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깡이와 몽천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은 육체의 죽음일 뿐 그 마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윤회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그저 옷과 같은 육신의 껍데기만 바꿔 입는 것이 아니겠는가? 티벳 사자의 서를 비롯하여 심리학에서의 최면을 통한 전생퇴행, 캐논보고서나 이안스티븐슨 박사의 전생연구, 에드가캐이시의 최면상태에서의 전생구술 등을 보면 인간이 여러 생을 거쳐서 환생 윤회 한다는 불가사의한 사실들이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바 있다.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의 구술이 정확히 사실과 맞아 떨어진다는 것과 함께 연령퇴행을 한 최면에 걸린 자가 구술하는 전생에 대한 이야기들이 현실에서 정확히 확인되는 것들을 보면 분명 인간은 현생의 단 일회성뿐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수생을 거쳐 살아왔고 또 살아갈 불멸의 존재가 아닌가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목숨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더구나 어떻게 죽으라는 것까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몇 해를 누구로 어떻게 살다가 어떤 방법을 통해 어느 날 죽어야 한다는 것까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작금의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내일 닥칠 일을 미리 알지 못하고 하루살이 곤충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덜컥 사고를 당하거나 죽게 된다. 어떤 자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어떤 자는 10대에 죽고 어떤 자는 90을 넘어 살다 죽으니 사는 것이 무엇이고 또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보면 인생이 닥칠 행복이나 불행 그게 모두 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여진다.
키가 작고 몸집이 도토리 같이 생겨 맹꽁이 비슷하다고 꽁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초등학교 동창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홀어머니 밑에서 형과 함께 살았는데 물론 집안도 몹시 가난했다. 공부도 못했고 조금 미련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마음은 착하고 성질이 온순했다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작년 어느 초등학교 동창생의 음독자살 소식을 가지고 온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 그 꽁깡이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몇 해 전 추석 전날 시골집에 와서 예초기를 메고 벌초를 하러 갔는데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 형님과 형수 그리고 아내가 이상하게 여기고 부랴부랴 찾으러 갔다. 무덤에 가서 찾아보니 무덤가에서 무수히 벌에 쏘여 죽어 있었다. 산소의 풀을 깎다가 벌떼들이 달려들어 쏘여 죽었던 것이다.
당시 50이 갓 넘었을 그 황당한 죽음의 소식을 듣고 과연 죽음이 무엇이며 하필 그렇게 죽어야 할 운명이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꽁깡이는 어려 불행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천호등 자개농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자개를 반짝반짝 갈아 농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때 어느 날인가 한번 내게 연락을 해와 소주를 얻어 마신 기억이 있었다. 스물도 아니 된 나이의 앳된 얼굴에 뭉툭한 손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스물을 갓 넘어서는 그 자개농 공장을 그만두더니 양식 요리 학원을 다녔다. 양식 요리를 배워 주방장으로 취직해 일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때 꽁깡이는 초등학교 다닐 적 한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공부도 항상 일등인데다가 여느 농촌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세련된 몸매에 고운 옷을 입고 다니던 여학생이었다. 꽁깡이는 주제넘게 그 여학생을 흠모하였고 여러 번 연락을 하여 가까이 지내려 했으나 턱도 없는 일이었다.
초라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고된 공장 노동자 일을 하다가 세상사를 뒤늦게 깨닫고 나서 남보다 부자로 잘나서 잘살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들어찼고 또 남들에게 보아라 하는 여자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한순간의 가슴 속에 품은 연정으로 끝이 났고 양식집 주방장으로 취직해 돈 벌면서 잘 지내는가 싶었다. 그리고 그 후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그러던 꽁깡이가 20여년도 넘었는데 10여 년 전 중년이 되어 우연히 나를 찾아왔었다. 세상에 돈벌이도 못하고 되는 일이 없어 낙오자로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불쑥 나타나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그때 꽁깡이는 모 시내에서 하던 김치찌개 집 같은 작은 음식점을 경영했는데 그것을 접고 새로운 자리를 찾아보며 쉬는 중이었던 것이다.
어렸을 적 때꼽자구 끼고 코 흐르던 모습은 사라지고 제법 그럴싸한 얼굴로 나타난 꽁깡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아내를 얻어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딸 하나를 두고 아파트에서 산다고 했다. 당시 꽁깡이를 따라 그 집 아파트도 가보았는데 못 배운 한이 있어서 인지 고등학교 졸업장도 검정고시를 통해 뒤늦게나마 받았다고 자랑을 했고, 방 한 칸에 수많은 책을 사다 놓고 있었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하는 제법 어려운 책에다가 종교 철학 과학 서적까지 천여 권을 넘게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논어를 필사했다며 정성스럽게 먹을 갈아 근사하게 쓴 글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꽁깡이는 제법 지식인 흉내를 내며 이 땅의 미래를 책임지어야할 교사들의 행태를 맹비난하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월급만 먹는 자들이라고 폄하했고, 글이나 쓰고 교수네 언론가네 학자네 하는 자들을 가짜라고 사정없이 공격했다. 그때 독서깨나 한듯한 꽁깡이의 그러한 강경한 태도에 매우 놀랐고 나도 얼마간 수긍하고 말았는데 그 후 다시 꽁깡이를 만나지는 못했다.
꽁깡이가 새로운 음식점 자리를 구해 시내 모처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문과 함께 꽁깡이가 불행한 나를 비난하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꽁깡이를 다시 만나면 ‘너 함부로 인생에서 불행하게 된 자를 여기저기 욕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작금의 세상인심이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세상이라 의당 인격불한당 등인 그들이 나의 불행을 요기삼아 함부로 혀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것쯤을 탓할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세상인심이 사납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남의 불행을 마치 입에 피 묻은 늑대처럼 씹고 다니는 실정이니 별 내세울 것 없는 처지라 가급적 아는 사람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데다가 피해 버리곤 하면서 내 마음이나 내 일에나 신경 쓰며 살뿐이 되고 말았는데 문득 알게 된 꽁깡이의 황당한 죽음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그새 그의 죽음이 5년이 다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과연 인간의 삶과 죽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장난일까?
강변에 사는 어느 마을에 두어 살 나이어린 후배가 있었다. 40이 훌쩍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농촌 노총각인 그는 비닐하우스에 채소며 고추를 경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간간이 그 마을 주점에서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술을 좋아하는 것 빼고는 남에게 험담하기를 꺼려하는 착한 후배였다.
그 후배를 만날 적마다 ‘형님, 나도 호를 하나 지어주라.’고 부탁을 하는데 참으로 난감했다. 남의 호를 지어 줄만큼의 무슨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보아라 하고 남의 호나 지어주는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긴 어느 중학교 동창생 술좌석에서 부담 없는 친한 친구에게 장난삼아 ‘자네는 꿈꾸는 풀이라’고 몽초(夢草)라는 호를 주며 몽초라고 불러 주곤 했는데 그것을 듣고 자기에게도 호를 주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괜한 헛장난이라고 여기고 그저 웃고 말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우연히 주점에서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아주 작심하고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없이 술에 취해 ‘자네는 꿈꾸는 내, 몽천(夢川)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하고 몽천이라는 호를 주고 말았었다. 몽천이라는 호를 받은 그 후배는 몹시 즐거워했다.
그리고 지난 해 가을, 우연히 내 집에 들른 그 몽천의 마을에 산다는 어느 후배를 만나 ‘그 후배 비닐하우스 잘하며 잘 사느냐?’고 소식을 물어보니 그새 수년 전에 죽어버렸다고 했다. 참으로 참담한 소식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몽천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하직해버렸단 말인가?
어느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는데 몽천의 늙은 아버지가 마을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주막 앞 활주로로 통하는 수로가 막혀 물바다가 되었다. 마침 그때 그의 아들 몽천이 주막 앞에 나타났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저기 막힌 수로를 좀 트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몽천이 막힌 수로를 텄는데 순간 그 네모난 구멍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엄청난 물과 함께 휩쓸리더니 머리를 거꾸로 그 수로로 처박아 버렸다. 순간의 사태를 당한 그의 아버지가 달려 나와 두 다리를 겨우 붙잡고 끌어내려 했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죽음의 소식이었다.
옛 이야기에 보면 물에 빠져 죽을 아이 운명이라 하여 방에 가두어 놓았더니 접시 물에 코를 처박고 죽었다 하고, 또 어떤 청년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운이라 그 부모가 호랑이 사냥을 나가지 말라며 방안에 가두어 놓았는데 하필 벽에 걸어둔 호랑이 가죽을 보고 갇혀 지내는 것에 부아가 나서 주먹질을 했는데 녹슨 쇠못을 쳐서 손에 파상풍이 와서 죽고 말았다고 하는데 인간에게 죽음은 결코 비켜 갈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물론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임에는 분명하다. 어차피 사바세계의 중생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불문코 종국에는 죽음으로 이별할 밖에 없는 운명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다시 새로운 육신을 받아 내생에 환생하는 것일까? 모든 전생 연구자들이나 영혼 연구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요사이 나도 깊은 불행을 만나 헤매며 임사체험, 유체이탈, 사후 세계, 전생, 환생, 윤회 등에 관한 연구와 글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이 세상사 마치 꿈속인 듯 의미가 없고 마치 환상 속을 유영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기도 하여진다. 그러기에 물질적 욕망이나 지위나 권력 따위는 참으로 부질없는 것들일 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살아생전 가급적 여유가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고 나눔을 실천하여 모두를 무조건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하겠고, 또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일조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다. 그 외의 삶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어찌 남의 일을 돌 불 틈이 있으랴? 여기저기 서민들의 삶은 아우성이다. 기실은 우리도 꽁깡이나 몽천처럼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들이다. 이 세상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 살다 죽어간 꽁깡이나 몽천의 해원 극락환생을 뒤늦게나마 빌어본다. 부디 내생에는 좋은 몸을 받아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살도록 간절히 빌어보는 것이었다.
첫댓글 죽은 넘은 산 넘을 살았을때 욕했는데
산.. 죽... .. 네
청야님, 가슴이 먹먹하네요. (읽은 답으로 짧은 경험담을 하나 적겄습니다). 흔히들 주식가격은 귀신도 모른다라고 말하잖습니까. 제가 수년전에 그쪽 볼일이 쪼까 있어 평소 다른 문제로 한 두번 찾았던 무속인을 찾아 다시 갔었지요. 해서 그쪽 볼일을 여쭙고 어찌 될까요 했더니, 1850쯤 가다가 확 고꾸라지겠다라고 하시대요. 이틀 있으니 진짜 그렇게 되더만요. ㅋ 못 믿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 경험담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귀신이 없다고도 못하고, 귀신이 있다함은 육신의 삶이 전부가 아니란 것이 되겠읍죠. 더 자세한 내막은 우리들이 알기가 어렵지만 하여간 뭔가는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읍지요.
(사족을 아니 달 수가 없군요: 그렇게 제게 말씀해주신 그 분이 매사에 언제나 쪽 짚어주시진 못하기도 하더군요. 허나 전반적으로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그 무언가는 있더군요. 너무 빠져들까봐 지금은 그런 쪽으로 자제를 합니다요). 청야님께 들려드리고 싶어 솔직히 제 경험을 이야기해버렸구먼유. ㅋ. 육신을 벗으면, 원할 경우엔 다시 환생하리라 생각이 드는군요. 글고 나름 공부를 해본 제 경험상 옛 말씀들이 그냥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고 봅니다. 108번뇌라는 것도 108번 정도의 삶을 살아봐야만 좀 쉴 수 있거나, 해탈하거나 할 수 있는 카르마가 아닌가 짐작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