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합리적 의식 세계와 비합리적 무의식 세계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사말적인 이해관계를 호혜적 관계망 속에서 하나의 협력 관계로 올바르게 정립하여 상호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삶의 과제이다. 의식의 중심부에 이성의 밝은 불을 켜 놓고 자신의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하지 않으면 이기로 인해 의식의 불은 희미해 지게 되고, 의식이 희미해 지게 되면 근시안적 이익에만 집착함으로써 소탐대실의 우를 범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사람은 무릇 대범하고 멀리 보는 안목이 필요하지만 이기가 시야를 가리게 되면 멀리에 있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으로 인해 인간 관계나 주변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인지력과 자각력을 상실하는 오류에 봉착하게 되면 큰 기회는 썰물처럼 슬며시 빠져 나가게 된다. 목표는 장기적, 거시적 방법론을 확립하지 못하면 표류하게 되는 것은 상식이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상호 발전을 위해서 희생과 양보와 협조가 전제되어야 하며, 양자 간 이해의 충돌로 인해 어떤 논쟁이 생겼을 때, 어느 쪽에서 양보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논하려 할 때, 때로는 논리의 타당성이 아니라 관계적 측면에서 상대에게 조금의 손해를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으로 귀결 될 때가 있다. 이재에 지나치게 밝으면 이해관계에 대한 비타협성으로 인해 신뢰를 잃게 되고 논리적 타당성을 지나치게 앞세우고 인간 관계를 소홀이 하게 되면 작은 이익에 매몰되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잃는 자충이 되는 것은 삶에서 반복되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옛말에 '축록자불고토'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현실에 적용해 보면 장사꾼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쫓고, 사업가는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작은 이익은 미련없이 양보하고 미래에 있는 더 큰 이익을 쫓는다. 목표와 명확함, 이것은 삶에서 선결되어야 하는 지향점이다. 그러나 그 목표와 명확함이 인간 관계와 충돌하거나 배려가 결여된 이기의 끈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라면 계산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함이다. 삶에서 이익의 기회는 인간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기회는 언제든지 만들 수 있지만 인간 관계는 신뢰의 뿌리가 뽑히게 되면 고사한 나무처럼 다시 회복이 불가능하게 된다. 신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인데, 이재에 밝은 소인배는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당장의 이익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한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면 불필요한 계산에 종속되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나는 내 삶의 목표가 단순히 돈벌이로 귀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나의 길을 변함없이 가기를 원한다. 한 우물을 깊이 파는 것은 시야가 좁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넓은 안목으로 먼 미래를 보기 때문이며, 현실적인 근거나 논리적인 귀착점에 의한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본능적 이기를 부정하면 발전의 재료가 소진될 것이고, 반대로 인간 관계를 소홀히 하고 이기의 정당성을 용납하게 되면 스스로 자기 기반을 붕괴시키는 화를 자초하는 것이다.
삶의 속성은 희생의 대가 없이 어떤 목적지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기와 이타는 양날의 칼이되어 언제나 자신을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