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류자명(柳子明)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894년 1월에 현재 충주시 이류면 영평리의 한 농가에서 3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이름은 흥갑이고 학생 시절 본명은 흥식이며 호는 우근(友槿)이다. 독립운동을 하며 이름을 자명으로 바꾸었다.
소년시절 부친 유종근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등 한학을 공부했고 충주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14세 때인 1907년 항일의병운동을 목격했다. 충주·제천 일대는 의병대장 류인석의 본거지로서 일본군이 의병 소탕을 명분으로 초토화작전을 한 곳이었다. 이 사건은 어린 류자명이 일본이야말로 조선의 적임을 확실하게 인식한 계기가 됐다. 1910년 11월 열일곱 살이 됐을 때 부모의 권유로 이난영이란 처자와 결혼했다. 졸업 후 농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1912년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에 있는 간이농업학교의 교원으로 취직해 교무주임으로 일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자 그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교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졸업생 환송회를 열어 집회를 갖고 재학생들을 합세시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충주경찰서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보통학교 동창생의 사전 정보제공으로 서울로 피신하게 됐다.
서울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연결됐고 그해 6월 상해에서 온 조용수를 만나 함께 상해로 갔다. 상해에 도착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서로 일하게 됐다. 의정원의 일상사무를 맡아 보면서 회의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하니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
이 시기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역사학자 신채호였다. 신채호와 그는 너무 늦게 만났다고 개탄할 정도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으며 평생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또 한 사람은 임시정부 법무부에서 비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김한(金翰)인데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쳐 줬다.
신채호와 김한, 아나키스트
1919년 12월 그는 상해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심했다. 좀 더 실천적인 행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애국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힘을 썼다. 이 무렵 그는 일본에서 들여온 잡지와 서적을 탐독했는데 그중 일본어로 번역된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 <한 혁명가의 회상> 등의 저작물을 읽고 아나키즘에 심취해 사상적 전변을 하게 됐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계급투쟁론에 동의할 수 없고 계급이나 이념을 초월해 인류 전체의 평화와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봤을 때 크로폿킨의 사상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는 아나키스트로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언론에 발표했다.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와 조선일보에 투고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1921년 3월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체포됐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1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후 그는 다시 중국으로 2차 망명을 꾀했다. 자금이 없자 부친과 가족의 도움으로 여비 200원을 마련해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 신채호를 만나 역사에 대해서 배우고 이회영의 집에서 기거하며 1924년에는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에도 참가했다. 이후 그는 천진으로 가 조선인 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이사회를 맡아 3·1 운동 기념행사와 안창호 초청강연을 개최했다. 이 무렵 상해에서 천진으로 온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김원봉은 그에게 의열단의 통신과 연락, 선전과 교육 업무를 책임지도록 했다. 의열단의 핵심 참모가 된 것이다. 1922년 3월 황포탄 의거에서 오발로 미국 부인이 사망하고 임시정부와 공산주의자들이 의열단 활동을 거세게 비판하자 이에 이론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에 류자명은 김원봉에게 평소 존경하던 선배이자 스승인 신채호를 추천했고 두 사람은 북경의 신채호 집을 찾아가 선언문 집필을 의뢰했다. 이후 신채호가 상해로 와서 의열단 비밀사무소에 한 달간 합숙하면서 집필한 선언문이 <조선혁명선언>이었다. 이 선언문은 강렬한 민족주의와 동시에 파괴가 곧 건설이라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데 이는 류자명이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인쇄돼 조선은 물론 중국 각지와 러시아령·일본·미주지역에까지 널리 유포됐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의열단 단원이 1년 만에 150명 규모로 확대됐다고 한다.
이후 의열단은 북경과 천진에서 주로 활동하며 서울 도쿄 만주 등지에서 대규모 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3년 3월 서울에 잠입된 36개의 폭탄이 압수되고 단원 18명이 전원 검거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에 반입하려 한 폭탄 50여개도 일경의 추적을 받아 입수되고 그해 9월 관동대지진의 발생해 다원 다수가 희생돼 불발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학살에 대한 의열단의 응징은 김지섭의 도쿄 황궁폭탄 투척 사건으로 나타났다.
의열단원, 나석주 의거 지원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다수의 의열단 간부들이 암살 파괴 행동이 큰 희생을 내는 데 비해 성과가 없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됐다. 김원봉과 19명의 간부진이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아 군사조직을 만들기로 하고 1925년 8월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러 떠나자 류자명은 홀로 의열투쟁 노선을 고집하고 실행하였다.
그가 의열단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실행한 일들로는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를 처단하고 1926년 12월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의거를 들 수 있다. 나석주 의거는 김구가 나석주를 추천하고 김창숙에게 군자금을 대어 무기와 폭탄을 구입하고 류자명이 나석주를 만나 거사를 계획해 이뤄진 거사였다. 자명은 그의 거사 소식을 듣고 글을 써서 발표했다.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중국 정세가 어지러울 때 1928년 무한에서 의열단원 10명과 함께 중국 공안국에서 공산주의자란 혐의로 체포해 무한 위수 사령부에서 6개월간 구금됐는데 한인 지도자들이 항의공문을 보내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된 후 그는 상해로 와 중국 호남성 출신 아나키스트인 광호생이 설립한 입달학원에서 농업과목과 일본어를 가르치며 교사로서 생활하게 됐다. 이곳은 조선과 중국,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만남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 있으면서 그는 유기석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이회영의 추천으로 의장이 되었다. 연맹은 중국인 동지들과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직접 행동대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1933년 3월17일 상해의 육삼정이라는 음식점에서 주중국 일본대사 이리요시 아키라와 중국 남경 정부의 외교부장 왕정위가 비밀리에 회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서로 자원하는 바람에 제비뽑기를 해 백정기와 이강훈이 뽑혔다. 류자명은 매일 아침 이들을 찾아가 식사를 같이하며 격려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밀정의 보고로 사전에 이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이후 밀정을 처단하는 일에 주력했다.
남화연맹은 1936년 1월부터 매월 남화통신을 발행했으며 민족전선의 통일과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남경에서 조직을 개편해 조선혁명자연맹으로 조직을 개칭하고 류자명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조선혁명자연맹은 정화암·유기석·유림 등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이었다.
그는 이후 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창설시 4인 지도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윤세주와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로 활동했다. 1942년 임시정부에 참여해 학무부 차장을 역임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하며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뒤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해방 이후 귀국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그는 농학자로서 제2 인생을 살게 됐다. 대만으로 건너가 농업시험소에서 4년 있다가 홍콩을 거쳐 귀국하려 했으나 출항하기로 한 날이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6월25일이어서 포기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에 호남성 부성장이었던 정성룡과 호남대학 교장이었던 이달의 초청으로 대학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그는 호남농업대에서 학자로서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하고 농업기술의 혁신을 통해 중국 농업현대화 주역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3천여명의 제자를 기르며 존경받는 삶을 살게 돼 문화대혁명의 광풍도 비켜 갈 수 있게 됐다.
1957년 전후 농업현대화가 시급한 북한의 초청을 받아 북으로 갈 생각을 했으나 이를 안 중국 당국의 만류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도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재 호남농업대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있고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후학들은 지금도 그를 추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류자명은 1985년 92세로 작고할 때까지 평생 고향과 조국을 잊지 못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의 산천 위에 솟아오른 달을 그리워했다. 그는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로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만일 남과 북이 민족대단결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 하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 노세극 직접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1978년 북에선 그에게 3급 국기훈장을 수여했고 남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고 2002년에 대전 현충원에 유해를 모셔와 안장했다. 중국 호남성에서는 그의 서거 후 1996년 호남 과학기술의 별이란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한 혁명자의 회억록>이란 저서를 남겼다. 그는 중국에서 오래 살며 생을 마쳤지만 끝까지 중국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아나키스트로서 진정한 민족주주의자였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자였다.
노세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