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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00. [역경의 열매] 황영희 <1-10> 장애인 섬기게 된 장애인… “왜?” 하나님께 물었다
세 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5급… 필리핀 세부에 가서 보내신 까닭을 알았다
황영희 선교사(왼쪽 세 번째)가 지난해 11월 필리핀 세부 ‘파그라움 센터’에서 남편 박동호 선교사(오른쪽 첫 번째), 필리핀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밀알복지재단 제공나는 지체장애 5급 장애인이다. 세 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인해 지금도 다리 한 쪽이 불편하다. 초등학생 때 친구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갔던 교회, 이후 영적인 방황을 하다 고등학생 시절 다시 만난 하나님. 그분을 좀 더 알고 싶어 신학을 전공했고, 청년시절엔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꿈을 꾸면서도 장애인 선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장애인 선교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장애인인데도 말이다.
나는 필리핀 세부 국제공항이 위치한 막탄 섬에서 6년째 거주하고 있다. 다들 멋진 해변과 화려한 리조트를 떠올리겠지만 세부는 필리핀의 81개 주 가운데서도 높은 빈곤율을 나타내는 곳이다. 게다가 필리핀에서 네 번째로 많은 장애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다수의 장애인들이 집안에 방치된 채 생활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뒤편으로 빈곤과 범죄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곳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부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라 불리는 스눅에 심으셨다. 스눅은 2012년 아동 사이버 성매매로 국제사회의 집중 조명을 받은 곳이다. 굶주림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이버 성행위를 강요받은 아이들의 아픔이 남아있다. 또한 이곳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가난한 장애인들의 열악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네 곳곳에는 마약과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 지붕만 씌워 공부방을 시작했고, 지금은 세부어로 ‘희망’이란 뜻을 가진 ‘파그라움 센터’를 건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모든 과정들이 순탄치 않았다.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 결혼, 몸이 불편한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위해 내려놨던 선교사로서의 꿈, 꿈을 모두 접어버린 상황에서 찾아왔던 하나님의 부르심, 선교 현장에서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보냈던 세부 아이들…. 매번 ‘왜’냐고 하나님께 물으며 씨름했다. 하지만 숱하게 역경을 넘게 하신 하나님은 결국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
죽을 것같이 힘든 순간도 버티고 나면 뒤에는 항상 축복이 따라왔다. 물론 그 과정들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눈과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하나님은 늘 더 큰 위로를 주셨다. 지금도 잔잔하게 찬양하듯,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급하지 않게, 길을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가 가기도 하면서 하나님께서 옆에 붙여주신 사람들과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다. 주님이 심어놓으신 밀알들이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늘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을 걸어오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의 배를 채우심 같이 그렇게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내가 이 귀한 공간을 통해 이야기를 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싶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구했다. 오랜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게 끝나는 날까지 성실히 하라고 ‘역경의 열매’를 통해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첫마음을 잊지 말라고 주신 채찍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또 살아갈 길의 이야기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세움이 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의 첫 장을 열어본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 [역경의 열매] 황영희 <1> 장애인 섬기게 된 장애인… "왜?" 하나님께 물었다
* [역경의 열매] 황영희 <2> 목포여고 시절 만난 인생의 멘토 전도사님
* [역경의 열매] 황영희 <3> 등록금 마련 위해 취직한 공장서 전도의 열매
* [역경의 열매] 황영희 <4> 원했던 중국 선교 아닌 '박 선교사와 결혼하라' 음성
* [역경의 열매] 황영희 <6> "필리핀, 왜 하필 지금인가요"… 하나님과 실랑이
* [역경의 열매] 황영희 <7> 가족이 버린 장애소년 통해 축복의 통로 열려
* [역경의 열매] 황영희 <8> 장애아·비장애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세워
* [역경의 열매] 황영희 <9> 사이버 성매매 내몰리는 아이들 보고 충격
* [역경의 열매] 황영희 <10·끝> 파그라움 센터가 심은 희망의 씨앗
약력=△1962년 전남 신안 출생 △전남 무안 한양신학교 졸업 △베데스다복지재단 전 사무장 △밀알복지재단 필리핀 세부 막탄 지부장
***[역경의 열매] 황영희 <2> 목포여고 시절 만난 인생의 멘토 전도사님
삶 속에서 그리스도 향기 나던 분… 고2 때 세례 받고 전도에 불 붙어
황영희 선교사(오른쪽 첫 번째)가 목포 중앙여중 재학시절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황영희 선교사 제공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신안군 지도읍 사옥도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가서 다시 산 세 개를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우리 집이 있었다. 또래 남자친구들에게 “결혼하기 전까지는 여자 데리고 집에 오지 마라. 도망간다”고 농담할 정도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은 곳이다.
교회 가는 길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제일 친한 친구 손에 이끌려 산 하나를 넘어 처음으로 교회에 갔다. 당시 예수님을 영접하진 못했지만 나는 모범생처럼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무릎이 잠길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도 눈을 뚫고 교회에 갔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전진한(사옥교회) 목사님께선 큰 전지에 그림을 그려 실감나게 ‘천로역정’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목사님은 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드라마 예고편처럼 탁월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주셨다.
사실 처음 교회 다닐 때만 해도 가족들의 반대가 컸다. 우리 집은 종가였고 가족 중 누구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굿을 하고 1년에 10여 차례 제사를 지내고 조금만 아파도 어디 가서 점을 봐야 낫는다고 믿는 집안이었다. 당연히 내가 교회 다니는 걸 좋아할 가족도 없었다. 하지만 신앙을 향한 내 뜻을 꺾진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떠받들어 키워졌다. 오히려 나의 장애가 교회에 계속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내게 영적 방황기가 찾아왔다. 사옥도를 떠나 목포에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다. ‘신이 있는가’를 두고 생각이 깊어졌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불교의 매력에도 빠졌다. 방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목포여고 시절 친구와 함께 가게 된 교회에서 내 인생의 멘토인 노영학 전도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전도사님은 쉼 없이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도통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기만 하는 내게 ‘너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아래 있는 자녀’라는 메시지를 심어주고 또 심어주셨다. 그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분이셨다. 교인들에게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전도사님을 보며 삶을 배웠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결국 ‘투덜이 스머프’는 ‘똘똘이 스머프’가 됐다. 고2때 세례를 받고 나서부턴 전도에도 불이 붙었다. 동네 친구와 학교 친구, 심지어 절에 다니던 친구들까지 내가 전하는 성경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안타깝게도 그때까지 우리 가족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런 가족들을 보면서 ‘예수 믿는 가정이 됐으면 좋겠다’고 참 많이도 울면서 기도를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고개를 넘어왔다. 그 중 가장 가팔랐던 고개는 엄마가 갑자기 이상한 종교를 믿게 됐을 때다. 건강이 나빠진 엄마가 치료를 받느라 서울에 잠깐 계시는 동안 당신 병을 낫게 하겠노라며 일본에서 건너온 남묘효렌게쿄에 빠지신 것이었다. 그건 진리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는지 모른다. ‘남묘효렌게쿄를 봉창하면 누구나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 억지 부리는 엄마를 하나님 앞으로 모셔오기까진 꼬박 2년이 걸렸다. 그렇게 하나님은 스물두 살 때까지 ‘나홀로’였던 신앙에 엄마 오빠 할머니 등 한 사람, 한 사람씩 열매를 주셨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3> 등록금 마련 위해 취직한 공장서 전도의 열매
모범 보이자 나 따라 교회 가겠다 말해… 장애 주신 이유, 장애인 섬기라는 뜻
황영희 선교사(오른쪽 첫 번째)가 1986년 공장 작업장에서 동료 직원들과 간식을 먹고 있다.신학교 3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이던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 회사에 부도가 났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가세가 기울었다.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등록금 걱정은 사치였다. 하나님께 차마 돈 달라는 기도는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기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의 친구 분께서 내 상황을 듣고 등록금을 대신 내주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평소 장애를 딛고 신학을 공부하는 내 모습을 인상 깊게 지켜봐주던 분이었는데 새벽기도 중에 갑자기 어려움을 당한 내가 생각났다며 목사님께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등록금 마감을 사흘 앞두고 온 연락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사히 대학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분께선 이어진 학기에도 등록금을 내주신다고 하셨지만 나는 “나보다 더 어려운 친구를 도와 달라”며 거절했다. 물론 등록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나는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공장에 들어가 근로청소년 사역을 해야 했다.
공장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예쁘게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거리낌 없이 욕을 뿜어댔다. 신학교에 다니던 나로선 별천지 같은 광경이었다.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나는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을 어떻게 전도할까 생각하며 사명을 갖고 일했다. 하지만 결코 녹록지 않았다. 공장 기숙사 방을 함께 쓰던 친구들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넌지시 얘기했는데 어찌나 쌀쌀맞게 거절하던지 전도가 아니라 이 친구들과 같이 생활할 일이 더 걱정이었다.
전략을 바꿨다. 내 모습을 보고 교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의 아침을 깨우는 알람시계 역할을 자청했고 방 청소는 도맡아 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니 반응이 왔다.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친구들이 물어왔다. “근데 나 있지. 교회 가도 돼?”라고 말이다.
당시 매일 나이트클럽에 가는 어린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를 꼭 교회로 이끌고 싶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교회에 가자고 했지만 매번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계속 말하면 잔소리 같아 보일까봐 어느 날부턴 교회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그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한동안 교회 얘길 꺼내지 않던 내게 어느 날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포기하지 마.” 마음속으론 늘 내가 붙잡아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그 친구도 내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게 됐다.
졸업할 때쯤엔 강화에 있는 그루터기학교에서 사역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면접까지 마치고 준비가 거의 끝나가던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케냐에 선교사로 갈 계획이었다. 동시에 어떤 집사님이 지역사회청소년센터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일이 뒤엉키면서 그루터기학교와 지역사회청소년센터 사역이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또 다시 기도에 매달렸고 하나님은 ‘장애인 선교 사역’에 대한 응답을 주셨다. 베데스다선교회로부터 장애인 사역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사역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내 길입니까.’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내게 사람을 보내 응답을 주셨다. 알고 지내던 목사님께서 기도하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며 찾아오셨다.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물으셔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하나님이 왜 내게 장애를 주셨을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결심이 서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4> 원했던 중국 선교 아닌 ‘박 선교사와 결혼하라’ 음성
남편은 당시 초등학교 중퇴 학력… 피하려고 했지만 자꾸 그와 연결 돼
황영희 박동호 선교사가 1996년 베데스다나눔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베데스다선교회에서 간사로 6년 정도 일했을 때다. 너무 일에 치어있어서 나도 모르는 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세상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궁전 안에 있는데도 왕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때마침 농아인들과 함께 중국 단기선교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처음 마주하는 중국 대륙은 광활했다. 그 땅 위에서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봤다. ‘드넓은 대륙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알게 된다면 어떨까.’ 처음으로 중국이란 땅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일을 그만 두고 중국 선교활동을 갈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출석하던 베데스다나눔교회는 매년 초에 ‘심지뽑기’를 해서 기도짝꿍을 정하고 1년 동안 함께 기도를 했다. 그해 나의 기도짝꿍이었던 형제 두 명 중 한 사람이 지금의 남편 박동호 선교사다. 박 선교사는 당시 배우자 기도를 하고 있었고 나는 하나님께 중국에 선교하러 갈 수 있도록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40일 작정기도의 마지막 7일을 남겨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체험을 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보다 더 큰 놀라움은 그 음성의 내용이었다. 줄곧 기도해오던 중국 선교가 아닌 ‘박 선교사와 결혼하라’는 음성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기는 평생 처음이었다.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어요.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신분까지 숨긴 채 공장에 들어가 근로선교도 하고 오직 하나님 영광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때 내 신앙의 민낯을 발견했다.
박 선교사가 장애인이어서가 아니었다. 만약 하나님이 장애인과 결혼하라는 응답을 주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부터 조금씩 생각은 해 왔었다. 그럼에도 그 대상이 장애인이라면 사역의 열매를 맺기에 학문과 경험이 나보다 깊은 사람이길 바라는 인간적인 욕심이 있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할 당시 학력이 초등학교 1학년 중퇴였다. 1학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장애를 입었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성실하고 기도에 힘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의 배우자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결혼에 대한 음성을 들은 뒤로는 교회에서 박 선교사를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요나가 된 듯했다.
문득 하나님이 내게 이런 신호를 주셨다면 상대방에게도 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만 모른 척하면 그냥 넘겨볼 수도 있겠다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선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를 배우자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배우자 기도의 응답으로 당신을 주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이야기를 숨기고 남편에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희한하게도 그날 이후 자꾸 박 선교사와 연결되는 상황들이 생겼다.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응답에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목사님을 만나게 됐다. 목사님께서 불쑥 간증도서를 한 권 주셨는데 그 내용이 한 비장애인 여자가 뇌성마비 장애인과 결혼한 이야기였다. 나와 남편의 스토리와 비슷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목사님께서도 똑같은 책을 주셨다. ‘하나님. 이게 진정 당신의 뜻인가요.’ 나도 모르게 무릎이 꿇어졌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6> “필리핀, 왜 하필 지금인가요”… 하나님과 실랑이
갈등 끝에 “하나님의 뜻이구나”순종… 2010년 6월 세부 도착하니 말문 막혀
황영희 선교사가 2011년 필리핀 세부 힐루동안 지역 쓰레기마을에서 구제활동을 펼치고 있다.2009년 여름. 묵상 중에 하나님께서 계속 창세기 12장 1절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이다. ‘왜 내게 이러한 말씀을 주실까. 날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뭘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청년 시절 섬기던 목사님께서 필리핀에 선교사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난 10년 간 연락이 끊겼던 목사님과의 우연한 조우. 문득 창세기 말씀이 떠올랐다. ‘이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계획일까.’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께서 내게 필리핀 선교 사역을 제안하셨다.
처음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때 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몸이 불편한 남편, 어린 두 아이가 있는 이상 내 인생에 해외선교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요. 지금 제 상황 잘 아시잖아요.’ 그때 하나님과 얼마나 실랑이를 했는지 모른다.
청년 시절 케냐 선교사를 꿈꿀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로 꿈을 접게 하셨고, 중국에 선교사로 가고자 할 땐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이기에 더 그랬다. 그렇게 갈등하는 와중에 또 다른 통로를 통해 필리핀 장애인 선교 제안을 받게 되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필리핀이 신기루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아. 하나님의 뜻이구나.’
2010년 6월 필리핀 세부에 도착했다. 처음엔 힐루동안, 빵안안 등 섬에서 장애인 사역을 했다. 그러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열악한 상황이 이어졌다. 식수가 없어 빗물을 받아 사용하는 사람들. 가난한 장애인들에겐 빗물조차 받아 쓸 여력도 없었다. 섬사람들은 대부분 물고기를 잡아 쌀로 바꿔서 식량을 마련했는데 몸이 불편하니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장애인들에게 쌀과 비타민을 나눠줬다. 하지만 나 또한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어려움이 컸다. 파송단체의 상황도 열악했을 뿐더러 개인적인 후원자도 거의 없었다. 역시 믿을 건 기도뿐이었다. “주님, 이 땅 장애인들의 삶이 너무 고달픕니다. 제발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동역자를 만나게 해주세요.” 매일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쉼 없는 기도가 이어졌다.
얼마 후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국내에서 20여년 장애인 복지사업에 주력해 온 밀알복지재단은 해외까지 사역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었다. 때마침 내가 장애인 사역을 위해 세부로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정 대표가 먼저 연락을 준 것이다.
밀알복지재단 관계자들은 사역지를 방문해 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면밀한 검토 끝에 지원을 결심했다. 간절한 기도에 또 한 번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밀알복지재단과 협력하게 되면서 사역은 차츰 안정적 궤도에 올랐다. 비정기적으로 지원 활동을 해오다가 정기적으로 구제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돕기 위해 꾸준히 찾아오는 나를 보며 주민들의 마음도 차츰 열렸다. 신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자 진심은 주민들에게 빠르게 녹아들었다. 나중엔 현지인들에게도 공개를 꺼리는 빈민가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더 많은 빈민들을 돕기 위해 힐루동안 섬의 지역조사를 시작했다. 이전에 몇 번 사역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선교사임을 알고 있는 섬 주민들은 내게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며 한 집을 가리켰다. 사람 사는 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집의 방문을 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7> 가족이 버린 장애소년 통해 축복의 통로 열려
뇌수막염 앓는 6세 알드린과의 만남, 장애인 공동생활가정 설립 계기 돼
왼쪽 사진은 2011년 10월 필리핀 힐루동안 섬에서 발견된 알드린의 모습. 건강해진 알드린(왼쪽)이 황영희 선교사와 함께 2012년 3월 활짝 웃고 있다.코를 찌르는 악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코를 막고 집 안을 둘러보니 캄캄하고 어두운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짐승인가, 사람인가. 죽었나, 살았나. 혹시 해치진 않을까.’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어린 아이였다. 아이의 머리엔 배설물이 묻어 있었고 팔다리는 뼈에 가죽만 겨우 붙어있었다. 얼마동안이나 방치된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알드린. 여섯 살, 뇌수막염으로 장애를 입은 상태였다. 부모는 가출했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소년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오랜 시간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있는 알드린은 마치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하나님 이 아이를 어떻게 하나요.’
서둘러 배를 띄워 알드린을 병원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병원에선 응급처치만 해준 뒤 다른 병원에 가보라며 돌려보냈다. 몇몇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받아줄 수 없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그랬던 것 같다. 더 지체하면 이 아이가 정말 죽음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를 붙잡고 사정사정을 했다. 결국 알드린을 받아주겠다는 답을 얻었지만 병원에선 내게 돈이 많이 들 것이라 경고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일단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 최선을 다해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알드린은 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기약 없는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병원비 약값 간병비 등 매일 어마어마한 돈이 빠져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비용에 나는 동생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돈을 구했다. 늘 염려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본다고 했지만 매순간 염려가 찾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큰돈을 들여가며 알드린을 보살피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돈이면 더 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 텐데. 살리더라도 더 힘든 현실을 눈앞에 둘 텐데.’
하지만 알드린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알드린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사람답게 치료라도 받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분명 주님께서 알드린을 만나게 하신 이유가 있으실 거라고, 분명 이 아이를 향한 주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실 거라 믿었다. 내가 아는 모든 분들께 알드린을 위한 기도를 청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나눔의 손길을 더해줬다. 이어진 후원은 지속적인 치료의 밑거름이 됐다.
3개월 쯤 지나자 홀쭉했던 알드린의 볼이 통통해졌다. 병원에서도 퇴원을 권했다. 하지만 아직 거취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이가 다시 방치될 것이 분명했다. 힐루동안 섬으로 아이를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당시 우리가 거주하던 곳은 알드린과 함께 살 만한 환경이 되지 않았다.
다시 주님께 응답을 구했다. 갈 곳 없는 장애인들을 모아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세부 지역에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이 없어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를 대표하는 밀알복지재단과 베데스다선교회가 연합해 장애인 공동생활가정인 ‘필베밀(필리핀 베데스다 밀알복지재단)하우스’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를 빛내주신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했던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아이를 데리고 왔더니 축복의 통로가 열리게 된 것이다. 알드린을 통해 또 다른 장애인들이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또 하나의 사역이 세부의 어둠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8> 장애아·비장애아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세워
파그라움 장애인통합복지센터 건축부지를 찾아 기도하고 있는 황영희 선교사(오른쪽 두 번째)와 현지 직원들.‘알드린 구출’을 씨앗으로 사역을 시작한 필베밀하우스는 지적 장애가 있는 마르진을 비롯해 장애 아동 4명, 아이들을 돌보는 아주머니와 선생님, 비장애인인 리아까지 합류하며 한 가정을 이루게 됐다.
얼마 후 리아처럼 빈곤한 가정의 청소년 중 학업의 욕구가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함께 지냈다. 비장애인 아이들이 필베밀하우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인복지 분야의 리더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필베밀하우스의 모습은 지역 주민들의 변화를 가져왔다. 세부는 장애인들에게 정부 차원의 지원과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일상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곳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인식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주일 예배를 드리러 필베밀하우스를 찾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침부터 선생님께 혼이 났나’ 생각하는데 리아가 와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선교사님. 어젯밤에 도둑이 들었어요.” “뭐라고.”
지난 새벽에 외부인이 필베밀하우스에 침입한 모양이었다. 옆집 사람도 내게 어젯밤 필베밀하우스에 누군가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그제야 없어진 물건은 없는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많지 않은 집안 살림들이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했다. ‘분명 누군가가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사라진 것은 슬리퍼 두 켤레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과 따로 사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같이 살 공간이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실한 마음은 곧 간절한 기도로 이어졌다. ‘하나님,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늘 마음 아팠는데 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해봐야겠다 싶어 이곳저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의 집들뿐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 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 사정을 알던 한 동생이 조언을 해줬다. 임대료가 너무 비싸니 차라리 저렴한 곳의 땅을 사서 건축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땅을 보러 다니던 중에 소개 받은 곳이 ‘스눅’이었다. 드넓은 대지와 탁 트인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저렴했는데 땅 주인은 당장 땅값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할부를 해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이곳에 장애인 식구들을 위한 공동생활가정과 주단기보호시설(주간 및 단기 보호시설), 직업재활센터, 도움이 필요한 비장애인들을 위한 통합복지센터가 세워지는 그림을 그렸다. 밀알복지재단 역시 발달장애인의 교육과 자립을 위한 장애인통합복지센터를 건립해 지역 장애인의 빈곤 해소를 도모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나는 곧장 계약 체결을 추진했다.
매일 건축 부지를 찾아와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서 스태프들과 기도를 했다. ‘주님이 바라는 대로,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힘이 되는 시설이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모습이 이상해 보이던지 동네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무척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스눅에 계약했다고요? 거기 위험한 곳이에요.” 알고 보니 스눅은 하나님의 눈물이 고인 땅이었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9> 사이버 성매매 내몰리는 아이들 보고 충격
부모가 자녀 시켜 돈벌이 악행… 아이들 마음에 씻지 못할 상처
황영희 선교사(왼쪽 첫 번째)가 필리핀 세부 ‘파그라움 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손하트’를 만들며 활짝 웃고 있다.스눅은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곳이었다. 현지인들 사이에선 우범지역으로 유명했고 살인청부업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스눅은 2012년 ‘아동 사이버 성매매’로 국제사회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빈곤한 가정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음란행위를 시킨 뒤 인터넷으로 유포해 돈을 챙긴 것이다.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해당 사건에 연루돼 있었다. 한동안 경찰들이 수시로 출동했고 그때마다 동네는 발칵 뒤집혔다. 부모들은 체포되고 아이들은 보호관찰소로 보내졌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스눅에 도착하기 불과 1년 전 일이었다. 외부인을 경계하던 눈빛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통합복지센터 설립을 위해 지역을 조사할 때 들은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슬픔에 빠지게 했다. 겉으로 보기엔 밝은 얼굴을 한 아이들의 마음에 씻지 못할 상처들이 깊이 패여 있었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수 없다고 하니까 말이다. 나중에 그것이 끔찍한 범죄이자 자신을 상처 입히는 행위인 것을 알게 됐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함께 일하는 밀알복지재단 간사는 스눅 지역 조사를 마치고 오는 날이면 눈물로 며칠을 보내야 했다.
현실을 확인하고 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이 지역에 ‘툭’하고 떨어뜨리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며 울고 계실 땅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정말 그 땅에 우릴 보내셨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필베밀하우스를 이전하며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길 바랐는데 이곳이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눅 지역에 깔린 마약과 범죄 등 나쁜 문화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놀이 문화를 만들어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우리는 아픔으로 신음하는 스눅 지역이 희망으로 채워지길 바라며 센터의 이름을 ‘파그라움’이라 지었다. 세부어로 ‘희망’이라는 뜻이었다.
술술 풀려나갈 것 같던 파그라움 센터 건축은 이내 난관에 봉착했다. 건축비용을 꾸준히 조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지붕만 올린 간이 건물을 만들어놓고 2년을 보냈다. 비용이 없어 툭하면 공사가 중단되는 모습을 보면 가끔 지치고 힘들기도 했다. ‘필베밀 아이들과 하루라도 빨리 같이 살고 싶은데, 스눅 아이들에게 빨리 좋은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싶은데….’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냐며 따져 물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회개하며 떠올리는 생각은 나는 그저 주님의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계획하심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스눅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쌓으라고 2년여를 돌아오게 하신 것 같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처음엔 우리를 경계하던 주민들의 마음이 허물어지고 스눅 지역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깊은 상처들도 속속들이 알게 됐으니 말이다. 파그라움 센터의 첫 예배 참석자는 7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하나둘씩 놀러오는 아이들이 생겼다. 이제는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러 오는 인원이 200여명에 달한다. 날선 눈으로 바라보던 부모들도 이제는 ‘파그라움’이라면 믿고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작은 희망이 또 다른 희망을 움트게 해 온 나날들이었다.
***[역경의 열매] 황영희 <10·끝> 파그라움 센터가 심은 희망의 씨앗
아픔 딛고 성장하는 아이들 보며 그동안 고난·역경 눈 녹듯 사라져
황영희 선교사(뒷줄 왼쪽 다섯 번째)가 파그라움 센터 앞에서 아이들, 현지 스태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지난 1월 28일은 필베밀하우스의 이삿날이었다. 수년간 소망해오던 파그라움 센터로 입주했다. 난생 처음 양변기를 사용해 본 아이들은 일주일 만에 변기 뚜껑 두 개를 망가뜨리며 톡톡히 신고식을 치렀다.
센터는 2013년 첫 삽을 뜬 후 건축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공사를 중단하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3분의 2가량 건축이 진행됐지만 최근 3층 공사를 하던 중 건축비 지급이 늦어지며 완공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새하얀 2층 건물 위로 건축 자재가 비죽비죽 튀어나온 모습이 예수님이 쓰신 가시면류관 같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속담처럼 3층 건축은 멈췄지만 1·2층은 센터 사역의 잇몸이 돼주고 있다.
센터는 이 동네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다. 3층에 오르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가난과 장애로 소외된 이들이 사용하는 곳이기에 더 멋지게 만들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했던 낮은 사람들을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시설인 파그라움 센터가 품어준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존귀하게 대해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센터의 일주일은 바쁘게 흘러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진 밀알복지재단 간사들과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COC) 봉사단이 영어 수학 태권도 등의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자기들끼리 무리 지어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일요일엔 해맑은 웃음소리에 찬양과 기도까지 얹은 예배가 진행된다.
스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학부모들로부터 문의가 오기도 한다. “그곳에 입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늘 같다. “파그라움은 누구에게나 열린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듯 이곳도 누구에게나 열린 곳으로 느껴지기를 소망한다. 아이들이 길을 잃어버리거나, 먼 길을 가게 되더라도 따뜻한 집처럼 찾아올 수 있는 곳이 파그라움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들도 열린 마음으로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들을 품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장하길 기도한다.
그런 마음을 담아 지난해엔 센터를 이용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PYC(Paglaum Youth Communication)란 조직을 만들었다. 나와 남편이 이곳을 떠나더라도 센터가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PYC를 통해 아이들은 센터의 규칙을 직접 정하고 이용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주인의식과 리더십을 쌓았다. 지역 내 도움이 필요한 장애아동들을 발굴하고 자신이 찾은 장애인 친구들과 짝을 지어 캠프도 다녀왔다. 1년 동안 성장한 아이들을 보면 이들이 변화시킬 스눅 땅의 5년, 10년 후가 기대된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놀이터가 생기고 나무가 심어지고 건물이 건축되는 동안 아이들도 조금씩 성장했다. 그 모습을 보는 지역사회 사람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소외당하던 장애인들, 손가락질 받던 문제아들이 파그라움 안에선 차별 없이 어울리며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상처로 아픔이 있던 아이들은 “예전엔 삶이 고달픔의 연속이었지만 파그라움에 오고 난 후 기쁨과 행복으로 차 있다”고 말한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지금까지의 고난과 역경이 눈 녹듯 사라진다.
하나님이 심으신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될까. 파그라움이 지금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세워지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소망이 지어져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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