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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초상. 김만중은 과거에서 부정행위로 장원급제했다고 필자 미상의 <좌계부담>은 전한다.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이상적 개혁주의자 조광조(1482~1519)는 미남이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은 조광조의 용모가 아름다웠고 안색이 뛰어났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광조는 스스로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얼굴이 어찌 남자로서 복이 있는 상이라고 하겠는가"라고 실망스러워했다고 어우야담은 전한다.
고전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른 경우가 많다. <악학궤범>을 편찬한 음악가이자 <용재총화>의 저자이기도 한 성현(1439∼1504)은 외모가 뛰어났던 조광조와 달리 풍채가 보잘 것 없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람좌객(御覽坐客)'이라고 불렀다.
어람좌객은 '임금을 알현할 때 자신이 더 돋보이도록 함께 데려가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생집에 갈 때 자신의 외모가 부각되도록 같이 데려가는 추한 외모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쓰였다.
독서광이었던 성현은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심지어 잠잘 때도 책을 베고 잤다. 그의 몸에는 유독 이가 많았는데, 이를 잡으면 습관적으로 책갈피에 끼워뒀다. <어우야담>는 "후대 사람들이 그의 자손들에게서 책을 빌려 보면 항상 말라 비틀어진 이가 책 사이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런 성현의 형 성간(1427∼1456)도 추남 중의 추남이었다. 성간은 외모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까지 받아야만 했다.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에 따르면, 세조가 책시(정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 과목)할 때 성간을 보고 "네가 비록 재주는 있으나 인물이 추하니 나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승지는 반드시 불가하고 다른 직책을 맡기는 게 낫겠다"고 했다. 그는 전농시(국가의 제사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청)의 7품 벼슬 전농직장에 임명됐다.
목은 이색의 영정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1328~1396)은 명나라에 황제(태조 주원장·재위 1368~1398)에게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다.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주원장은 이색의 중국어 발음을 두고 "그대의 중국말은 나하추(원나라 장수)와 같다"고 모욕을 주면서 이색의 외모에 대해 "(못생긴) 이 늙은이는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고 놀렸다.
이색은 황제 면전에서는 대꾸도 할 수 없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귀국 후 이색은 소심한 보복을 한다. "중국 황제는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헐뜯고 다녔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가 실언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필원잡기>는 "(주원장이) 남긴 제도가 한나라와 당나라 보다도 크게 뛰어나니 어찌 그릇이 작다고는 하겠는가. 대업을 이루는 데 정신을 두다 보니 이색과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곁에서 우는 어린애 같이 여겨 마음에 두지 않은 것 뿐"이라고 논평했다.
정몽주 초상 보물 제1110-2호
정몽주는 조선 선비들이 '충신의 대명사'로 떠받들었던 인물이지만 술을 즐겼으며 여색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필원잡기>에 따르면 정몽주는 술을 마실 때면 늘 남보다 먼저 와서 맨 나중에 자리를 떴다. 벼슬이 크게 높아진 뒤에는 그가 참석하는 술자리 마다 손님이 가득했고 술통에도 술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여자도 마다 않았다. 친구가 여색을 두고 담담하지 못한 정몽주를 꾸짖었다. 그러자 정몽주가 답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공자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고 했다. 공자도 여색이 좋다는 걸 몰랐던 게 아니다."
조선은 성리학이 국교였지만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왕실에서도 불교를 믿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중형 효령대군(1396~1486)은 스님이 됐다. 효령대군은 안하무인이었던 백형 양녕대군(1394 ~ 1462)으로 인해 무척이나 속을 썩였다. <청파극담>은 효령대군이 법회를 열고 있는 절을 찾아 행패를 부린 양녕대군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양녕이 수하 10여 명과 매를 팔 위에 얹고 개를 끌고 가니 방울소리가 계곡 전체에 울렸다. 절에 도착하여 불상이 있는 옆자리에 매를 놓아두고 잡은 꿩을 불에 구워 절간에서 술을 마시니 효령은 그의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을 몹시 못마땅히 여겼다.
안색이 변하여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 절에서 이렇게 무례하시오. 앞으로 있을 화가 두렵지도 않소' 하니, 양녕대군이 크게 웃으며 '태어나서는 임금의 형이 되어 온 나라가 존경하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되어 세상이 받들 것이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복이 있는데 내가 어찌 두려워 할 게 있을까' 하였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혔던 화담 서경덕(1489~1546)은 많은 사대부들의 스승이었다. 서경덕의 제자였던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에 의하면, 서경덕은 청빈했다. 그는 그래서 자신을 존경하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한 번은 그와 친분이 있었던 황해도 관찰사의 초청을 받아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관찰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 붓을 선물로 줬지만 서경덕은 모두 사양하고 단지 쌀 닷 되만 받았다. 전국을 유람했지만 준비한 식량이 자주 떨어져 여러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황희 초상
반면 '청백리'로 알려진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1363~1452)는 사실 뇌물을 받아 여러차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성품이 지극히 관대해 조정의 조정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30년이나 정승을 지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그런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황희는 자신의 집에서도 성격이 너그러워 아들과 손자는 물론 종의 자식들이 울부짖고 장난을 치면서 떠들어도 꾸짖지 않았다고 <필원잡기>는 기술한다. 자신의 수염을 잡아 뽑고 빰을 때려도 화내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사람들과 집안일을 의논하면서 책에다 이를 써내려가고 있는 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는 일도 발생했다. 황희는 늘 그렇듯 노여워하지 않고 손으로 오줌을 닦아낼 뿐이었다.
박문수 초상, 보물 제1189-1호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1691~1756)는 초상화(보물 제1189호)의 점잖은 외모와 달리 괴짜에다 짓궂었다. 심노숭(1762~1837)의 <자저실기>에 따르면 판서 이익보(1708~1767)는 수려한 용모에 성격이 오만해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어느 날 승정원에 여럿이 모여 있는데 박문수가 이익보를 발견하고 손짓으로 불렀다. 이익보가 마지못해 다가오자 박문수는 다짜고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면서 "잘 생겼다, 이 교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눈 깜짝할 새 봉변을 당한 이익보는 화도 내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했다.
<구운몽> 저자이자 한글 문학의 선구자인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증손자이며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동생이다. 그는 의외로 과거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해서 장원으로 뽑혔다.
필자 미상의 <좌계부담>에 의하면, 김만중은 1665년 정시 과거에 응시한다. 과장에 제목이 내걸리자 모두가 술렁거렸다. 주제가 너무 어려워 모두들 자포자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를 제출한 대제학은 "'바야흐로 나라가 크게 위태로우니 송백만이 홀로 푸르고 푸르도다'라는 구절로 글머리를 삼은 답안지는 잘 짓고 못 짓고 일찍 내고 늦게 내고를 떠나서 장원으로 뽑을 것"이라고 흘렸다.
김만중의 형 김만기(1633∼1687)가 시험관으로 참여했는데, 이 말을 듣고 이를 글로 써서 아우에게 슬쩍 건넸다. 좌계부담은 "아우 김만중이 마침 대각 아래에 있어 적당한 틈을 봐 전해 주었다. 수천 장의 시험지를 채점한 후에야 비로소 만중의 답안지가 장원으로 뽑혔다"고 서술했다. - 계속 -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8.아름다운 외모가 불만이었던 조광조...예상 밖의 위인史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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