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 그 절묘한 예술의 향기
황병기
홀어미 · 과부 · 미망인 등이 모두 지아비를 여의고 혼자 사는 지어미를 지칭하는 말이면서도, 홀어미에는 눈물이, 과부에는 억척스러움이, 미망인에는 세련됨이 각기 서려있는 그 어감의 차이를 외국 사람은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물을 지칭하는 말보다도 정감을 나타내는 말들은 더욱 미묘한 어감을 지니게 된다. 특히 각 민족 특유의 미적 체험 속에서 형성된 예술에 관련된 말들은 다른 민족이 파악하기 어려운 독특한 감각을 지니는 수가 많다.
스페인 예술의 진수를 이해하려면 '두엔데Duende'를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와 같은 외국인으로서 그 참뜻을 알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스페인 특유의 요기妖氣나 마기魔氣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두엔더가 스페인 음악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재미잇는 일화가 있다. 어느 플라멩코(flameneo, 스페인 남부의 집시적 요소가 강한 민속음악) 기타의 대가가 술집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데, 어느 손님이 "참으로 잘 치기는 하는데, 두엔더가 없다!"라고 혼잣말로 지껄였다. 두엔더가 없다는 것은 플라멩코 음악가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에, 기타리스느는 화가 나서 구둣발로 테이블 위에까지 뛰어올라 기타를 쳐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손님은 "이제 두엔더가 제대로 나온다,"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조차 외래어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는 영어의 '테이스트taste'는 본래 '맛'이라는 뜻을 갖지만, 철학 용어로 되면 '취미'로 번역되고, 심미적인 용어로는 '품위'나 '아취'로 번역된다. 그러나 영· 미인들이 예술을 감상할 때 사용하는 테이스트라는 말의 참된 뜻은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불란서 사람들은 예술작품에서 흔히 '에스프리'를 찾는다. 에스프리는 영어의 스피리트sprit와 같이 라틴어 '입김spiritus'에서 유래된 말이데,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정령精靈'으로 번역된다. 예술에서의 에스프리는 생명력 즉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 정신적인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에스프리가 잇어야 한다고 불란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여섯 사람의 독창자를 위한 '슈티뭉Stimmung이란 작품의 뜻은 무엇일까? 독일 사람들은 슈티뭉은 슈티뭉이라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외국어로는 도저히 번역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리 또는 조율調律의 뜻에서 발전하여 분위기 · 기분 · 정취 · 정조情調의 뜻까지 지니게 된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독일어이다.
한국의 '멋'도 외국어로 번역돌 수 없고 다른 민족이 그 어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멋은 어떤 대상을 접했을 때 우리의 감정이 대상으로 이입移入되어, 그 대상과 더불어 움직이는 미적인 리듬이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멋은 아름다움과는 별개의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것과 일체화되어 움직이는 마음의 리듬이 생기지 않으면 멋있다고 할 수는 없다. 다이아몬드의 휘황한 빛이나, 그랜드 발레의호화로운 무대,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을 보고 분명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반드시 멋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쉰 목소리로 꺾어 넘어가는 어느 대폿집의 소박한 민요 가락에서도 우리는 곧잘 멋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형식적으로 완벽하거나, 극히 성스럽고 장엄하여 우리에게 위압적으로 군림하는 대상에서는 멋을 느끼기 힘들다. 이처럼 위압적인 것에 우리의 감정이 이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것, 그리고 친밀감을 주는 것에서 우리는 보다 쉽게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음악 중 궁정적인 아악을 하는 음악가들 사이에 멋은 별로 사용되지 않던 말이다. 장엄하고 정중한 아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할 때, 멋이라는 말은 적합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음악은 사심을 버리고 관조하는 태도를 가져야 그 진미를 알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민속악에서는 멋이 이를 데 없이 중요하게 된다. 그러나 민속악에서도 멋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멋에도 몇 개의 차원이 있다. 저급한 멋은 '겉멋' 또는 '신 멋'으로 불린다. 사물의 본연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멋이 아니라, 대중적인 인기를 위하여 그렇듯하게 꾸며진 멋을 겉멋이라 한다. 반대로, 멋을 오히려 소외함으로써 내면적으로 또 다르게 생겨나는 은은한 맛을 '속 멋'이라 한다. 속 멋은 사물의 깊은 맛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차원의 멋이다. 민속악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그 사람 야단났군. 속 멋이 단단히 들렸으니…"라는 역설적인 찬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속 멋을 안다는 것은, 고독과 시련에 찬 참된 예술 세계를 알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약 30년 전의 일이다. 당시 고전 대가로 꼽히던 김보남金寶男 선생에게 짐짓 고전 무용에게 누구를 최고로 보느냐고 물은 일이 있다. "글쎄…임춘앵(林椿鶯, 창극의 대가)과 김소희(金素姬, 판소리 명창)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분들은 직업적인 무용가가 아니고, 이분들의 춤을 실제로 본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사실은 승무나 살풀이 같은 민속무용에서 어느 무용가도 따를 수 없다고 봅니다. 임춘앵의 춤이 멋이 있다면, 김소희의 춤은 맛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김보남 선생의 이러한 답변이야말로 참으로 멋이 있다고 감탄했었다.
멋이 감정이입에 의하여 대상과 어울리면서 느끼는 리듬이라는 점에서 동적인 성질을 갖는데 대하여, 맛은 대상을 우리 내면에 관조함을써 이루어지는 정서적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중동靜中動이라는 말에서 짐작되듯이, 궁극적으로는 멋은 맛을 지니려 하고, 맛은 멋을 지니려는 경향을 갖는다. 이렇게 볼 때, 임춘앵의 춤이 멋이 있고, 김소희의 춤이 맛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절묘한 평이다.
멋은 맛을, 맛은 멋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역시 멋은 멋이고 맛은 맛인데, 그 미묘한 어감을 어찌 속 멋이 든 사람이 아니고 알 수 있겠는가.
황병기|(1936―2018) 서울출생, 국악작곡가, 가야금명인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