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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집사로서 선출된 후에 교회의 살림을 감당했습니다. 살림을 감당하는 사람을 집사라고 하잖아요. 교회에서도 집사가 뭘 하는 거냐? 교회 살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거기에다가 교회 살림만 감당한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돌에 맞아서 죽음으로 집사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의 반열에 올라갔습니다.
오늘 이 스데반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이 스데반은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는 겁니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을 주셔서 표적, 기사 이런 것들이 나타나 그 복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일곱 집사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에 빌립이라고 하는 집사가 또 나타나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 가운데 또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이름이 니콜라라고 하는 안디옥의 니콜라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니콜라 당을 지어서 교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 일곱 집사는 처음에 똑같이 훌륭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잘 출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고 어떤 사람은 그만 변질돼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처음 출발하는 것도 잘 해야 하지만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데반을 프랑스 말로 에티엔느라고 합니다. 성경에 프랑스 말로 번역을 할 때 다르게 나타나는 용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스테반 에티엔, 또 막달라, 마리아 할 때 그 막달라를 프랑스 말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프랑스 말로 막달라는 바로 옆에 있는 성당 이름입니다. 마들렌 마들렌이 뭐냐? 빵 이름이지요. 조금 오전 일부 예배 끝나고 누가 저에게 맛을 낸 빵을 줬어요.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틀리지 않으세요? 빵 이름인데 이 마들렌이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할 때 막달라를 의미합니다. 프랑스에 살면서 이런 몇 가지는 좀 잘 이해를 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 문제로 문제가 생겼을 때,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그 과부들이 구제를 받을 때, 헬라파가 구제에서 제외되면서 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빠졌을 때 이걸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7명의 헬라파 중심의 일곱 집사를 선출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교회 살림을 맡기고 사도들은 대신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했습니다. 각자 서로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선택하고 집중하자 교회 안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균형이 교회 안에는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팔방미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팔방미인이라도 그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하면 좋지 않습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한두 가지를 감당하고 또 누군가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또 감당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드림팀이 돼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아직 교회 내에 봉사와 헌신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최소한 한두 가지 정도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이 교회가 부응하고 주님의 몸이 성장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 봉사와 헌신에 참여함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봉사와 헌신에 참여함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신 기적이 가나 혼인잔치 기적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다 체험했어요. 그 기적의 혜택을 누렸어요.
야 보통은 포도주가 처음에 좋은 거 주고 나중에 알딸딸락 맛 모를 때 나쁜 거 내놓는데 이 집은 어떻게 갈수록 좋은 포도주냐?
예수님이 만들어주신 질 좋은 포도주를 마시는 축복을 누렸어요. 그런데 주님의 그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은 모두가 누린 게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그 집안을 섬기면서 물을 퍼가지고 나르던 하인들이 퍼가지고 가는데 자기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거예요. 성경은 물 떠다 준 사람은 알더라.
여러분 누리는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는 그것도 축복이지만 주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역사하시는 과정을 보고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더 놀라운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 내에서 이런 크고 작은 봉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거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축복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참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봉사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할 때 그걸 큰 짐을 지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에게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구나 이렇게 하고 아멘 하고 받으셔야 되는 거예요. 이쪽 동네는 아멘이 없네. 주님의 교회 내부의 일들에 참여할 때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또 이렇게 함께 서로 협업을 하면 하나님 나라의 드림팀이 돼서 더 많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아요. 누구든지 지칠 수 있어요. 목사도 지쳐요. 누구든지 목사가 될 때는요. 헌신할 때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헌신합니다.
그런데 하다 보면 지치고 나중에는 번아웃 완전히 모든 것이 소진돼 가지고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때도 있어요. 혼자 가는 사람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함께 일을 나누면서 함께 기도하면서 격려하면서 지쳐 있을 때 서로 일으켜 세우면서 가면 끝까지 갈 수가 있어요.
공동체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도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그랬어요. 멀리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함께 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20주년이 되면서 비교적 많은 분들이 고르게 봉사와 헌신에 참여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걸 짊어지지는 않아요. 고르게 참여하고 목회자들은 기도하는 일, 말씀 전하고 가르치는 일, 또 우리 집사님들 권사님들은 또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목회자보다 훨씬 잘 감당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리가 설렁설렁 하는 것 같지만은 이 교회가 은혜롭게 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초대교회 일곱 집사님들이 그렇다고 교회 살림만 한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건 교회 내에서의 활동이에요. 그 말고 이 교회 밖에서 이분들은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자가 된 거예요. 복음 전하는 거,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 주신 사명이 아닙니다. 그건 목사님 일이지 선교사님 일이지 전도자의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전문성을 따라 일하지만 교회 밖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모두가 해야 돼요. 오래 믿은 사람도 해야 되고 방금 1시간 전에 예수를 영접한 사람도 전할 수 있어요. 내가 만난 예수 전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는 거예요.
여기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도 있고 오래 저처럼 에서 부모님 태에서부터 교인이 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한번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예수 믿은 다음에 이 예수님의 복음을 몇 사람에게 전했는가? 아마 한 번도 얘기 못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러다가는 여러분 죽을 때까지 얘기 못합니다.
얘기 못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예수님이 부끄럽습니까? 예수 믿은 게 부끄러운 일이에요. 아니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하지 못하고 숨길 만큼 예수님이 내게 그런 존재인가 하는 거예요. 예수님 만왕의 왕이시고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시고 지금 나와 동행하시는 분이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분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에요. 그분을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입술을 열어서 여러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감당해야 되요.
초대교회는 누구나 이 복음 전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주님의 부탁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도 빌립도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모든 일곱 집사가 이 일에 헌신했을 거 왜 모든 평신도들이 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셔야 돼요. 하루를 시작할 때 일주일을 시작할 때 아니 1년을 시작할 때 목표를 전해야 돼요. 금년에는 최소한 몇 사람에게는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야 되겠다. 모든 걸 계획하잖아요. 뭐든지 새로 시작할 때는 다 계획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 복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획하지 않아요. 아예 계획에서 제껴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갑자기 예수님을 전했다가 무시당하고 봉변당하고 초대교회 사도들을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랬어요. 이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에요.
여러분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삶으로 전하고 입으로 전해야 돼요. 근데 더 중요한 것은 입으로 전하는 거예요. 입으로 전하고 그 전해진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이 파워풀하게 전달됩니다. 입으로는 전하는데 삶이 영 아니야 그러면 이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려. 아니 당신 같은 사람이 믿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믿겠어?
그래서 우리가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복음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해야 돼요. 그래야만 그 복음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열심히 성자처럼 저는 사는데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는 벙어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삶으로도 예수님을 증거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믿은 다음에 그 예수님을 입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입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이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다 달라요. 돌밭도 있고 길가도 있고 풀밭도 있고 옥토도 있어요. 옥토에 떨어지면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밭에 대해서 걱정할 거 없어요.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돼 입술로 전해서 그 마음 밭에 뿌리면 거기서 싹이 나고 열매 맺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에요.
그러다가 4분의 1 4명 중에 한 사람은 옥토가 있어 거기에 떨어지면 영적으로 대박 나는 거예요. 변화되고 천국 백성되고 그 사람이 누가 될지 여러분 압니까? 그 사람이 빌리그레암이 될지 그 사람이 스폴전이 될지 누가 아느냐 이거예요. 스펄전의 변화는요. 어느 수요일날 저녁에 자기 교회를 못 가고 눈이 와가지고 가까운 교회에 갔는데 거기에 어떤 초청받은 설교자가 설교도 대단히 잘하는 설교자도 아니었어요. 시골교회에서 초청받은 설교자가 전한 말씀을 듣고 그날 밤에 뒤집어진 거예요.
사실 그 밤에 그 말씀은 스데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그 사람 하나가 변하면 스펄전 이 사람이 변하면서 영국이 뒤집어지고 전 세계가 영향을 받았어요.
여러분들이 전한 예수님 그 복음을 듣고 누군가가 전하는데 아무도 안 믿어 그래도 괜찮아 그건 나 하나님께서 우리 전하는 우리를 보시는 겁니다. 그리고 열매 못 맺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에요. 그러다가 딱 딱 한 사람만 걸리면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부지런히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가 맺힐까 싹이 날까 염려하지 말고 뿌리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면서 뿌리는 거예요. 우리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에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복음이에요. 어떻게 뿌려요? 입으로 뿌리는 거예요.
오늘도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옥토를 가진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아멘 씨를 뿌리다. 씨뿌리다의 경상도 버전은 시부리다입니다. 씨뿌리다 히브리다가 무슨 뜻이에요? 말하는 거예요. 말 그 말은 뭐냐 하면 말은 씨를 뿌리는 거예요. 말대로 된다고 그러잖아요. 말을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거예요. 불평하고 원망하고 망하는 얘기하면 망하는 길이 열려요. 그러나 축복하고 믿음의 말을 하고 승리의 말을 하면 말한 대로 되는 거예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돼요? 믿음의 말을 해야 되고 좋은 말을 해야 되고 생명의 말을 해야 되고, 내 입에 복음을 담아서 복음의 말을 해야 돼요.
그 씨를 뿌리라 이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회사가 부정적이야. 남 얘기를 너무 많이 해 만나면 그냥 리스트가 있어요. 쫙. 그건 선교사님들 중에도 만나보면 그런 분들이 있어요. 계속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뭐 어쩌고 저쩌고 이건 안 되고 저건 안 되고 저 사람은 뭐가 문제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거기도 문제가 되지만 그 말을 나도 듣기 때문에 내뱉으면서 들은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나 절대 일이 풀리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고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을 씨 뿌린다고 하고 그런 부정적인 얘기하고 기타 등등 이런 얘기를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것을 경상도 말로 시부린다는 거예요.
더 심한 얘기가 있는데 똑같은 말을 해도 씨부리지 말라. 이야 씨를 뿌리세요. 아멘 크리스찬은 이 입을 조심해야 돼요. 우리가 씨부리지 않고 씨를 뿌리면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받고 예루살렘 온유다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 예수님의 증인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시고 권능을 주셨다는 거예요. 예수님 전하는 일에 내 입술을 사용하면 복음의 씨를 뿌리면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이거예요. 우리가 처음 은혜 받고 처음에 은혜 받으면 능력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우리가 일을 안 하는 거예요. 복음을 안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능력을 하나님이 걷어가시는 겁니다.
복음을 전할 때 정말 놀라운 신비로운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요. 한번 꼭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스데반은 강력한 방해 세력에 직면했어요. 9절에 보면 이른바 자유인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세.
이 회당 이름을 리버디노 회당이라고 합니다. 자유인들의 회당 그런 뜻이에요. 리버티 리베 학대 리버디노 이게 같은 자유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유대 사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헬라파 유대인들 중심으로 모인 이 회당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자유로운 이 사람들이 스데반을 공격하고 있느냐? 그 이유는 스데반도 여기 출신입니다. 리버디노 회당 출신이라고 봐야 돼요. 이방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예수를 믿고 바울도 마찬가지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니까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히브리파 유대인들 중심으로 예수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헬라파 유대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어디서 오느냐 리버디노 회당 자유인들의 회당을 다니던 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볼 때는 교인 뺏어가는 겁니다. 교인 뺏어가면 지금도 열받지 않아요. 다 우리가 주님 교회라고 하면서도 우리 교인을 누가 막 이렇게 이런 식으로 데려가면 누구든지 힘들어해요.
여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집중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생각하기를 내가 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고 주님이 부탁하신 일이니 이 일을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일 선한 일을 계획했으면 하나님이 팍팍 밀어주셔가지고 일이 그냥 쫙쫙 돼야 되는데 여러분 세상이 그렇지 않아요 거룩한 일일수록 좋은 일일수록 하나님의 일일수록 방해가 많습니다.
왜 마귀가 역사니까 왜 이 세상은 어두움이니까 빛의 일에 대해서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주님 일을 하려고 왔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라고 말하면 아직 우리가 수준이 미달한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방해가 있는 것이 거룩한 일이기 때문에 핍박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세상이 저항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시와 조롱과 박해의 관문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자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거저 자명해진다. 아주 밝아지는 거예요. 언제 이런 관문을 통과한 후에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이 각오를 하셔야 돼요. 내가 지금 결심한 내 인생길, 내가 결심한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방해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음 단단히 하고 출발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못 갑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들 따라와라. 지금부터 그냥 일사천리로 인생 이루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협작한 길로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 길을 가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편하고 예수 편하게 믿다가 믿을 생각을 했으면 여러분 빨리 여기서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절대 편한 길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먹은 사람만 끝까지 갈 수 있어요. 현대 교회는 거짓 복음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냥 예수 믿으면 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 좋은 길만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예수 믿어 천국을 얻고 영생을 얻은 대신에 이 땅에서는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도 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금 전하는 말씀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제자가 돼서 목회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의 앞에는 박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박해를 받는데 유대인들이 지금 어떻게 도전합니까? 첫째는 논쟁을 걸어 논쟁 프랑스에 이 비슷한 말이 두 개가 있어요. 토론 토론이라는 건 뭐냐 하면 좋은 결론을 낼 목적으로 건강한 대화를 하는 거예요. 디스 귀떼 그런데 토론 말고 논쟁이 있어요. 디스 피데 상대방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토론을 잘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좋은 결론을 끌어내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돼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이 디스피대에 강한 사람이 있어요. 계속 말꼬리 물고 늘어지고 조금 이론에서 밀렸다 하면 수긍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고 또 다음에 다시 만나리라 결심하고 가서 내내 그거 연구하고 다시 만나고 디스피데 하는 사람 참 피곤하죠.
그런 사람이 실제 있어요. 그런 사람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데요. 그런 일에 에너지를 쏟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내면 훈련을 해야 돼요. 습관이거든요. 이것도 말꼬리 물고 늘어져가지고 계속 싸움을 거는 사람 피할 수 없다면 싸우지 말고 차라리 당해 그런 사람은요. 이겨놓으면 절대로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막 철저하게 더 무장하고 나타나 아니면 피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한 번 당해주고 말든지 그래서 이 이 논쟁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 리버디노의 해당 사람들이 논쟁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스데반도 보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그들의 논쟁을 눌러버리는 거예요. 그러자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어요? 여론을 조성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 말발로 안 되면 그다음에는 사람들을 다 꼬드겨가지고 여론을 조성하는 거 여론전 10절 11절에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되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이 여론전 자기 실력이 안 되면 사람들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드는 거예요.
대중은 약간 우둔한 면이 있어요. 대중은요. 이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분위기 따라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말구거든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 이 리버디노의 사람들이 스데반을 공격하기 위해서 여론전을 펼치는 거예요. 왜곡된 정보 오늘날은 그래도 우리가 다 찾아보면 몇 개만 찾아봐도 이게 사실인가 아닌가 이게 거짓 정범가를 알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몇 사람이 입을 맞춰가지고 얘기하면 그게 사실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스데반을 공격합니다.
크리스찬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크리스찬은 이렇게 여론을 형성해가지고 어떤 일을 이루려고 거짓 정보를 흘려보낸다든가 이런 건 죄예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여론전을 하는데 그 여론전에 어떤 방식을 사용, 어떤 무기를 사용하느냐 프레임을 만들어서 씌우는 거예요. 프레임 12절 14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잡아가지고 공예에 이르러 거짓 증인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이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죽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여러분 우리가 원하는 안전한 세상 국가를 지키는 번호 111. 이 현대사를 보면 우리가 일본에게 오랫동안 36년 동안 고통을 당했어요.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래서 일본 하면 막 치를 떱니다.
근데 참 희한한 것은 동남아나 이런 데 가보면 우리보다 훨씬 많이 당했는데 이분들은 그런 감정이 없어. 그러니까 전 세계에 이 복수의 감정을 가장 강하게 가진 민족 중에 하나가 한국 사람인 것 같아. 우리는 한 번 그 36년 동안 당한 것을 지금도 저는 저는 직접 당한 것도 아닌데 저도 사실 막 울분이 그 이름만 들어도 울분이 막 오르고 축구에서 다 줘도 괜찮은데 일본한테 졌다 그러면 막 국가대표 선수들 국내에 못 들어오게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감정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프레임을 만들어가지고 친일 프레임을 만들어서 씌워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여론을 조성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어.
거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다 따지고 올라가면 따지고 올라가면 독립운동하는 사람 몇 사람 제외하고는 다 친일입니다. 거기에 다 걸리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 명분을 만들다 보면 우리 조상도 있네 해서 덮어버리는 거예요.
근데 그게 강력한 하나의 싸움의 도구가 돼요. 우리가 6 25를 겪었어요. 그렇죠 그래가지고 6.25를 겪었기 때문에 공산당 하면 치를 떱니다. 제가 이번에 다녀온 지난 월요일에서 오늘 아침에 밤새 비행기 타고 씨엠립 캄보디아에서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아침에 도착했어요. 거기는 인구는 얼마 안 되는 나라인데 그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던 폴포트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가 지배하기 위해서 자기 민족을 200만을 학살을 했어요. 200만을 정말 잔혹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죽였냐면 얼굴이 하야면 죽여 왜 이 사람은 일을 안 했다 노동자가 아니고 이 사람 브로즈하다 얼굴이 하얀 사람 나 같은 사람 죽었어 가서 나는 일주일 태우고 와서 일주일만 그냥 있으면 하얘지는데 안경 쓰면 죽어. 여기 안경 쓴 사람 다 죽었어요. 그리고 손을 이렇게 펴봐가지고 여기에 굳은 살이 있으면 살지만 여기에 굳은 살이 있으면 이게 펜떼 잡았다가 죽인 거예요.
그래서 그 작은 나라에서 200만을 죽인 거예요. 이게 공산주의가 그렇게 무서운데 우리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은 우리 전쟁 때문에 우리 민족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도 공산당에 의해서 죽었어요. 순교를 그렇게 하셨다고 그러니까 한 시대는 막 그 반공 사상이 어마어마해서 저게 친북이다 그러면 어지간하면 다 잡혀 그건 거기는 빠져나올 길이 없는 거예요.
막 그런 프레임들이 이 오늘날도 그 정치 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제 씌우면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걸려들면 그 사연 같은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공격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언제부터 있었느냐 이때도 있었던 이때 여기서 프레임은 뭐냐 하면 이 유대인들은 성전 중심 율법 중심 특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는 성전과 특히 율법을 강화시켰어요. 그래서 반성전적이고 반율법적이면 그 사회에서는 끝나는 거예요.
지금 스데반을 뭘로 공격하느냐 이 거룩한 곳과 성전입니다. 율법을 거슬러 반성전적이다 반율법적이다라는 프레임을 탁 씌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치는 겁니다. 더 이상 물어볼 게 없는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아시겠지만 스데반은 반성전적이지도 반율법적이지도 않아요. 다른 해석을 할 뿐이에요. 그러나 프레임에 탁 씌워서 대중을 선동하자 대중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건 범죄입니다. 어쨌든 이런 싸움을 이 니버디노 유대인들이 버린 것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어떻게 했어요? 스데반이 의연했습니다. 15절에 보면 공중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당황합니다. 나는 성전을 모독한 게 아니고 율법을 모독한 게 아닌데 너무 억울해. 그리고 내가 예수 믿어서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박해를 받는 거 너무나 괴로워 지금 사람들이 돌을 들어치려고 해 인간이니까 피하고 싶지 않겠어요? 막 돌을 던질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어요? 피하다가 어떻게 하는데 맞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스데반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의연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모함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고 매를 맞고 누군가 죽이려고 그래 그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로 나는 신이다라는 그 방송 여러분 보셨죠? 거기에 jms 이 사람이 신 행세를 하다가 거기 짧은 그 장면에 보면 어느 산에서 이 사람을 잡으러 간 사람한테 걸렸어요. 반바지 입고 그 텐트에서 나오면서 왜 그래 왜 그래 하면서 도망가는 모습을 딱 보니까 확실히 신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나 비겁하게 보이는지 그 사람 잡으러 간 사람이요. 내가 저런 사람을 잡기 위해서 내 인생을 이만큼 허비했는가 그런 고백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위기 상황이 오면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스데반은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으나 요동하지 않아 눈빛 하나도 요동하지 않고 그것을 다 받아들여 이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만큼 믿음을 깊이 뿌리내렸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호흡이 깊어요. 진리를 붙들었어요. 양심에 부끄러운 곳이 없어요. 그래서 사자같이 담대한 것입니다. 어려움 당해봤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진짜와 가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들이 돌을 들어치려고 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고 담대함을 잃지 않았고 은혜를 잃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는, 그리고 나중에 그가 기도할 때 드리는 기도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닮아간 것을 보게 돼요.
물론 스데반도 인간이기 때문에 두려웠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순교자들을 보면 순교자들이 우리하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잘 믿는 거예요. 그들에게도 두려움이 있고 분노가 있고 아픔과 상처가 있어요. 그러나 늘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 가운데 기도하며 살다 보면 그 결정적인 순간에 성령께서 붙들어주시는 거예요. 다 그때 마음을 붙들어주셔서 오히려 그때 더 담대하게 흔들리지 않는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스데반처럼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순교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이 땅을 정말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앞에 갈 수도 있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올지 몰라요. 어떤 시대가 1년에 여러분 순교당하는 사람이 크리스찬으로서 순교당하는 사람이 9만 명에서 10만 명, 9만 명에서 10만 명이에요. 고든 코넬에서 통계를 낸 게 그겁니다. 지금 전 세계에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당하는 사람이 많아요. 언제 우리에게 그런 어려움이 올지도 몰라요. 그때 저와 여러분들이 스데반처럼 살다가 스데반처럼 그 마지막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어요.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잡으시고 신앙생활 정말 굳은 마음으로 출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