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차 이다라니무진보,장엄법계실보전,궁좌실제중도상,구래부동명위불
얻게 되는 이익을 설명함
-이다라니무진보 : 다라니의 한량없는 금은보화 사용하여
-장엄법계실보전 : 화엄법계 보배궁전 장중하게 꾸미고서
-궁좌실제중도상 : 궁극에서 참된 경계 중도 자리 앉고 보니
-구래부동명위불 : 옛적부터 부동하여 그 이름 부처였네.
지금까지 공부한 화엄의 가르침을 집약한 다라니인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제다즉일'과 같은
가르침은 마치 금은보화와 같다.
보배 궁전과 같이 꾸며서 화장 장엄 세계를 만든 후 드디어 그 궁전의 한 가운데에 있는 중도자리에
앉았는데 그 자리는 열반의 자리다.
수행자는 보살행의 궁극에서 드디어 마음속 번뇌도 소진되고 육신도 사라지는 대 열반의 자리에
앉는다.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수행자는 수행의 궁극에서 드리어 이런 열반의 법상에 앉았다.
이 자리는 모든 법의 본질이 드러난 자리이고 이분법적 인지와 감성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의
자리였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자리다.
그런데 그 분은 '구래부동'의 부처님이셨다. 의상은 '구래부동'에 대해 '옛적부터 성불했다는 뜻'이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법성게에서 '법성원융무이상~~ 으로 시작하는 첫글자인 '법'자는 법계도인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그 후 총 210자 가운데 나머지 문구가 이어지면서 54각을 돌고 돌아 마지막 문구인 '구래부동명위불'의
'불'자로 종료하는데 '불'자가 도칙한 곳이 바로 '법'자가 있는 곳이었다.
즉 보살도의 길고 긴 여정을 끝내고 드디어 부처가 되어 열반의 법상에 올랐는데,
그 자리는 다름 아닌 애초의 출발점이었다.
가도 가도 본래 그 자리 , 도달하고 도달해도 출발점이네'라고 하듯이 수행자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이름이 부처였다. '구래부동명위불'이었다.
의상 스님이 법계도인의 첫 글자인 '법'자와 끝 글자인 '불'자를 중앙에 배치한 이유가 법성이 부동하다는
점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애초의 출발점에서 '나는 부처였다'는 것이다.
'법'과 '불' 둘다 본성은 '중도'이다.
이는 '법성원융무이상'이라는 첫 문구에서 보듯이 법의 본질은 이분법적 사유를 용납하지 않는
무이상(無二相)의 중도이고, 부처의 본질 역시 중도다.
54각의 굴곡은 보살행의 인(因)을 지어서 부처의 과(果) 모두 그 본질은 중도에 있다.
또 앞에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노래 했듯이 수행의 종점과 그 출발점은 모두 중도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수행자가 초발심의 길을 떠나 보살도를 통해 드디어 부처의 지위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원래
부처였다. 초발심의 자리가 성불의 자리였다.
유식학에서 일체유심조라고 할 때 그 심(心)은 나 개인의 마음을 의미한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고 할 때 그 마음은 남의 마음이나, 마음의 보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이다.
무엇을 바라볼 때 형상을 만들고, 무엇을 들을 때 소리를 만들고, 무엇을 먹고 마실 때 냄새를 만들고
맛을 만든다. 무엇을 만질 때 촉감을 만들고, 무엇을 의식 할 때 생각을 만든다.
내 마음이 이런 모든 것을 만들기에 이 세상의 구심점은 바로 나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누구든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부처다.
' 내가 곧 부처다'
구래부동명위불은 누구나 원래 부처였다.
선승들의 어록에서도 '마음이 곧 부처' '내가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
불교는 아니지만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사상 역시 이와 유사하다.
범아일여는 '브라만'과 '아뜨만'이 같다.는 것에 부처를 브라만으로 대체했을 뿐 의미의
골격은 같다.
불교 유식학에서 '모든것을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고 할 때 '모든 것'을 온 세상인
브라만으로 대체하고 '마음'을 아뜨만으로 대체하면 이 역시 그 골격이 '범아일여'사상과
다르지 않다.
또 한 점 크기 티끌속에 온 우주가 담겨있고' 라고 번역한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문구에서
'한 점 크기 티끌'을 아뜨만인 내 마음, '온 우주'를 브라만인 모든 것으로 대체하면 이 역시
범아일여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통찰이 가능한 시점은 바로 주관적 시점이다.
부처님께서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실 때, 먼저 제행이나 제법에 해당하는
일체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분류하셨는데, 그 때 견지하셨던 시점이 주관점 시점이었다
자 그럼 주관적 시점을 더 살펴보자.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주관속에서 혼자 살아간다. 인간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그렇다, 객관은 모호하지만, 주관은 언제나 분명하다.
주관에서는 끝이 있지만, 객관에는 끝이 없다.
'내가 부처다' 또는 '내 마음이 곧 부처다' 라고 할 때, 이런 주관의 세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주관의 세계에는 나 홀로 살기에 내가 중심이고, 내가 절대자이고, 내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객관의 세계에는 남들도 살지만 , 주관의 세계에는 나 홀로 살고 있기에 그 전체는 내 마음이 구성한 것이다.
모든 것을 오직 내 마음이 만들었다. 일체유심조다
부처님의 오온, 십이처, 십팔계설에서 보듯이 불교 수행자는 시작부터 철저하게 주관적 시점을 가져야 한다.
주관적 시점으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나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산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불교적이기 위해서는 주관적 시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주관성의 끝에서 만난 참나, 또는 아뜨만의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상(無相)하고 무아(無我)이며
주재성이 없는 식(識)일 뿐이라는 통찰까지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찰라생멸하는 나의 마음이 내가 체험하는 세상 전체를 만들어 낸다.
일체유심조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낱낱의 생명체는 나름대로 소유한
주관적 세상의 주인이고, 부처님이고, 절대자다.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라고 노래하듯이 한 톨 먼지 크기의 찰나적인 마음에
(일미진중) 그것이 만든 온 세계가 담겨 있고(함시방), 다른 모든 생명에 역시 제각각 자기 마음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누구든 자기가 사는 세상의 중심인 부처다.
'화엄경'에서 설하듯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세 가지는 다르지 않다.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이 세상을 어떻게 펼칠 것인가?
아니면 거둘 것인가?
내가 결정할 일이다. 주관의 세계에서 내가 중심이고, 내가 절대자이기 때문이다. 탐욕 분노,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번뇌를 모두 제거할 때 이 세상은 막을 내린다. '열반이다'
펼쳤던 세상을 기꺼이 거둔다.
옛적부터 부동하여 그 이름이 부처 '구래부동명위불'였기 때문이다.
바로 중도상이다. 육도 윤회가 사라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