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부 비인부전/5 ]
때아닌 어머니의 기척에 허준은 아내를
겨눈 주먹을 거두었다.
이어 아내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언쟁인 아무래도 안채에까지
들렸던 듯,
들어온 손씨는 그런 아들내외를 의식한 채 잠시 말이 없다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미 말 다 들었다.
그리고 그건 에미 말이 옳다."
"무어라구요?"
"에민 하던 말 마저 하거라.
애비가 세상의 인정을 받은것이 하도
기뻐서 내가 잠시넋이 나간 탓으로 미처
깊은 생각까진 못했다만,
에미말이 백번 옳고말고."
"왜들 이러시오니까?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을 말 들어야 해!"
어머니의 딴때없이 강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고,
허준이 성대감의 서찰을 집어들고 발딱
일어섰다.
"어머님이 무어라 하시건,
이 일만은 어머님 말씀대론 못 하오리다.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당당히 시험을 쳐서 붙으면 그야 통쾌는 하오리다. 하나,
대여섯 사람 뽑는데 나라 안에서 몰려드는 의원이 자그만치 천 명도 넘을때가
많소이다.
한데,
고집대로 살잔 말이오!
난 못해요.
다시 말하오만 이 서찰은 내가 꾸민것도
아니요!
자청한 것도 아니요!
성대감이 자진하여 꾸며준 게요.
상대가 누군지 아오?
시임 우의정에 현재 내의원 도제조란
말이외다.
어림도 없는 소리!
차라리 내 목숨을 나눠줄지언정 이건 못
버려!"
고함과 외침이 끝나자,
허준은 자기의 관을 떼어들고 방문을 차고 나갔다.
그러나,
방안의 두 여자는 부르지도 따라나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 방안에서 아내가 얼굴을 휩싸며 울음을 터뜨렸고,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
거리며 말했다.
"한숨 더 자거라.
자고나면 속상한 일은 잊어버려지는 거니."
집을 뛰쳐나온 허준은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다.
늦가을 배추잎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온몸에 시렸으나,
아내의 뜻밖의 고집을 본 허준의 분한
숨결은 의원에 도착하는 동안,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의원 앞 개울에 이르러 이윽고,
허준은 소세를 하며 하늘도 보고 한숨도 쉬고 하다가 언덕 비탈을 올랐다.
불빛이 내걸린 의원 마당은 오늘도
새로운 병자와 그 가족들로 복닥거렸으나 이런시각 아버지의 회진에 앞서 초진을
맡아보는 도지나 임오근의 모습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임오근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나 보다
여기며,
허준이 몇 사람 안면이 있는병자 가족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 마당에 비질을 하던 꺽새와 저도
고명한 의원인 양 병자의 환부를 짚어보던 영달이가 허준을 발견하고,
무엇에 찔린 사람들처럼 튕겨일어났다.
허준이 선배인 영달과 꺽새에게 웃음을
보이며 인사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소이다.
난 간밤에야 당도했소."
"흥."
하고,
꺽새가 코방귀로 허준의 인사를 일축했고 돌연 두 손으로 허리를 재며,
영달이가 허준의 발치까지 훑어보는 눈이 야멸찼다.
"왜 그러오?"
허준이 의아했으나,
침묵속에 돌아온 건 증오와 질투에
일그러진 눈빛뿐이었다.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그들의 자기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었고,
달랜다 하여 고분고분해지는 자들도 아니었기에....
그 허준의 앞으로 사랑 쪽에서 달려나온 어린제자 상화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며 반색했다.
"오셨군요. 이번 일 감축합니다."
"소식을 듣고 있었는가!"
허준이 묻자 상화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럼요.
어젯밤 임의원님이 당도하시어 모두
허의원님 얘기로 밤을 지샜던걸요."
"그래 스승님은 기침해 계신가?"
"예,
안 그래도 마악 허의원댁으로 부르러
가던 차올시다."
허준이 상화와 큰사랑으로 향해가자
영달이와 꺽새가 저희끼리 눈을 맞추더니 얼른 그 허준의 뒤를 따라왔다.
큰사랑 앞에 이른 허준이,
불이환한 스승의 방문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소인 준 지난밤에 당도하여 이제 문후
올리옵니다."
유의태의 기침소리 대신,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건 임오근이었고 방안에는 유의태와
도지의 쏘는듯한 눈빛이 허준을 향해
있었다.
그 방안의 눈빛과 자기의 등뒤에 닥치는 영달, 꺽새 들의 조소와 이상하게 긴장된
얼굴을 발견하며,
허준이 방으로 들어가자 딴때없이 영달과 꺽새가 그 방으로 쫓아들어왔다.
방 한구석에는 임오근이가 나누어 지고 온 성대감댁에서 꾸려준 사례품들이 쌓여
있는 걸로보아 유의태는 임오근으로부터
허준의 성공 소식을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일을 성공하고 돌아온 제자를
맞이하는 그런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다.
"밤이 늦어서야 당도했사와 스승님께서
주무시리라 여기어 소인의 집에부터
들렀다가 왔습니다."
다음 순간,
그 허준에게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첫마디가 떨어졌다.
"창녕서 받아온 것 내놓아라."
" ...?"
"얘긴 이미 다 들었어!"
하고,
도지도 딴때없이 반말지거리를 뱉었다.
지난날 서책을 빌려주며,
내의원 얘기를 들려주던 다정한 얼굴은
간 곳이 없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성대감댁에서 사례라 하여 몇 가지
물목들을 꾸려주었사온데,
그건 집에 두고 미처 가져오지 아니
했습니다.
밝는 길로 가져오겠습니다."
"누가 그 따위 비단조각이나 돈냥을
묻는 줄 아나!"
도지가 소리쳤고 유의태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그 서찰 말이다"
하고 임오근이 말했다.
허준이,
'앗!'
하는 얼굴로 임오근의 조롱어린 얼굴을
보고,
품안의 서찰을 꺼내 유의태 손 위에
놓았다.
"누구에게 가는 무슨 내용인지 말해보아."
하고 도지가 입을 씰룩이는데,
"내용은 알 것 없다."
유의태가 냉연히 말했고,
그 서찰은 곧장 촛불에 당겨졌다.
허준이 벌떡 일어났으나,
마주보는 유의태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스승님?"
허준이 불꽃이 되는 성대감의 서찰을
뺏으려 한 것도 잠깐,
유의태는 이미 잿더미가 된 그 서찰을
놋화로 속에 내던지며 말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공과사가 애매한
풍속이기로서니,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사사로운 인정으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하 ... 하오나."
허준의 핏기가신 얼굴이 한줌 잿더미로
변한 서찰을 향해 신음소리를 냈으나,
그 서찰은 화로 속에서 마지막 불꽃이
되어 푸식거리고 있었다.
쩡!
하고 유의태의 다음 말이 잇따랐다.
"또 하나,
그런 나약한 자가 내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은 나로선 참을 수 없는 수치인즉!"
"그러나 스승님!"
"돌아가되 내일부터는 내 집에 다신
얼굴을 비칠 것도 없다!"
"예?"
"네가 내게서 배운 재주로 기량을
키우려 않고,
벼슬 높은자의 서찰 따위로 네 앞날을
열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너는이미 나를
배신한 것,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났더니라. 나가거라!"
"스승님!"
다시 몸을 일으킨 허준의 면상에 유의태의 창날같은 손가락이 뻗어왔다.
"이잘 썩 내치거라!"
"용서를 ... 한번만 ..."
그러나,
이 순간을 기다린 듯 영달이와 꺽새가
허준의 팔목을 잡아젖혔고,
튕겨일어난 임오근이 함께 허준의
목덜미를 잡아채 방문 밖으로 끌었다.
허준이 두 발을 문지방에 버티며,
또 스승님을 절규했으나,
"닫아라, 문!"
하는 유의태의 고함이 터지고 도지가
방문을 닫았다.
이어 허준의 몸은 임오근 등의 완력에
이끌려 마당으로 굴러떨어졌고,
몸을 다시 일으킬 사이도 없이
사랑 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의원 마당으로 끌려가며,
허준이 필사적으로 다시 스승님을 울부짖었으나,
그 면상에 터진 건 임오근, 영달, 꺽새 들의 주먹질과 욕지거러였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허준은 의원 밖
비탈에 내굴리며 정신을 잃었다.
내일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