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山 김동출 수필 - 蘭의 香氣 속에서
蘭의 香氣 속에서
올해 1월 초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습관처럼 거실로 나서 성모상(聖母像) 곁에 얌전히 놓아둔 난(蘭) 분 앞으로 살며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튼튼한 잎새 밑에서 검은 자(紫색) 꽃대 하나가 난석을 헤치고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일 년 넘게 자식처럼 정성 들여 키운 보람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매일 이른 아침 눈도장을 찍는 관심 가운데 자색 꽃대는 조그만 곁가지를 7개를 달고 점점 키를 키우기 시작하였다. 꼭 보름쯤 되었을까? 설날을 앞두고 한 뼘 넘게 자란 꽃대의 곁가지 끝에 맺은 자색 꽃망울이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여 겨우내 메말랐던 우리 부부의 마음에 희망과 감동과 헤아리기 힘든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이번 설날을 전후하여 향기로운 향기로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난분(蘭盆)은 재작년 가을에 들여와 우리 부부와 함께 살게 된 대명보세란(大明報歲蘭)이다. 그즈음부터 필자는 장기입원한 환자가 겪게 되는 섬망(譫妄) 증상 등의 심리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차츰 정신이 안정되고 기초체력이 좋아지게 되자 소일거리로 다시 반려 식물을 키워보자는 아내의 의견에 의기투합하였다. 다음날 십 년 단골로 다녔던 시내 외곽에 있는 대형 K 화원에 가서 큰 화분에 관엽식물 ‘싱고니움’과 ‘스킨답서스’, 그리고 대명보세란(大明報歲蘭) 몇 촉을 정성 들여 난분(蘭盆)에 심어와서 정성 들여 여태껏 키워온 보람을 얻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은 한량없었다.
젊은 시절 한때 미치도록 난을 좋아했다. 값비싼 동양란을 몰랐던 20대 청년 시절에는 한국 자생란 춘란(春蘭), 석곡(石斛:석란), 풍란을 어렵게 구해서 실험적으로 키워보았다. 1976년 교육대학 졸업 후 발령을 기다리며 잠시 고향에 머물 때는 난원(蘭園)을 가진 향리(鄕里)의 선배 형과 가까이 지내면서 동양 난(蘭)에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내 고향 거제도의 산과 바닷가는 자생 난의 천국이었다. 봄이 오는 산을 오르면 배수가 잘되는 양지바른 산골짜기 낙엽 진 참나무 아래 억새밭, 풍수지리를 몰라도 명당 묏자리 같은 감이 오는 곳 낙엽 더미 아래 여기저기에서 새파란 춘란 포기가 군락을 이루어 저마다 꽃대 하나에 우아한 꽃잎을 달고 은은한 향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때에는 난에 대해 무지하였을 때라 신기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춘란을 뿌리째 캐와서 화분에 심어 보았지만 이내 꽃이 지고 나면 볼품없이 시들어버리는 춘란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향 집 감나무 밑에 무더기로 심어놓았던 춘란은 해마다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 고향 집을 찾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그런 나만의 호사도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 초에 시작된 옥포 조선단지 배후도시 건설로 산비탈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고향마을도 고향마을 꼭대기 필자의 생가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고향 집 뜨락에 돌이끼와 함께 심어놓았던 춘란(춘란) 향기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낙인처럼 남아있다.
그 후 교직에 있으면서 봄이면 종종 값비싼 동양란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팔러 오는 보따리 난 장수에게 사들인 난으로 蘭 盆을 늘려가며 아파트 베란다에다 나만의 난원(蘭園)을 만들어놓고 퇴근 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좁은 베란다에서 생육 조건이 까다로운 난을 건강하게 키우기란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대나무 발로 햇볕과 습도를 조절하려고 애썼으나 비싸게 사들인 난들은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시들시들 시들어 베란다 한구석이 빈 난 분으로 채우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나의 무식한 애란(愛蘭)의 극성은 멈출 수가 없었다. 뒤늦게 승진하면서 고향 친구들과 선후배들로부터 선물 받은 축하 난 분을 난을 좋아하는 교직원들에게 우선 분양하고 남은 몇 분(盆)을 집으로 가져와 키워보기로 하였다. 고급 분무기와 영양제와 소독제도 구입하고 분갈이를 위한 도구도 새로 장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박한 내 꿈은 몇 년을 넘기지 못했다. 보듬어 키워야 할 필자가 2019년 정년퇴직한 그해 여름에 심장이식 대기 환자가 되어 장기간 서울에 있는 A 종합병원에 입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물주기 등 관리에 애로를 느낀 아들이 난의 생육상태가 좋을 때 아들의 지인들에게 모두 분양하였다. 남 주기 너무 아까웠지만, 사람의 생명이 위중했던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2년 후 퇴원하여 귀가해 보니 ‘못난 소나무 고향 선산 지킨다’라는 말처럼 평소 나의 애란(愛蘭) 텃새에 밀려 항상 구석 차지였던 목마른 대형 관음죽만 텅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주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즈음 마침 나의 퇴원 소식을 들은 친구가 거금을 들여 다육식물 10여 종을 택배로 보내주어 정성을 쏟아가며 키워보았지만, 처음부터 다육식물 키우기에서 제일 중요한 심기부터 실패하여 입양한 지 6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나의 반려 식물은 모두 힘없이 녹아들고 말았다. 처음 당해보는 참담한 실패였다. 애초부터 베란다가 없는 아파트 가옥 구조 우리 집 안에서 다육식물은 키우기는 무리수였기에 죽어간 다육식물과 분양해 준 내 친구에게 너무 미안해 이 사실을 알려주지도 못했다. 다육식물 키우기에 실패한 그 이후 재작년 가을에 몸과 마음이 환자의 일상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차츰 안정되고 기초체력이 좋아지게 되자 반려 식물을 키워보자는 생각에 아내와 의기투합하였다. 그 이튿날 십 년 단골로 다녔던 화원에 가서 큰 화분에 관엽식물 싱고니움을 심고 아름다운 자색의 꽃을 기대하면서 대명보세란(大明報歲蘭) 몇 촉을 들여와 자식 돋보듯 키웠다.
「보세란(報歲蘭)의 종류는 동양란 중에서 잎이 넓고 몸집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웅장한 것이 ’금화산‘으로 명명된 대명(大明) 보세란(報歲蘭) 이란다. ‘보세’란은 이름 그대로 ‘보세(報歲)’ 즉 해가 바뀌는 것을 알린다‘는 뜻. 음력 정월(양 1,2월)에 개화(開花)하므로 보세란(일명 鶴之花)이란 이름을 갖게 됨. 꽃말은 미인. 넓은 잎과 하나의 대웅에 적자색(赤紫色) 꽃이 여럿이 피는 일경 다화성(一莖多花性)의 향기가 아주 좋다」 라는 난원(蘭園) 주인장의 권유로 모르고 샀지만, 이번에 꽃을 피우고 보니 참 잘 들여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蘭)의 품격은 우아함, 아름다움, 인내심, 겸손,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 등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다. 필자가 난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蘭’- 그 특유의 우아하고 섬세한 모습과 고상한 향기 또는 나의 모습에서 특별한 순간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움」보다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난(蘭)을 감상할 때 얻게 되는 정신적 정화와 안정감과 편안함 때문이다. 일찍이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대개 천지간 만물 가운데서 혼(魂)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혼(生魂)이니 그것은 초목(草木)의 혼으로서 생장할 수 있는 혼이요, 둘째는 각혼(覺魂)이니 그것은 금수(禽獸)의 혼으로서 지각(知覺)할 수 있는 혼이요, 셋째는 영혼(靈魂)이 있다.」 하였다. 이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영혼 혹은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 난을 비롯한 특정한 관상용식물 애호가들은 특정한 식물을 아기 돌보듯 정성 들여 키우는 은연중에 우리네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성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나 뿌리로 대를 이어가려는 식물의 생혼(생혼)을 느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성찰하였기 때문이리라.
필자는 요즈음 난이 피어있는 동안 날마다 미인을 만나듯 난 향기 속에서 행복하다. 또한 누구는 작위적(作爲的)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명 금화산(金華山)으로 부르는 자색 대명보세란이 은은한 향기를 피우기 시작한 그 날부터 나의 근심 걱정이 하나둘 사라져 버렸다. 쪼들리는 생활비 걱정에 맘고생 할 때쯤 방학을 맞이하여 귀향한 여식이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주었다. 난의 꽃이 필 때쯤 내려온 동업자(同業者) 똑순이 여식이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문의하여 주택연금 신청한 것이 난 꽃이 절정에 이를 때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과 성모마리아의 은총과 축복에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길상운집(吉祥雲集) 만사여의형통(萬事如意亨通)이라. 2024년 甲辰年에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과 전국의 모든 애란가에 길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구름처럼 모이고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고 건강과 행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2024-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