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평 윤씨 집안에 얽힌 우동 장지마을
윤용선 대감은 왜 해운대에 묘를 썼을까?
우1동 해운대고교 운동장을 왼편에 끼고 북쪽 장산 기슭으로 들어가다 보면 53사단 사령부가 있다. 정문을 지나 왼쪽 아스팔트 길을 떠나 올라가면 테니스 코트 주차장 옆에 조선 말기 정치가인 윤용선의 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정일품 대관보국승록대부의정부의정 대훈위 증시 문총윤공용선지묘’라고 기록되어 있다.
윤용선의 선영은 경기도 지방인 장단군(지금 이북), 적성군(지금 파주시), 고양시 등이고 아들의 묘가 전라북도 고창군 구암리에 있으며, 그 외 후손 대부분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지금 구리시)의 선영에 묘가 있다. 또한 해평 윤씨의 본향은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이다. 그렇다면 윤용선은 왜 선대나 후손의 세거지도 아닌 부산의 해운대에 묘를 썼을까?
윤용선(1829~미상)은 이조참판 윤치희의 아들로 1885년 문과에 급제하여 무려 6회(1896~1904)나 총리대신을 지냈던 인물이다. 고종황제(재위 1863~1907) 생일날인 만수절에 독이 든 커피를 진상한, 이른바 독다사건(毒茶事件)에 휘말려 들었던 윤용선은 독립협회로부터 탄핵 대상에 올라 보직변경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제국(1897~1910) 성립으로 다시 보수내각으로 환원되자 법규교정소 총재로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였다.
<윤용선 대감의 비>
이렇듯 조선말의 권세 높고 위엄 있는 한 정치가의 무덤이 오늘날 해운대 우동에 이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듯하다. 윤용선은 아들이 없어 양자를 두었지만 그 아들은 그의 덕망을 본받지 못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떨어뜨렸다. 장지봉에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나 경북지방에 묻혀 있던 부인 안동김씨의 묘도 그의 묘(장지봉 기슭 탁거리) 근처로 이장돼 우1동 해운정사 뒤 장지마을 뒷산 장지봉에 ‘정경부인 김씨지묘’라는 비석과 묘가 있다. 이장 당시 전국 각처에서 장사치가 몰려들어 파시를 이룰 정도였다고 전하는데, 이장돼 온 이후 몇 년 동안은 후손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의 집안이 몰락하여 그의 묘는 1990년 4월 육군 제53사단이 이곳으로 이전하기까지 후손들의 손길이 끊긴 채 방치되어 있다가 포클레인에 떠밀렸고 묘비도 비스듬히 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후 부대에서는 잦은 사고가 일어나고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 등 온갖 불길한 말들이 떠돌았다. 그러다 마침 해운대구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몇 달 후 공병대가 테니스 코트를 조성하면서 묘비를 좋은 곳으로 이전하고 묘역을 단장하여 천도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 후로 부대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주영택 향토사학자는 말한다.
<우1동 해운정사 뒤 부인 안동김씨의 묘와 비>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