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나는 나무였을까?
오명옥
올해도 무심천체육공원에서 묘목 나누어주기 행사가 있다고 해서 벌써 가슴이 설렌다.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내 키보다도 더 큰 괭이를 끌고 다니며 나무 심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무와 꽃 등 식물만 보면 흥분이 된다. 도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전생에 내가 나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릴 적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봄이 되면 식목 행사에 나갔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때 폐허가 된 벌거벗은 민둥산에 나무 심기 운동이 한창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 산은 헐벗고 메말라 무성한 숲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린 나무를 심으러 가면서 ‘메아리’라는 동요를 불렀다. 나무가 없어 메아리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그 산에 메아리가 찾아오라는 의미로 노래를 부르면서 4월 한 달은 쭉 나무를 심으러 다닌 것 같다. 산 중턱쯤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심고 산 아래쪽과 밭둑에는 뽕나무를 심었다. 뽕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다. 밭둑에 뽕나무가 쑥쑥 자라니 집집마다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뽕나무 때문에 곳곳에 제사공장이 생기면서 섬유산업 발전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고사리손으로 나무를 심던 우리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고속도로 공사와 사방공사에 쓴다고 각종 씨앗을 다 받아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잔디 씨, 싸리나무 씨, 아까시나무 씨 등을 모아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 나는 주말이면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잔디 씨를 받았다. 그 시절엔 잔디마저도 귀해 아침부터 종일 할아버지 산소에 앉아 잔디 씨를 훑던 생각도 난다. 엎드려 잔디 씨를 받을 때는 볕이 너무 뜨거워 등이 타는 듯했었다. 산기슭에 나무가 없었으니 시원한 그늘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작고 까만 씨를 수도 없이 훑었지만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순간에도 편지 봉투에 가득 차려면 아직도 멀었다. 싸리나무 씨는 내가 나무를 몰라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서 품앗이 일을 하다가도 쉴 참에 싸리나무 씨를 받아다 주셨다.
산과 들에 나무를 심고 씨를 받아서 공사장 언덕에 뿌리며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때 숙제는 통조림 깡통에 끈을 묶어 손잡이를 만들고 나무젓가락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손잡이를 만든 깡통에는 송충이를 잡아넣으려는 것이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준비한 깡통을 들고 우암산으로 올라갔다. 한참 물이 올라 잘 자라는 소나무에 매달린 송충이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징그러워 쳐다보지도 못하는 송충이를 잡다가 잘못하여 얼굴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혼비백산하여 꺅~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나무젓가락을 들고 있는 오른손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깡통 속 송충이들이 꿈틀꿈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녀석들은 달아나기 위하여 다른 송충이를 밟고 올라서서 깡통 벽을 타고 오르다가 미끄러져 내리기를 반복하지만 결국 깡통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하여 손잡이 줄을 타고 기어올랐다.
팔뚝이 간질간질하여 쳐다보면 팔에 송충이가 꿈틀꿈틀 기어오르고 있어 깜짝 놀라 깡통을 집어던지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잡았던 송충이가 모두 쏟아지고 깡통은 데굴데굴 굴러 산 아래 가서 나뒹굴어졌다. 너무 놀라 울다가 웃기도 하고 밤마다 송충이들이 기어오르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산에 우리가 심은 소나무가 잘 자라게 하려고 징그러운 송충이를 잡던 일도 고운 추억으로 남아 웃음을 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 숲을 가꾸었던 내가 큰 일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 심은 나무는 50살이 넘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때 심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우거진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다.
작년 추석 때 친정 부모님 성묘하러 고향에 갔었다. 남편과 같이 플라타너스와 잡초가 우거진 초등학교 교정을 걸었다.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듯 처음에는 거센 바람으로 맞이하던 나무들이 이내 유순하게 시원한 바람을 실어다 주었다. 50여 년 전 내 손길을 기억하는지 나뭇잎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흐뭇했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조막만한 손으로 옴팡지게 흙을 파내고 나무를 심고 물을 주었던 지난날을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학교를 지나 사람들이 길을 낸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그곳에는 어렸을 적 내 뼘으로 열 뼘 정도 될듯한 아주 어린 묘목을 심었었는데 지금은 내 키보다도 아홉 배 열 배 이상 자라서 산을 지키고 있어 대견스러웠다. 가지가 늘어져 그늘을 드리우는 나뭇가지를 툭툭 치면서 남편과 숲길을 걸었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고 눈길을 주지 않아도 혼자서 씩씩하고 무탈하게 잘 자라준 나무들이 고마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만 해도 50여 년 뒤 남편과 이 길을 걷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향에 우거진 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나만 나이 먹는 것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허로웠다.
식목 행사에 참여해서 묘목도 받고 꽃과 나무로 골목 정원 만드는 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어 기뻤다. 사실 청주 근처 세종시에만 가도 주민들이 따로 공원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파트 단지 내에 나무들이 무성하다. 그야말로 아파트마다 특색있는 정원을 만들어 놓아 갈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를 가든, 녹색의 숲과 예쁜 공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동네도 골목마다 꽃과 나무를 심어 골목 공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다니 신이 났다.
행사를 마치고 한나절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들어가니 텅 빈 집에서 수다를 떨던 나무와 꽃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남편은 집에 식물이 너무 많아 이제 나무와 꽃이 집주인이 될 것 같다고 잔소리한다. 그 덕에 집안에서도 청량한 공기를 맡으면서 사는 거라고 쏘아주고 싶지만 내일 심을 주목을 생각해 말을 아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스피노자처럼 내일은 오늘 받아온 주목을 심을 대형 화분을 사 와야겠다. 한 그루의 나무가 내게 주는 고마움을 생각해 본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내 옆에 산소통을 하나 두고 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를 늦추기 위해서라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힘을 써야겠다.
첫댓글 오명옥 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