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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2부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루이스H.모건의 연구와 관련하여
프리드리히 엥겔스
Ⅰ. 선사 시대의 문화 단계들
Ⅱ 가족
Ⅲ. 이로쿼이 족의 씨족
Ⅳ. 그리스의 씨족
Ⅴ. 아테네 국가의 성립
Ⅵ. 로마의 씨족과 국가
Ⅶ. 켈트 인과 독일인의 씨족
Ⅷ. 독일인의 국가형성
Ⅸ. 미개와 문명
2부
Ⅴ. 아테네 국가의 성립
국가가 발전해 온 과정, 즉 씨족제도의 기관들이 일부는 개조되고 일부는 새로운 기관들에 밀려나면서 마침내 진정한 국가 관청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한편으로, 각자의 씨족, 프라트리, 부족에서 스스로를 지키던 진정한 ‘무장 인민’이 있던 자리에 이 국가 관청에 봉사하고 따라서 인민에 대항하여 사용될 수 있는 무장한 ‘공적 권력’이 들어서는 과정-적어도 이러한 과정의 제1막을 추적하는 데 있어서 고대 아테네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이 형태 전화는 모건에 의해서 대체적으로 서술되었으나, 그것을 일으킨 경제적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내가 덧붙여야 한다.(123쪽)
영웅시대에 아티카에 있던 아테네 인의 네 부족은 아직 서로 분리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네 부족을 구성하고 있던 12 개의 프라트리들도 아직 케크로프스의 12 개 도시에 따로 거주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제도는 영웅시대의 그것 이었다: 민회, 인민평의회, 바실레우스. 씌어진 역사의 한도 내에서는, 토지는 이미 분배되어 사적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미개의 높은 단계가 끝나가는 무렵에 이미 어느 정도 발전해 있었던 상품생산과 그것에 조응하는 상품 거래에 부합하는 것이다....소유지가 매매된 결과, 또 농경과 수공업의 분업, 상업과 항해의 분업이 더욱 진전된 결과, 얼마 안 있어 씨족, 프라트리, 부족의 성원들은 서로 섞일 수밖에 없게 되었고, 프라트리나 부족의 거주지역은 같은 민족원이긴 하지만 이 단체들에 속하지 않는 주민 따라서 자기의 현재 거주지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타자라고 하는 이유는, 각 프라트리와 각 부족은 평상시에 아테네의 인민평의회 또는 바실레우스에 의뢰하지 않고 자기들의 사무를 스스로 처리하였기 때문이다.(123-124)
...테세우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제도가 채용되었다. 변경의 요점은 무엇보다도 아테네에 하나의 중앙 행정부가 설치되었다는 것, 즉 그때까지 각 부족이 자주적으로 처리해 오던 사무의 일부가 공동의 사무로 선언되어 아테네에 위치한 공동평의회로 이관되었다는 것에 있었다....인접 부족들의 단순한 동맹 대신에 부족들의 단일한 시민단으로의 융합이 나타났다. 그와 함께 부족이나 씨족의 법 관습보다 우월한 아테네의 일반 시민법이 생겨났다. 아테네 시민은 자신이 족외자가 되는 영역에서도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자격으로 일정한 권리와 새로운 법의 보호를 얻게 되었다....테세우스가 제정했다고 하는 두 번째 제도는 씨족, 프라트리, 부족에 상관없이 전체 시민을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다: 에우파트리데 즉 귀족, 게오모르 즉 농민, 데미우르그 즉 수공업자. 그리고 귀족에게 공직을 차지할 독점권을 부여하였다....이 구분은, 특정한 가족들이 통상적으로 씨족의 공직을 차지하던 것이 이제 공직에 대한 그러한 가족들의 별로 논쟁할 여지가 없는 요구권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부에 의해 세력을 얻은 이 가족들이 자기 씨족 바깥에서 독자적인 특권계급을 결성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국가가 이 월권을 신성화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구분은, 농민과 수공업자 사이의 분업이 이미 사회적 의의라는 점에서 씨족과 부족에 의거한 과거의 편제와 우위를 다툴 정도로 강력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구분은 씨족 사회와 국가의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을 선언하고 있다; 국가를 형성하는 최초의 시도의 요점은, 각 씨족의 성원을 특권을 누리는 자와 괄시받는 자로, 후자를 다시 두 개의 직업 계급으로 나누어 서로 대립하게 함으로써 씨족을 분열시키는 데 있다.(124-125)
바실레우스의 직무는 쓸모없게 되었다; 국가의 꼭대기에 선 것은 귀족 중에서도 선발된 아르콘들이었다. 귀족의 지배는 점점 더 강화되어 기원전 600년 경에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민을 억압하는 주요 수단은-화폐와 고리 대금이었다. 귀족의 본거지는 아테네와 그 주변이었는데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해상무역과, 그 밖에 지금도 때때로 자행되는 해적 행위가 그들을 부유하게 하였고 화폐 부를 그들의 손에 집적시켰다. 이때부터, 발전 중에 있던 화폐경제는 부식작용을 하는 초산처럼 현물경제에 기초를 둔 농촌공동체의 전래의 생활양식을 침식해 들어갔다. 씨족 제도는 화폐경제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아티카의 분할지농민은 그들을 감싸고 보호하던 옛날의 씨족적 유대가 허물어지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몰락하였다. 채무증서와 부동산담보는 씨족이나 프라트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의 씨족제도는 화폐도 선대도 화폐채무도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점점 더 덩치를 불려 가던 귀족의 화폐 경제는 또한 채무자에 대항하여 채권자를 보호하고 화폐 소유자에 의한 소농민의 착취를 신성화하기 위한 하나의 새로운 관습법을 만들어 냈다. 아티카의 평야 어디를 가나 저당 기둥이 서 있었고.....농민은 소작인으로서 그 경지에서 그대로 남아서 자기 노동 수익의 6분의 5을 새로운 주인에게서 소작료로 지불하면서 자기 노동 수익의 6분의 1로 살아가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변재하기 위해 자식들을 외국에 노예로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파는 것-이것이 부권제와 일부일처제의 첫 열매였다! 게다가 이것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흡혈귀는 채무자 자신을 노예로서 팔아버릴 수 있었다.(125-126)
.....지금 아테네 인에게, 말하자면 그들의 관여 없이 또 확실히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강요되고 있는 그러한 상태는 이로쿼이 족의 경우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로쿼이 족의 경우에는 생활 자료를 생산하는 방식이 해가가나 해가 오나 같았고, 그러한 방식 하에서는 그러한 외부에서 강요된 충돌, 부자와 빈자의 대립,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대립은 결코 생겨날 수 없었다....생산은 극히 좁은 경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생산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산물을 지배하였다. 이것은 미개의 생산의 거대한 장점이었다. 이 장점은 문명의 출현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을 다시 쟁취하는 것, 단 오늘날 달성된 인간의 강력한 자연 지배를 기초로 하여 그리고 이제 가능하게 된 자유로운 연합을 기초로 하여 그것을 다시 쟁취하는 것은 다음 세대들의 임무가 될 것이다.(126-127)
그리스 인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가축 떼와 사치품에 대한 사적 소유의 출현은 개인들 사이의 교환,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이후에 일어난 모든 변혁의 맹아가 놓여 있다. 생산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더 이상 자신이 직접 소비하지 않고 교환을 통해서 그것을 떠나보내자마자 그는 자기 생산물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였다. 그는 더 이상 생산물이 자신을 떠나서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후에 생산물이 생산자에 대항하여 생산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도 개인들 사이의 교환을 폐지하지 않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의 생산에 대한 지배와 자기의 생산과정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없다. (127)
그러나 개인들 사이의 교환이 성립한 후 그리고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함에 따라, 얼마나 급속하게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가 위세를 떨치게 되는가를 아테네 인은 몸소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곧 이어 개인의 토지소유가 나타났다. 더 나아가 화폐가 즉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일반적 상품(이때 제2형태인 확장된 가치형태를 넘어서, 제3형태인 일반적 가치형태나 화폐형태가 나타났을 것이다-발제자 주)이 나타났다.....옛 씨족제도는 또한, 자신의 틀 안에 화폐, 채권자와 채무자, 채무의 강제 징수 같은 것들이 존재할 공간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회의 힘이 일단 출현한 이상, 좋았던 옛 시절로의 복귀를 경건히 소망하고 갈망한다고 해서 화폐와 고리 대금이 다시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여러 산업 부문들 사이의 분업; 농경, 수공업, 특히 수공업 내의 무수한 직종들, 상업, 항해 등등의 분업은 공업과 교환이 진보함에 따라 더욱더 완성되어 갔다; 이제 주민은 직업에 따라 상당히 고정적인 집단들로 나뉘어졌으며, 이 집단들은 각각 일련의 새로운 공통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씨족 또는 프라트리에는 이러한 이해가 존재할 공간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돌보기 위해 새로운 공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예의 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여 당시에 이미 자유로운 아테네 시민의 수를 훨씬 넘었을 것이 틀림없다; 씨족제도는 원래 노예제도라는 것을 몰랐고.......(128)
요컨대 씨족제도의 종말이 다가온 것이다....국가는 조용히 발전해 갔다. 먼저 도시와 농촌 사이의, 다음에는 다양한 도시 노동 부문들 사이의 분업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어 냈다; 각종 공직이 설치되었다. 다음으로 젊은 국가는 무엇보다 자기의 무력을 필요로 하였다. 항해를 업으로 하는 아테네 인의 경우에 무력은 우선은 개개의 작은 전쟁과 상선보호를 위한 해군력밖에 없었다.....각 나우크라리아는 한 척의 군선을 제공하고 무장을 하고 승무원을 배치해야 했으며, 그 밖에 또 두 명의 기병을 제공하였다. 이 제도는 씨족제도를 두 가지 방식으로 공격하였다. 첫째, 무장한 인민의 총체와는 더 이상 전혀 일치하지 않는 공적 권력을 만들어 냄으로써; 둘째, 공적 목적을 위해 인민을 구분함에 있어 처음으로 친족집단이 아니라 지역적 동거에 의거함으로써...(128-129)
착취 받는 인민에게 씨족제도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한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성립 중에 있던 국가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가는 솔론의 제도를 통해서 도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옛 제도를 희생시켜 자신을 새로이 강화하였다. (기원 전 594년-발제자) 솔론의 개혁은 그 뒤에 벌어질 이른바 정치 혁명들의 서막을 열었다. 그것은 소유의 침해를 통해서 열었다........솔론의 혁명에서는 채무자의 소유를 위해서 채권자의 소유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채무는 간단하게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세부사항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솔론은 자신의 시에서 저당 잡힌 땅에서 저당기둥을 뽑아내고 채무 때문에 외국에 팔려간 자나 도망한 자를 돌아오게 하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른바 정치혁명은 최초의 것에서 최후의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어떤 한 종류의-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이루어졌고-다른 종류의-소유의 몰수, 소유의 절취라고도 불려지는 것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므로 2,500년 동안 사적 소유는 소유권 침해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 진실이다.(129)
그러나 이제는 자유로운 아테네 인이 이처럼 노예화되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것은 우선 일반적인 방책에 의해서, 예컨대 채무자의 인신을 담보로 하는 채무 계약을 금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나아가 농민의 토지에 대한 귀족의 탐욕을 적어도 어느 정도나마 제한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토지 소유의 최대한도가 설정되었다. (130)
평의회는 각 부족에서 100명씩 4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직 부족이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국가체가 낡은 제도로부터 받아들인 유일한 측면이었다. 왜냐하면 그 밖에 솔론은 시민을 소유지와 거기서 나오는 수확량에 따라 네 계급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모든 공직은 상위의 세 계급출신만이, 그리고 최고의 공직은 제1계급 출신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제4계급은 민회에서 발언하고 투표할 권리를 가질 뿐이었지만, 모든 공직자는 민회에서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활동보고를 해야 했다. 법률은 모두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제4계급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귀족의 특권은 부의 특권이라는 형태로 부분적으로 갱신되었지만, 인민이 결정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 네 계급은 새로운 군대 조직의 기초를 이루었다. 상위의 두 계급은 기병을 맡았다; 제3계급은 중무장 보병으로 근무해야 했다; 제4계급은 갑옷을 입지 않은 경무장 보병으로서 혹은 해군으로서 근무해야 했지만, 근무 시에는 급료를 받은 듯하다. (130)
그러므로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요소가 제도 안에 도입되고 있다: 사적 소유. 국가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각자의 토지 소유의 크기를 기준으로 정해지고 자산계급이 세력을 얻는 만큼, 그만큼 옛날의 혈연 단체는 밀려 난다; 씨족제도는 새로운 패배를 당한 것이다.(130)
그렇지만 재산을 기준으로 한 정치적 권리의 대소 결정은 국가 성립에 없어서는 안 될 제도들 중의 하나는 아니었다. 그것이 국가의 제도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은 국가는 매우 많았고...아테네에서도 그것은 일시적 역할을 했을 뿐이다; 아리스티데스 이래 모든 공직은 시민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130-131)
클레이스테네스의 새로운 제도에서는 씨족과 부족에 기초를 둔 옛날의 네 부족들이 무시되었다. 그것들 대신에 이미 나우크라리아에서 시도된, 단순한 정주에 따른 시민의 구분에 기초를 둔, 완전히 새로운 조직이 나타났다. 이제 혈연단체로의 소속이 아니라 거주지만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인민이 아니라 영역이 구분되었다. 주민은 정치적으로 영역의 단순한 부속물이 되었다.
전체 아티카는 100 개의 자치구 즉 데모스로 나뉘어, 각 데모스는 자치행정을 하였다. 각 데모스에 정주하는 시민들(데모테스)은 그들의 수장(데마르코스)과 출납책임자, 그리고 작은 소송 사건들에 대한 재판권을 가진 30명의 재판관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신전과, 수호신 즉 영웅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을 섬기는 제관을 선출하였다. 데모스의 최고 권력은 데모테스의 총회에 있었다. 모건이 옳게 지적했듯이, 그것은 아메리카의 자치적인 도시공동체의 원형이다.(131-132)
...데모스 10개가 모여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의 혈연부족과 구별하기 위해 이제는 지연부족이라 불린다. 지연부족은 자치적 정치단체였을 뿐 아니라 군사단체이기도 하였다....아티카의 영웅 중의 한 명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그의 이름을 따서 자기 부족명으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아테네 평의회에 참가할 5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였다.
이러한 것이 매듭지어진 결과가 아테네 국가였다. 아테네 국가는 10개 부족에서 선출된 500명의 대표로 구성된 평의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종국적으로는 모든 아테네 시민이 출석권과 투표권을 가지는 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집행권력의 단일한 최고 관리는 아테네에 없었다.(132)
국가의 본질적인 한 가지 표징은 인민 대중과 구별된 공적 권력이라는 점에 있다. 아테네 인은 당시에 인민의 군대와 인민이 직접 제공한 함대를 갖고 있을 뿐 이었다; 군대와 함대는 외적으로부터 아테네를 방위하고, 당시 이미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노예를 통제하였다. 시민들에 대해서는 공적권력은 처음에는 경찰로서만 존재하였다. 경찰은 국가만큼 오래된 것이다...그러나 이 헌병대(경찰대)는 노예들로 편성되었다. 자유로운 아테네 인은...이 수치스런 일을 하느니 차라리 무장노예에게 체포되는 편을 택했다...이것은 옛 씨족시대의 사고방식이었다...
이제 기본 골격이 완성된 국가가 아테네 인의 새로운 사회 상태에 얼마나 적합한 것이었는가는 부와 상공업이 급속히 번창했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아테네가 가장 번영한 시기에 아테네의 자유시민은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여 약 90,000명이었고, 그들과 나란히 365,000명의 남녀 노예와 45,000명의 거류민-외국인과 해방 노예-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인 남자 시민 한 명 당 적어고 18명의 노예와 두 명 이상이 거류민이었었던 셈이다. 노예의 수가 이처럼 많은 것은 그들 다수가 수공업 작업장에서, 커다란 실내에서 감독의 지휘 하에 모여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소수자의 손으로 부가 축적·집적되고 자유 시민 대중은 빈곤하게 되었다. 자유 시민 대중에게 남은 선택은 스스로 수공업 노동을 하여 노예노동과 경쟁하거나...그렇지 않으면 룸펜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그들은 필연적으로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시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던 만큼 아테네 국가 전체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아테네를 몰락으로 이끈 것은 군주에 아첨하는 유럽의 학교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시민의 노동을 추방한 노예제였다.(133-134)
아테네 인들에게서 이루어진 국가의 성립은 국가 형성 일반의 아주 전형적인 견본이다.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외적 또는 내적 폭력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기...때문이고, 둘째 민주주의 공화제라는 아주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국가를 씨족 사회로부터 직접 출현시켰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그 모든 중요한 세부 항목들이 우리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134)
Ⅵ. 로마의 씨족과 국가
로마 창건 전설에 따르면, 최초에 정주한 것은 한 부족으로 결합한 몇 개(전설에 따르면 100개)의 라틴 씨족들이었고, 얼마 안가서 역시 100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벨리 족이 결합했으며, 마지막으로 역시 100개의 씨족이라 불리는 잡다한 요소들로 구성된 세 번째의 부족이 결합하였다. ...... 중간고리를 이루는 프라트리는 10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졌으며, 쿠리아라고 불렀다; 따라서 쿠리아는 30개였다.
로마의 씨족이 그리스의 씨족과 동일한 제도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암리카 인디언이 우리에게 그 원초 형태를 보여주는 저 사회적 단위가 한층 발전한 것이 그리스의 씨족이라고 한다면, 로마의 씨족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
1. 씨족원들의 상호 상속권: 재산은 씨족 내에 남겨졌다. 그리스의 씨족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씨족에서도 이미 부권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여계의 자손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로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에 따르면, 먼저 자식들이 실자 상속인으로서 상속하였다; 그들이 없는 경우에는 아그나테(남계의 친족)가 상속하였다; 그리고 이들도 없는 경우에는 씨족원들이 상속하였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재산은 씨족 내에 남았다. 우리는 여기서 부의 증대와 일부일처제에 기인한 새로운 법 제정이 씨족 관습을 점차 침해했음을 알 수 있다; 씨족 원들이 애초에 가졌던 평등한 상속권은... 아그나테로 국한되었고, 마지막에는 자식들과 자식들의 남계의 자손에 국한되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십이표법에는 이와 반대의 순서로 되어 있다.
2. 공동 묘지의 소유
3. 공동의 종교적 제사.
4. 씨족 내에서 결혼하지 않을 의무. ..... 여자는 결혼하면 아그나테로서의 권리를 상실하면서 자기 씨족을 떠난다. 그녀도 그녀의 아이들도 그녀의 아버지나 아버지의 형제의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
5. 공유지. 이것은 원시 시대에는, 부족 토지가 분할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존재하였다. 우리는 라틴 부족들 사이에서는 토지가 일부는 부족의 소유, 일부는 씨족의 소유, 일부는 세대-당시에는 아직 개별 가족이 아니었다-의 소유로 되어있었음을 볼 수 있다. ...
6. 씨족원들의 상호 보호와 원조 의무..... 로마국가는 애초부터 매우 강대한 힘을 갖고서 등장했기 때문에, 가해로부터 로마를 보호할 권리는 국가에 이전되어 있었다.
.....
9. 수장을 선출하고 해임할 권리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로마 초기에는 선거왕을 비롯한 모든 공직 취임이 선거 또는 지명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쿠리아의 제관도 쿠리아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므로, 씨족의 수장들(프린키페스)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이상이 로마 씨족의 권리들이었다. 이미 부권제로의 이행을 완료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것은 이로쿼이 씨족의 권리 의무를 그대로 거울에 비춘 것과 같다. p.135-138
로마 시민단에는 씨족의 성원이면서 이 씨족을 통해서 쿠리아와 부족의 성원인 사람만이 속할 수 있었다. 이 시민단의 최초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공적인 사무는 우선적으로 원로원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원로원은 ....300개 씨족의 수장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씨족의 장로로서 아버지들 즉 patres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총체는 원로원senat(장로들의 평의회라는 뜻으로, senex 즉 늙은이라는 말에서 왔다)이라고 불렷다. 통상적으로 언제나 각 씨족의 동일한 한 가족 중에서 선출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최초의 부족 귀족이 생겨났다: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민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이러한 요구가 실제적인 권리가 되었다는 것은 로물루스가 최초의 원로원 의원들과 그 자손들에게 귀족의 신분 patriziat과 그 특권을 나누어 주었다는 전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 새로운 법률을 결정하는 것은 쿠리아 회의라고 불리는 민회였다. 인민은 쿠리아 별로 모여 앉았으며, 각 쿠리아에서는 아마도 씨족 별로 모여 앉았을 것이다. 결정을 내릴 때는 30개의 쿠리아 각각이 한 표씩을 행사하였다. 쿠리아 회의는 모든 법률을 채택 또는 부결하였으며, 레크스(이른바 왕)를 포함한 모든 고급 공직자를 선출하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쿠리아 회의는 로마 시민의 사형이 문제가 되는 모든 사건에서 당사자의 상소에 따라 최고 재판소로서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원로원 및 민회와 나란히 레크스가 있었는데 레크스는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몸젠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절대 군주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레크스는 군사 지휘자였고, 제관장이었으며, 어떤 종류의 재판에서는 재판장이었다. 그는 군사 지휘자로서의 징벌권, 또는 재판장으로서의 판결 집행권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 한, 시민의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민정상의 권한 혹은 권력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레크스의 직무는 세습되지 않았다. .....
영웅 시대의 그리스 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왕정 시대의 로마인들도 씨족, 프라트리, 부족을 기초로 하는, 그것들로부터 발전된 군사 민주주의 하에서 생활하였다. 비록 어느 정도 인위적인 구성물이긴 하였지만, 쿠리아와 부족은 그것들을 발생시키고 모든 방향에서 아직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던 그 사회의 진정한 원형, 자연 성장적 원형을 따라 만들어졌던 것이다. 자연 성장적인 파트리치어 귀족이 이미 지반을 확보하였고, 또 레크스들이 점차 그 권한을 확대하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의 본원적인 기본 성격이 변하지는 않았다. p. 142-144
그러는 동안에 로마 시와 정복에 의해서 확대된 로마 영토의 인구는 일부는 이주민에 의해서 일부는 복속지역, 주로 라틴 족 지역의 주민에 의해서 증가하였다. 이 새로운 국가 신민들은 모두 과거의 씨족, 프라트리, 부족의 밖에 있었고, 따라서 본래의 로마 시민단의 구성 부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신적으로는 자유인이었으며, 토지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세금을 내야했고 병역에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공직도 차지할 수 없었으며, 쿠리아 회의에 참가할 수도, 정복한 국유지의 분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어떠한 공적 권리도 가지지 못한 플렙스를 이루었다. 수가 점점 늘어가고 군사 훈련을 했고 무장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이제 외부인의 가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던 과거의 포풀루스에게 하나의 위협적인 힘이 되었다. 게다가 소유지는 포풀루스와 플렙스 사이에 상당히 균일하게 분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한편 상공업의 부는 아직 그렇게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주로 플렙스의 수중에 있었다. p.144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라는 레크스가 제정하였다고 하는 새로운 제도, 그리스의 모범, 특히 솔론에 의거한 그 제도는 하나의 새로운 민회를 만들어 내다. 이 민회에의 참가 여부는 포풀루스냐 플랩스냐 하는 차이가 아니라 병역을 수행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병역 의무를 지니는 남성 주민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 제6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들은 그 이하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병역 및 납세를 면제 받았다. 새로운 켄투리아 민회에는 시민들이 군대식이라, 100명씩 켄투리아 별로 부대를 이루어 도열하였다. 그리고 각 켄투리아는 한 표를 가졌다. 그런데 제1계급은 80켄투리아를 이루었다; 제2계급은 22, 제3계급은 20, 제4계급은 22, 제 5계급은 30 켄투리아를 이루었고, 제6계급도 체면상 한 켄투리아를 이루었다. 그 외에 가장 부유한 자들로 이루어진 18 켄투리아의 기병대가 있었다; 도합 193; 투표의 과반수; 97. 그런데 기병대와 제1계급을 합하기만 해도 98표, 즉 과반수 였다. ...
이전의 쿠리아 회의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권리는 이제 모두 이 새로운 켄투리아 회의로 넘어갔다; 이로써 쿠리아와 그것을 구성하는 씨족들은 아테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사적. 종교적 단체로 전락하였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오랫동안 남은 목숨을 보존하였으나, 쿠랑 회의는 얼마 안가서 완전히 영면하였다. 또한 세 개의 낡은 혈연 부족을 국가에서 구축하기 위해 시의 1/4에 나누어 사는 네 개의 지연 부족이 만들어져 이 부족들에 일련의 정치적 권리들이 주어졌다.
이처럼 로마에서도, 이른바 왕정이 폐지되기 전에 이미, 인신적인 혈연적 유대에 기초를 둔 낡은 사회 제도가 분쇄되고, 그 대신에 영역의 구분과 재산의 차이에 기초를 둔 새로운 진정한 국가 제도가 들어서 있었다 .여기서 공권력은, 노예들뿐만 아니라 병역과 무장에서 제외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들에 대립하여, 병역 의무를 지는 시민들에게 있었다.
이 새로운 제도 내부에서 관직 취임권과 국유지의 분배를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투쟁으로 점철된 로마 공화국의 전 역사가 진행되었으며, 파트리치어 귀족은 마침내 대토지 소유자 및 화폐 소유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계급으로 해소된다. 이 새로운 계급은 병역 때문에 영락한 농민의 모든 소유지를 점차 흡수하였고, 이렇게 만들어진 광대한 영지를 노예를 부려 경작하면서 이딸리아의 인구를 감소시켰다. p.145-146
Ⅶ. 켈트 인과 독일인의 씨족
아직도 다양한 야만 민족들과 미개 민족들 사이에서 혹은 순수한 형태로 혹은 불명료한 형태로 존속하고 있는 씨족 제도의 흔적들은 지면 관계상 여기서 다룰 수 없다. 그것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 여기서는 켈트 인과 게르만 인 사이에서의 씨족의 존재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는 데 그치려 한다. p.147
잉글랜드인들이 정복하기 여러 세기 전에 즉 늦어도 11세기에 제정된 고대 웨일즈의 법률을 보면, 설령 이전의 일반적 관습의 잔재가 예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직 촌락 전체의 공동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 촌락 공동체가 씨족 혹은 씨족의 곁가지를 나타낸다는 것은 ......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우에서 유추해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켈트 인들 사이에서는 11세기가 되어서도 아직 대우혼이 일부일처제에 의해 결코 밀려나지 않았다. .....
아내 쪽에서 재산 분배에서 청구권을 잃지 않으면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이혼 사유들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남편의 입에서 악취가 난다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초야권의 대가로서 부족장 또는 왕에게 지불해야 하는 속죄금은 법전에서 큰 역할을 한다. 여성들은 민회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아일랜드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태가 존재했음이 증명되었다; 거기서도 역시 기간을 정해 놓은 결혼이 아주 통상적이었으며 또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에게는 정확히 규정된 많은 특전이 보장되어 있었고, 그녀의 가사 노동에 대한 보수까지도 보장되어 있었다; 거기서는 다른 아내들과 나란히 ‘본처’가 있으며, 유산을 나눌 때 적자와 서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었다. -이는 대우혼의 광경이다. p.148-149
아일랜드 씨족은 고대의 법전들뿐만 아니라, 클란의 토지를 잉글랜드 국왕의 직영지로 바꾸기 위해 그곳에 파견된 17세기 잉글랜드의 법률가들도 그 존재를 확인해 주었고 ... 토지는, ... 17세기까지만 해도 클란 또는 씨족의 공동소유였다. 한 명의 씨족원이 죽으면, 따라서 한 세대가 없어지면, 수장은 남은 세대들 사이에 토지 전체를 재분배했다. p.149
스코틀랜드에서 씨족 제도의 몰락은 1745년 봉기의 진압과 때를 같이 한다. .... 월터 스코트의 소설에는 이 고지 스코틀랜드의 클란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모건이 말하고 있듯이....
“그 조직과 정신으로 보아 씨족의 완벽한 전형이며 씨족원에 대한 씨족 생활의 지배력을 보여주는 적절한 실례이다. ...... 혈통은 부권에 따라 따졌다. ....”
그러나 이전에는 모권제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했다는 것은, 베다에 따르면, 픽트 족의 왕가에서 여계의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 그뿐 아니라 스코트 족 사이에서도 웨일즈 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푸날루아 가족의 한 조각이 초야권의 형태로 중세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있었다. 그것이 대속되지 않는 한, 클란의 수장 혹은 이전의 공동의 남편들의 최후의 대표자로서 어떤 처녀에 대해서도 이 초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p.151
독일인이 민족 대이동 전까지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케사르의 확언에 따르면, 수에브 족은 씨족과 친족 별로 정주했다고 한다. .... 이러한 정주형태는 모든 독일인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로마 속주에 정주할 때조차 시족별로 정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알라만 민족법은 이 민족이 도나우 강 남쪽의 정복지에 친족별로 정주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genealogia는 후세의 마르크 공동체나 촌락 공동체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p.152-154
.....
멕시코 인이나 그리스 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일인의 경우도 네모 모양 기병 중대건 쐐기 모양 보병대건 씨족 단체별로 전투 대형을 편성하였다. .....
타키투스의 다음 구절들은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어머니의 형제는 자신의 조카를 자신의 아들과 같이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외삼촌과 조카 사이의 혈연적 유대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보다 더 신성하고 긴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인질을 요구하는 경우에 인질 제공자의 아들보다 외조카를 더 큰 담보로 생각한다. ..... 설령 독일인의 씨족 제도의 흔적이 이것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구절로도 충분할 것이다. p.152-154
타키투스 시대에는, 적어도 그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모권제가 이미 부권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였다; 아이들이 없는 경우에는 형제들과 아버지 편 및 어머니 편의 삼촌들이 상속하였다. 어머니의 형제가 상속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방금 말한 관습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당시 독일인들 사이에서 부권제가 아직은 새로운 것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세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후에도 모권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까지 아버지의 혈통은, 특히 농노의 경우에, 별로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봉건 영주가 도망친 농노를 반환해 줄 것을 어떤 도시에 요구할 때, 예컨대 아우구스부르크, 바젤, 카이저스라우테른 등지에서는 도망친 사람이 농노라는 것을 그와 가장 가까운 6명의 혈족들이 그것도 모두 어머니 쪽의 혈족들이 서약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 사멸해 가고 있던 모권제의 또 다른 잔재는 여성에 대한 독일인들의 존경으로서, 이것은 로마 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것이었다. 독일인과 계약을 맺을 때는 귀족 가문 출신의 처녀가 가장 구속력 있는 인질로 간주되었다. ..... 그들은 여성을 어떤 신성한 존재, 예언자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여성의 의견을 들었다. .....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지배는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노동은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의 몫이었고, 남자는 사냥을 하거나 술을 마셨고 그렇지 않으면 빈둥거리며 놀았다. 이상은 타키투스가 말한 것이다. ......
결혼 형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점차 일부일처제에 접근해 가는 대우혼이었다. 그것은 아직 엄격한 일부일처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류 계층의 일부다처제는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처녀들의 순결은(켈트 인과는 반대로) 엄격히 지켜지는 편이었다. ....
독일인들이 자기들의 삼림 속에서는 그처럼 예외적인 덕행의 기사일지 몰라도, 조금만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 그들은 보통 유럽인들의 수준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도덕적 엄격함은 로마 세계의 한가운데 들어서자 그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져 버렸다. ..... 독일의 원시림 속에서는 로마에서처럼 세련된 관능의 성찬이 베풀어질 수 없었다. ....
....
케사르의 증언에 따르면 수에브 족 사이에서는 당시까지도 씨족에 의한, 후에는 공산주의적 가족 공동체에 의한 경지의 공동 경작이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에 뒤이어 개별 가족들에 대한 토지의 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정기적으로 재분배되었다. ....
따라서 나는 타키투스의 다음과 같은 간단한 구절만을 읽는다: 그들은 매년 경지를 변경하지만(혹은 재분할하지만), 공유지는 충분히 남겨둔다. 이것이 독일인들의 당시의 씨족 제도에 정확히 부합하는 농경 및 토지 소유의 단계이다. p.155-158
꼬발레프스끼가 모권제적 공산주의적 가족과 현대의 고립적 가족의 중간단계로서 가부장제적 세대 공동체가 보편적으로는 아니지만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 이후로 문제는 더 이상 마우러와 바이츠 사이의 논쟁 때처럼 토지의 공동 소유냐 사적 소유냐 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공동 소유의 형태가 문제가 되었다. 케사르 시대의 수에브 족 사이에서는 공동 소유뿐만 아니라 공동 경리에 의한 공동 경작 또한 존재했으며,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경리의 단위가 씨족 이었는가 세대 공동체였는가 아니면 양자 사이의 공산주의적 친족집단이었는가 또는 토지의 조건에 따라서 이 모든 집단이 다 경리 단위의 역할을 했는가에 관해서는 아직 논쟁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꼬발레프스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타키투스가 묘사한 상태는 마르크 공동체 또는 촌락 공동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공동체를 전제한다; 이 세대 공동체로부터 한 참 후에 인구 증대의 결과로 촌락 공동체가 발전해 나왔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로마 시대에 점거하고 있던 지역에서건 그 후 로마 인들에게서 빼앗은 지역에서건 촌락 단위로 정주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의 가족 공동체 단위로 정주했을 것이다. p. 158
러시아의 경우에는 이러한 발전 과정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으로 보인다. .... 대체로 촌락 마르크 공동체보다 세대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더 잘 설명된다. 다른 한편 이러한 추론은 다시 새로운 난점을 낳으며,.....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연구가 있어야만 최종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나는 세대 공동체라는 중간 단계가 독일,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등지에도 존재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p.159
케사르 시대만 하더라도 독일인들은 한편으로 이제 겨우 정착했거나 아니면 정착지를 찾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타키투스 시대에 와서는 이미 한 세기 동안이나 정착 생활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
이 민족은 이제 막 미개의 중간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로마 인들과 바로 붙어 있는 부족들은 로마의 공업 제품들을 수입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독자적인 금속 공업이나 섬유 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그것이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북동부의 발트 해 연안에서는 틀림없이 이러한 공업이 발달했을 것이다. .....
그들의 제도도 역시 미개의 높은 단계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어디에나 수장들의 평의회가 있었다. 작은 문제들은 평의회가 직접 결정을 내렸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민회의 결정을 위한 사전 심사를 하였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민회는,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 인들의 경우, 씨족에만 있었고 부족이나 부족 동맹에는 없었다. 수장들은 이로쿼이 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 군사 지휘자들과 확실하게 구별되었다. ..... 그들은 아메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개 동일한 한 가족에서 선출되었다; 부권제로의 이행은 그리스 및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출제에서 세습제로의 점차적 전화를 촉진하였으며, 아울러 각 씨족 내에서의 귀족 가족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고대의 소위 부족 귀족은 대부분 민족 대이동 때에 혹은 그 직후에 몰락하였다. ...... 실제적 권력은 민회에 있었다. 부족장이 사회를 보고 인민이 결정을 내렸다. - 반대일 때는 투덜거렸고 찬성일 때는 환호성을 지르며 무기를 두들겼다. 민회는 동시에 재판회의이기도 했다; 여기서 고소가 이루어지고 판결이 내려졌다. .... 씨족과 기타의 하부 조직에서도 역시 수장의 사회아래 전원이 재판하였다. 독일의 모든 원시적 재판이 그러했듯이 수장은 오직 심리의 지휘자 내지 심문자 밖에 될 수 없었다. p.159-161
케사르 시대 이래 부족 동맹들이 형성되었다; 그중 몇몇은 이미 왕을 두었다; 최고 군사 지휘자는 그리스 인이나 로마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미 참주 정치를 획책했으며 때로 그 목저을 달성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행운의 권력 찬탈자들도 결코 무제한적인 지배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씨족 제도의 질곡을 타파하기 시작했다. ...
왕권의 발흥을 촉진한 제도가 있었다; 종사단.... 이 사적 단체는 독일인들의 경우에 이미 상설적인 단체가 되어 있었다. 명성을 얻은 군사 지휘자는 약탈욕에 가득 찬 한 무리의 청년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 모아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의 의무를 지우고 자신도 그들을 성실하게 대우할 의무를 졌다. ..... 이러한 종사단은 허약했을 것이 틀림없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인민의 자유가 붕괴하는 맹아였던바, ..p.161-162
연합하여 여러 민족들을 형성한 독일인 부족들은 대체로 영웅시대의 그리스 인들이나 소위 왕정시대 로마인들이 발전시킨 것과 동일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민회, 씨족장들의 평의회, 이미 진정한 왕권을 움켜쥐려고 하는 군사 지휘자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씨족제도 아래서 이룩될 수 있었던 가장 완성된 제도였다; 그것은 미개의 높은 단계의 전형적 제도였다. 사회는 어느 경계까지는 이 제도로 충분하였으나, 사회가 그 경계를 벗어나자 씨족 제도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파괴되고 대신 국가가 나타났다. p.162
Ⅷ. 독일인의 국가형성
타키투스에 따르면, 독일인은 인구가 대단히 많은 민족이었다. 케사르의 언급을 참조하면, ..... 각 부족단은 약 10만 명쯤 되는 셈인데, 이는 예컨대 전성기의 이로쿼이 족의 인구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이로쿼이 족은 전성기에 오대호에서 오하이오 강과 포토맥 강에 이르는 지역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할 당시에도 2만 명을 넘지 않았다. .....
부족단의 평균 인구가 100,000 명이라고 할 때 대 게르마니아의 총인구는 5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개인의 부족단 집합군으로서는 상당한 숫자지만, 현재의 상태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것이다. .... 고트 족 계열의 독일 민족들, 즉 바스타르너 족, 페우키너족 등등은..... 이들의 숫자를 100만 명으로만 잡더라도 기원 초기의 독일인의 인구는 적어도 6백만 명쯤은 되었을 것이다.
인구는 게르마니아에 정착한 후부터 급속히 늘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공업상의 진보만으로도 이것에 대한 증명이 될 것이다. p.163-164
5세기 말경에 로마 제국은 아무런 힘도 원기도 없는 구제불능 상태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독일인들을 무방비 상태로 맞았다.
.... 지중해에 인접한 모든 나라들에 걸쳐서 로마의 세계 지배는 대패의 작용을 하여 그 나라들을 모두 평준화시켰으며, 그것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스어가 저항한 곳을 제외하고, 모든 국민어가 부패한 라틴어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더 이상 어떠한 민족적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 모두는 로마 인이 되었다. 로마의 행정과 로마의 법은 모든 곳에서 낡은 혈연 단체를 해체하고 지역적 민족적 독자성의 마지막 흔적 까지 없애 버렸다.(팍스 로마나-발제자 주) ..... 이전에 이딸리아, 갈리아, 에스빠냐, 아프리카를 자립적 지역으로 만들어 주었던 자연적 경계들은 여전히 존재하였고 또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민족들을 만들어 낼 힘은 어디에도 없었다. .... 엄청나게 넓은 지역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끈에 묶여 있었다; 로마국가. 그리고 이 로마 국가는 시간이 가면서 최악의 적, 최악의 억압자가 되었다. ..... 로마 국가는 오로지 신민들의 고혈을 빨아 먹을 뿐인 거대하고 복잡한 하나의 기계가 되었다. 온갖 종류의 조세, 부역, 공납이 주민 대중을 억압하여 그들을 점점 더 깊은 빈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러한 억압은 총독과 세리와 병사들의 착취로 더욱 가중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
사회 상태 역시 절망적이었다. 이미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의 지배는 정복한 지방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치달았다; 제정은 이러한 착취를 없애기는커녕 규칙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제국이 몰락해 갈수록 조세와 공납은 더욱 심해졌으며, 관리들의 약탈은 더욱 뻔뻔스러워졌다. .... 전반적인 빈곤, 교통, 수공업, 예술의 퇴보, 인구의 감소, 도시의 쇠퇴, 농경의 퇴보-이러한 것들이 로마의 세계 지배가 남겨 놓은 마지막 결과들이었다. p.165-166
공화정 말기 이래 이딸리아의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복합 영지(라티푼디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선,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주민들이 밀려나고 양과 소가 그곳에 살게 되었다. 이 동물들을 치는 데는 그리 많은 노예가 필요치 않았다. 두 번째로는 교외 농장으로 이용되었다. 여기서는 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 대규모의 원예 농업이 이루어졌는데..... 교외 농장과 원예 농업은 그 주인이 빈곤해지고 도시가 쇠퇴함에 따라 몰락하였다. 노예 노동에 기초를 둔 라티푼디움 경영은 더 이상 채산이 맞지 않았다; ..... 소규모 농업이 다시 유일하게 이익이 남는 농업 형태가 되었다. 교외 농장은 차례차례 작은 분할지로 나누어져서 일정한 소작료를 내는 세습 소작인들이나 파르티아리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파르티아리는 소작인이라기보다는 관리인의 성격이 강했으며 연간 생산물의 6분의 1정도를 자기 노동의 대가로 받았다. ... 그러나 이 소분할 경지는 주로 콜로누스들에게 분배되었다.이들은 그 대가로 매년 일정한 양의 수확물을 지불하였으며, 경작지에 붙잡힌 신세로 그 분할지와 함께 매각될 수 있었다: 그들은 노예도 아니었지만, 자유민인 것도 아니었다. ... 그들끼리의 결혼은.... 노예들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동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중세 농노들의 선행자였다.
고대 노에제는 수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농촌의 대규모 농업에서도 도시의 수공업 작업장에서도 더 이상 그 수고에 값하는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노예제의 생산물이 팔릴 시장은 사라졌다. 그러나 제국 전성기의 거대한 생산이 수축한 결과인 소규모 농업과 수공업에는 수 많은 노예들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다. 사회에는 부자들의 가내 노예나 사치성 노예를 받아들일 여지밖에 없었다. ..... 한편으로 이제 남아돌아서 부담이 된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졌고, 다른 한편으로 여기서는 콜로누스들이 증가하였고 저기서는 룸펜이 된 자유민들이 증가하였다. 고대 노예제가 서서히 소멸한 것은 결코 기독교 때문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북쪽 독일인들의 노예 무역이건 지중해 베네치아 인들의 노예무역이건 후대의 흑인 노예 무역이건 기독교들의 노예 무역을 일체 방해하지 않았다. 노예제는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아서 사멸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는 사멸하면서 자유민들의 생산적 노동을 추방하는 독침을 쏘고 죽었다. 여기에 로마 세계가 처한 막다른 골목이 있었다; 노예제는 경제적으로 불가능했고, 자유민들의 노동은 정신적으로 추방되었다. 앞의 것은 더 이상 불가능했고, 뒤의 것은 아직 사회적 생산의 기본 형태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혁명뿐이었다. p.166-167
지방들의 상황도 이보다 나은 편이 아니었다. ,,,, 갈리아에는 코롤누스들 이외에 자유로운 소농민들이 있었다. 관리, 재판관, 고리 대금업자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자유로운 소농민들은 자주 권세가의 보호, 후견에 몸을 맡겼다; 개별적으로 그러는 경우도 있었지만, 공동체 전체가 그러는 경우도 있었다. .... 비호 귀족은 피난민들에게 그들의 토지소유권을 자신에게 넘기면 그 대신에 그 토지에 대한 용익권을 평생 동안 보장해 주겠다는 식으로 조건을 내걸었다.- 신성한 교회는 이 술책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9세기와 10세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자신의 땅을 늘리는 데 실컷 써 먹었다. 475년 경 마르세유의 주교 살비아누스는 이러한 도둑질에 격분하여 그것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p.168
독일의 미개인들은 로마 인들을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대신에 전체 토지의 3분의 2를 빼앗아 그것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분배는 씨족 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정복자들의 수가 별로 많지 않았으므로 매우 광대한 토지가 분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일부는 부족단 전체의 토지, 일부는 각 부족 및 씨족의 토지가 되었다. .... 어쨌든 토지 재분배는 얼마 안 있어 로마의 지방들에서는 자취를 감추었고 개별 토지는 알로트라는 양도 가능한 사유재산이 되었다. .... 씨족이 자기 촌락에서 오랫동안 거주할수록, 그리고 독일인과 로마 인이 점차 융합할수록, 유대의 혈연적 성격은 희박해지고 지역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씨족은 마르크 공동체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지만, 마르크 공동체에도 물론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 성원들의 친족적 관계에서 기원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리하여 혈연 제도는 적어도 마르크 공동체가 유지되던 나라들-북부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스칸디나비 아-에서는 모르는 사이에 지역적 제도로 이행하였으며, 그에 따라 국가에 적합한 것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제도는 씨족 제도 전체의 특징인 자연 성장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 이로써 이것은 하나의 무기로서 피억압자의 수중에 남아 최근에까지 맥을 이어오게 되었다. p.168-169
로마 지방들의 지배자가 된 독일의 부족단들은 자기들의 이 정복을 조직화해야만 했다. 그러나 로마인 대중을 씨족 단체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며, 또 그것을 매개로 그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로마 지방 행정 기관은 얼마 동안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정점에 로마 국가를 대신할 만한 것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국가 기관으로, 그것도 사정이 절박했기 때문에 매우 급속히 전화해야 했다. 그러나 정복한 민족의 우선적 대표자는 군사 지휘자였다. ....군사 지휘자의 지배권이 왕권으로 되어야 할 시기가 왔다.
...... 단순한 최고 군사 지휘자에서 진짜 군주가 된 프랑크왕이 첫 번째로 착수한 일은 이 인민의 재산을 왕의 영지로 바꾸는 것 이었으며, 그것을 인민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종신들에게 증여 또는 대여하는 것이었다. .... 이 종신들은 얼마 안 가서 로마 인들, 요컨대 로마화한 갈리아인들에 의해서 보강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이 궁정을 형성하고 있던 노예, 농노, 해방 자유민들로 증강되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인민의 토지들이 처음에는 대개 증여되었고 후에는 은대지의 형태로 대여 되었는 바, 처음에는 대개 왕이 살아 있는 동안으로 한정하였다. 이리하여 인민의 희생위에서 새로운 귀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p.169-170
왕국의 규모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낡은 씨족 제도를 가지고서는 통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수장들의 평의회는, 남은 목숨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소집이 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서 왕의 측근들로 교체되었다; 지난날의 민회는 외관상 존속하긴 했으나, 역시 그것도 점차 하급 지휘관들과 신흥 호족들의 단순한 회의가 되어 갔다. 프랑크 인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토지소유 농민은 끝없는 내란과 정복 전쟁, 특히 샤를르 대제 시기의 정복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때 공화제 말기의 로마 농민과 마찬가지로 피폐해지고 영락하였다. 초기에는 전체 군대를 충당하였고 프랑스를 정복한 후에는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던 이농민들은 9세기 초에는 너무나 가난해져서 출정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도 되지 않았다. 왕이 직접 소집하던 자유농민 소집군을 대신하여 신흥 호족의 가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나타났다. .... 프랑크 농민의 영락를 샤를르 대제 후계자들의 통치시기에 내전, 왕권의 쇠약, 이에 따른 호족들-여기에는 샤를르 대제의 의해 임명된 가우 백작들로서 그 관직을 세습화하려 하던 자들도 포함된다- 의 간섭, 끝으로 노르만 인들의 침입 등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하였다. 샤를르 대제가 죽은 후 50년이 지나서 프랑크 왕국은... 노르만 인들에게 유린당하였다.p.170-171
프랑크 왕국은 대외적 무능력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의 사회적 질서, 아니 차라리 사회적 무질서에서도 로마 국가와 거의 동일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자유농민들은 그 선행자인 로마의 콜로누스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전쟁과 약탈로 영락해 버린 그들은 신흥 호족이나 교회의 보호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왕권은 그들을 보호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호를 받기 위해서 그들은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이전에 갈리아 농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자기 토지의 소유권을 보호 주에게 양도하고 그것을 소작지로 그에게서 돌려받아야 했다.... 일단 이러한 형태의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되자, 그들은 점차 자기의 인신의 자유도 잃게 되었다; 불과 몇 세대도 지나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농노로 전락하였다. ..... 보호주가 농민의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종신 용익권만을 농민에게 주는 관습에 대해 살비아누스는 신을 배반하는 짓이라고 한 바 있지만, 이것이 이제는 교회를 통해 도처에서 실행되었다. 점차 관습이 되어 버린 부역은 로마의 앙가리아 즉 국가를 위한 강제 노역을 본뜬 것임과 동시에 독일의 마르크 공동체 성원들이 다리를 놓고 도로를 만들고 기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역을 하던 것을 본뜬 것이었다. 그러므로 외견상 주민 대중은 400년이 지난 뒤 자신이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간 셈이다.
.... 첫째, 몰락해 가는 로마 제국의 사회적 편제와 재산 분배는 당시의 농업과 공업의 생산 단계에 완전히 조응하며, 따라서 불가피했다는 것; 둘째, 이 생산 단계는 그 후 400년 동안 근본적으로 낮아지지도 않았고 근본적으로 높아지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동일한 필연성 하에서 동일한 재산 분배와 동일한 주민 계급들을 다시 낳았다는 것. 도시는 로마 제국 마지막 몇 세기 동안에 농촌에 대한 기존의 지배권을 상실했는데, 독일인이 지배하기 시작한 처음 몇 세기 동안에는 그것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것은 농업과 공업의 낮은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전체 상황은 필연적으로 지배적인 대토지 소유자와 예속된 소농민을 낳는다. p.171-172
그러나 이 400년 동안에도 진보는 있었다. 이 시기 말에 와서도 기본 계급들은 초기와 거의 같았지만, 이 계급들은 구성하는 인간들은 달라졌다. 고대 노예제는 소멸하였다. 노동을 노에나 할 일로 멸시하던 룸펜화한 가난한 자유민들도 소멸하였다. 로마의 콜로누스와 새로운 예농 사이에는 프랑크의 자유농민이 존재하였다. ..... 이 400년이 아무리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생산물을 남겨놓았다; 현대의 여러 민족체들이 그것이며, 다가오는 역사를 위해 서유럽의 인류를 개조하고 편성한 것이 그것이다. 실제로 독일인들은 유럽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므로 게르만 시기에 일어난 국가들의 해체는.... 은대지 제도와 보호위탁제도가 봉건제도로 발전하는 것으로, 또 그 후 200년도 채 지나지 않고 일어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에 따른 큰 출혈도 무사히 감당할 만큼의 방대한 인구 증가로 끝났다. p.172-173
그런데 독일인들이 죽어가는 유럽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 쓴 신비한 마술적 수단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 그러나 유럽을 다시 젊게 만든 것은 독일인 특유의 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단순히-그들의 미개성, 그들의 씨족 제도였다.
그들의 개인적인 강인함, 용기, 자유정신, 모든 공적인 일을 자기의 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적 본능, 요컨대 로마 인들은 이미 잃어버렸지만 로마 세계의 진창 위에 새 국가를 이루고 새 민족체를 육성하자면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모든 특성- 이것은 높은 단계 미개인들의 특징이 아니고, 또 그들의 씨족 제도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일인 들은 일부일처제의 고대적 형태를 개조하여 가정에서 남성의 지배를 완화하고, 일찍이 고전 세계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여성에게 부여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미개성, 그들의 씨족적 관습, 아직도 생기를 잃지 않은 모권제 시대의 유산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세 나라, 독일, 북부 프랑스, 잉글랜드에서 마르크 공동체라는 형태로 순수한 씨족 제도의 한 조각을 보존하여 봉건 국가에 도입하였고, 이것은 피억압 계급인 농민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는 중세 농노제 하에서도 고대의 노예나 현대의 프롤레타리아들이기성 형태로는 가질 수 없었던 지역적 단결력과 저항 수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미개성, 오로지 미개 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그들의 혈족별 정주 방식에 기인한 것... p.173-174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미 자기 고향에서 실시한 바 있는 한층 느슨한 예속 형태, 로마 제국에서도 노예제를 점차 대체하였던 그 예속 형태, ... 예속된 자들에게 계급으로서의 점진적 해방 수단을 제공하는(경작자들에게 집단적이고 점진적인 해방 수단을 제공하는 그 예속형태, 이 점에서 개개인을 과도적 상태를 거치지 않고 즉시 해방시키는 것만이 가능했던 노예제 보다 우월했던... 그 예속 형태를 더 발전시켜 그것을 유일한 형태로만들 수 있었던 바, 이는 그들의 미개성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일인들이 로마 세계에 이식한 생활력 있고 생기 있는 그 모든 것은 미개성 이었다. 실로 미개인들만이 지칠 대로 지친 세계의 죽어가는 문명을 젊어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족 대이동 전에 게르만 인들이 도달한 미개의 높은 단계야말로 이러한 과정에 가장 유리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된다. p.174
Ⅸ. 미개와 문명
위에서 우리는 그리스 인, 로마 인, 독일인이라는 세 개의 개별적인 큰 실례를 들어 씨족 제도의 분해를 고찰해 보았다. 이제는 이미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씨족적 사회조직을 땅속에 파묻어 버리고 문명의 도래와 함께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일반적인 경제 조건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모건의 저서와 마찬가지로 맑스의 [자본]이 필요하다. p.175
야만의 중간단계에서 발생하여 높은 단계에서 더욱 발전한 씨족은, ....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도달하였다. ...
이 발전 단계의 실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인데, 이 단계를 살펴보면 씨족 제도가 완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 단순한 조직은 그것을 낳은 사회 상태를 완전히 만족시킨다. 그것은 그러한 사회 상태에 고유한 자연 성장적으로 무리를 짓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조직된 사회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체의 갈등을 조절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깥 세계와의 갈등은 전쟁을 통해서 해결된다.....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씨족 제도의 위대함과 동시에 한계가 있다. 씨족 내부에서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 아직 아무런 구별도 없었다. .... 또 부족이나 씨족이 여러 계급으로 갈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p.175-176
인구는 매우 희박하였다; 부족의 거주지에서만 조밀하였다. ... 분업은 순전히 자연성장적이다; 분업은 남녀 사이에만 있었다. 남자는 전쟁을 치르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러 나가며, 먹을 거리와 그것에 필요한 도구를 조달한다. 여자는 집안일을 돌보며 음식과 옷을 만든다. 즉 요리를 하고 천을 짜고 바느질을 한다. 남자와 여자는 가각 자기의 영역에서 주인이다. .... 집안 살림은 몇 개의 가족, 종종 많은 가족에 의해 공산주의적으로 운영된다. 공동으로 만들어 이용하는 것은 공동 재산이다. p.176
그러나 인간은 어디서나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에서 길들일 수 있는 그리고 길들여서 더 번식시킬 수 있는 동물을 발견하였다. 야생 암 물소는 사냥을 해서 잡아와야 했지만, 길들인 것은 해마다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며 우유도 제공하였다. .... 처음에는 길들이기가, 그 다음에는 가축의 사육 관리가 주요한 노동 부문으로 되었다. 목축 부족은 다른 미개인 집단과 분리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 목축 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많은 것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생산하는 생활 수단 또한 달랐다. ... 훨씬 더 많은 우유, 유제품, 짐승 고기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짐승 가죽, 양모, 산양모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러한 원료의 증대와 더불어 그들이 생산하는 실과 직물의 양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전의 발전 단계에서는 우연한 교환만이 가능했다; 무기나 도구를 제작하는 특별한 기능은 일시적인 분업을 가져올 수 있었다. .... 이 발전 단계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부족 내부에서의 교환 이외의 교환은 결코 성립할 수 없었으며 또 그러한 교환조차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가치교환의 제1형태-발제자 주) 이와 반대로 이제 목축 부족이 분리된 후에는 서로 다른 부족 성원들 간의 교환을 위한 또 이교환이 규칙적인 제도로서 발전하고 확립되기 위한 모든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보게 된다. 최초에는 부족과 부족이 서로의 씨족장을 통해서 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가축 떼가 개별 재산으로 되기 시작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더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이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 가축은 모든 상품을 평가해 주며, 또 어디서나 기꺼이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요컨대, 가축은 이미 이 단계에서 화폐의 기능을 획득하고 화폐의 역할을 하였다.(일반적 등가물의 형태)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이와 같이 신속하게 상품 교환 발생 당초에 화폐상품에 대한 욕구가 발전하였다. p,177-178
미개의 낮은 단계에 있던 아시아인들은 ... 늦어도 미개의 중간단계에서 그것은 전야 경작의 선구로서 그들 사이에 나타났다. 투란 고원의 기후에서는 깊고 매서운 겨울에 대비하여 사료를 저장해 두지 않고서는 목축 생활을 할 수 없었다. .... 처음에는 가축을 위해 곡물을 재배했지만, 얼마 안가서 사람의 식료로도 곡물을 이용하였다. 경작지는 아직 여전히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후에는 세대 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그것을 양도 받아 이용하였다. ...
이 단계의 상업적 성과들 중에서는 다음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는 직기이고, 둘째는 광석의 용해와 금속 가공이다. 구리와 주석 그리고 그 둘을 합금한 청동은 가장 중요한 금속이다; 청동 덕분에 유용한 도구와 무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석기를 몰아내지는 못했다; 철만이 석기를 몰아낼 수 있었지만, 철을 얻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금과 은이 장신구와 장식품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때 금과 은은 이미 동이나 청동보다 더 큰 가치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모든 부분-목축, 농경, 가내 수공업-에서 생산이 증대됨으로써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씨족, 세대 공동체 또는 개별 가족의 각 성원에게 부과되는 매일의 노동량이 증대되었다. 이제 새로운 노동력을 들여와야만 했다. 전쟁이 새로운 노동력을 공급하였다; 전쟁 포로는 노예가 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노동 생산성의 상승과 재부의 증대 및 생산 분야의 확대와 더불어 당시의 전체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를 가져왔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의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계급으로의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열이 일어났다; 주인과 노예, 착취와 피착취자. p.178-179
어떻게 또 언제 가축 떼가 부족 또는 씨족의 공유 재산으로부터 개별적 가장의 소유로 이행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이 이행은 주로 이 단계에서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에 혁명이 일어났다. 생계 획득은 언제나 남자의 일이었다. 생계 획득 수단은 남자가 생산하였고, 남자의 소유였다. .... 따라서 가축은 남자의 것이었으며 가축과 교환하여 얻은 상품과 노예들도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 여자는 그것을 소비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은 조금도 없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의 자리에 만족하였다;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부를 뽐내면서 첫 번째 자리에 올라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 가족 내의 분업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내 분업은 종래의 가족 내 관계를 뒤집어 버렸는데, 이것은 오로지 가족 밖에서의 분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에는 가정에서의 여자의 지배를 보장해 주었던 바로 그 원인; 여자가 가사 노동에만 종사하는 것이 이제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지배를 보장해주었다. p.179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 노동에만 갇혀 있는 한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이미 여기서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여성이 가사 노동에 시간을 별로 빼앗기지 않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의 대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현대의 대공업은 여성 노동을 대대적으로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본격적으로 요구하며 또 사적인 가사 노동을 점점 더 공적인 산업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p.179
모권제의 전복, 부권제의 도입,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 확인되고 영구화되었다. 이로써 낡은 씨족 제도에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여 그것을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p.180
다음의 한 발자욱은 우리를 미개의 높은 단계로, 즉 모든 문화 민족이 다음과 같은 자기의 영웅시대를 체험하는 시기로 끌고 간다; 철검의 시대이며 또한 철 보습과 철 도끼의 시대를. 역사에서 혁명적 역할을 한 모든 종류의 원료가운데서 최후의 원료-감자의 출현 전까지- 이자 가장 중요한 원료인 철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되었다. 철은 대규모의 전야 경작과 광대한 숲의 개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이제 진보는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더 끊임없이 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망루와 총구멍이 설치된 석재 성벽으로 석재 가옥이나 벽돌 가옥을 둘러싼 도시가 부족 또는 부족 동맹의 중심지가 되었다. ..... 직조업, 금속 가공업, 그리고 점차 분화해 가는 그 밖의 수공업들은 생산의 다양성과 기교를 더욱더 발전시켰다; 토지 경작은 이제 옥수수, 콩과 식물 및 과일 외에도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제공하였다. .... 제2의 거대한 분업이 일어났다; 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되었다. p.180
노예제는 이전 단계에서 겨우 발생하였고 당시만 해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는데, 이제 이 노예제가 사회 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부분이 되었다; 노예들은 이제 단순한 보조 일꾼이 아니었으며, 사람들은 전야와 작업장에서 수십 명의 노예를 부렸다. 생산이 농업과 수공업이라는 두 개의 기본 부문으로 나뉘어지면서 직접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즉 상품 생산이 발생하였다; 이것과 나란히 부족 내부와 부족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상업뿐만 아니라 해외 무역도 벌써 발생하였다. .... 귀금속이 우세한 그리고 일반적인 화폐 상품이 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주조되지는 못했고....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과 나란히 부자와 빈자의 차별이 나타났다.- 새로운 분업과 함께 사회는 계급으로 새로이 분열되었다. 각 가장의 재산 차이는 그때까지 낡은 공산주의적 세대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던 모든 곳에서 그것을 파괴하였다... 경작지는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후에는 영구적으로 개별 가족들의 용익에 맡겨졌다. 완전한 사적 소유로의 이행은 서서히 또 대우혼의 일부일처제로의 이행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가 되기 시작했다.p.181
인구가 조밀해짐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한층 긴밀한 결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혈연부족들의 동맹이 도처에서 필요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이 부족들을 융합하는 것이, 또 이와 함께 따로 떨어져 있는 부족 영토들을 하나의 전체 민족 영토로 융합하는 것이 벌써 필요하게 되었다. 민족의 군사지휘자는 없어서는 안 될 상설적인 공직자가 되었다. 또한 민회가 없던 곳에서는 민회가 나타났다. 군사 지휘자, 평의회, 민회는 군사적 민주주의로 발전해 가던 씨족 사회의 기관들을 이루었다. 군사적이라는 것은 -전쟁과 전쟁 조직이 이제 민족 생활의 정규적인 기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들의 부는 부의 획득을 제1의 생활 목적들 중의 하나로 삼고 있는 민족들의 탐욕을 자극하였다. 그들은 미개인들이다; 그들에게는 약탈이 노동으로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더 쉬울 뿐 아니라 차라리 명예로운 일로 보인다. 전에는 침해에 대해 복수를 하거나 또는 부족하게 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만 전쟁을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약탈을 위해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상시적인 생업 부분이 되었다. ... 도시의 호는 씨족 제도의 묘혈이었으며, 성탑은 이미 문명을 향해서 솟아 있었다. 약탈전쟁은 최고 군사지휘자의 권력뿐만 아니라 하급 지휘관들의 권력도 강화하였다; 관습적으로 동일한 가족 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던 것이 특히 부권제가 도입된 이래 점차 세습제로 이행했는데, ..... 세습적 왕권과 세습적 귀족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씨족 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 즉 씨족, 프라트리, 부족 속의 자기의 뿌리와 유리되었으며, 전체 씨족 제도가 자기의 대립물로 전화하였다; 전체 씨족 제도는 자기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기 위한 보족의 조직에서 이웃 사람들을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화했으며, 이에 따라서 그 기관은 민의의 도구에서 자기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적인 기관으로 전화하였다. p.182
문명은 분업이 한 걸음 더 진전되면서 개시되었다. 미개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인간은 직접 자신의 수요를 위해서만 생산하였다; 간혹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더라도 산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우연히 생기는 잉여를 교환하는 것이었을 뿐이다.(제1형태, 우연적 형태-발제자 주) 미개의 중간 단계에 이르러 우리는 목축민들의 경우에 가축 떼가 일정한 규모가 되어 목축민들의 수요를 초과하는 약간의 잉여를 규칙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가축이 재산으로 됨을 보게 하였다. 동시에 목축 민족들과 가축 떼가 없는 후진 부족 사이의 분업, 따라서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상이한 두 생산단계의 존재, 또 따라서 규칙적 교환에 필요한 조건들을 보게 된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분업이 한층 더 확대되어 농업과 수공업 사이에 분업이 생겨났으며, 그와 함께 노동 생산물 중에서 직접적 교환을 위해 생산되는 부분이 끊임없이 늘어나게 되었다. ... 문명은... 특히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날카롭게 만듦으로써 확고히 하고... 더 나아가서 문명에 고유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제3의 분업을 추가하였다; 문명은 더 이상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상인-을 만났다. .... 그에 따라 생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지휘자와 실행자로 혹은 대규모 생산자와 소규모 생산자로 나뉘어졌다. 이제 비로소 한 계급이 등장하여, 생산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으면서 전체적 차원에서 생산의 지휘권을 획득하여 생산자들을 경제적으로 자기에게 예속시켰다. ....생산자들에게 교환의 노고와 위험을 덜어 준다는 생산물의 판로를 원거리 시장에까지 확대시켜준다는, 그런 이유에서 자기들이 주민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계급이라는 구실 하에, 기생자들의 계급, 순전한 사회적 기생 동물들의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은 실제로는 극히 보잘 것 없는 노력을 기울여 놓고서는, 그에 대한 보수로서 국내와 국외의 생산에 알짜배기를 독차지하여 엄청난 부와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빠른 속도로 획득해 갔다..... 마침내 그들 스스로 독특한 생산물을 세상에 내놓게 되기에 이른다.-주기적 상업 공황 p.182-183
그러나 우리가 고찰하는 발전 단계에서는 아직 청년기에 있던 상인층은 당연히 그들의 전도 양양한 미래에 대해 꿈조차 꾸지 못했다. ... 그런데 상인층과 함께 금속 화폐, 즉 주화가 출현했으며, 이로써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그의 생산을 지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나타났다. 다른 모든 상품을 은폐된 형태로 내포하고 있는 상품 중의 상품, 즉 마음만 먹으면 어떤 물건으로도 탈바꿈할 수 있는 요술 수단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가 생산의 세계를 지배하였다. p.183-184
화폐를 주고 상품을 구매한 뒤부터 화폐 대부가 나타났고 이와 함께 이자와 고리 대금업이 나타났다. 그리고 후세의 어떠한 입법도 고대 아테네나 로마의 입법처럼 그렇게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채무자를 고리대 채권자의 발아래 내던지지 못했다. p.184
상품 및 노예로 이루어진 부와 나란히, 화폐로 이루어진 부와 나란히, 이제 토지로 이루어진 부가 나타났다. 분할지에 대한 개인들의 점유권은 원래는 씨족 또는 부족에 의해 부여된 것이었는데, 이 점유권이 강화되어 분할지는 개인들의 세습 재산이 되고 말았다. .... 그것은 토지를 양도할 가능성도 의미하였다. 토지가 씨족의 소유였을 때는 그런 가능성이 없었다. ... 이제는 토지가 판매해도 좋고 저당 잡혀도 좋은 상품이 되었다. 토지 소유가 도입되자마자 벌써 저당이 발명되었다. ....
이렇듯 상업이 확대되고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이 생겨나면서 소수 계급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과 집중이 급속이 이루어졌다. .... 그리고 부에 따른 자유민의 이러한 계급 분화와 나란히 특히 그리스에서는, 노예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으며, 그들의 강제노동이 전체 사회의 상부구조의 기초를 이루었다. p.184-185
씨족 제도는 어떠한 내부적 대립도 없는 사회에서 성장한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사회에서만 적합한 것이었다. 씨족 제도에는 여론 이외의 어떠한 강제 수단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체적인 경제적 생활 조건들로 말미암아 자유민과 노예, 착취하는 부자와 착취당하는 빈자로 분열될 수밖에 없는 사회, 이 대립을 다시는 화해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점점 더 극단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사회가 나타났다. 이 사회는 이 계급들 상호간의 끊임없는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만 혹은 제3의 세력의 지배 하에서만 존립할 수 있는 사회였다; 외견상 서로 싸우는 계급들 위에 서 있는 이 제3의 세력은 계급들의 공공연한 충돌을 억눌렀고 기껏해야 경제적 영역에서만, 이른바 합법적 형태로만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만들었다; 씨족 제도는 수명을 다하였다. 그것은 분업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산물인 계급으로의 사회 분열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다. 그것은 국가로 대체되었다. p.186
위에서 우리는 씨족제도의 폐허 위에 국가가 발흥하는 세 개의 주요 형태를 각각 고찰하였다. 아테네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전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거기서는 국가가 주로 그리고 직접, 씨족 사회 자체 내부에서 발전한 계급 대립으로부터 발생하였다. 로마의 경우에 씨족 사회는 이 사회 밖에 있으면서 권리는 없이 의무만 지고 있던 다수의 평민 한가운데서 폐쇄적 귀족제가 되었다: 평민의 승리로 과거의 씨족 제도가 파괴되었고, 그 폐허 위에 국가가 건립되었다. 얼마 안 있어 씨족적 귀족도 평민도 모두 국가 속에 완전히 용해되었다.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의 정복자인 독일인들의 경우에 국가는 광활한 남의 영토를 정복한 직접적 결과로서 발생하였다. 씨족 제도는 도저히 이러한 영토의 지배 수단을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복은....피정복자와 정복자의 경제적 벌전 단계가 거의 같았기 때문에,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따라서 씨족 제도는 마르크 제도라는 변화된 지역적 형태를 띠면서 여러 세기 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p.187
국가는 결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또한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윤리적 이념의 현실성”, “이성의 형상 및 현실성”도 아니다. 국가는 오히려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들로 분열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데 이 대립물들이, 즉 서로 다투는 경제적 이해를 가진 계급들이 쓸데없는 투쟁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않게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 충돌을 완화시키고 충돌을 ‘질서’의 틀 내에 잡아 둘 권력이 필요하였다; 사회로부터 발생하였으나, 사회 위에 서서 점점 더 사회에 낯선 것이 되어 가는 이 권력은 바로 국가이다. p.187-188
옛날의 씨족적 조직과 비교해 볼 때, 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국민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이처럼 거주지에 따라 국민을 조직하는 것은 모든 국가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러한 조직이 아테네와 로마에서 혈연에 의거한 과거의 조직을 대체할 수 있기까지는 참으로 격렬하고 긴 투쟁이 필요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자기 자신을 무장력으로서 조직하는 주민과 더 이상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의 설립이다. ..... 960,000의 아테네 시민은 365,000의 노예에 대해서는 하나의 특권 계급일 따름이다. 아테네 민주제의 시민군은 노예 위에 군림하는 귀족적 공권력으로서 그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 공권력은 무장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씨족사회에는 없었던 물적 부속물, 즉 감옥과 온갖 종류의 시설들로도 이루어졌다. .... 예컨대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때때로 곳에 따라 그러하듯이, 아무 미미하고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공권력은 국가 내부에서 계급 대립이 날카로워 지고 인접한 국가들이 더 강대해지고 인구가 많아질수록 강화된다. ....
이러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민의 비용 부담이 필요하다- 조세. 이것은 씨족 사회가 전혀 모르던 것이다.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 조세조차 불충분하게 된다; 국가는 나중에 지불하기로 하고 채권을 발행하여 채무를 진다. 즉 국채를 발행한다. ....
관리들은 공권력과 징세권을 가짐으로서 사회의 기관이면서도 사회 위에 군림한다. .... 사회와는 낯선 것이 된 권력의 담당자인 그들은 그들로 하여금 특별하고 신성 불가침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예외법을 통해서 존경을 얻어야 했다. 문명국가의 말단 경찰관도 씨족 사회의 전체 기관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문명 시대의 아무리 유력한 군주라도,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 혹은 장군일지라도, 그들은 자발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존경을 받았던 가장 미미한 씨족 수장을 부러워할 만하다. 후자는 사회의 한 복판에 서 있다. 그러나 전자는 사회 밖에 그리고 사회 위에 서 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p.188-189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동시에 그것은 이 계급들의 충돌 한가운데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은 대개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어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며 그리하여 피억압 계급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는 무엇보다도 노예를 억압하기 위한 노예 소유자들의 국가였으며, 봉건국가는 농노와 예농을 억압하기 위한 귀족의 기관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투쟁하는 계급들의 힘이 균형에 도달하여 국가 권력이 외견상 두 계급의 조정자로서 어느 정도의 자립성을 일시적으로 획득하는 시기가 있다. 예컨대 귀족과 시민 계급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었단. 17세기 8세기의 절대 군주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서로 싸우게 한 프랑스의 제1제정, 특히 제2제정의 보나빠르트주의도 그러하다. .... 비스마르크 국민의 신독일 제국이 있다: 여기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힘이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어, 그들은 영락한 프로이센의 시골 융커들의 이익을 위해 다 같이 기만당하고 있다. p.189-190
그 밖의 특징을 말해 보자면 역사에서 알려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국가 시민들에게 인정되는 권리는 그들의 재산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는 국가가 무산계급에 대해 유산 계급을 지켜주는 조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 그러나 이처럼 재산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국가 발전이 낮은 단계에 있을 때의 특징이다. 최고의 국가 형태인 민주 공화제는 현대 사회의 조건들 하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유일하게 최후의 결전을 치를 수 있는 이 국가 형태-이 민주공화제는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재산의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민주공화제에서 부는 자신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한층 더 확실하게 행사한다. 한편으로는 관리를 직접 매수하는 형식-가장 전형적인 표본은 아메리카이다- 으로 행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주식거래소의 동맹이라는 형식으로 행사한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산 계급은 보통 선거권을 매개로 해서 직접 지배를 한다. 피억압 계급은, 그러므로 우리의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스스로를 해방시킬 만큼 성숙하지 않은 한은,.... 정치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의 후미, 즉 자본가 계급 진영의 극좌익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해방을 향해 성숙해 감에 따라, 그들은 독자적인 당을 결성하여 자본가들의 대표가 아닌 그들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것이다.p.190-191
이상에서 보았듯이,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나 국가 권력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국가 없이 일을 꾸려가던 사회가 있었다. 계급으로의 사회적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제적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로 말미암아 필요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모종의 생산 발전 단계, 요컨대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그 존재가 오히려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그러한 단계로 접근해 가고 있다. 계급의 발생이 불가피했듯이 계급의 소멸도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소멸할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전체 국가 기구를 그것이 응당 가야할 곳으로 보낼 것이다;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물레, 청동 도기 등과 나란히 전시할 것이다. p.191
상품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즉 생산이 더 이상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위해 이루어지면서, 생산물은 필연적으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생산자는 교환을 하면서 자신의 생산물을 넘긴다. 그는 이제 그것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화폐가 그리고 화폐와 함께 상인이 생산자들 간의 중개자로서 나타나자 교환과정은 더욱 복잡해지며, 생산물의 최후의 운명은 더욱 더 알 수 없게 된다. 상인들은 다수이며 그들 중 아무도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상품은 이 제 이미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갈 뿐 아니라, 시장에서 시장으로 이동한다; 생산자들은 자기 생활권의 전체 생산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 지배권이 상인의 손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생산물과 생산은 우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우연은 연관의 한 극단일 뿐이다. 그 다른 극단은 필연이라 불린다. 역시 우연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에서 우리는 그 어느 영역에서나 이미 오래 전에 이 우연을 관통하는 내적 필연성과 합법칙성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자연에 타당한 것은 사회에도 타당하다. 어떤 사회적 활동, 일련의 사회적 과정이 사람들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나 억제할 수 없게 될수록, 그리하여 이 활동이 순전한 우연에 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이 활동에 특유한 내적 법칙들은 더욱더 자연 필연성을 가지고 이 우연 속에서 자신을 관철해 간다. 이러한 법칙들이 상품 생산과 상품 교환의 우연도 지배한다; 이러한 법칙들은 처음에는 알 수조차 없고 고된 연구를 통해서만 그 본성을 구명하고 해명할 수 있는 낯선 힘으로서 개별적 생산자와 교환자에 대립한다. 상품 생산을 지배하는 이 경제 법칙들은 이 생산 형태의 발전 단계가 달라짐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간다; 그러나 문명시대 전체는 대체로 이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 오늘날에도 역시 생산물이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역시 사회의 전체적 생산은 공동으로 작성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맹목적 법칙들, 결국 주기적 상업 공황의 뇌우로 발현되는 맹목적 법칙들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다. p.192-193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비교적 초기의 생산 발전 단계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생산자의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이 발전 단계는 대체로 분업 및 개인들 간의 교환이 출현하는 바로 그 단계였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인간도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면 인간의 힘도 교환할 수 있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거대한 ‘진리’가 발견되었다. 인간이 교환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 자신도 교환되었다. 인간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능동태는 수동태가 되었다.
문명시대에 들어와서 최고의 발전을 이룩한 노예제의 출현과 함께 사회의 최초의 대분열이 일어나, 사회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문명기 전체에 걸쳐서 존속하였다. 노예제는 고대 세계에 고유한 최초의 착취 형태였다; 그 뒤를 따른 것은 중세의 농노제, 그리고 근래의 임금 노동이다. 이것은 예속의 3대 형태로서 문명의 3대 시기를 각각 특징짓는다; 공공연한 것이건 그리고 최근처럼 가장된 것이건, 노예제는 언제나 문명에 붙어 다닌다. p.193
문명이 시작되는 상품 생산 단계는 경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도입한 데 그 특징이 있다. 1. 금속화폐, 그와 함께 화폐 자본, 이자 및 고리대금업, 2. 생산자들 중개하는 계급으로서의 상인들; 3. 사적 토지 소유와 저당권 그리고 4. 지배적인 생산 형태로서의 노예노동. 문명에 조응하는, 그리고 문명과 함께 결정적 지배권을 확립한 가족 형태는 일부일처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 그리고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 개별 가족이다. 문명사회를 총괄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는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 없이 지배 계급의 국가이며, 또 어떤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피억압, 피착취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기관이다. 문명에는 또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다; 한편으로는 전체 사회적 분업이 기초로서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고착시킨 것; 다른 한편으로 소유자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기 재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유언 제도를 도입한 것. p.193-194
이러한 제도에 기초를 둔 문명은 고대 씨족 사회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러나 문명이 그렇게 해낸 것은 문명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충동과 정욕을 발동시키고, 인간의 다른 모든 소질을 희생시키면서 그것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문명이 시작된 첫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 첫째도 부요, 둘째도 부요, 셋째도 부, 그것은 사회의 부가 아니라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규정은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발제자 주)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에서 진보가 이루어질 때 마다 그것은 동시에 피억압 계급, 즉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가 퇴보함을 의미한다. ....
그럴 리가 없다. 지배 계급에게 좋은 것은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지배 계급은 전체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전진하면 할수록 자신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폐해를 사랑의 보자기(ㅋㅋㅋ-발제자 주)로 싸서 그것을 미화하거나 부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따라서 피착취 계급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반항을 한다면, 그것은 은인, 즉 착취자에게 너무나 배은망덕한 짓을 하는 것이다. p.194-195
이제 문명에 대한 모건의 판결을 인용하면서 마무리 하자;
“문명이 개시된 이래 부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했으며, 부의 형태는 매우 다양해 졌고, 부의 이용은 아주 광범위해졌으며, 소유자의 이익을 위한 부의 관리는 매우 교묘해졌다. 그리하여 이 부는 인민과 대립하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성이 강화되어 부를 지배하게 되고 국가와 국가에 의해 보호되는 재산의 관계뿐만 아니라 소유자들의 권리의 한계도 규정하게 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사회의 이익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며 이 양자 사이에는 공정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만약 진보가 과거의 법칙이었듯이 미래의 법칙이기도 하다면, 단순히 부만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종국적 사명은 아니다. 문명의 개시 이래 지나간 시간이라는 것은 인류가 살아온 시간의 보잘 것 없는 한 토막일 뿐이다; 또한 인류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의 보잘것없는 한 토막일 뿐이다. 부를 유일한 궁극적 목표로 하는 역사 궤도의 종착역으로서 사회의 해체가 우리를 위협하며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 궤도는 자멸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에서의 민주주의, 사회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를 예고하는 전조이다. 그것은 고대 씨족의 자유, 평등, 우애의-한층 높은 형태의-부활이 될것이다.”(모건, <고대사회>,552면) p.196
첫댓글 너무 길어서, 로마와 유사한 아테네는 제외했으나 흐름 상 곤란하여 다시 보완합니다.
오타도 많고, 중요한 부분에 바를 칠 겸, 수정하여 올립니다. 엥겔스와 모건의 위대함에 그저 고개 숙여집니다. 글 맨 끝, 이 글 맨 끝, 모건의 결론은 정말 대단합니다. 엥겔스가 제4판 서문에서 모건의 원시사 연구성과를, 정치경제학에서 맑스의 잉여가치론, 생물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지닌 의의에 견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