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59
산목 함동선 시인
산목(散木) 함동선(咸東鮮) 시인을 만난 것은 1988년 쯤 그가 대학로 예총회관에 있었던 문인협회에서 어떤 행사 때였다. 그러나 좀더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그가 1995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피선되고 문협 사무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더욱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는 1930년 5월 21일(음)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해월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연백군 온정면장이던 아버지와 함께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생활하면서 금성국민학교와 연백공립농업중학교를 다니면서 그때부터 문학수업이 계속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저녁 38선을 지키던 군인들이 마을 외딴 곳에 군용 지프와 트럭을 숨기더니 배를 타고 강화도로 후퇴하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어머니께서 배를 마련하고 밤중에 마을의 젊은이 몇 사람과 함께 아랫개에서 배를 타다. 어머니가 허리춤에 달아준 부적과 ‘잠깐일 게다’라는 말씀을 듣고 떠난 길이 60년이 되고 어머니와 마지막 이별이었다. 강화도에서 피란민과 함께 수원으로 걸어가서 용케 화물차를 타고 대전에 가다. 대구를 거쳐 한 달만에 부산에 도착하여 함태영 심계원장 비서실장이던 사촌 동욱 형을 만나다. 병으로 여러 달 고생하다. 한편 그해 10월 병으로 집에 숨어 있던 동훈 형은 후퇴하는 인민군에 잡혀 서낭당 고개에서 총살되다. 시 「형님은 언제나 서른 네 살」은 그 형을 노래한 시다.
산목 시인은 그의 연보(年譜)에 월남한 사연을 위와 같이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1945년 동찬(4남) 형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속을 끓이시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8.15 광복을 눈앞에 둔 6월 4일 돌아가셨다. 광복과 함께 형은 출옥했으나 늑막염을 앓게 된다.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여 미당 서정주 선생을 만나게 되고 미당의 추천으로 1958년 2월 『현대문학』에 「봄비」를 시작으로「불여귀」(1959.2,)「학의 노래」(1959. 9.)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그는 서라벌예술대학과 중앙대학교, 경희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석사와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이후 제주대학교 국문학과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 중앙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그의 문단활동은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과 국제펜한국본부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도 많다. 시집으로 『우후개화』『꽃이 있던 자리』『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짧은 세월 긴 이야기』『식민지』『인연설』『밤섬의 숲』『연백』『함동선 시전집』『산에 홀로 오르는 것은』과 시선집『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한 줌의 흙』『마지막 본 얼굴』『함동선 시선』이 있으며 수필집『오후에도 오랫동안』과 예술가의 삶『절대 고독의 눈물』산목함동선선생팔순문집『쓸모없는 나무』를 상재하여 우리 문단에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또한 많은 동인지를 발간하였고 중국어 번역시집『雨後開花』를 중국평화출판사에서 발간하였으며 영역시집『THREE POETS OF MODERN KOREA』를 미국에서 간행하여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고 시론으로 『시의 원초 형태』와『현대 시정신의 재인식』등이 있으며 ‘선’ 출판시에서 ‘오늘의 시인 총서’『함동선 시 99선』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금석문집『한국문학비』를 제3집까지 출간하기 위해서 전국에 시비를 찾아서 순회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 되어 한국현대시인상과 한국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청마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많은 업적이 그의 문학과 함께 빛나고 있다.
바람 한 점 소리 한 점 없군요 / 쪽진 머리 옆으로 도톰한 귓밥이 / 양지쪽을 향할 땐 사랑으로 그늘이 질 땐 슬픔으로 / 가슴을 채우셨지요 / 동구스럼한 볼 성큼한 두 눈 / 부두럽게 솟은 코 / 아 어머니 / 부적을 허리에 꿰매주시고 / 인민군이 마을을 뒤지는 사이 / 거룻배 타고 떠난 막동이를 / 생각하다 돌이 된 세월 어쩌겠어요 / 강화도에서 / 먹구름 몇 덩어리가 걸려 있는 고향 하늘을 보고 / 귀야산의 가느린 능선이 어림이 가잖아 / 아지랑이 때문인가 집이 보이잖아 / 언제나 목에서만 맴돌다 / 햇볕에 그을린 어머니 / 미군의 오폭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 아닐 거에요 아닐 거에요 / 생신날에 기제사 지낼 때 / 음복하는 잔에 고이는 / 어머니.
산목 시인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는 어머니에 대해 눈물어린 사모곡인 「어머니」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막동이가 생이별한 어머니는 우리 민족의 분단 비극인 한(恨)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휴전 전 해의 가을이었던 것 같다. 강화도에 갔다가 미군 탱크부대에 들러 망원경으로 고향을 본 일이 있다. 넓은 들녘엔 누런 벼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화도는 이미 추수가 끝났는데 지금부터 가을걷이를 해볼까 하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때 마을 동쪽 끝의 우리 집 부엌문에 흰 옷이 드다든다. “어머니다”하니 눈물이 망원경을 흐리게 한 일이 있다. 그 어머니가 올해 118세이다.(분단시집 『한 줌의 흙』서문중에서)
이처럼 그가 일생을 두고 한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와 고향 ‘연백(延白)’은 그의 문학과 동행하고 있다. 최근에 나온 시집 『연백』에서는 ‘연백평야는 내가 읽은 책의 국판과 46판으로 정지(整地)된 곡창지대다 이 끝과 저 시작이 보이지 않는 들녘에서 사람들은 봄 햇살 온기처럼 이성을 감성으로 고인 말로 농사지었다 벼가 자라는 시간 어디쯤과 어머니 서낭당에 돌 쌓던 시간 어디쯤에서 숟가락 휘일만큼 찰기 있는 쌀이 되었는가 나는 지금도 아침에 연안(延安) 배천(白川) 인절미를 먹는다’는 그의 망향가가 지금도 들리고 있다.
언젠가 그의 애제자였던 신진숙 시인이 내가 등단한『心象』지에 신인상이 당선되었다고 나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대학로에서 몇 번 만나다가 어느날 나에게 그의 시평(詩評)을 부탁받고 ‘나보다 더 훌륭하신 함동선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는데 선생님에게 부탁해야지’라고 간곡히 거절했으나 함동선 선생님의 소개라는 말을 받아들여 시평을 써준 인연도 있었다.
그의 시풍(詩風)은『한국문예사전』(어문각)에 따르면 ‘그의 시는 동양적 사상을 근저로 한국적 정서를 섬세하게 표출하는 신선한 감각능력을 보이고 있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함동선의 시세계』에서 원로 문덕수 시인은 ‘그를 전통적 서정시인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는 자연을 무릉도원경으로 혹은 이상향으로 생각하여 그곳으로 들어가 안주하거나 초탈하려고 하는 그런 서정시인이 아니다.-중략-자연 질서의 추구를 통하여 현실적 삶의 리얼리티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비록 자연과 현실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 속으로 도피하거나 초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함동선론’에서 피력하고 있다.
어느 명절날 이수화 시형과 함께 ‘北漢山 水石居(산목 시인의 집)’로 인사를 간적이 있었다. 인자하신 사모님 손보순 시인님과도 반가운 만남이 되었다. 지난 달에도 혜화동에서 만나 차를 나누면서 문학적, 문단적 많은 조언을 들었다. 올해로 84세 노익장 시인의 맑고 밝은 선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