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야고바형제회 트레커들의 성지순례와 트레킹 2012년 일정은 오늘로써 마지막회차입니다. 그 동안 1월에는 명동성당 - 서소문 - 약현성당- 당고개성지, 2월에는 남한산성 성지, 3월에는 마재성지, 4월에는 양근성지, 5월에는 천진암성지, 6월에는 홍천 양덕원
물굽이 작은형제회 수도원, 7월에는 순수 트레킹으로 춘천 청평사, 8월에는 오봉산과 포르치운쿨라 참석차 산청 성심원, 9월에는 구산성지, 10월에는 하우현성지, 11월에는 연풍성지와 문경새재 트레킹, 그리고 손골성지 다녀왔습니다. 12월은 2012년 한해동안 다녀던 성지순례에 대하여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절두산 , 새남터, 용산신학교 교사동, 성당, 용산성당내 성직자 묘역, 왜고개 성지를 찾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15세기 로마 교황청에서는 스폐인과 포로트갈 두 나라에게 보호권을 주어 많은 무제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고 심지어 주교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막대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 종교적 권리를 지닌 포르트칼은 북경교구를 관할함으로서 조선교구 또한 북경교구에 영향을 받았으나 로마교황청에서는 프랑스에 외방전교회를 설립하여 전교사업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초창기 보호권과 파리외방전교회에 갈등으로 순조롭지 못하였으나 북경교구 관할에서 벗어나 조선교구가 독립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의 활동은 조선에서 괄목할 만큼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주문모 신부께서 최초로 순교하신 이 후로 (당시 주문모신부는 보호권 관할 아래에서 활동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에서 활동하시다 순교하신 성직자는 모두 13명이십니다. 초대 조선교구장이신 브르기웨르 신부님을 시작으로 순교하신 12분의 성직자들은 조선에서 전교를 통하여 천주교의 틀을 세우셨습니다.신학대학을 세우고, 사제를 양성하며 천주교의 발전을 꾀하다. 결국 갈메못과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하십니다. 특히 새남터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10분과 보호권아래 사제 주문모신부님을 포함하여 11분의 사제가 처형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증거하는 일에 고귀한 생명을 받치는 순교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를 만들면서 전교 원칙을 교황청에선 세웁니다. 전교지에 뼈를 묻어라, 사제를 양성하고
신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토록하라 등등 이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서양사제이면서도 순교 후 한국성인으로서 인정받고 추앙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성인 103위 성인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10분의 성직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신도 92명은 고관대작이었던 승지부터 노비신분까지 다양한 신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조선 최초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포함하여 93명이 한국 토착 순교성인입니다. 그래서 103인의 성인이 한국성인이 되시게 된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시는 순교성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자취를 찾아 마음으로 새기며 거룩함을 체험하기 위하여 12월 성지순례를 절두산, 새남터, 용산신학교, 용산 성직자 묘역, 왜고개 성지를 순례하는 일정을 잡은 것입니다.
절두산 성지는 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던 명승지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머리가 잘려 순교하였다하여 절두산이란 지명으로 바뀐 곳입니다. 서울교구에서는 1967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과 박물관을 준공하였으며 이 후 1997년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시설로서는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성인 유해실, 형구형틀 체험관, 노기남 바오르 기념관, 한국천주교 박물관, 이 있습니다.
합정역, 2호선과 6호선 환승역, 처음 찾는 이들에게는 동선이 길고 7번출구를 찾아 나서기에 쉽지 않은 곳입니다. 저는 충정역에서 횐승한 후 합정역에서 내린 후 6호선 환승장소로 내려선 후 다시 에스커레이터를 이용하여 7번출구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나오자 신명희 필로메나 자매님께서 혼자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김성곤 요셉 형제님 부부께서 오시는 것을 시작으로 남성구역장이신 김종식 파스칼형제님이 도착하셨고 그 뒤를 이어서 야고바형제회 왕 형님들이신 이주완 에로니모 형제님과 오상걸 도미니코 형제님들께서 오셨습니다. 노구를 이끄시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시는 모습에서 저희들은 늘 감명을 받게 됩니다. 함께 동행하신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도착하신 형제, 자매님들 숫자는 모두 29명, 그리고 김성곤 요셉형제님께서 활동중이신 카돌릭 보이스카웃 지도 수녀님께서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성지관리소측과 9시30분 약속이 되어 있는 관계로 합정역을 출발하여 성지사무실에서 오늘 성지 설명을 해 주실 학예사 자매님과 만나 설명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예 봉사자 자매과 함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광장 앞에서 시작기도를 함께 받치므로서 성지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순교 현양비.
박물관으로 이동,
방명록에 재속프란치스코 서울지구 야고바형제회를 기입한 후
박물관 관람이 시작되었습니다. 실내에서 촬영이 금지된 관계로 이곳까지만 촬영을.......
절두산 성지 기념관 처마 사이로 보이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 흰연기를 보는 순간, 이 부근에 있던 청랑정이란 별장이 생각났습니다. 옛적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단편소설, 유진오박사가 집필한 단표소설입니다. 이조말 대원군 뜻에 따라 쇄국정치에 힘을 보태었던 사람의 별장 청량정에서 어린적 기억을 살피고 성인이 되어 그 곳에 찾았던 소회를 담담하게 밝히는 내용입니다.
엣적에는 바닷물이 밀려오면 당인리까지 짠내음이 났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뱃길이 열려 있을 때는 각종 어물전이 성시를 이루고 육젓이 난전을 이루며 마포나루는 그야말로 어전과 젓갈전이 성시를 이루던 마포나루였습니다. 화력발전소 굴뚝연기를 보는 순간 청량정기가 떠 올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트레킹 날이 다가 오면 당일 일기예보에 무척 신경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눈과 빙판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 긴장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겨울비가 내려 얼음과 눈을 녹여 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야고바 트레커가 가는 날은 언제나 일기가 불순하다가도 정작 그날이 닥치면 쾌청내지는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날씨 조건을 주십니다. 오늘도 절두산에 도착하자 밤새 내리던 비는 멈추고 봄 날씨처럼 온화한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은혜가 아닌가 합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언사를 전해드렸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다가 오는 새해에 대한 언약이 주를 이룬 기도였습니다.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초처럼 그러한 신앙심 안에는 사랑과 자비심이 항상 웅축되어 있어야 하고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삶처럼 우리들도 가난, 겸손, 단순함의 영성 빛을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입니다. " 서양 오랑케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 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노라"
사실 김대건 신부님에게 조선의 조정은 관대했습니다. 세계지도를 요청하고 새로운 서양학문에 대하여 김대건신부님을 통하여 받아 드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문호개방을 반 강제적으로 하려고 하자 남종삼 승지를 비롯하여 천주학과 관련된 이들은 프랑스 영국 등등을 끌어 들여 러시아 남침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결국 프랑스나 영국의 협조를 받지 못하자 남종삼과 서양 선교사들을 참수하고 더불어 서둘러 김대건신부님까지 새남터에서 참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함대는 충남 홍주에 큰 배를 정박시키고 세명의 참수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하여 항의하며 대원군 부친 묘을 파헤치는 일을 저질러 분노한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학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인 논리로 따진다면 국권수호라 합니다. 종교적 판단은 분명 순교의 역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남종삼 후예로서 남상철이란 프란치스칸이 있습니다. 재속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형제님으로서 순교자의 집안 후손으로서 천주교의 뿌리를 찾고자 부단하게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프란치시칸이신 남상철 프란치스코 형제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천주교 강학이 열렸던 강학터 발견은 없었을 것입니다. 권철신 형제와 이벽, 정약종 등등이 모여 천주실의 등등을 기본으로 학문적 강학을 열었던 주어사 터를 발견하신 분이 바로 남상철 프란치스코형제님이셨습니다. 주어사를 세운 해운당대사 공덕비를 발견함으로서
천진암이 발견되고 그 자리에 100년 동안 천진암 성전을 세우는 기틀이 마련된 것입니다. 남상철 프란치스코형제님께서 세우신 공로는 바로 천주교 역사에 반석입니다.
이 묘역은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하신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와우산, 왜고개, 삼성산 등등으로 안장하신 박순집의 묘입니다. 만약 이분과 부친의 노력이 없었다면 성인들의 유해를 지금처럼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결국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셨지만.....
순교자들께서 당하셨던 당시 상황을 재현하시는 야고바형제회 이국희 모니카 회장님이십니다. 갖은 문초를 당하신 후 나무 칼을 목에 걸고 옥살이를 하셨던 성인들의 생활을 체험함으로서 그 고초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절두산 성지에서 모든 일정을 끝낸 후 점심을 챙기기 위하여 절두산 성지 지하에 위치한 식당으로 내려갔습니다. 분명 사전 예약을 하였고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하였습니다. 추운겨울 도시락 식사문제를 상의하자 지하식당 이용하여도 좋다는 인가를 받았는데 막상 내려가니 그런일이 없다고.... 기가막일 일 입니다. 성지 근무자가 이런식으로 매도하니 울분이..... 그러나 용서와 배려의
화두를 놓치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독이 됩니다. 참으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다행이도 날씨가 봄날씨 수준이라 야외에서 점심 견딜 수 있었습니다. 각자 싸 오신 오신 음식을 펼쳐 놓고 나누며 먹는 음식은 항상 느끼지만 꿀 맛입니다.
식사를 끝낸 후 한강 강변 길을 따라 새남터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새남터 까지는 약 5.2km 시간은 1시간 30분정도 걸립니다. 봄 날씨같은 12월의 날씨 속에서 내 딛는 걸음 걸이는 무척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옛지명이 잠두봉인 것처럼 강변을 바라보고 있는 절벽 모습이 누에머리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무척 높습니다. 참수로서 고귀한 생명을 초개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셨던 순교성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새남터를 향해 걸어 나갔습니다.
새남터로 향하는 길, 밤섬부근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하였습니다. 행동식을 꺼내 나누고 과일을 깍아 서로서로 나누며 봄빛같은 강변에 앉아 먹는 행위는 맛의 진미를 느끼는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원효대교에 와서 순례계획을 변경하기로 하였습니다. 새남터에서 용산신학교로 이동하는 순서를 용산신학교에서 , 성직자묘역, 새남터, 왜고개 성지로 변경한 것입니다. 현재는 성심여고 교정으로 사용하는 옛용산 신학교를 찾기 위해서는 지하철 이용시 5호선, 6호선 환승역인 공덕동역과 6호선 효창공원역을 이용하는 방법과 1호선 용산역 4호선 신용산역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한 용산성직자 묘역을 함께 순례를 하려면은 후문을 이용하면 동선이 짧아 좋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후문으로 이용하여 옛신학교 교사동과 성당을 참관 후 후문 위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성직자 묘역을 참배하려고 후문을 이용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열쇠로 잠꿔버리는 바람에 다시 돌아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최초 신학교는 배티와 배론에서 찾아야 합니다. 배티에서도 그 흔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배론을 최초신학교 건립 운영했던 곳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855년 충청북도 제천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이 신학교의 태동입니다. 그 이전에도 1830년대부터 정하상과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 보내 신학교육을 받게 했지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배론 신학당은 폐쇄되는 비운을 겪은 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얻어져 1882년 21명을 폐낭신학교에 유학을 보내고 1885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엉이골에 예수성심신학교라는 교호를 사용하는 신학교 문을 엽니다.그리고 다시 1887년 3월에 용산으로 이전한 후 동년 6월9일 신학교를 개교하게 된답니다. 용산신학교가 프란치스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프란치스칸으로서 최초형제이신 장면박사께서 미국유학을 끝내고 귀국 후 용산신학교에서 재직하셨을 때 제자가 바로 노기남대주교 이십니다. 노기남대주교께서는 성직자로서 프란치스칸이 되신 이광재 신부님을 이끌어 주신 맨토셨습니다. 또한 동성상업고교 교장으로 재직시에는 김수환 추기경님을 애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런 연유가 있는 장소라 프란치스칸들에게는 각별하게 다가 오는 장소가 용산신학교입니다. 이광재 신부님 또한 이곳 용산신학교에 입학하신 후 사제서품을 받으시고 첫 임지인 풍수원 부제 생활을 하신 후 양양성당 주임신부님으로 발령받으셔서 사목생활을 하시게된 연유도 당시 임명권자가 바로 노기남 대주교님이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각별한 곳이 용산신학교 입니다.
설계자는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건축한 코스트신부님께서 담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코스트 사후에 건립된 건물이라 사망전에 만들어 놓은 설계에 의해 건립된 것인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습니다. 이전 초기에는 한옥에서 기숙하면서 교육을 하였는데 그 한옥의 이름은 함벽정이었다. 함벽정에서 바라보면 병인박해 당시 성직자들의 순교터인 새남터와 기해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평신도들이 순교한 당고개가 지척으로 다가 오는 곳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한불조약체결 후 1887년 이곳 토지를 매입한 후 1891년 4월 7일 신학교 건축을 결정하게 됩니다. 1891년 신학교 정초식을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신부들의 참석으로 갖었으며 1892년 6월25일 축성식이 있었는데 이 날은 바로 신학교 주보이신 예수성심 축일이었습니다. 1928년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성직자 휴양소, 성모병원 분원 등등으로 사용하다 1956년 성심수녀회 진출에 따라 수녀원에 양도된 곳입니다. 건물에 사용된 벽돌은 용산방 와고개 벽돌가마에서 생산된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건물전면을 단순한 적벽돌을 사용 단순한 외장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벽면 대부분을 큰 원형 아치형태 창을 만들었습니다. 학교 건물이였기 때문에 그런 형태를 설계자는 갖춘 것 같습니다. 교사동가 유사한 건물로서는 명동성당 주교관이 있습니다.
원효로 성당은 용산신학교의 부속성당으로 1899년 착공하여 1902년 준공되었습니다. 성당 건물은 언덕에 위치하여 성심학교에서 보면 3층, 수녀원에서 보면 2층으로 보입니다. 나르텍스(narthex, 현관부), 네이브(nave, 신도석부), 트랜셉(trancept, 십자형 돌출부), 엡스(apse, 聖所部) 등 아주 간결한 평면 형식이며, 정면 출입은 계단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외벽에는 회색벽돌과 적벽돌을 혼용하였습니다. 외벽을 돌아가면서 부축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2개의 부축기둥은 높이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하였고. 창문은 뾰족 아치창, 양식적으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절충하였습니다. 이곳에는 축성당시부터 1958년까지 첫 방인사제셨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모셔져 있었고 북경교구로부터 독립후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조선 초대교구장이셨던 소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셨던 뮈텔주교 유해가 거져 갔던 곳입니다. 또한 이곳에서 첫 배출된 사제로서는
강도영(姜道永) 신부
강도영(1863~1929) 마르코 신부는 서울 출생으로 고모 강 마리아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그 후 한문을 공부하던 중 블랑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83년 4명의 신학생과 함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다가 1892년에 귀국하였다.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1896년 4월 26일 뮈텔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에서 서품된 그는 그해 6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미리내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 선종할 때까지 34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하였다.
정규하(鄭圭夏) 신부
정규하(1863∼1943)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 출생으로 병인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그뒤 블랑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던 그는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26일 뮈텔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강원도 횡성 풍수원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곳에서 사목하였다.
강성삼(姜聖參) 신부
강성삼(1866~1903) 라우렌시오 신부는1882년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1892년에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 주교의 주례로 약현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부산 절영도에 부임하였다. 1898년 1월 절영도에서 경남 밀양군 하남면 명례로 옮기고 밀양, 청주(현 晋陽), 양산, 언양등 14개 공소, 500여 명의 교우를 대상으로 6년 동안 사목하다가 1903년 9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야고바형제회 트레커님들을 모시고 다니며 사진 포인트를 만나게 되면 단체사진을 찍어 드리는 일은 이제는 일상화 되었습니다. 이제는 위치와 포즈는 전문 모델못지 않을 만큼 노련해 지셨습니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파인더를 통하여 바라보는 시선과 표정들을 통하여 평화의 기운을 느끼게됩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소신껏 드리는 기도하는 모습에서 성숙된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인간에게는 아는 만큼 보이고 깨닫는 만큼 지혜를 얻으며 성스러움을 자주대하므로서 자신도 성역권에
침잠되어 평화의 기운 깃든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사실임을 저는 항상 느끼며 샷다를 누르고 있습니다.
성당 현관입구 문설주에는 위와같이 세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AK라는 뜻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뜻하는 문장으로서 미리내 석관 뚜껑에 적혀 있는 문장과 같은 뜻입니다. 신부님의(1821-1846) 출생에서부터 순교시 까지를 뜻하며 중앙에 있는 별들은 신부님께서 사제서품 후 귀국길에 올랐을 때 거친 풍랑을 만나자 성모님에게 기도를 바치는 순간 풍랑이 잦아들고 하늘에 별에 떴다하여 붙여진 바다의 별을 뜻하는 문장입니다. 또한 상단 좌측 IX JUN I I MDCCCXCIX 문장은 신학교 개교일을 뜻하는 문장이며 우측 XIV APRILIS MCM I I 은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활된 시점을 뜻하는 문장입니다. 또한 제대 양옆으로 걸린 성화는 장면박사의 친동생인 서울대 초대 미대학장을 지내셨던 장발 루토비꼬 형제님께서 그린 성화로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초상화와 유대철 성인 순교화 입니다.
시간 여건상 성직자 묘역 참관은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였습니다. 후문이 개방되어 있다면 5분 거리이지만 성심학원 울타리를 끼고 돌아가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다음 일정에 차질이 있어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