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디모데전서 3장, 거기에 보면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하고 지명이 나오지요. 성경에 지명이 나오면 교인들이 골치 아파요. 왜 그러냐 하면 목사들이 약간 힘들게 해요. 이 동네가 우리 사는 동네가 아니에요. 남의 동네에요. 남의 동네가 성경에 나왔다, 그 동네 지리에 대해서 설교 전에 언급을 해야 될 필요가 있겠죠.
마게도냐는 뭐고 에베소는 뭐냐? 에베소는 여기에 있습니다. 마게도냐는 이 동네가 마게도냐입니다. 라고 해 버리면 이것이 어떤 문제점이 발생되느냐 하면 이런 문제점이 발생됩니다. 이태리 여기 있고 그리스 있고 그리스는 약간 반도로 되어 있는데 터키 있고 여기에 시리야, 그래타 섬이 여기 있는데 에베소는 여기있고 마게도냐는 여기있습니다.
성경에서 에베소가 여기 있습니다. 마게도냐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아, 이 성경이 옛날이야기구나! 성경 이 자체가 옛날이야기라서 우리가 참고로 들으면 그만이겠네 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에요. 우리 동네 옛날에 에베소였고 지금은 터키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있고 마게도냐있다 그러면 현재 오늘날 우리하고는 별 거리가 있고 상관없는 이야기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있었다, 있었겠지,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있지만 지금은 이순신 장군이 동상만 있지 없잖아요. 없으니까 이제 실감 나지 않는 거예요. 아 옛날이야기나 듣자 이렇게 끝나요. 아 옛날에 디모데라는 사람이 살았고 옛날에 사도 바울이 있는데 디모데 이 사람을 에베소에 목회하게 남겨두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마게도냐로 갔다가 드로이로 갔다가 니고볼리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겨울을 나고 고린도 갔다가 3년 후에 체포되어 드디어 이탈리아 로마에 가서 그걸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아아 사도 바울 고생 많이 했구나! 아이고 고생하기 전에도 전도 많이 했구나!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본 받아서 전도하다가 주님 부르실 날에 가야지’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사적인 경력에 불과한 거죠. 그렇다면 오늘날 이 성경에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데 이게 한계가 있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내가 에베소에 머물라할 때에도 이 에베소가 오늘날 같으면 어디입니까? 라고 이렇게 해야지요. 그러면 그 당시에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이 에베소였잖아요. 여러 군데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에베소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의 에베소가 어디일까요? 지금의 에베소가 어디 있느냐는 말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에베소는 에베소가 있다는 것은 성립이 되는데 지금에 에베소가 어디 있습니까? 말은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에베소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여기가 에베소입니다. 해 버리면 그 옆에 있는 동네, 여기에는 골로새가 있는데요. 골로새는 에베소가 아닌 게 되지요.
그러면 에베소서나 디모데전서 이야기가 골로새서 이 사람들에게는 에베소서가 더 당길까요? 골로새서가 더 당길까요? 이 골로새 사람들에게요. 자기한테 한 편지한 게 당긴단 말이에요. 덜 중요한 게 돼요. 한 집에 살지만 이미아씨 앞으로 온 편지 하고 송재원씨 앞으로 온 편지 하고 한 집에 살지만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어쨌든 내 이름으로 온 편지는 내가 뜯어봐야 되고 당신 이름으로 온 편지는 당신이 뜯는 게 옳지요.
저는 에베소서가 골로새서와 맞바꾸어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시대가 에베소서냐 골로새서냐 빌립보서냐 로마서냐 이런 것이 어디 입니까? 라고 묻지 말고 복음의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이 에베소가 되고 골로새가 되고 빌립보가 되고 로마서가 되고 이 한국 땅이, 이 신월동이 로마가 되고 빌립보가 되는 거예요. 이 신월동 의존교회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에베소가 어디 입니까?’ 라고 물을 필요가 없어요. ‘주님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면 그 장소가 에베소가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해야 돼요. 질문이 너무 길지요. 질문이 너무 기니까 질문을 줄여보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있는 이 집이 에베소가 되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면 되겠습니까? 만약에 내가 사는 곳이 에베소라면 그것은 바로 에베소서는 누구한테 전하는 편지가 되겠지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전하는 편지가 아니고 누구한테 전하는 편지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편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사도 바울 지금 들어가면서 이곳은 어디 입니까? 이게 언제입니까? 라는 그 질문 자체를 성경의 진짜 뜻을 훼방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강의 시작하려는 거예요. 보통 주석을 보면 로마는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이렇게 하잖아요. 로는 고린도에서 로마에 보낸 편지가 로마서이다. 디모데전서 같은 경우에는 마게도냐에 있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게 뭔데요. 그럼 지금 신월동에 사는 우리한테는 상관없는 책이네요? 없는 책이죠.
여기서 우리가 특히 신약성경에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신약성경이 참 어려운 것이 구약에서는 어떤 지시와 계시가 떨어지면 계시가 왔던 그 단체, 그 집합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가운데 보면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나오죠.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들 중에 있느니라 했거든요. 이게 구약에서는 이런 표현하기가 굉장히 난처해요. 그런데 신약에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왜 구약에서는 어려우냐 하면 여기에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있다 했는데 내 이름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의존교회에 두 세 사람이 모였다 칩시다. 그러면 저 청량리에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예수님은 한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한 분인데 바쁘다 바뻐, 여기도 함께 해야 되고 저 계모임 저기도 함께 해야 되고, 저기도 회비내야 되고 여기도 회비내야 되고 어떻게 해야 돼요?
구약이 차라리 쉬운 것은 구약의 출발점은 내가 여기 존재한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이야기하듯이 주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해요. 그런데 지금 만약에 제가 여러분, 오늘 서울에 들어와도 여러분들과 함께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할 때는 그 사람이 분명히 대구 갔는데 대구 갔다가 또 서울에 우리와 함께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왜? 제 몸은 동시성이 없잖아요. 대구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이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제가 귀신입니까? 안 된다 이 말이죠. 안되면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추억한다, 기억한다.’ 그 정도입니다.
애인 군대 보내놓고 ‘네가 군에 가 있어도 지금은 내 마음속에 너와 함께 있어’ 이것은 그냥 추억이죠. 실제로 함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추억하면 되는 겁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없어서 예수님을 추억하고 기억했습니까?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천주교회에서 예수님을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기념까지만 해도 다행스럽지만 천주교는 다행스런 게 없지만 기념까지 해도 봐줄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이 무리수를 둔게 뭐냐 하면 어떤 것을 무리수를 뒀느냐 하면 비스킷하고 포도주 잔을 나눠주면서 하는 소리가 이 잔은 곧 예수님의 피고 이 비스킷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금 신부가 당신에게 빵을 주는 순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라는 거짓말을 친 거예요. 예수님의 비스킷처럼 생긴 먹기 좋으라고 만든 그것을 밀가루 반죽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까? 어떻게 돼요? 밀가루 밀 때 주께서 함께 하십니까? 그것을 오븐에 굽을 때 함께 하십니까? 굽고 난 뒤에 주께서 임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제단에 이동할 때 함께 하시는 거예요? 이동할 때는 안 계시다가 입에 넣어줄 때 몇 센티 앞으로 그 사람 혓바닥 몇 쎈치 앞에서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어디 법으로 정해 놓은 게 있습니까? 조금 있다가 법이 나와요. 오늘 참 어려운 거 합니다. 법 이야기하는데 먼저 천주교 법부터 이야기할게요.
도대체 어느 쪽에서 임하는 거예요? 천주교 신자들은 그려러니 하고 받지요. 예수님의 떡이 이게 이런 겁니다. 어렵게 써서 죄송합니다만 사건이 형체 화할 수가 있느냐 있는 겁니다. 사건은 형체화 돼요. 그런데 어떤 형체가 있을 때 자동적으로 거기서 전에 나왔던 사건이 여기서 다시 재발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주 쉬운 예로 얼음판에 미끄러져서 내가 팔이 부러졌다면 깁스를 하지요. 미끄러진 사건이 깁스 속에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것은 되잖아요. 그러면 안 미끄러졌는데 깁스만 하고 있으면 가는 곳 마다 미끄러집니까?
목사를 가지고 뭐라 합니까? 주의 기름을 발랐다고 하지요? 소위 말하는 성령 받았다 있잖아요. 성령받아서 목사 됐으면 목사가 화장실가도 성령이 따라옵니까? 목사가 큰일 해도 따라오고 논문 조작해도 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까? 목사가 고스톱 치면 주께서 ‘야, 야야!’ ‘예, 성령님’ ‘그거 광 내라니까’ ‘알았어요.’ 이렇게 하십니까? 사건이 형체화 됐다고 해서 형체가 그 사건을 붙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어떤 교인이 은혜 받아서 그 교회 예배당 교육관 하라고 땅 100평을 바쳤어요. 그러면 땅 100평은 어디서 왔는가? 어떤 장로가 은혜 받아서 준거다 그러면 그 100평에서 성령이 아침 9시 반만 가면 성령이 옆에서 돋아나옵니까? 잔디 나오듯이 그게 땅에서 나와요?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100평을 누가 와서 팔아먹었다, 목사가 퇴직금 대신 다오 해서 줘서 가벼렸다 그러면 성령도 떼어가지고 같이 가는 겁니까? 제가 지금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이게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것을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에요. 사람들이 보고 믿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떤 추억꺼리가 없고 기념물 없이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거예요. 추억꺼리와 기념물이 있어서 내가 믿었다면 그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믿음이 없어야 마땅한데 이것은 한경직 목사님의 유품이고 이것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손수건이고 이렇게 나오면 눈물 나와서 은혜 받는 것, 그런 것 보고 눈물나 은혜받으려고 하면 북쪽에 보내버려요. 장성택하고 같이 보내서 북쪽에 김일성 교살당해 울도록 만들어야 돼요. 그게 지금 북한의 신흥종교아닙니까? 북한의 신흥종교가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한국교회에 그대로 다 써먹고 있는 거예요.
보고 믿고 믿겠다는 교인들에게 ‘오라, 보여줄게!’ 그래서 만든 것이 성당이나 교회에서 이런 것을 기념물로 만들어서 마치 자동적으로 믿음이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진짜 성령이 올 때에는 여러분들 오늘 쪽 이것은 머리에 새기던지 꼭 외워가세요. 성령은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성령은 인간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한데 하는 그것을 증거하는게 아니고 뭘 믿고 뭘 가지고 있으면 은혜가 나옵니까? 이게 아니라 은혜 나오는 어떤 기념물이나 그런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행동하면 네가 은혜가 넘친다. 그런 것을 주는 게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오직 예수님만 증거해요.
우리의 믿음을 좋게 하는데 성령은 동원하지 않아요. 성령은 우리 앞에 들이대십니다. 들이대시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수집해도 괜찮아요. 만약에 내가 전에 와서 온풍기 훔쳐간 도둑놈이라면 내가 옛날에 도둑놈인데 지금 회개하려고 목사님 만났다면 앞에 온풍기 또 있으면 탐내겠습니까? 안 내지요.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탐을 안 내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죄인 같으면 예수님이 가진 것이 탐이 나겠습니까? 주님,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예수님한테 기도 하겠습니까? 뭐라 하겠습니까? 죄인 여기 있습니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저 여기 있습니다. 제가 탕자입니다. 내가 주님이 구세주인 것을 안 것만으로도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부흥시켜 주옵소서! 선교사 많이 보내게 하옵소서! 우리교회 땅 사게 해 주시고, 누구하나 돈 내서 의자 확 바꿔서 앉아서 예배드리게 해 주고, 비 새는데 어떻게 할까? 뭐가 달라는 왜 그리 많아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뭔가 달라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다오, 다오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거예요. 네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친히 안다 뭘 달라고 하지마라 이 말이죠. 그런데 뭔가 달라고 하지 아니하면 기도 할게 없는데 어떻게 해요. 기도 뭐 때문에 하는 거예요? 기도 시작, 뭐 때문에 합니까? 자, 이제부터 뭐 달라고 할까? 뭔가 달라고 할 때는 뭔가 결핍된 것, 모자란 것, 아쉬운 것, 그것을 달라고 하잖아요. 풍족하다고 여기는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자라니까 이거마저 주면 균형 맞춰지고 마저 채워진다. 그것 때문에 달리하잖아요. 그런 기도를 하지 마시라 말입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목사님, 앞으로 기도 할 게 하나도 없네요? 기도 할게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기도는 결국 무엇과 연관했다는 겁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 했는데 그것을 하지 마라하니까 기도 물이 다 말라 버렸어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달라고 할 때는 주신 것 모아놓는 자기의 창고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두고 하는 거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뭐냐, 주님 주신 것을 모아놓고 있는 뒤에 있는 창고가 없어요. 드레스 룸 하는 것,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바치고 싶어서 기도 한 거예요.
시편에 보면 기도라 하는 것은 반드시 전제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제사가 받을 경우에만 기도도 받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제사 안 받는데 기도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제사를 받는다는 것은 너의 소원을 받는다는 뜻이고 제사를 안 받는다는 것은 네가 백날 해 봐야 네 기도 하는 손에 피가 묻어있기 때문에 제사 안 받는다는 것은 기도도 안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습니까? 구약사람들이요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 했습니까? 너희가 절기 지키고 백날 기도 해 봐야 너희는 내 마당만 밟고 더럽힐 뿐이다. 그런 식으로 기도 하지 마라하는 거예요. 기도라 하는 것은 우리가 달라고 할 게 아니라 거기에 뭔가 주께서 달라해서 실적 걷어와서 그것을 끌어모은 창고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헐어버리고 내가 달라하는 내 자신을 주 앞에 도로 바치는 겁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바치는 거예요.
제가 대전 시민대학에서 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 참새를 친히 기르신다 했습니다. 맞지요? 그러면 참새가 갖고 있는 종교가 뭐죠? 참새가 종교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참새가 어느 교회 다녔습니까? 혹시 이 참새가 등록하는 거 봤습니까? 참새가 어느 교회에 등록했어요? 등록 안 하면 주께서 기르시지 않습니까? 참새가 종교가 없으면 주께서 안 길러요? 이게 종교도 없는 것이 나 이제 안 기를 거야! 이게 하나님이십니까?
들풀을 주께서 친히 기르시죠. 들풀의 종교가 뭡니까? 실례하지만 들풀의 혈액형이 A형이에요? o형이에요? o형 됐다고 들풀아 너 지옥가! 이런 소리 안하죠. 주께서 친히 기르시잖아요. 친히 기르시면 됐지 왜 종교가 필요하고 왜 교회가 필요합니까? 나,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 보니까 한 사람 빼놓고 머리카락이 괜찮은 수준에 있어요. 특히 목사님은 나이에 비해서 머리가 너무 많아요. 그 머리 누가 길렀어요? 뭐 댕기머리 발랐어요? 주께서 길러줬잖아요. 그런데 십일조 할 때만 머리 길러줬습니까? 아니다. 이 말이죠. 주께서 누구한테 받지도 않는다 했죠. 사도 행전에 보면 주께서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교회냐 어느 종파냐, 어느 교단이냐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우리가 고백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준 것도 없는데 주께서는 친히 기르십니다. 라는 그 고백밖에 없어요. 우리가 기도 할 것은 도대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 오늘도 기르십니까? 천국인도 합니까? 라는 물음의 답변은 뭐냐?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십자가의 피를 흘려서 그 피를 증거하라고 너로 하여금 나한테 바쳐야 하는 존재로서 내가 너에게 인식시켜 줬다 이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거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거 또 기도해야 됩니까? 라는 말을 하겠지요. 여기에 중요한 게 나와요. 뭐냐 하면 여러분 방금 다 안다 했죠? 다 아는데 이게 한 10초만 지나가면 알기는 아는데 체험이 안돼요. 10초면 제가 많이 봐준 겁니다. 어떤 사람은 2초 만에 잊습니다. 예수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을 알지만 이게 기쁨으로 감격으로 눈물 쏟아지는 환희로 느껴지는 것은 볼 불과 2내지 3초밖에 안돼요.
안다고 해 놓고 다시 눈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돌려버립니다. 바로 돌릴 때 내가 돌렸던 시선에 의하여 내가 갑자기 사기를 당했다든지 했을 경우에 이제 기도 하는 거예요. ‘주여, 사기 당했습니다. 빨리 제 돈 찾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할 때에 주의 응답은 그거에요. 한결같아요. 조금 전까지네 입에서 안다했는데 네가 안다는게 뭐지? 조금전까지 안다는게 뭐냐? 예수님의 희생으로 친히 기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한테 보낸 사기꾼도 네가 바로 사기를 당해도 주께서는 개의치 않고 친히 기르신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게해서 내가 사기꾼을 보낸것에 대해서 네가 의의가 있냐? 이렇게 나오죠.
기도를 하게 하시는데 그 기도는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전혀 체험되지 않을 때 아는 것에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기도 안하고는 못 배기는 마음으로 전환시킵니다. 지금 얘가 갑자기 학교에서 손을 데었다고 하는데 그냥 가는 엄마가 없어요. 주여, 주여! 차타고 가면서 주여, 주여, 경미한 부상이길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잖아요. 뭐 응답이고 뭐고 생각할게 뭐가 있어요? 지금 답답한 속이 그대로 나오는데요. 신학이 어떠니, 금요일에 기도 하지 말라, 배운 것도 소용없어요. 지금 체험되는 것은 어쨌든간에 남의 아이는 죽든 말든 장성택이는 처형되든 말든 내 얘는 약간 덜 데이도록 그것만 바로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바로 그 강렬한 체험 때문에 십자가로 살기를 바란다는 그 체험은 후진 체험으로 그것은 항상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항상 내 다급한 일상 때문에 뒤에 시시하게 천시 받는 무시당하는 체험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이 답답해 하십니다.
기도케 함으로서 내가 하는 기도와 주께서 말씀에 들어있는 기도 응답이 얼마나 거리가 멀었었는가는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체험입니다. 그게 바로 날마다 사건을 유발시키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마게도냐를 봅시다. 에베소서 의미의 이야기에 벌써 한발자국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발자국 다가선 겁니다. 어떻게 다가섰느냐 하면 에베소라는 특정 지역, 마게도냐가 넓은 지역, 이것을 마게도냐입니다. 밑에는 아가야이고 위에는 마게도냐입니다.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데 밑에 있는 그리스 남부지향은 아가야이고 이는 마게도냐이고 마게도냐에서 유명한 헬라 마게도냐 제국이 나왔어요.
북쪽에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대학이 있어서 313년 페르사르를 전부 다 정복해요. 그러다가 162년인가의 로마한테 멸망했는데 기원전입니다. 여기 마게도냐 헬라 마게도냐 제국이 여기 나와요. 지금도 위에 보면 마게도냐 라는 나라가 있어요. 그 마게도냐라는 이 에베소라는 지명을 언급할 때 1차적으로는 그 지명은 인간의 집단에서 통용되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하면 아하 그 장소, 빌립보, 아 이 동네! 골로새, 아 이 동네! 다 알아요. 이미 통용돼요. 마게도냐, 아 마게도냐 이거 그리스 북쪽의 마게도냐!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백날 알아야 그거 안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잖아요. 그러면 다른 의미로 나와야 돼요. 이미 안다고 하는 그 의미에서 복음의 의미가 새롭게 도출되지 아니하면 이거 지명 백날 해 놔도 소용없잖아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우리는 어떤 성경에 1차적인 의미, 모든 성경의 용어, 1절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 우리라는 단어 한 사람을 두지 않고 여러 사람을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통용되는 의미에요. 우리 구주 하나님,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전부 다 철자 하나하나는 이미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자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거 백날 해 봐야 이것은 국어 시간돼요. 문단 나누기 이런 것, 문맥 나누기, 문법적인 해석, 이것은 아무리 해도 십자가 복음의 의미가 안 나와요. 아 옛날 그랬었구나!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통용되는 그 의미가 구원의 의미가 되려면 어디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 십자가를 경유해서 의미가 도출돼야 돼요. 아- 이거는 정말 기적입니다. 정말 어려워요.
만약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할 때 이거 문자 하나하나 의미가 만 듯 뜻이냐 하면 죄인, 죄 지은 사람을 죄인이라 한다. 괴수다 하는 것은 우두머리를 괴수라 한다. 백날 알아봐야 인간 세상끼리 통하는 의미인거예요. 그런데 백날해서 나는 괴수다 할 때 아하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구나! 나는 아니 지롱 이렇게 돼요. 나는 아니지롱, 그러면 이 디모데전서 1장 15절은 옛날 만화책보다 더 못해요. 옛날 지나 간 역사책에 불과하지요. 심훈의 상록수라는 소설책, 조정래 태백산맥 보다 더 못한 거예요. 판교에 가면 기념관도 있죠. 이것은 기념관도 필요 없죠. 그런 식으로 백날 해석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 했기 때문에 우리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일치되게 해서 노력하자! 이게 노력한다고 될 문제입니까? 노력한다는 사람이 저는 더 수상해요.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뭔가 고상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게 그게 더 수상해요. ‘에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거 사도바울의 옛날 일이야’ 차라리 이것이 솔직하지 우리는 이것을 본 받읍시다. 무슨 수로 본을 받는데요 사도 바울이 키가 몇 센티인데 동일하지 않는데 사도 바울이 먹는 음식, 사도 바울의 어릴 때 있는 기억, 두뇌 속에 있는 기억, DNA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아요? 사후에 경험했던 것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생각하는 게 다 달라요. 왜?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해도 그 의미가 다 다르다니까요 부부가 한 방에 잠을 잔다는 것도 결혼 10년차 되니까 보통일이 아닙니다. 각방 쓰기 마련인데 정이 푹푹 나야 한방 쓰지 보통 한 10년 지나면 전부 다 각방 씁니다만 한 방 쓰면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닮는가 한번 조사해 볼까요? 닮기는 아이고 뭐가 닮아요? 그냥 정치적 타협을 했을 뿐이죠.
약간의 돈 내놓으면 내가 약간 속여 줄게 이게 정치적 타협에 불과하지 그게 무슨 한 몸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한 날 한시에 결혼해도 한 날 한 날 한시에 죽어도 그거 한 몸 아닙니다. 한 몸 되려면 적어도 꿈은 같은 꿈을 꿔야 적어도 한 몸이다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꿈을 한번 대조해 보세요. 당신, 무슨 꿈꿨어? 그 꿈꿨어? 나는 이 꿈인데 우리는 딴 몸인가 봐! 그래요 처음부터 딴 몸인데요 뭐 같은 몸 같으면 꿈이 그렇게 두 가지 나올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제발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마세요. 이것은 믿음도 없는 것이 믿는 척하는 자기의 처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 좋다고 위에서 속아 넘어가겠지만 주님한테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돼요. 인간과 인간 속에서 통용되는 의미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릴게요. 철자, 단어 하나에 전부 다 뜻이 있는데요 그 뜻은 어떻게 새기느냐 하면 인간을 포함한 이 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언어가 생겼어요. 지금으로부터 BC 3000경 수메르 왕국에서, 수매르 도시 국가에서 처음 생긴겁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언어는 그 전에 조금씩 있었지만 언어라는 게 뭐냐 하면 이 변화무쌍한 것의 질서를 부여할 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은 여기 이게 컵인데 여러분은 뭐로 봅니까? 컵으로 보입니다. 나는 개구리로 보겠습니다. 백날 해 봐야 안 보여 지지요. 너 혼자 개구리 해라! 우리는 컵한다. 이러면 저도 컵하겠습니다. 하고 따라온다 이 말입니다.
집단이 대 자연을 향하여 이 대 자연을 이용하려할 때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겁니다. 질서를 부여할 때는 이렇게 토막을 내야 해요. 격자 모양으로 토막을 내요. 이게 질서잖아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개구리, 여기서 여기까지는 뱀, 이렇게 해야 돼요. 뱀은 긴게 뱀이고 개구리는 눈만 크고 튀어나온 게 개구리잖아요. 이것도 뱀 저것도 뱀 하면 뭐가 안 잡힙니까? 혼란스럽지요 질서가 안 잡히죠.
실제로 한의사들이 약재를 다룰 때 한자로 서랍에다가 종류별로 써서 넣어 놓지요. 그게 한 곽이 붙은 한 자 명칭에 대한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 환자가 와서 그 어려운 한자를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 먹지요. 아마추어이니까 한의사가 아니잖아요. 그때는 아이고 찌뿌둥한게 감기들었나? 가만있어 보세요. 당귀에다가 그 당귀라는 한자도 어려워서 못봐요. 자기가 알아서 일어나 끄집어내지요. 요새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렇게 했거든요. 끄집어내지요. 그러면 이 한약재에 대해서 누가 질서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의사이잖아요. 밑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 질서 있는 사람들을 따라해야 되지요.
이거 하면 감기 낫습니까? 예, 푹 두재만 고와잡수면 내일되면 거뜬없이 낫습니다.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잖아요. 결국은 이 언어와 법이라 하는 것은 누가 한다? 계급이 있고 그 계급에서 누가 정해요? 바로 상위 계층에서 관료층이라 하는데 상위계층, 엘리트에서 이 법과 질서를 정해서 정하기만 합니까? 통치하고 지배를 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아랫사람들은 뭐 합니까? 그 통치와 지배를 받으면 그 나라는 불안정하겠습니까? 질서가 있겠습니까? 질서가 있는 국가체제가 되는 겁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법을 만들잖아요. 전두환 법 만드니까 전두환법 생겼잖아요. 그 전에 전두환 법을 순천에 있는 농사꾼이 만들었습니까? 국민의 대표가 만들었어요. 모든 언어도 마찬가지에요. 그 언어, 만약에 호미 같으면 대장간이라는 전문가 집단이 있어요. 그들이 호미라고 만든 거예요. 제가 지금 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라는 하는 것은 그 철자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데 그것을 통용하고 사용하는 그 공동체, 집단들이 어떤 자연에 대해서 내부적인 질서체제를 잡기 위해서 임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말입니다. 언어 자체가 신비로웠던 게 아니라는 뜻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건이 형체 화되면 그 형체가 전형적으로 사건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주라는 의미는 구약에서 기름부은자에요. 그러면 기름 누가 부으면 그 다음부터 구원받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못 받지요. 그것은 하나의 인간의 언어로 조립된 거니까요. 거기서 사건이 안 나오잖아요.
남묘호렌게쿄, 이름도 어려운데 일본 종교, 그 종교는 굉장히 간단해요. 특정 문장이나 단어를 외우면 병이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환자가 아플 때 이 약써도 안되고 저 약써도 안될 때는 병이 낫는다고 하는 그것을 속는 샘치고 한번 해 보는 거예요. 병이 안 나으면 그만인데 웬걸 병이 잘 나아요. 어느 날 부산역 앞에 천리교 신자가 돼서 딱따기를 치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하면 병도 낫고 가정이 화목하고 돈도 잘 번다는 기도를 이게 응답이 안 되면 천만다행인데 응답이 되면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은 그 교회에 중직을 맡게 되어서 온 동네방네 간증하러 돌아다닌다니까요. 문제가 더욱더 화를 불러서 자기한테 치명적인 화가 되어 버린 거예요.
특정 문장, 예수 이름을 외우면 그게 응답이 됩니까? 어디 남묘호란게교 그거 주문 외우면 되는 거예요? 옛날 신라시대 때에 원효대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불교가 어려우니까 이래가지고 불교숫자가 안는다고 간단한 거 했어요. 뭐냐 하면 나무아미타불 외우면 무조건 누구나 소원이 됐어요. 이건 히트 상품이에요. 무조건 병이 낫게 된 거예요. 된다니까요 나무아미타불 집에서 해 보세요. 병 낫게 나무아미타불 해 보세요. 병이 난다니까요. 할렐루야를 순복음교회 가서 외치면 방언이 터져요. 안 터지면 다행인데 터진다니까요.
모든 세상의 종교는 어떤 전문가 그룹이 있어요. 어떤 성령 그룹, 성령을 분배하고 구원과 믿음을 나누어주는 전문가 그룹이 있고 전문가 그룹에 의해서 그들이 만든 법과 특정한 문장, 나무아미타불이라 든 지 예수이름이라든지 귀신아 물러가라 이런 특정한 기호나 문장, 또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생수물 마시면 병이 난다 이런 거, 특정 그것을 하게 되면 그것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서 거기에 참여하게 되면 그 질서라는 덫에 걸린 거예요.
어떤 부흥사가 와서 부흥회하면서 목사한테 대들었더니만 그 집안 3대가 벌 받았으니까 여러분들이 주의해야 됩니다. 저주 받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은 종에게 잘 했더니만 세상에 그 때부터 사업부도난 사람이 원상회복돼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실제로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목사한테 잘 해 주려고 넥타이 사주고 했는데 이런 교회는 그런 것도 없지만 하여튼 뭐 잘해 주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결국 뭡니까? 그 질서체제에 흠뻑 빠진 게 돼요.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위한 질서 체제, 내가 복 받는 질서체제에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때에 마귀가 어디 폼으로 있는 줄 알아요? 마귀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축복과 은혜와 부흥을 약속 해 준 겁니다. 그런데 참새 보세요. 참새는 누가 키운다고요? 참새는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잖아요. 들풀도 친히 기르시지요. 종교가 어디 있습니까? 어디 문장 외웠습니까? 나무아미타불 했습니까? 그처럼 너희는 먼저 뭘 구하라?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 나라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는 말은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너희를 휘감고 있는 너희들이 서로 소통하는 서로 통하는 언어냐는 그 의미에서 그 의미가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도 믿고 예수님도 믿어서 구원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는 수모를 당하실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뭔가 반대 세력이 꽉 차있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반대 세력에 의해서 죽고 난 뒤에 튕겨져 나갔어요. 이 철조망 바깥에서 이 세상 바깥에서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우리가 그렇게 출세하고자 원하는 우리가 성공하고자 원하는 이 유토피아 같은 이 세상에서 주께서는 지금 나가떨어졌어요. 나오고 난 뒤에 내 쪽으로 오라는 거예요. 그 나라 의를 구하라는 말이에요. 너희가 좋다 하는 이 세상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을 주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담긴 성령의 역사는 모르고 이것을 국어시간에 공부하듯이 이것을 공부하면 자동적으로 여기서 능력이 나오고 믿음이 나오나 하고 기대하면서 하는 거예요.
안 나옵니다. 성경공부 백날해도 안 나와요. 성경공부 백날해서 나올 것 같으면 우리는 국어시간에 하지요 여기 십자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십자가, 2장 십자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뭐로 되어 있어요? 십자가라는 말이 디모데전서에는 나오지도 않는데 이것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 여기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네! 아, 에베소서 이번 여름에 성지수련회 해? 마게도냐 한번 달려봐? 백날가면 그 사람들 하루 관광 수입만 더 해 주는 거지.
당신은 안 가봐 놓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소리를 자주 해요. 저는 가봤자입니다. 가봤자 그 동네나 이 동네나 전부 다 밥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죠. 정리 중요한 것은 이거잖아요. ‘살고 보자!’ 이것보다 더 다급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살고 보자가 지금 용광로처럼 끓고 있잖아요. 우리는 뭐 입에 풀칠을 해야 성공을 하지 지금 죽어가는 마당에 성공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살고 보자!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가 어제나 오늘 이나 항상 첫 번째 이슈입니다.
첫 번째 이슈입니다. 일단 살면 하나 더 붙어요. 이왕 사는 것, 보란 듯이 잘 살아 보자! 이게 첫 번째 이슈라고요. 여유 있으니까 잘 사는 게 중요 하나?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하지, 사람 된 제 1된 목적은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거고 실제로 어려워 보세요, 살고 보자이지 그게 안 나온다니까요. 우리의 몸이 가난을 기억해요
그 당시에 옛날 언어가, 법이 처음 생길 때 사람들이 같은 인간에게 굴복하고 복종 이유가 그 사람들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살고 보자였어요. 잉여, 남아도는 재산을 관리하고 그것을 통합하는 힘을 가진 영웅이라 하거든요. 창세기 10장, 11장, 그 영웅들이 등장해서 그 영웅들이 세습화되는 겁니다. 그 자식까지 영웅이 되는 거예요.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가 크게 성공했잖아요. 그러면 그 목사에게 아들이 있으면 아들 미국에 신학교 보내서 목사 시켜 대를 이어 세습화시켜요.
북한의 김일성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김정일, 김정일 아들은 김정은 아닙니까? 김일성의 아들이 김정일이고 김정일 아들이 김정은 이잖아요. 부자가 세습되잖아요. 다 같은 한 민족입니다. 다 같이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해요. 정서가 같아요. 속성이 같아요. 북한이나 큰 교회목사나 큰교회 다니는 교인이나 다를게 뭐가 있어요. 대를 이어서 충성하는데요. 살고 보자를 누가 이깁니까? 난 도대체 살고 보자 하는 이런 사람 못 봤어요. 난 안 살아도 돼요. 혹시 그런 소리 하면 믿음 좋아 보여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에요?
가장 다급한 문제에요. 왜? 이것은 내 머리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튀어나오니까요. 의존교회 교인들 줄서 가는데 여기 5만 원짜리 하나 떨어놓아 보세요. ‘주여!’ 하고 그냥 가는 사람 없어요. ‘어이구 5만원!’ ‘어이구 돈, 하루 5만원 벌려면 하루 일을 몇 시간해야 돼? 어이구 5만원’ 주님의 축복이다. 가지자, 주께서 오늘도 친히 기르시는구나! 그런데 기르시는 것은 좋은데 그 다음부터 디스크 걸려요. 만날 주어서 기르시는 줄 알고 길을 쳐다보고 안 좋아요.
잘 살고 보자! 우선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어떤 말씀이나 어떤 것을 줘도 하나의 훅 불면 조금의 바람이나 어려움에 휘 날라 가죠. 먼지가 되어 날아가죠. 그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먼지 같은 고상함과 거룩함, 경건함을 모르고 먼지인지 모르고 자기는 꽁꽁 묶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게 어디서 어설프게 묶었어!’ 하고 후- 하고 바람을 불면 그동안 잘 믿었다고 우겼던 십자가 언약은 훅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게 ’역시 사람은 살고 봐야 돼! 이게 딱 남거든요.’역시 애는 공부 잘 하는 게 왔다야! 성경 신학보다 머리 좋고 1등하는게 최고야‘ 이게 남지요. 그러니까 15절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우리가 주님의 사용하는 언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성급하게 직접 대하는 노선을 잘라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쓸데없다! 보기 싫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라! 내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는 그 자리까지 주께서 친히 들어가게 하십니다. 들어가게 해 놓고 거기서 비로소 우리에게 진짜 주님께서 가지고 있던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온풍기를 가져갔던 도둑놈이 몇 년 뒤에 와서 목사님 앞에 왔을 때 ‘온풍기 왜 또 가져가지?’ ‘아닙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된 죄인입니다.’ 할 때 주변에 온풍기가 10개가 있으며 두 번 다시 그것을 탐을 낼 수가 없듯이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탐을 냈던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저한테 밉상 받았고 설움 받았고 시답지 않은 존재로서 항상 나한테 그런 대우만 주님은 받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원인 제공한 인간이 바로 접니다. 하는 그 자리까지 주께서는 성령을 일으켜서 데려온 겁니다. 데리고 오면서 바람을 휙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거추장스러운 종교적인 폼을 벗겨내는 그 작업을 지금 오늘도 주께서 쉬지않고 이 작업을 해 주십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31213b (예수님경유)―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인간의 집합체에서 나오는 그 의미는 평소에 인간들이 이미 지배당하고 복종당하고 있는 그런 인간들끼리 통용되는 의미인데 그것을 인간 공동체에서 의미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게 법이 됐다고 했죠. 여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율법의 선생이 되게 하라 율법의 말이 어려우면 그냥 법이라 하세요. 법의 선생이 된다. 그런데 법이라는 것이 왜 있나하면 질서를 잡기 위함이다.
그러면 질서가 뭐냐? 계급 정하는 거예요. 통치하는 사람 따로 있고 통치 받는 사람 따로 있고 그럴 때 질서가 잡힌다고 보는 겁니다. 교회는 영리한 사람은 목사이고 영역 다른 사람은 교인이고 그럴 때 교회 질서가 잡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한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복종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도리어 복종한 게 아니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이야기했죠. 맞아 죽어도 싸지요. 왜 질서를 훼손합니까?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을 가지고 채찍을 만들어서 흩어버렸잖아요.
성전을 훼손했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성전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집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일반 그 당시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성전이라 하는 것은 매개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는 만남의 장소에요. 거기에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것은 뭐냐, 내 아버지 집이에요. 그냥 아버지가 아니고 내 아버지에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 생각이고 일반 사람들은 예배당 지으나 교회 지으나 성전 져놓고 기도하고 제사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떡과 이 잔을 먹고 마시면 주께서 오신다는 것이 천주교나 기독교나 오늘 인간들의 생각이고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가야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고 지금도 주장은 팽팽합니다.
일치되지 않아요. 어느 것이 쉽습니까? 하고 묻고 싶은 게 아니고 어느 쪽이 옳습니까? 하고 묻고 싶어요. 어느 것이 쉽습니까? 훨씬 쉽지요. 그냥 예배당 지어놓고 주일날 11시입니다. 거기 10시 50분에는 성령이 안 온다는 거예요. 꼭 11시 예배 드려야 돼요. 전도사가 서면 안돼요. 가운 입은 목사가 서야 또 성령 오는 거예요? 집사가 예배하고 집사가 떡 주면 이건 주의 떡이 아닌 모양이죠.
어떤 형식과 제도가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임할 수 있는 그런 매체가 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법에 위반자로 죄인취급 당했습니다. 그 죄인을 너희들이 믿느냐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질서 잡기 위해서 만든 법의 위반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인데 위반하신 그 아들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현재 이 법을 따르겠느냐? 어느 쪽을 따르겠느냐고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제시는 그 당시 에베소나 마게도냐 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경을 펼치는 모든 장소가 바로 그 에베소가 되고 마게도냐가 되는 거예요. 사건이 임하면 어떤 장소도 그게 빌립보가 되고 로마가 되는 겁니다. 성지순례 안가고 서울 동네를 그냥 돌아다녀도 그게 에베소이고 빌립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만 복음 전한 게 아닙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모든 성도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1차, 2차, 3차 전도요? 사도 바울만 1차 2차 3차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교인들도 1차 2차 3차 4차 5차 6차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거 그거 위험스러워요. 역사적으로 재구성해 버리면 이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과거 역사로 끝나 버립니다. 이게 성령의 반복성이 없어요. 그러면 이 계시가 오늘날 계시가 아니고 옛날 한 물간 계시가 되어 버립니다.
한 물간 계시가 되어 버리면 마치 이와 같은 거예요. 우리는 선악과 구경해 본적도 없는데 왜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을 왜 우리가 감당해야 되는가! 이렇게 대드는 수가 생겨버립니다. 선악과 따먹은 적 없는데 선악과는 우리 조상이 아담이 다 먹어놓고 왜 그 벌은 우리가 져야 되느냐, 이 불공평함이 웬 말이냐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선악과 따먹은 그 사건은 아담의 족속의 모든 인간에게 되풀이 반복해서 적용이 됩니다. 사건화 돼요. 그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육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육신, 이것은 흑이고 백이고 관계없어요. 이것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그것도 관계없어요. 남녀노소 관계없이 그냥 육신이에요. 육신은 그 속에 선악과를 기억해요. 육신은 선악과를 기억해요. 그래서 선악과 요소가 걸핏하면 선악과로 나가요. 나도 선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안다는 그 쪽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어요.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고마운 것은 예수님마저 그 육신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만 육신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마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어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육신의 몸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그런 가능성을 드디어 육신 속에서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떤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데 그 말씀의 의미는 인간들이 아는 법적이고 질서적인 것 말고 하늘나라에서 통하는 그 법에 의한 의미로 우리에게 들어와야 되는데 그게 들어오려면 우리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어야 했던 그 자리에 우리를 거기에 집어넣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게 하늘입니다. 복음의 형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사람이 돼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셨다. 비로소 사람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못 알아보는 순간, 그 인간은 심판, 저주이다. 이런 조건을 부여 받은 거예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가고 싶은 그 방향성을 우리가 갖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방향성에 동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허락도 없이 그 반대방향으로 하나님 쪽에서 우리가 사람이 되어버려요.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하늘에서 찾으면 안돼요. 어디서 찾아야 돼요? 사람 속에서 찾아야 돼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 속에서 찾아야 돼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제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예수님은 사람의 법을 거부한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이 예수님이 맞습니까? 라고 찾아오자 하는 우리는 기껏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의미밖에 모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의미가지고 인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포착한 그 의미를 어떻게 포착합니까? 그것은 과학수사대 동원해도 포착이 안돼요. 될 수가 없습니다.
낚싯대 가지고 계류장에 있는 비행기를 낚시할 수가 있습니까? 던지면 칼기 747이 끌려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하고 되지도 않는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주님 모가지에 딱 걸려서 우리한테 끌려옵니까? 안 끌려오잖아요. 이것은 내 떡이고 살이라, 살과 떡인데 주께서 자동적으로 그 때 오셔야 맞습니다. 하면 주께서 ‘오냐, 알았어! 내가 찾아 갈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건 안 되지요. 주님이 어디 택배 회사도 아니고 부르면 쪼르르 와서 뭘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뭘 도와드릴까요? 만날 고객님 하는 그런 예수님이 어디 있어요?
성경 다 외우고, 말씀 외운다는 것은 수련회 때 자장밥 먹으려고 하나 둘 줄서서 성경 구절 외우는 것, 그것은 교육상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말씀을 외웠다고 해서 자장밥 먹을 권리가 생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정도까지도 미신적이에요. 수련회 마지막 날에 나무를 모아놓고 휘발유 부어놓고 자기 죄를 적으라해 가지고 인디안 보호구역에 인디안 출장한 것도 아니고 자기 죄를 써서 그 불에 던지고 촛불 켜고 노래 부르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생각해 보세요. 자기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그만큼 죄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데 거기서 딴 죄를 골라잡습니까? 전체가 죄인데 인간 자체가 육신의 몸인데 거기서 따로 분리해서 이것은 죄라는 말은 나머지는 죄가 아니라는 이야기밖에 더 되겠어요? 모든 게 죄인데 거기서 뭘 따로 죄인 것과 죄 아닌 것을 뽑아냅니까? 머리에 하얀 머리 뽑습니까? 엄마 머리에서 하얀 머리까락 뽑듯이 그렇게 뽑을 수 있습니까? 그래 놓고 뽑혀진 죄에 대해서 울면서 회개합니다.
사람이 울 때는 딱 한 번 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사기 당했을 때입니다. 돈과 관련되었을 때 웁니다. 뭔가 사기 당했을 때 울지 나머지는 미리 울어놓으면 혹시나 좋은 복 올까싶어서 하나의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미리 회개하면 지 잘못 때문에 벌 받는 것을 봐준다든지 상쇄 해 줄까 해서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그것은 나도 알겠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사람이 울컥할 때는 사기를 당했을 때, 그리고 남편이 바람피웠을 때, 자존심이 상했을 때 울컥 나옵니다. 내가 기대한 것이 깨 질 때 사람은 웁니다. 일종의 반항입니다. 드라마 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일찍 죽을 때, 안됐을 때 막 울잖아요. 감정이입 돼서 울잖아요. 사람 여럿 죽이는 드라마 같으면 만날 울겠네요.
하나님이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람에서 하늘로 가는 것 길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을 법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께 나가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것은 성사될 수 없는 아이디어를 인간들이 그동안 율법이란 이름으로 해 온 거예요. 지금도 교회에서 하고 있고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됐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도 않았어요. 왜 기도 할 때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이유가 뭔데요? 네 기도가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내 이름으로 기도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려면 우리는 어디 가야돼요? 내 이름을 포기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포기 했다는 것은 자기 체면과 명예와 자기 자존심, 자기 재산, 자기 생명 다 포기 한 거잖아요.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요? 내가 중요하지 예수가 중요합니까? 아무리 예수가 중요해도 자기 자신을 버리기까지 예수님에게 드릴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따라서 어느 누구도 예수이름으로 기도 할 사람이 없어요. 왜? 예수이름을 빙자해서 결국은 자기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기도는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그냥 기도 했다 하지 말고 그냥 육신의 몸부림이다. 육신이 지 혼자 몸부림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름에 바닷가에 안 보내주니까 화가 나서 방바닥에 헤엄치는 애들 있지요? 그 식입니다. 주께서 응답안하니까 지가 방바닥에서 철야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 방바닥이 바다 되는 거 아니에요. 해변 아닙니다. 기도 실컷 두 시간하고 깨보면 맨 자기 방이에요. 그리고 기도 한 당사자는 여전히 죄인이에요. 기도하기 전에도 죄인이고 기도 하고 난 뒤에도 죄인이고 조금도, 손톱만큼도 아, 손톱만큼은 달라졌겠네요. 손톱은 이만큼 자랐으니까 달라질게 하나아도 없습니다. 제발 속지 마세요.
주께서 우리로 기도 하게 만들고 헌금하고 예배하고 교회가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육신 됨을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기도 하면서 네가 왜 육신인줄 알라고 네가 헌금하면서 네가 왜 육신인줄 알라는 겁니다. 헌금 실컷 했는데 헌금해도 30배 60배 기대 했는데 헌금만 달랑 뺏겼을 때 도대체 내가 이렇게 헌금해도 돌아오는 게 없고 본전도 못 찾고 어째 내가 헌금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다시 헌금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달으라는 말이죠.
헌금해 놓고 복은커녕, 하루아침에 부부가 다 죽은 경우가 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둘이 결혼식 할 때 얼마나 호화롭게 결혼식을 했겠습니까? 한날한시에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것도 헌금 안한 게 아니고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한 푼도 없었으면 나았을걸! 오래 살고, 오래 살면 오랫동안 해로할 건데요. 괜히 돈 생겨서 헌금 할까 말까하다가 둘 다 다 죽었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돈 없는 것을 천만 다행이라 하세요. 돈이 있으면 하루아침에 죽는 수가 있어요.
너희는 육신이라는 글은 성경에 나와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글 일뿐이고 정말 내가 육신이라 하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세기고 또 세기고 날마다 느끼고 또 느껴야 될 문제이거든요.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 몸 자체를 하나의 칠판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칠판으로 사용할 때 그냥 매직으로 쓰면 간지럽지요. 주께서 매직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조각할 때 쓰는 칼 있죠? 칼 가지고 우리 몸에 성경말씀을 새겨 버립니다. 상당히 엽기적이에요. 피가 줄줄 나면 잠시 멈췄다가 피 멈추면 다시 세깁니다.
성경말씀을 세깁니다. 세기기면서 뭐라 새기느냐 하면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했던 여인을 잡아왔던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고 돌로 칠까요? 라고 제안했던 그들 앞에서 주님께서 땅에다 뭘 썼습니까? 글을 썼더니만 짱돌 들고 왔던 사람들이, 뭘 쓰는데 아무 소리 안하고 뭔데? 글을 보는 순간, 무슨 영문인지 그들이 들고 있던 돌은 다 놔 둬버리고 그 여인에게서 하나 둘 다 떠나가 버렸어요.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께서 묻습니다. ‘여인아! 너를 고소한 자가 몇 명이지?’ ‘다 갔습니다.’ 그들이 돌멩이를 놓고 가게 된 것은 예수님의 추가적인 행위 때문입니다. 그 추가적인 행위가 뭡니까? 땅 바닥에다 글을 썼잖아요.
글을 쓰니까 비로소 그 쓴 내용은 모르지만 효과는 알 수 있죠? 그 글로 말미암아 어느 누구도 죄 없는 자로서 여인을 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쓰시는 글은 그 어느 누구도 나는 누구를 죄 있다고 칠 수 있는 입장은 못 된다 그것을 확연하게 보여 주는 겁니다. 그것을 아까부터 제가 육신이라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더 육신 덜 육신 없이 모두 그냥 보편적으로 육신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쓰신 것은 네 몸이 육신 아니고 육신이 너라는 거죠. 네 몸이 육신 같으면 육신인데 네가 인간답게 살아라! 이렇게 돼야 되는데 육신이 바로 너라 한다면 네가 인간답게 살던 안 살던 무엇을 해도 너는 육신이 육신 됨을 까발릴 수밖에 없는 그런 여생만 너한테 인생에 남아 있다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이 슬슬 60 넘어가서, 오늘 참 연세 많으신 그 분 안 나오셨네요? 추운데 넘어지면 또 골절되면 큰일이죠. 그 연세 많은 분이 저 뒤에 앉아 계셨는데 저 분이 16살 때도 그렇게 늙었을까요? 아니죠. 16살에는 16살쯤 됐을꺼에요. 젊었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16살 때 그게 본 얼굴입니까? 지금이 본 얼굴입니까? 정답은 아직도 본 얼굴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언제 본 얼굴입니까? 돌아 가셨을 때 화장터에서 흙이 될 때 인간은 본 얼굴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이 얼굴은 가짜입니다. 임시 땜빵입니다. 일시적으로 조립된 겁니다. 어디서? 부모의 태중에서 조립된 겁니다. 주께서 그것을 방금한 그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여기에 4절에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륜하는 것은 자전거타고 도박하는 것 말고 메커니즘, 정의, 작동원리, 순서 절차 이것을 의미하거든요. 이 의미는 어느 순간을 콕 짚어서 이게 납니다. 하는 것을 주께서 일체 허용을 안 한다는 거예요. 어느 순간도 내가 아니라면 그러면 나는 뭡니까? 너는 육신이라니까요. 나는 육신이 아니고 육신이 바로 너에요. 나는 항상 삭제 당해서 항상 어디로 돌아와야 돼요? 나는 몇 살을 살던 그것도 육신이다. 이 말이에요. 61이 되면 그것도 육신이고 62 되면 그것도 육신이고 67되도 그것도 육신인거예요.
주님께서는 네가 어떠냐를 보는 게 아니고 너라는 육신이 이렇다는 것을 특정 개인에게 알려주는 믿음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공통적인 믿음을 제공하는 겁니다. 일종의 배급제입니다. 아침에 밥 먹을 때 자기 밥그릇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자기 숟가락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옛날에는 양푼이라는 게 있어서 네 밥 그릇 내 밥그릇 없이 밥하나 떠서 미나리 고사리 넣고 고추장 풀어 넣고 비벼가지고 알아서 먹어라, 고기 넣고 하면 형 같으면 손 떼 고기 나 먹고 동생들은 아무 것도 없는 밑에 밥만 먹고 그랬어요.
믿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믿음을 준적이 없어요. 이것은 믿는 사람 같으면 자기 육신이라고 인정할 사람 같으면 믿을 수 있는 그 믿음을 준 거예요. 그래서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오직 집단 구원밖에 없어요. 이게 옛날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에 이 집은 어린 양 두 마리잡고 저 집은 세 마리잡고 하는 그런 것 없어요. 어느 집이든 어린 양 한 마리로 족합니다. 장자가 키가 몇 센티든지 150이던 170이던 관계없습니다. 모든 것이 어린 양과 다 대비가 돼요. 문설주 어린 양의 피와 키와 나이와 상관이 없고 장가를 가든 안 가든 상관이 없어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이 따지고 드는 주님이여! 제가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고 인간이 갖고 있던 의미, 법, 질서를 전혀 주께서는 거기에 동조하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육신이 뭐? 너만 구원받으려고? 웃기고 있네! 내가 왜 너만 구원할 이유가 뭔데?’
70명은 한 명이다. 남은 자는 7천명은 오직 엘리야 한 명이에요. 한 명이 7천명이고 7천명이 한 명이라니까요 7천명들이 비밀 소집했습니까? 없어요. 7천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지 7천명 당사자들은 각자 몇 명이에요? 각자 자기밖에 없어요. 비밀통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가 뭐라 했습니까? 주님이여! 나만 남았습니다. 라는 생각을 7천명도 동일하게 자기 자신이 사는 자리에서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를 제가 해 보겠어요. 성경에 보면 교회라는 단어 나오지요? 그러면 이 땅에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러면 교회를 세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너무나 간단한 논리잖아요. 성경에 교회 나오잖아요. 그 교회 우리 보고 세우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세워준다고 했습니까? 주께서 세워주지요. 그러면 우리는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네요. 없잖아요? 그죠? 제 말이 맞잖아요. 그런데 어떤 데를 보면 교인을 뺏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교회를 빼앗겨요? 무슨 그런 일이 다 있습니까?
세 번째 이야기할게요. 성경에 교회 있지요? 교회 있잖아요. 성경에 교회 있으면 진짜 교회 있잖아요. 됐잖아요. 무엇을 걱정합니까? 왜 교인 빼앗겼다는 말이 왜 나오지요? 지금 무슨 교회를 두고 이야기하십니까? 교인 빼앗기는 교회가 그런 교회가 성경에 나오는 교회입니까? 교인 빼앗기고 교인 데려오는 교회가 그게 성경에 나오는 교회, 그 교회 맞습니까? 빼앗기고 다 빼앗기면 그러면 교회 없잖아요. 그죠? 10명 있는데 10명 다 빼앗기면 교회 없잖아요. 그러면 성경에는 교회 있는데 여기는 교회 없고 그러면 교회 없네! 예수님이 거짓말 했네, 교회 없는 것을 가지고 교회 있다고 예수님께서 거짓말한 샘입니까?
어떤 애가 아버지가 하도 늦게 퇴근을 하니까 오랜 만에 아버지를 아침에 본적이 있어요. 애가 인사하기를 아버지, 왜 여기 오셨어요? 이 집에 놀러왔어요? 하도 안 들어오니까 자기 집에 놀러온 줄 알았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어린 애는 아버지가 매일 우리 집에 와야 아버지이고 가끔 오게 되면 손님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 입장이냐 하면 자기입장인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입장은 집에 자주 들어오나 가끔 들어오나 여전히 아버지잖아요.
교회라는 하는 것은 성경에서 교회가 나오면 교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교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교회를 생각해야 될 건데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이 교회가 교회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말씀에 위배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은 이 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다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구원의 절차 같은 것을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혼란들이 있었던 겁니다.
3절 봅시다. 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여러분들이 어떤 신화와 끝없는 족보와 변론을 벌린다는 것은 의견이 지금 분분하다는 뜻이잖아요.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각자가 따로 따로 일치가 안 되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있는데 여기서 해석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신학을 우연히 듣고 난 뒤에는 이상하다 한 하나님이고 예수님인데 왜 그렇게 교파가 많고 왜 신학은 여러 종류가 되는지 그 중에 어느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진짜로 걱정이 되고 염려가 돼서 묻는 물음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받았죠? 그런 것 안 받았습니까?
이 사람은 이 이야기를 하고 저 사람은 저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쪽을 해야 됩니까? 라고 할 때 많은 교파에 있는 현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교파를 믿지 말고 신학을 믿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러면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왜 교파는 왜 있느냐 말이죠. 진짜 순순복음 가도 그 이야기하거든요. 신학 믿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그런데 예수 믿으라는 것 다 똑같은데 왜 싸우고 있느냐 말이죠.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정은 전혀 입지가 안 되고 있다 말이죠. 어디서 문제냐 이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해결이 안 되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가지 교파가 있더라도 예수 믿으면 됩니다. 모두가 형제라고 하거든요. 그게 형제입니까? 그것은 더 나빠요. 예수 믿는다고 형제 아닙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 당시에도 엄청나게 많았어요. 그게 형제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양의 탈을 쓴 악마의 종이라 했습니다. 어디서 형제라고 이야기해요. 고린도 교회 자체를 두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다 하면 여러 가지 의견 나온 그것도 잘못이라고 하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고 무엇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까? 라고 할 때에 제가 보기에는 왜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 소리 하니까 더 이상하네, 왜 구원 안 받아요? 구원받으면 좋지, 천국가면 좋잖아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지금 가치 있는 존재인데 이 가치 있는 존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살아서도 가치 있는 존재, 죽어서도 천국 가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하는 그 발상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추방된 취지를 모르는, 일단 추방되고 난 뒤에 자기를 미화하고 꾸미려는 그런 마귀적인 것에 놀아났기 때문에 그런 자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뭘 해 줄 겁니까? 라고 아까워 같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야기하기를 목사님, 성경의 중심은 어떻게든 구원받는 게 성경 중심 아닙니까? 라고 묻기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어떻게 구원받는 게 성경의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게 성경의 중심입니다. 천국은 내가 구원받았다고 외치는 게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라고 외치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무엇을 포기해야 돼요? 내가 구원받고 싶어 한다고 어떤 해답을 제시해 줄 의무와 책임은 하나님에게 없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 싶은데 이렇게 되기로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책임지고 나의 구원의 원칙, 정보를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왜?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왜 가르쳐주는데? 그러니까 그것부터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행적을 한 그것도 잘못이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 것도 잘못이고 오직 잘못이 아닌 것은 뭐냐?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 1장 12절의 그 말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 나 같은 인간은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모든 일의 주체 자가 사도 바울, 내가 내 인생의 주체 자가 아니고 내 인생을 이끌어간 주체 자는 예수그리스도가 나대신, 나의 주체 자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몸입니까? 사도 바울의 그 몸은 사도 바울의 몸이 아니고 소유가 예수님의 것이죠. 예수님의 것이니까 예수님이 키우고 구원하겠다는 게 그게 뭐가 이상해요?
지금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은 이 몸은 일단은 내 것인데 내 것을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질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거기에 제가 답변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질문 자체부터 바꿔야 된다 말이죠. 주님의 몸인데 주님의 몸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주님의 몸은 예수님께서 구원하시지, 누가 십자가로 구원하십니까? 내 몸을 어떻게 구원합니까? 네 몸은 구원안하지, 너 몸을 왜 구원해요?
어떤 젖소 키우는 집이 있는데 거기에 분유업자가 지나가니까 ‘우리 집에 젖소 키웁니다.’ 뭘 어쩌라고? ‘우리 젖소는 맛있습니다.’ 맛이 있는데 어쩌라고? 당신 짜서 많이 먹으라. 이 말이에요. 그러나 그 젖소가 그 분유 회사의 소속이라면 ‘그래, 요새 젖이 맛있어요?’ 뭔가 이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소유권이 주체가 내 인생이 내가 주체가 되면 애초부터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를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네가 뭔데 구원해요? 하나님이 사랑이라며? 누가 사랑이라 하는데? 누가 하나님이 사랑이래?
진짜 하나님이 사랑 같으면 애초부터 지옥을 안 만들어 놔야지 무슨 사랑이 자기 만든 피조물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불 가운데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아이고 시원하다 하는 그런 무슨 이상한 사랑이 다 있어요? 부자를 지옥에 보내놓고 부자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게 사랑인지, ‘사랑 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너무 뜨거워요! 그런데 고마워요 이렇게 주께서 사랑해 주셔서’ 이러는 부자 봤습니까? 부자가 너무 고생해서 정신병자가 됐어요.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욥을 보세요. 욥을 생각 해 보면 욥에게 고난이 오지요. 욥에게 고난이 오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욥을 보는 주변사람들의 인식자체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까발려주는 겁니다. 욥이 잘사는 것은 믿음이 좋아서 잘 산다고 욥의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친구들이 의리 지킨다고 찾아온 거거든요. 욥의 딸이 이쁜것도 믿음 좋아서 딸이 예쁘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것은 바로 욥만 그런게 아니고 평소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들도 평소에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특히 욥기 8장에 보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한 말은 이것은 욥보고 하는 게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보고 평소에 그렇게 세뇌시켜 온 거예요. ‘그래 걱정하지 마! 지금은 힘들더라도 성공할거야!’ 바로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소리 입니까?
그런 욥이 갑자기 고난을 받으니까 주변의 친구들이 자기가 생각했던 기준을 억지로 맞추기 위해서 자기보다 심한 죄인으로 만들었어요. ‘거봐, 당신이 우리보다 의롭다 하지만 봐라, 우리는 멀쩡하잖아, 당신은 우리보다 더 심하게 벌 받는 것을 보니까 결과는 당신은 우리보다 죄가 더 많다 그렇게 결론을 내릴 때 그들은 자기가 고수하고 있던 그 법칙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욥기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거꾸로 되지요.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 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랐어요. 언제까지? 욥이 고난 받기 전까지는 죄인인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는 십자가 체험하기 전까지는 십자가를 본 받으면 될 줄 알고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줄 알았죠. 그런데 정작 그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는 바로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애초에 나한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고 에베소뿐만 아니고 여기 서울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명이나 시대나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은 복음사건이 터져버리면 전부 다 하나로 묶어집니다. 하나의 의미로 통용되는 겁니다. 그 의미가 바로 복음적 의미인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경련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족보, 끝없는 족보, 끝없는 신화, 이것을 설명하면 족보와 신화라는 것은 신화이니까 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에 관한 이야기를 왜 신이 등장했느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 인간이 있으면 인간 뒤에 뭐가 있습니까? 인간 뒤에 대자연이 있지요. 인간은 이 대자연을 다루려고 해요. 다루려고 하는데 폭풍우라든가 가뭄 이런 것은 잘 안되지요?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 고기 잡는 사람들 전부 다 걱정되잖아요. 그래서 바알종교가 뭐냐 하면 대자연을 구획을 나눠서 전문가 신을 따로 따로 전문적인 신을 배정을 해요. 그래서 바알은 곡식과 폭풍을 관장하는 전문적인 신입니다. 바알 신들의 특징이 뭐냐 식물이 겨울 되면 죽잖아요. 봄되면 다시 오르지요.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거예요. 일종의 부활 같은 것, 새 생명, 새 생명 운동하는 사람들은 바알종교로 보면 돼요. 내가 다시 산다는 겁니다.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이 이게 기독교인줄 아십니까? 모든 종교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불교도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종교에 다 있어요.
우리는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나로 죽어요. 나는 나로 인해 주고 그리스도 몸의 힘으로서 다시 사는 거죠.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사람들이 영원불멸하고 싶어 환장해요. 여러분 사람들이 안 죽는 게 불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죽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해요. 죽는 것이 낫습니다. 안 죽으면 골치 아파요. 지옥에 간 사람들 어떻게 됩니까? 15년이 넘어도 안 죽어요. 죽었던 자도 다시 무덤에서 부활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끝까지 갈굴 꺼야. 아
신화라 하는 것은 신의 전문분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시루떡 신이 따로 있어요. 여자 결혼할 때 결혼신 따로 있고 이사할 때 이사신이 따로 있고요. 전문분야가 있어요.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뭐냐 목축의 신이에요. 왜? 여호와 믿던 조상 아브라함은 목축 했거든요. 그러니까 목축했을 때는 여호와를 믿지만 일단은 정착해서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을 믿는 것이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실제로 주변나라를 보니까 바알을 믿어서 잘 됐어요? 못 됐어요? 잘 되도 너무 잘살아요.
삼성그룹, 현대그룹 sk그룹 너무 잘 살아요. 다 교회 다닙니까? 아니잖아요. 아니지요. 의존교회에 삼성그룹의 이건희 아들이나 손자나 와서 아이고 교회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헌금을 용돈 정도는 내자 하고 일억 내면 되는데 안 생겨요, 15년 되도 그런 사람 안 와요. 이 세상에는 돈 버는 신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옛날에는 부처였고 지금은 예수가 되어버렸었어요. 심지어는 순복음이 등장해서 방언하는 신, 병 고치는 신이 완전히 예수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신화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 이 신은 무슨 뇌물을 좋아하고 어떤 선물을 좋아하고 프라다를 좋아하는 신, 구찌를 좋아하는 신, 명품을 좋아하는 신, 그렇게 정분이 있어서 그것을 달래게 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그냥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그 주변에 암몬, 모압, 아람, 앗수르, 바벨론, 몰렉 블레셋 그렇게 해서 다들 이스라엘만큼만은 보다는 잘 살았어요. 하나님이 지켜 주니까 이스라엘이 살았지 힘으로 비교해서는 그들한테 못 이겨요. 그러니까 여호와 믿는다는 그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참 초라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신이 여호와에요.
그래서 그들은 제사에 대해서는 여호와에게 하고 나머지 모든 일상에 대해서는 기존에 잘 나간다는 그 신을 도입한 겁니다. 그러니까 죄 용서에서는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 애들 결혼하게 되면 궁합보러 또 가야돼요. 그리고 또 어느 학교를 입학할지는 미아리쪽에 용한 신이 또 있어요. 그리고 사업에 대해서는 추도 예배라는 이름으로 조사에게 해야 돼요. 조상님이 도와 줘야 또 되니까 기독교는 그게 부끄러우니까 추도예배라고 흡수 했지만 추도 예배라는 게 뭡니까? 제사지내는 거 아닙니까?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예수, 이 잘난 나를 하나님이 버리지 마옵소서! 이 잘난 나, 이 잘난 나, 이 훌륭한 나, 이게 뭡니까? 이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선악과 따먹은 나는 내가 뭐가 된다? 신이 된다. 그 신이 되고자하는 그 속성을 인간은 이 몸이기 기억해요. 인간은 몸을 포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5절에 보면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경계,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미 인간은 육신이니까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모든 복음과 모든 말씀은 인간을 치는 쪽으로 가요. 언제까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할 때까지 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 뒤에
딤전 1:9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딤전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것이 여러 사람을 두고 각자 하나씩 맡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한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아비를 안쳤다고 해서 아비 안친다고 보장을 못해요. 5년 뒤에 칠 수도 있어요. 여기에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하지만 경건치 아니한 자의 정도가 어느 정도 돼야 경건한 거예요? 음행하는 자며 남색 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 이 모든 것은 누구나 배고플 때 누구나 성질 욱할 때 나올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기서 벗어난다면 매직으로 이 부분을 지워버려야 돼요. 이거 나한테 해당생사항도 아닌 것을 괜히 성경 부피만 키우려고 쓸데없는 것을 나한테 안 되네! 다른 성경 없나? 빠진 성경 없어? 나는 이미 초월했고 나는 착하기 때문에 그런 거 필요없어! 그게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모든 말씀은 어제만이 아니고 오늘도 내일도 또 경계 받아야 돼요. 모든 말씀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의 뿌리이다.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죄다 형제보고 욕하는 것도 살인죄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내놔라, 누가 너희에게 돈을 꾸고자하거든 거저 주라,
미쳤어요. 돈 문제가 나오면 이것은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아이고 돈을 꾸는데 거저 주라고요? 우리 살림살이 어떻게 하려고 거저 줘요? 이자 꼬박 꼬박 받아야지, 모든 성경 말씀은 네가 애초부터 육신이고 그 육신들의 자리가 바로 구원이 보이는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만이 고맙다는 것을 예수님만이 귀하게 보이는 그 자리를 주께서 일부로 그 틀을 만드는 대상으로 우리를 삼으신 겁니다. 아, 주여 제가 바치겠나이다. 이 몸 바쳐서 주께서 복음 전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디모데한테 당부한 복음의 말씀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대할 때 지키려고 덤비지 말고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지킬 수 없나를 아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육신이 육신의 티를 내면서 자꾸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아예 하루하루가 주님에게 바쳐진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임 받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