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강씨의 시조, 강이식
강씨(姜氏)는 상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되고 성(姓)으로서는 원시성이로다. 우리나라에 건너온 시조(始祖)는 이식(以式)이니 중국 광동 강씨보(中國廣東姜氏譜)에 공좌태조 이정천하후 양제찬위 공이퇴야(公佐太祖以定天下後帝簒位公以退野)01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 「수벌 고구려시 공위병마원수 지살수이 지수장란 잉류불반(隋伐高句麗時 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02의 기록이 있는 바와 같이 진주 강씨(晋州姜氏)는 중국(中國) 수양제(隋帝) 때에 우리나라에 건너 오니라. 시조(始祖) 이식으로부터 三十一대 자손 세의(世義)가 고부(古阜)로 낙향한 후 六대에 진창(晋昌)·우창(愚昌)·응창(應昌) 삼 형제도 이곳에 살았도다. (행록1장 1절)
강이식(姜以式, ?~?)은 고구려 명장이자 진주 강씨(姜氏)의 시조(始祖)로 우리에게 익히 알져진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생몰연대에 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그의 태생(胎生)에 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고구려인으로만 알고 있으나, 사실 그는 고구려인이기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었다. 이에 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제(濟)나라03 시대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기원전 386년 제(濟)나라 강공(姜公) 때에 이르면 전화(田和)가 강공(姜公)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만 해도 태공망(太公望)이 영구(營丘)04의 제후로 봉해졌을 때부터 제나라의 모든 실권은 강씨(姜氏)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田和)가 왕좌에 오른 뒤부터는 그 실권을 전씨(田氏)들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강씨들은 화(禍)를 피해 제나라를 떠나야만 했다.05 한동안 제나라를 떠나 방랑생활을 하던 강씨들은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건국할 즈음인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원시조(原始祖)06의 고향인 천수(天水)07에 정착하게 된다.08 이때부터 700년이 더 지나면 드디어 이곳에서 강이식 장군이 출현하는데, 천수에서 태어나 성인(成人)이 된 그는 양견〔수 문제, 재위 581~604〕09을 도와 수(隋)나라를 건국(581)하고, 나아가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589)하여 중국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년 후 수나라에는 예기치 않은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수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 문제(文帝)와 형 양용(楊勇)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것이다. 문제를 도와 중국을 통일한 강이식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정치적 참변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강이식은 한동안 수나라의 벼슬 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중국 『광동강씨보(廣東姜氏譜)』에 “공(강이식)이 태조(수문제)를 도와 중국 천하를 안정시켰으나 태조의 아들인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公佐太祖以定天下後帝纂位公以退野).”는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패륜을 저질러가면서까지 제위를 찬탈한 양광(수 양제)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진시황과 한 무제의 치적을 흠모하여 동도를 조영10하고 ‘대운하를 건설’11하는 등 영토 확장준비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그는 지나치게 권세를 남용하였을 뿐 아니라 언제나 국고가 가득 차고 병력이 막강해지기를 갈망하였으며, 독단적으로 모두를 정복하고 모두를 노예화시키려는 신념으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르는 곳마다 대단위의 궁궐을 축조했는데, 그 수만 해도 모두 40곳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데,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遠征)을 결심하였다.12
이를 위해 양제는 전 국토를 뒤져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이를 병사로 삼고, 전 나라를 통틀어 부역을 충당했는데, 이로 인해 수나라의 전답(田畓)은 모두 황폐해지고 경작하는 사람마저 없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같은 실정에서 8년 전(604), 양제가 제위를 찬탈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던 강이식 또한 군사 징발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이식은 과거 문제를 도와 수나라를 세우고 남조의 진을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한 경험까지 있었으니, 고구려와의 대전(大戰)을 목전에 둔 양제로서는 중국천하를 안정시킨 경험 많은 그에게 중책(重責)을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강이식은 병마원수(兵馬元帥)의 자리를 맡게 되고, 이로써 전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수 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감행한다.
한편 그 무렵, 고구려(영양왕 23)는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하였을 때부터 장차 통일된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고구려를 침공해올 것이라고 예견하여 그들보다 먼저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였다.13 이 때문인지 수나라는 평양성전투에서 대패하였을 뿐 아니라, 살수(薩水)14에 이르러서는 살아서 돌아간 자가 불과 몇 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 군이 아무리 그들보다 먼저 전쟁준비를 마쳤다 하더라도 당시 수나라의 군사는 백만이 넘는 대군(大軍)이었는데, 단지 고구려 군의 발 빠른 대비책만이 승리의 관건이 될 수 있었을까? 짐작컨대 수나라가 고구려 군에게 패배하게 된 저변에는 분명 유형적인 모습 이외에도 무형적인 또 다른 요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는 “강이식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수나라의 병마원수가 되어 살수에 이르렀으나 수나라에 장차 난리가 날것을 알고 이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는 병사들의 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 수나라 병사들은 고구려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 대운하건설과 동도조영, 그리고 대단위의 궁궐조성 등으로 이미 시달릴 때로 시달린 상태였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감행된 원정은 당연히 병사들의 사기를 더 저하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사들의 심신(心身)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 나선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상황에서 강이식이 병마원수를 맡았으니 아마도 그 또한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승패의 결과를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수나라는 전쟁에서 참패의 아픔과 치욕을 겪어야 했고, 그토록 많은 인원이 동원된 전쟁에서 불과 몇 천 명밖에 살아 돌아가지 못했으니, 전쟁이 끝나더라도 수나라에는 백성들의 원성으로 인해 난리와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숙종 을축년보(肅宗乙丑年譜)』에는 “강이식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수나라의 병마원수가 되어 살수에 이르렀으나 수나라에 장차 난리가 날것을 알고 이에 머물러 돌아가지 않았다(隋伐高句麗時 公爲兵馬元帥至薩水而知隋將亂仍留不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강이식은 전쟁 전부터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장차 난리를 일으켜 수나라를 패망하게 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강이식은 수양제의 무모한 야욕이 불러일으킨 전쟁과 그의 행실에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살수에 이르러 고구려로 귀화하게 되는데, 그가 귀화한 이후 수나라는 그가 예견한대로 난리에 휩싸이게 된다. 그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실제로 수나라에는 병역과 요역으로 고통 받았던 백성들이 크고 작은 폭동을 계속해서 일으켰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전쟁의 패배를 시인치 않고 군사를 재정비하여 613년에 2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치닫자,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에서는 급기야 후방에서 병참(兵站)16을 맡은 양현감(楊玄感)17이 양제의 방자함과 포악함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명목아래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18 이것은 통치 집단 내 일차 대분열이기도 하였다. 물론 양현감의 쿠데타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양제를 정점으로 하던 수 왕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양제는 2차 고구려 원정에서도 도중에 귀환해야만 했다. 이처럼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이후 농민들의 크고 작은 폭동이 도화선이 되어 군사집단 내 쿠데타로까지 이어지는 등 양제의 무모한 야욕은 수나라를 점점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끝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614년에 또 다시 3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한편 양제가 3차 고구려 정벌을 감행할 때, 고구려에는 과거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침공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강이식 장군이 이번에는 고구려군의 병마원수가 되어 수양제와 맞서 싸웠다. 이 사실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권문해(權文海)가 1589년에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고구려 때 강이식은 병마원수로 수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高句麗時姜以式爲兵馬元帥以禦隋師)는 기록과 강이식의 묘가 고구려 군영 안에 호화롭게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가능하다. 강이식의 묘가 있다고 알려진 마을은 ‘중국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영자촌 원수림’인데, 고려영이란 고구려 군영이라는 뜻이고, 원수림이라는 명칭은 강이식의 직책인 병마원수와도 일치한다. 현재 ‘강이식의 묘소는 중국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는 등 심하게 훼손’19되어 누구의 묘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1930년 강씨 문중에서 그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묘비에 ‘고구려병마원수강공지총(高句麗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고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곳의 보장(군수)이었던 강보환(姜寶煥)이 그 묘소가 강씨의 시조 묘라 하여 극진히 보살폈으며 죽을 때 묘를 부탁하는 편지까지 남겼다고 한다.20 이런 정황에 따르면 강이식은 수나라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이후 고구려군의 장수가 되어 수나라의 공격을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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