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7
ㅡ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 3 ㅡ
(근초고왕 업적과 근수구왕)
'근초고왕'은 일본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 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중국 '진서'에는 ‘여구(餘句)’로 표기 되어있다.
이 호칭들은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 왕 대다수가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근초고왕 이름은 초고 / 조고 / 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이다.
또한 백제왕실 국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에 미루어 '진서'에 기록된 '여구'라는 이름은 성을 '여', 이름을 '구'로 축약 표기한 것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축약표기 사례는 다른 기록들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은 앞에 '근'자를 빼면 5대 초고왕 과 6대 구수왕이 되어 고이왕 이전 초고왕, 구수왕과 이름이 같다.
백제 왕계를 살펴보면 '근초고왕' 가까울 근(近)이 이전 왕과 구분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 '2세' 비슷한 의미이거나 한국어 '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근초고왕이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계승 혈투에서 '고이왕계'로부터 다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에 대한 역사기록은 그의 통치가 백제 최고전성기를 여는 중요한 시점임을 잘 보여 준다. 그의 외교 및 군사적 성과는 백제 문화적 발전에도 기여하여, 이후 백제가 동아시아의 중요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백제 제13대 왕 '근초고왕'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
근초고왕은 즉위 후 왕권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계승에서 초고왕계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름 앞에 '근'자를 붙인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진씨(眞氏)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2. 대외 영토확장
근초고왕은 왕권확립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잔여세력'을 경략·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지역 전부를 지배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 '가야세력' 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따르게 함으로써 백제영향권 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지역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 진출을 도모 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 된다.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 싸움 이었다. 이 싸움에서 근초고왕은 태자와 더불어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 '고국원왕' 을 전사시키고 만다. 대방고지(帶方故地)까지 차지 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 영역을 차지 하게 되었다.
3. 해상교류 활성화와 대외활동
근초고왕은 정복활동과 더불어 해상교류를 활성화 시키면서 대외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 을 이루었으며, 중국 동진(東晉) 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 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국 쪽으로부터 한반도지역 공식 지배자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낙랑군·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 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胡族)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백제는 요서(遼西)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기지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때부터 백제는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세력들을 연결해 고대상업망을 형성함 으로써 동아시아 무역 중심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 편에서도 설명했지만 요서지방에 설치된 '백제군'에 대해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백제요서지역경영설'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 단지 통일신라 시대 때 중국 산둥반도에 설치된 '신라방' 정도로 추정한다.
이와 더불어 백제는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계통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가 일본과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하다보니 '일본규수지역경영설'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단지 활발한 무역교류만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 금석문 자료 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 하지만, 앞 편에서 설명했듯이 내용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 왕이 왜왕(倭王)에게 하사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고대상업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이다.
한대(漢代)이후 중국 황해연안 에서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 는 한족의 동방침입과 동시에 고대상업으로서도 중요한 길 이었는데 근초고왕 시기에 그걸 백제가 차지했다.
4. 문화진흥과 문화수출
근초고왕은 문화를 장려하고,
대방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해 문화 질을 높였다.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 좋은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사상을 일으키고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직기는 왕인보다 앞서 근초고왕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자에게 한자를 가르쳤으며, 이를 통해 일본에서 한자사용이 처음 시작되었다.
일본 고대문헌인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직기는 백제에서 학문과 문자를 가르치기 위해 파견된 인물로, 일본 문자교육과 초기 학문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인에 대해서는 앞 편에서 설명했다.
이처럼 '왕인'과 '아직기'는 일본 고대국가 형성과 문화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백제의 선진문물과 학문을 일본에 전파하여 일본 교육, 정치, 문화 체제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특히 한자도입과 유교사상 전파는 일본 고대국가체제 형성에 있어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 둘의 활동은 백제와 일본 간 문화적 교류 상징으로, 백제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왕인 아직기 역사기록은 우리 쪽 역사서에는 거의없고 '일본서기'와 일본 '고사기'에만 기록되어 있다.
5. 정치안정화와 '서기'편찬
근초고왕은 중앙집권적 왕권을 강화하고, 국내 정치와 행정 체제를 정비하여 백제내부 정치 안정을 이루었다. 이를 통해 백제의 장기적인 번영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또한 지배영역 확대와 통치조직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왕은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 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 편찬은 왕실중심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실전통 유구성·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 최대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근초고왕 이러한 업적들은 백제를 고대 동아시아의 최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이는 '근초고왕' 아들 '근구수왕'까지 이어졌다.
[오늘 이후, 누가 능히 다시 이곳(현재 황해남도 신계군)
에 오겠는가?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乎?]
ㅡ 삼국사기 근구수왕 본기 ㅡ
치양전투 승리 이후 백제 제14대 왕 '근구수왕'이 한 말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근구수왕'( 재위 369~ 375)은 아버지 '근초고왕' 재위 때부터 태자로서 전장을 누비며 활약 했고, 즉위 이후 전성기를 유지 시키는데 성공한다.
근구수왕 또한 근초고왕과 함께 백제 양대 전성기를 구축해낸 군주로 평가 받는다.
그래서 '삼국사기' 원문에서도 대부분의 국왕 본기가 즉위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데 <근구수왕 본기>는 근초고왕 재위기간에 있었던 태자시절 기록부터 상세히 나오는 편이다.
근초고왕 초기 재위기간 20년 넘게 아무 기록도 없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예외이다. 아마 조선시대 세종대왕 시절 문종이 세자로서 오랫동안 여러 역할을 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이지 싶지않나 한다.
하지만 백제 '근구수왕' 당시 고구려도 가만있지 않았다.
백제 근초고왕 시절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 전사 뒤에 백제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고구려는 '근수구왕' 재위시 '고국원왕' 아들이자 그 유명한
'소수림왕'이 개혁에 성공해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그리고 백제에 대한 고국원왕 원한을 맘껏 풀어 낸다.
'근구수왕' 당시에는 그래도 고구려 공격들을 그런대로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근초고왕' 말년부터 시작된 백제 쇠퇴를 근수구왕 치세에 최대한 늦추는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것은 백제나 근수구왕 잘못이라기 보다는 당시 고구려 기세가 너무 힘차게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 당시 국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근구수왕' 사후 백제쇠락이 가속화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소수림왕부터 광개토대왕, 장수왕>까지 고구려 최고전성기
를 누리게 된다.
이어서 고구려 최고전성기 1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