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29.
Q.
신부님, 지난주에 칼 라너의 <은총의 체험에
대하여> 라는 글을 소개해주셨는데요~ 9번째.. 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계속 이어갈까요?
열번째, 사랑할 능력이 없어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열한번째, 누군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에 마음속 깊이는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싶은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할 능력이 없을 때 울어 본적이 있는가.
열두번째, 혹시 가족 안에서 혹시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 정말 사랑하고 싶은데 그 사람 하는 행동이나 그 사람 하는 말이나
그 사람의 어떤 것 때문에아니면 그 사람이 나한테 주는 상처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마음의 문이 닫힐 때 절망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정말 받고 싶을 때 특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을 때에 그 사람이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절망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Q.
네... 신부님 말씀 들어보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이
주제에 대해서 정리를 좀 해주시겠어요?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매듭을 풀어
주는 열쇠라고 봅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는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 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 안에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이 한 축이고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내면의
소리가 또 다른 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축의 긴장관계에서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두 축이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축은 우리 삶 안에 샛기줄 처럼 꼬여서 끊임없이 긴장관계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과하게 되면 불안정해 진다고나 할까요. 이 긴장관계가
잘 유지될 때 우리는 자신을 잘 쳐다볼 수 있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밝은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자에
밝을 명(明)
은 날일(日)와
달월(月)
자가 합성되어 있습니다. 밝음이라는 것은 태양과 달이 어우러져 조화가 이루어 질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밝음이 나오기 위해서는 빛 하나만으로 혹은 어두움 하나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두일 합쳐져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고 있는 빛과 어두움 두 축의 긴장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현재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제거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인정하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함께 가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여정은 평생을 두고 하는 것이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내면화 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Q.
신부님, 우리 모두 자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신부님, 매듭을 푸시는 성모님.. 이 시간을 통해서
삶의
매듭을 하나하나씩 풀어보고 있는데요..
그동안
다양한 주제로 청취자들과 만났습니다..
그동안의
내용을 정리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일년
넘게 방송을 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매듭을 풀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일년이
금방 지나 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지금까지 한 방송의 내용을 정리해 보는 시간들을 가지겠습니다. 내용을 정리하면서 반복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체 주제는 우리는 우리의 매듭을 어떻게 쳐다볼 것이며 또한 어떻게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느냐 하는 주제로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이
정리의 근본적인 개념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이런 시각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느냐 아니면 보여지는대로 보느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 타인,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즉 자기의 뜻대로 보느냐 아니면 이것들이 있는 그대로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강조한 부분입니다.
Q.
신부님, 보고 싶은 대로 보느냐 아니면 보여지는 대로 보느냐 참 의미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정리를
어떻게 시작할까요?
먼저
마르코 복음서 2:1-12절 말씀을 들을까요!
유선희님께서
읽어 주시겠어요!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애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편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
말씀에서 한 치유사건을 보는 예수님, 군중, 중풍 병자, 율법학자의 모습은 각자 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살펴보면서 매듭을 우리가 어떻게 쳐다보아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Q.
치유사건에 나오는 인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신선한데요? 그럼 어떤 인물부터 살펴볼까요?
먼저
군중들의 모습을 살펴 볼까요! 군중들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말을 듣고 몰려 들었고 예수님의 기적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12절에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서 전체에서
보면 군중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자신들이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그냥 예수님께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계기였던 예수님께 사로잡혀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신앙생활의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세례를 받고 별로 느낌이 없고 아무도 자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고 해서 바로 냉담을 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는 냉담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어쩔 수 없이 결혼 때문에 세례를 받고 바로 냉담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 그냥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기도와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냉담을 하는 사람입니다.
여섯
번째,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여기저기 좋은 피정과 강의를 듣고 다니며 귀만 고급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일곱
번째,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봉사활동도 하고 그림자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간혹 자신의 신앙생활에 의혹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유선희님은
어떤 유형에 속한다고 보십니까? 혹시 또 다른 유형이 있을까요?
대부분
우리는 이 유형 하나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유형에서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면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교리로 배우고 교회법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만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때로는 냉담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이 보여지는 대로 하느님을 쳐다보게 되면 우리의 영성과 신앙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구현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매듭을 풀 수 있다고 봅니다.
Q.
신부님,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이 보여지는 대로
볼
수가 있나요?
먼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보여지는 대로 보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
한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고 마침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지상으로 보내시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과 당신의 모상을 가지고 있는 이 두 축이 잘 어우러져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성을 깨고 인간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신성과 인간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우리에게
하느님이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삶인 부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따라가도록 끊임없이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지요.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없애 주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는 하느님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의 매듭이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