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水 鄭椀永 작품 감상
조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연과 바람
옛날 우리 마을에서는 동구 밖에 연밭 두고
너울너울 푸른 연잎을 바람결에 실어 두고
마치 그 눈 푸른 자손들 노니는 듯 지켜봤었다.
연밭에 연잎이 실리면 연이 들어왔다 하고
연밭에 연잎이 삭으면 연이 떠나갔다 했으며
세월도 인심의 盈昃도 연밭으로 점쳤었다.
더러는 채반만하고 더러는 맷방석만한
직지사 인경소리가 바람 타고 날아와서
연밭에 연잎 되어 앉는 것도 나는 봤느니
훗날 석굴암 대불이 가부좌하고 앉아
먼 수평 넘는 돛배나 이 저승의 三生이나
동해 저 푸른 연잎을 접는 것도 나는 봤느니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은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며
바람에 인경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는가.
가을 아내
한잔 술 등불 아래
못 달랠 건 정일레라
세월이란 푸섶 속에
팔베개로 지쳐 누운
당신은 귀뚜리던가
내 가슴에 울어 쌌네.
저 몸에 목숨 있으면
얼마나를 남았으랴
내 눈길 가다 멎은
갈잎 같은 손을 두고
생각이 시름에 미쳐
갈피 못 잡겠고나.
젊음은 아예 무거워
刑期처럼 마쳤느니
이제는 풀어 인 회포
용서 같은 백발 앞에
아내여 남은 날들을
서로 비쳐 보잔다.
고쳐보니 임자가 늙어
어머님을 닮았구려
가난도 눈물에 실으면
琵琶일시 분명한데
둥글어 허전한 달이
이 밤 홀로 떠간다.
세월이 무엇입니까
세월이 무엇입니까
젖은 모래성입니까
아니면 손사래로
빠져나간 꿈입니까
이 달도
마지막 하루가
촛불처럼 다 탑니다.
하루 가면 하루만큼의
이승은 멀어지고
이제 죽어 묻힌 벗이나
구름결을 생각하며
뻐꾸기 울음소리가
산빛 엮어 내립니다.
시름이 가슴에 고이면
沼가 된다 하옵기에
산다는 이치 하나로
한 세월을 흘려놓고
망초 꽃
흩어진 사연을
강기슭에 줍습니다.
登山과 遊山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에 품고 앉아있듯 내 고향 마을을 품에 품고 앉아 있는 고향 산은 내남산(乃南山)이다. 내남산은 별칭이 ‘큰골’이고, 이 큰골의 주봉은 ‘무남봉’이다.
마을 앞 큰 들녘을 넘어 먼 하늘을 가로질러 앉은 산은 ‘덕대산’인데, 마을 고로(古老)들은 남북으로 대좌하고 앉아있는 이 무남봉과 덕대산을 두고, 옛날 옛적 천지가 개벽했을 적에 큰물이 져서 온 세상을 쓸어 엎었는데 그때 무남봉은 문짝만큼 남았었고 덕대산은 언덕만큼 남아 있었다고 했었다. 말하자면 무남이니 덕대니 하는 어음(語音)에서 오는 하나의 설화겠거니와 아무튼 우리 마을 등과 배를 가름하여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주봉(主峰)들에게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신앙에 가까운 신뢰요, 또한 예배였던 것이다.
그러자니 그 산들에는 으레 산신령이 살았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동제를 드렸다. 제주(祭主)에는 학덕이 높고 품행이 방정하여 가간사(家間事)에 궂은일이 없는 사람을 골라 소임을 맡겼으니 그래야 부정이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큰골 무남봉에서 두 팔을 벌린 듯이 지맥들이 뻗어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 동쪽 해돋이 쪽엔 동산으로 앉고, 서쪽 해넘이 쪽으로는 극락산이 되어 앉아 있다. 또 마을 앞 가까이 내려와 나부죽이 앉아 있는 산은 마을이 밥상을 받은 듯도 하고 서안(書案)을 받은 듯도 하여, 마을 조무래기들이 조석으로 오르내리며 노니는 안산이기도 하다. 남이 보면 어쭙잖을 산이요 봉우리들이겠지만 내 가슴엔 이 산들, 이 봉우리들이 내 동심의 푸른 동산으로서, 어느 봉우리는 하늘을 달리는 용마 같기도 하고 어느 봉우리는 고운 깃을 떨쳐입은 한 마리 장끼 같기도 하여, 정 안 가고 꿈 안 가지는 산이라고는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이만한 산, 이만한 골, 이만한 설화들은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도 다 있는 것으로서 굳이 ‘택리지(擇里誌)’를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 조상들이 제가끔 자기 마을을 개기(開基)하는 데 산과 골을 얼마나 의지하고 신앙해 왔었는가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북으로 백두, 남으로 한라, 이 국토를 가름하는 양장 봉은 그만두고라도 낭림(狼林), 묘향(妙香), 구월(九月), 금강(金剛), 태백(太白), 소백(小白), 지리(智異)등의 웅산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이 산들에 의지하여 세월에 등을 대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문화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강이며 평야가 우리 역사의 피와 살이었다면, 산은 우리 문화의 골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산은 우리 목숨의 소자출(所自出), 우리 목숨의 근원이요, 또한 마침내 돌아가 누울 신후지지(身後之地)인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 민족 5천 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 언제고 산을 사랑하지 않은 때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요즘만큼 산을 좋아하고 산행을 즐긴 일은 일찍이 없었다. 어떤 전문지의 추계에 의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등산 인구가 백만이 넘는다고 한다.
이 많은 산행 인구, 이 많은 애산(愛山) 인사들이 전국에 편재해 있다면 자연보호 운동이니 국토미화 운동이니가 따로 펼쳐지지 않더라도 절로 잘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 연유는 등산인은 많지만 유산객은 없다는 데 있다.
원래 우리에게는 유산(遊山)이란 말은 있어도 등산이란 말은 없었었다. 유산이란 산에 노닌다는 뜻이다. ‘노닌다[遊]’는 것은 ‘논다[休]’라는 뜻이 아니라 ‘배우다[學]’라는 뜻이 된다. 유경(遊京) 한다고 하는 뜻은 서울의 문물과 풍습을 대인 관계에서 배운다는 뜻이다. 서울에는 배울 것이 많다고 하여 예부터 경사(京師)라고 일컬었던 것을 보더라도 알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예로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산에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직유하지 않고 ‘유산’이라 은유한 것은 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고 깊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살이의 안목을 기를 수 있는 땅이 서울[京師]이라 하여 유경이라 표현했듯이, 목숨의 근원과 그 높고 깊음을 배울 곳이 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산에 오르고 산에 노니는 것을 유산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이 유산 정신을 가장 잘 터득하고 가장 잘 본받아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것이 화랑의 낭도들이다.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만고에 우뚝한 우국 우민의 충무 정신도 그 연맥을 더듬으면 산 정기, 물 정기에 뿌리가 닿아 있다.
등산이란 말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놓고 간 얄팍한 서구인들의 정신을 직수입한 단어다. 등산이란 말은 우선 듣기만 해도 숨이 차다. 등산은 산꼭대기에 오르기만을 위해 기를 쓴다. 그것도 남보다 먼저 올라서야 직성이 풀린다. 남보다 먼저 올라서서 두 팔을 번쩍 들고 ‘야호!’하고 환성을 지르고는 산을 정복했다 한다.
현대인은 왜 이렇게 얄팍한 인성(人性)의 천려(淺慮)를 사는가. 달에 한 번 갔다 와서 달을 정복했다 하고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산에 한 번 올랐다 하여 마나슬루를 정복했다 한다. 모기 한 마리가 날아올라 황소 뿔 위에 앉아서 제가 황소를 정복했다고 소리친다면 황소는 무어라 생각할 것인가.
산은 우리 동양 정신의 신역(神域)이다. 우리는 산을 경배하고 산을 신앙하며 산과 더불어 화창(和唱)하고 산과 더불어 함묵하며 살아왔다. 우리 정신은 산을 표고로 따지지 않는다. 산을 오를 적에 골을 짚고, 간수(澗水)를 느낄 적에 대하(大河)를 본다. 봉(峰)을 가름하여 지형을 점치고, 맥(脈)을 더듬어 영(嶺)을 생각한다. 목숨도 애환도 먼 산령(山嶺)위에 일월(日月)로 걸어둔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間 相看 兩不壓 只有敬亭山’ 이백(李白)의 시다.
“날아가는 뭇 새도 좋고 홀로 떠나가는 외로운 구름도 싫지는 않다. 그러나 이제 내 앞에는 다만 산이 있을 뿐이다”라는 만고인의 독백을 이백이 대신해 준 것이다. 만고청산 만고심(萬古靑山 萬古心)이다.
주말의 오후, 더군다나 연휴라도 겹칠 것 같으면 터미널을 꽉 메우는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등산객들. 그들의 행렬을 볼 적마다 반드시 유쾌한 기분만 들지 않는 것은 나 한사람만의 심정일까. 이들이 다 요산요수하는 산의 적자(嫡子)들일까 하고 의심해 보는 것이 비단 나 한 사람만의 심정일까.
산의 성역을 어지럽히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가지라도 훼손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아닌 등산난족의 사람들은 없을까. 등산도 좋고 유산도 좋다. 어휘나 명사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산 정신만은 터득해야 되리라 믿는다.
[鄭椀永] 호 白水. 1919.11.11 ~ 2016.8.27. 경북 금릉 출생. 1946 향리에서 동인지 “梧桐”을 발간하며 문필활동 시작.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해바라기’가 당선되고, 같은 해 “현대문학”에 시조 “愛慕” “어제 오늘” “강” 등이 추천.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조국”이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 전개. 朴在森·李泰極 등과 함께 李永道의 뒤를 이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조시인. 투철한 자연관조와 전통적 서정세계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현대문학” “시인” 등의 문예지를 통해 잇달아 발표해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기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
시조집 “採春譜”(1969) “墨鷺圖”(1972) “失日의 銘”(1974) “나비야 청산가자”(1995) “엄마 목소리”(1998) “세월이 무엇입니까”(2001) “이승의 등불”(2001), 산문집 “다홍치마에 씨 받아라” “차 한 잔의 갈증” “시조 창작법”등 많은 저서를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