는 이슬람교의 중심도시 바그다드를 거쳐 코르도바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후 이들이 스페인 왕국의 수도 톨레도로 몰려들었으며 추방령 이후 암스테르담이 유대인의 도시가 되어 중상주의의 꽃을 피웠다. 그 뒤 런던을 거쳐 지금의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의 수도에는 항상 유대인들이 있었다.
6. 《토라》의 완성
보통 패망한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이고 그 과정에서 그 문화에 젖어들어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민족에 귀속되고 만다. 이것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그들만의 유일 신앙과 독특한 이상을 가지고 역사와 맞섰다. 그 정수가 《토라》였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인 《토라》를 경전으로 여기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 나갔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토라》의 정비였다. 에스라에 의해 《토라》가 완결되어 그 뒤 수정 없이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 두 인물은 민족중흥의 쌍두마차였다. 유대인이 《모세오경》을 《토라》라 해 신앙의 근본에 놓은 것은 뜻이 깊다. 왜냐하면 《오경》에는 바로 율법에 대해 다루고, 땅을 약속하고,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경위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오경》 이후의 《성경》 저작이 아무리 찬란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오경》의 중요성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후의 문서는 하느님의 계시라기보다는 《오경》의 주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제는 언제나 하느님 약속의 성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된 땅이다.
새로운 유대공동체 재건은 율법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선지자들이 강조했다. 《토라》가 이 시기에 성문화되어 집대성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낯선 세계에서 생존의 한 방식으로 오래된 기억과 전통을 모아 재구성함으로써 민족의 동질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제 《토라》는 단순히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마련해주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들이 《토라》를 정비한 후, 전령들을 페르시아 곳곳에 파견한다. 전령들이 모세가 쓴 《모세오경》이 유대력의 새해에 공표될 것이라고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제국 곳곳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히브리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통역사가 동원되어 어려운 부분은 아람어로 설명했다.
또한 바빌론 유수 이후,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율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어 이를 설명하는 《미드라시》 곧 《성경》 주석이 생겨났다. 그 뒤 《미드라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발달했다. 《미드라시》가 발전해 후에 《탈무드》의 기초가 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잊지 않도록 최소한 안식일을 포함한 주 2회 모세 율법을 읽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들은 유대력의 새해가 되면 〈창세기〉 1장부터 새롭게 읽기 시작한다.
* 토라(Torah모세오경, 모세율법) 1. 요약 ]유대교 율법. 좁게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모세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썼다고 인정된다. 넓은 의미로는 히브리 성서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는 유대인의 율법·관습·의식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도 쓰인다.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즉 유대 백성에게 내린 계시의 본질이며, 하느님이 인류를 위해 계시한 가르침 또는 지침이다. 토라는 종종 <구약성서> 처음 5권을 가리키는 데 국한되며, 율법 또는 오경(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토라는 전통적으로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모세가 썼다고 인정된다. 유대교,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개신교 교회들의 정경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로 이어지는 순서를 모두 똑같이 받아들인다. 기록된 토라는 모든 유대교 회당에서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손으로 직접 쓴 사본으로 보존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 사본을 특별한 경외감을 가지고 보관된 곳에서 꺼내오며 다시 집어넣는다. 유대교의 예배의식에서 토라(5경) 낭송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토라라는 말은 히브리 성서 전체를 가리키는 데 쓰기도 한다. 어떤 유대인들은 구전되어온 법률과 관습을 하느님이 모세에게 내린 계시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토라를 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 모두를 포괄하는 말로 이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랍비들이 구전과 기록된 율법 모두에 대해서 해놓은 주석과 해석을 신성한 구전 전승의 확장으로 보며,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토라가 유대인의 율법·관습·의식의 전체 체계를 가리키는 훨씬 더 넓은 뜻을 지니게 된다. |
7. 성전과 함께 존재한 시너고그
* 시너고그 [synagogue] : 유대교에서, 집회와 예배의 장소로 쓰는 회당 |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시너고그를 세웠다. 이때부터 시너고그가 성전과 함께 존재했다. 회당은 세 가지 용도로 쓰였다. 예배를 드리는 회당, 공부하는 학원 그리고 공동체 집회장이었다. 곧 기도, 교육, 자치정부 기능을 하는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했다.
유대인들은 포로생활 후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뒤로는 부족주의를 버리고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부르며 단결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통치할 때는 오히려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던 반면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며 종교적 경건함 아래에서 자신들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했고, 솔로몬 왕 시대에 또다시 타락했다. 부유하고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에는 여지없이 우상숭배와 부정부패가 나타났다. 반면 신기하게도 국가를 잃거나 외세의 지배를 받을 때마다 그들은 율법에 순종했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종교적 경건성 아래에서 자신들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나 성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오경》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 회당 신약 시대 유다교 회당은 유다인들 가운데 견고하게 확립된 기구이며 제도였다. 유다인들의 공공 집회 장소였던 회당은 지역 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예배와 종교적인 모임을 위한 장소요 학교였으며 사법적인 절차를 집행하는 곳이기도 했다.1) 회당의 출현은 유다교 역사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회당은 종교의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회당의 출현과 더불어 공적인 종교의식의 성격은 극적인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즉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으로서 그때까지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희생 제사가 기도와 종교적인 학습과 권고로 대체된 것이다. 공동체를 대표해 공적인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제라는 작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종교의식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처럼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바깥뜰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었으며 모두가 직접 종교의식을 이끌어 가는 주체로 참여하게 되었다. 게다가 회당은 성전처럼 어떤 한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 생겨났을 정도로 보편적인 기구로 자리 매김하였다. 회당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바빌론 유배 무렵에 회당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거나 바빌론 등 각지에 흩어진 유다인들에게 믿음의 중심이 되었던 곳을 잃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유배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발적으로 모여 종교적인 의미의 모임을 가졌던 것이 회당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유배 기간 동안 성전 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던 유다인들에게 회당은 성전을 대신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도 회당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다인들은 축제 때마다 성전 의식에도 참석했고 지역에서 거행되었던 회당 의식에도 계속적으로 참여했다. 회당은 성전과 달리 유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느 지역이든 설립되어 있었다. 유다인 남자 10명 이상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회당이 세워진 것 같다. 회당이 생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율법을 배우며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안식일은 공적인 예배를 올리도록 정해진 중요한 날이었다.2)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루어진 예식은 다섯 부분으로 나눠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인 ‘쉐마 이스라엘’을 낭송했고3) 이어서 기도를 바쳤다. 그러고는 성경 봉독과 해석과 설교 시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예배의 중심이었다. 모세오경을 읽었고 예언서의 일부를 해설해 들려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권고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러고 나서 설교가 행해졌는데 이때 초청을 받은 사람이 설교를 하기도 했다.4) 그리고 사제의 축복으로 예배가 마무리되었다. 사제가 없는 경우에는 기도로 끝맺음 했다. 회당의 예배 형식은 그리스도교 종교의식에도 반영되었다. 지역 원로들이 회당을 전체적으로 감독했지만 회당의 직접적인 관리자는 회당장과 시중드는 이였던 것 같다.5) 회당장이 맡은 책임은 회당 건물과 재산 그리고 예식에 관한 일6) 을 총괄적으로 감독하거나 계획하는 것이었다. 시중드는 이의 특별한 직무는 회당의 시설과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예식 중에 성경 두루마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성경 읽기를 가르치거나 율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인 채찍질을 집행하거나 안식일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일을 했다. 회당 건물은 크기나 형태가 다양했지만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출입구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게 했다. 안에 있는 시설로는 성경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궤, 성경 봉독과 연설을 위한 단, 등잔, 예배자들이 앉는 의자 등이 있었다. 신약 시대 팔레스티나를 비롯하여 로마제국 전체에 퍼져 있던 회당은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성장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설교자로서 회당에 자주 초청되었던 것 같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신 후에 자주 회당에 가시어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아픈 이들을 고쳐 주셨다.7)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회당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고8) 사도들과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회당을 거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9) 회당에서는 유다인들뿐 아니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복음 선포를 위해 회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보여 준 개방적인 친교의 모습은 유다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그들의 개방적인 태도로 인해 계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유다교 의식의 순수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회당의 유다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반대하고 박해함에 따라 그리스도교와 회당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10) |
8. 고난과 역경을 통해 은혜를 받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위기〉 25:23) 이렇듯 유대교의 계시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의 하나가 방랑생활에 대한 언급이다. ‘낯선 땅에서, 낯선 존재로’ 박해를 받는다는 주제는 유대인에게 시대를 초월해 되풀이된다. 이는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거쳐야 할 일종의 사명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인은 영원한 유목민으로 방랑과 이산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떠돌이 민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고난을 극복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 정주민족은 절대로 이들을 이길 수 없다. 정착사회에서 편하게 자란 민족이 사막과 황야의 시련에 단련되고 생존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목민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은 설사 정주민족 내에 들어와 살더라도 영원한 이방인이자 아웃라이어(outlier)다. 아웃라이어란 흔히 중심 집단에서 동떨어진 존재를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소외된 자, 그늘에 가려진 자, 사회에서 매장된 자가 유대인들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러한 아웃라이어들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를 준다. 그것도 황금 기회를. 농경사회에서 축출되어 상업에 눈뜨게 하고, 상업에서 축출되어 무역과 금융에 눈뜨게 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글로벌한 민족이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역사의 이치다.
유대인들은 고난과 수치의 역사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영광을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 고난은 영광을 낳는 디딤돌이 된다는 좀 더 긍정적인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련은 영광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역사 인식 때문이다.
"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
- 에스라서 7장 27절 ~ 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