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7만부나 찍은 의인소설... YS엔 득, DJ엔 미안했다
이문열, 시대를 쓰다 <17> 소설가의 정치적 발언
갑자기 쓰게 된 '오디세이아 서울' 비싼 독일산 볼펜을 화자로 내세워 기사 참조해 그날의 한국사회 얘기 칼럼같은 소설을 쓰겠다는 게 포부
지역감정 자극 않으려 조심했지만 소설에 초원복국집 사건 썼다 말썽 '왜 작가가 정치발언하나' 묻는다면 답은 '정치와 무관한 소설은 없다’
내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이야기꾼이라는 호칭도 친숙한 데, 문학평론가 유종 호 선생이 처음 사용했다. 선생이 내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금시조'(1983년)의 해설에서 '능란한 얘기꾼의 솜씨가 돋보인다고 한게 시작이었다. 이후 저널리즘이 ‘시대의 이야기꾼' '탁월한 이야기꾼', 심지어 '역사고전 이야기꾼'으로 변주하면서 이야기꾼은 당연한 수식어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이야기꾼 호칭, 기분 나쁜 것 없다”
이야기꾼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비하의 감정을 담아 부정적으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이야기는 오히려 소설을 포괄하는 더 큰 범주다. 세상에 이야기 아닌 게 있겠나. 처음과 끝이 있고, 그 안에 전개와 반전이 있으면 곧 이야기이고 스토리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 살이라는 것이 참으로 난해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자기 문제의 답이나 해결 을 보았다는 기분이 들거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래서 틀렸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선지 나는 소설가보다 작가라는 직함이 더 편했다. 소설가가 직업적인 전문가 같은 느낌이라면, 작가는 언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되는 자유와 유보를 가진 직업 같아서였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세상이 참 이야기로 넘친다고 생각하니 내게는 역사든 한 사람의 삶이든 거기서 무얼 줄여 버리고 무얼 들어내면 쓸 만한 이야기가 되느냐가 문제였다. 다음에는 이런 이야기 한번 써봐야지 하는 것이 늘 있었다.
199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오디세이아 서울'(1.2권)은 갑작스럽게 쓰게 된 작품이었다. 신문사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이 덜컥 연재를 수락하는 바람에 최소한의 사전구상 없이 소설을 써나 가야 했다.
이왕이면 여태까지와 다른 소설을 써보자는 생각은 있었다. 마침 동화작가 마해송(1905~1966) 선생의 장편 동화 '모래알 고금'이 떠올랐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경향신문에 500회 넘게 일일 연재됐던 '모래알 고금'은 '고금(古今)'이라는 이름의 모래알이 국민학생 아이의 주머니에 들어가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대의 시대상을 드러내는 형식이었다. 특히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다음에는 노골적으로 이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고가(高價)의 몽블랑 볼펜을 화자로 내세운 의인 소설(擬人小說)을 써 보기로 했다. 1992년 한 해 서울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입심 좋게 그려낸다는 생각이었다. 이방인의 낯선 시각과 가치관에서 바라보면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어딘가 왜곡돼 있는 우리 삶의 구석구석이 드러나리라는 게 독일산 볼펜을 화자로 선택한 이유였다. 볼펜은 졸부와 도시 빈민, 운동권 대학생의 손을 차 례로 거치며 당시 사회 문제였던 과소비풍조, 선거 때의 지역감정,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민감한 한국인의 심리 같은 것들을 전한다. 매일 연재하며 그날 그날의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려 다 보니 2~3일 치 신문 기사를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면서 시사 칼럼 같은 글을 쓰겠다는 포부였다.
'오디세이아 서울'은 가볍게 쓴 희필戲筆
최신 사건들에 문학적 수식을 가한다는 소설의 틀은 일종의 작가 편의주의이기도 했다. 작가는 소설의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소설의 흐름을 세상에 맡기는 식이었다. 그러니 소설을 하나로 꿰는 줄거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오디세이아 서울'은 가벼운 글, 희필이었다. 다만 지금 다루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사건이 터지면 문제였다. 그럴 때 이야기를 전환하는 일이 상당히 골치 아팠다. 나중에 책으로 묶어내며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을 정도로 당시에는 고민이 깊었다.
"진심을 밝히면 나는 이 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느꼈었다. 종래와는 다른 소설적 구조와 서술 방식으로 드러냈던 내 문학적 야심의 참담한 시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으로 출간되자 반응이 뜨거웠다. 민음사는 1993년 3월 초판을 7만 부나 찍었다. 지금보다 소설이 잘 팔렸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소설 초판은 5000부를 찍던 시절이다.
평단은 따가웠다. 생전 내 소설을 다루지 않던 창작과 비평이 여름호에 비판적인 리뷰를 실었다. 문학평론가 이성욱이 쓴 '좌초한 오디세이아의 모험'이었는데, 리얼리즘입장에서의 비판이었다. 문예중앙 여름호에 실린 신정현 당시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 턱없이 신랄하다고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러자 일부 일간지와 주간지가 “그동안 이문열 소설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비판해 왔던 평론가들이 이번에는 문학성을 두고 포문을 열었다”고 기사들을 써댔다.
소설을 연재한 1992년은 선거의 해였다. 우선 3월 총선이 있었다. 다분히 선거를 의식하며 쓰게 됐다. 특정인을 편들어 당파성을 드러내는 게 내게 이로울리 없었다. 특히 지역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연말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12월 15일 불거진 '부산 지역 기관장 모임' 사건에 대해 소설에서 참견한 것이 역시 말썽이 됐다. 전 법무부 장관 김기춘씨가 부산시장· 부산지검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 현직 기관장들이 참석한 초원 복국집 조찬 모임에서 “지역감정이 유치한지는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는 긍정적”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고 발언한 녹취록을 국민당 김동길 선거대책위원장이 공개한 파장이 컸다. 민자당의 부산 출신 김영삼 후보를 돕는 관권 개입이라고 야당이 들고 일어났다. 나는 소설 지면을 빌려 공식적인 회의가 아니었을 뿐더러 발언 내용도 사담 수준이었다고 깎아내렸다. 장교 몇 명이 아침 먹으며 어떤 후보를 돕자는 사적인 논의를 했다고 해서 그걸 군부회의라고 할 수 있느냐고도 했다. 참하게 욕을 얻어 먹었고 나중에 강준만 전북대 교수로부터도 한 소리 들었다.
소설의 그런 언급이 YS에게 득이 되긴 했을 것이다. YS가 왠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같은 독학자 처지여선지 감정적으로 더 잘 맞는 건 실은 DJ였다. 소설을 그렇게 써서 DJ에게 미안한 느낌은 있었다.
2006년 말 출간한 세 권짜리 장편소설 '호모 엑세쿠탄스'도 노골적인 정치적 견해를 표출했다고 해서 말이 많았다. '한야 대회'라는 이름의 집회에, 한직으로 밀려난 안기부 대북 파트 등이 뭉친 삼치회(三癡會), 퇴역 장성 모임인 오천사 낙성(落星)분회 등이 참석해 참여정부의 대북포용정책, 그에 따른 주적 의 부재 상황 등을 비판한 대목이 반발을 불렀다. 2007년 대선까지 1년이나 남았는데도, 14년 전 '오디세이아 서울' 일을 거론하며 '이문열이 활동을 시작한 걸 보니 또 선거철인 것 같다'고 지적한 일간지도 있었다.
'호모 엑세쿠탄스'는 '사람의 아들' 이후 20여 년 만에 초월적인 존재를 소설에 끌어들인 작품이었다. '처형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 '엑세쿠오르 (exsequor)'를 변형시켜 소설 제목을 만들었는데, 인간에게는 선신(善神)이든 악신(惡神)이든 세상일에 간섭하려는 초월적 존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성격이 있다는 가설이 출발점이었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영역과, 구원이나 해방을 내세우는 종교 영역이 갈수록 겹쳐 보이는 현상을 그리기 위해 친북 좌파 세력을 재림 예수 반대편의 적(敵)그리스도 무리로 상정한 것이지 단순히 참여정부와 386세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봤다. 민감한 내용이 정치적으로 소비됐을 뿐 한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서평 한 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소설책을 낸 게 아니라 또 다시 사회적·정치적 사고를 쳤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호모 엑세쿠탄스 386세대 비판목적 아냐
2009년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 '1Q84'를 출간했을 때 '호모 엑세쿠탄스'를 다시 살펴보게 됐다. 그는 나이도 나보다 한 살 아래고, 공교롭게 같은 1979년에 등단했다. 해외 진출 시기도 비슷했고, 외국의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적도 있다. 종교와 정치, 공간이동 등 내가 '호모 엑세쿠탄스'에 서 다뤘던 소재들이 '1Q84'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지향점은 아주 다른 소설이었다.
내 소설 가운데 현실 개입이 두드러진 작품들을 두고 문학평론가 이동하씨가 '시론소설(時論小說)’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어떤 시대적 쟁점에 관한 특정의 주장을 펴고자 하 는 목적이 압도적인 소설'이 시론소설이라고 했다. 어떤 작품들은 예술가의 자리에서라기보다 지식인의 입장에서, 칼럼니스트가 칼럼 쓰듯 내 주장을 펴는 게 목적인 것 같다는 얘기였다.
글쎄, 그런 소설은 극히 적다고 생각한다. 100편 중에 한 편 정도나 될까. 목적성이 지나치면 글에 힘이 없어진다. 쓰면서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전에도 밝혔지만, 왜 작가가 자꾸 현실 정치를 발언하느냐고 묻는다면 뚜렷한 답은 있다. 세상에 정치와 무관한 소설은 없다. 정치적 무관심도 하나의 정치적 견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