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스님의 인불사상
<1>
임제(臨濟, ?~867)스님은 선종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달마스님도 육조스님도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스님 다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빨리 돌아오셔서 임제문중에서 다시 큰일을 밝히시고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축원을 올린다. 그리고 큰스님들의 비석마다 임제스님의 몇 대 법손이라고 쓰여 있다. 그와 같이 임제스님의 안목은 높고 투철하여 아무도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임제록」에 이런 말이 있다.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라고 하였다.
다시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불교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성인을 좋아한다. 천불千佛 ․ 만불萬佛을 찾고 천보살 ․ 만보살을 부른다. 열광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천배 ․ 만배 절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있다. 아름답게도 보이지만 측은하게도 보인다. 성인이라고 해서 그토록 좋아하면 반대로 범부는 아주 싫어할 것이다. 선을 좋아하면 악을 싫어할 것이다. 증애심과 취사심이 그렇게 끓고 있으면 도와는 멀다. 불교와도 멀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지만 말라. 다만, 증애심만 없애면 환하게 밝으리라.”라고 한 「신심명」도 있다.
성인이란 단지 성인이라는 이름뿐이다. 천보살 ․ 만보살, 천불 ․ 만불이 모두 이름뿐이다. 단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이 있다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오대산을 찾아간 무착스님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몇 달 몇 년을 걸쳐 일보일배一步一拜의 고행을 하면서 찾아간다. 하지만, 벌써 틀린 짓이다.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말씀이다. 가슴이 천 조각 만 조각나는 말씀이다. 기존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저 넓은 바다의 끝없는 파도처럼 출렁대는 그 마음들을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물과 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그대들의 목전에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그것, 보고 듣고 하는 그것이다.
시간적으로 시종일관 다르지 않고 한결같은 그것이다.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래서
너무도 구체적인 그것이다. 추상적이거나 애매모호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확실한 그 사람이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이다. 그대가 참으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 그대가 참으로 성인이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이다.
<2>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스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불교다. 임제스님은 수 천 년의 인류사에 떠오른 천 개의 태양이다.
수억만 가지의 방편을 다 걷어치우고 진실만 드러낸 말씀이다. 하늘만큼 땅만큼 많은 불교의 거품을 다 걷어내는 가르침이다.
온갖 이름과 모양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속박과 구속과 저주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시원스런 해방의 묘책을 확실하게 제시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진짜 불교다. 「임제록」은 인간해방의 대 선언서大宣言書다. 그래서 일본의 어느 선사는 일본열도가 다 불에 타는 일이 있어도 이 「임제록」 한 권만 남아 있으면 된다고까지 하였던가.
<3>
조주(趙州, 778-897)스님이 행각할 때
어떤 작은 암자에서 며칠 묵었다.
떠나면서 원주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원주가 묻기를,
“어디로 갑니까?”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게송이 하나 있으니 들어보시오.”
“어느 청산인들 도량이 아니랴.
그런데 하필 오대산에 가서 참례하려 하는가.
구름 속에 비록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라도
바른 안목으로 보면 좋은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단다.
<4>
한국불교는 모두 임제스님의 후손들이다. 임제스님을 역대 조사들 중에서 가장 높이 숭상한다. 왜냐하면,
임제스님의 불교는 일반적인 불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일체의 방편과 가식과 거품을 다 걷어내고 불교의 진실만 오롯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법을 설함에 있어 결코 수준과 근기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당신 깨달으신 진리를 거침없이 표현한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절대 눈치 보면서 설법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설법은 한 토막만 들어도 속이 시원하고
백년 묵은 체증이 모두 다 내려간다.
「임제록」에 이와 같은 설법이 있다.
“불교를 공부하고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와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끌려다니면서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그와 같은 모든 것으로부터
다 벗어나서 다른 경계에 구애되지 않고 철저하게 벗어나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설법이라 좀 부연설명을 해야 한다. 여법한 견해나, 진정한 견해나, 정견正見이나, 훌륭한 지혜나 모두가 같은 뜻인데 이 지혜를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에게나 나 아닌 다른 경계에 끌려다니면서 미혹을 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임제스님의 죽이라는 말씀은 온갖 경계가 앞에 오거든 무조건 다 부정하고 끌려가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를 욕하고 나를 때리고 나를 모함하고 손해를 입히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을 흔드는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부모나 친지들이나 온갖 내 마음에 잘 맞는 대상들에게도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나로서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달리 부처님이나 조사나 보살들에게
끌려가고 흔들릴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저 부처님보다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부모나 처자 권속이나 모두가 다 나 아닌 다른 경계이며 내가 미혹을 당할 상대들이다.
다시 말해서 역경계나 순경계나 일체를 부정하고 벗어나라는 것이다. 거기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해탈이며 나는 나로서 당당하게 나의 삶, 나의 인생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내 인생이 툭 터져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부처님이나 조사나 아라한이나 그 어떤 권위나 관념들로부터도 벗어나라. 인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깡그리 부정해 버리고 끌려
가지 말라는 뜻에서 죽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조사에 대한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때려 부수라는 뜻이다. 이렇게 파격적이고 강도 높은 언어를 써도 강강强剛한 사람들은 억세고 미련하여 아무런 감동이 없다. 깊은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한 부처님이며 그러므로 “당신도 똑같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몰라서이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하자.
그리고 깊이 사유하고 명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