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장 미녀들의 현수막사건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약 1키로 정도의 거리를 미녀들이 타고 가던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양궁장으로 달려가던 그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던 나는 그때 너무나 놀라웠고 또한 노력한 만큼의 가치는 언제가는 실현된다는 것을 체험한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기회 였다.
1키로 정도의 거리를 미녀들이 뛰어서 다시 양궁장 주변에 걸려 있던 현수막을 걷으려고
달려 오는 모습은 글로서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장엄한 순간이었다.
그들은 마치 예천 땅의 주인 인양 그 현수막의 주인인양 현수막을 걷어가기 시작 하였다.
사실 우리는 그 현수막을 그들이 가져간다는 것 자체가 우리들이 그것을 맘속으로 희망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나 자신은 사실 그 장면에 말로서 글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 었다.
어떻든 그런 일들이 잃어 나리라곤 우리들이 상상도 안 해 본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 지상에는 장군님의 얼굴이 비에 맞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이 그런 말을 했을 수는 있다고 보지만 나는 장군님의 얼굴이 비에 맞는 다는 것은 한 이유이고 그 내면에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왜야하면 50여개의 현수막중 내용이 민족적 감성을 충분하게 표현 한 것 대부분과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가 만든 현수막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 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 촌 동네에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란 것이 있다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고 감동적이 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그들이 다시 돌아온 것은 주한미군철수라는 단체가 군단위에 있다는 것이 아마 상상도못한 일이 엇을 것이라고 본다.
내용자체도 이제는 잊었지만 촌 동네에 그런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이 엇다는 것이
몇년전 인가의 기억이다.
사실 그 일을 기획한 것은 예천 촌 동네에서 이북의 아름다운 미녀응원단을 오게 하자는
반은 장난기 넘치는 그런 제안에서 시작이 되었다.
비록 미녀 응원단이 오지 않드라도 예천지역에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로서의 의무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다보니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거기서 한 학생운동가 출신농민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걸자고 하여서 그것이 채택이 되었고 농민회 전교조 청년회 미군철수 단체 등이 각자 돈을 조금식 모아서 그 문제의 작품이 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맨 처음에는 예천 촌 땅에 그들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안했었다.
어차피 대구에는 사람들 많고 예천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그동안 지역에서 어렵게 민중운동을 해 온 그 표시라도 하고 싶은 것이 서로의 맘속에 있었던것 같다고 보는 것은
그 사업안에 바로 동의가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예천장궁 장에 북녘의 미녀응원단이 이쪽으로 와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거의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정도로 상상하기도 힘든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 었다.
그러나 일의 성공여부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고 모든 사물현상은 언제나 변화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았기에
우리들의 시도는 성공을 했었든 것이다.
우리들이 지켜보니 맨 처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 었지만 우리들의 기획한 안이 민족의 화합과 번영을 공동으로 염원한다는 것을 비추어 준다면 저들은 그냥 갈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이 맞았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들이 최종결정을 하기 전에 선발대가 왔었는데 그들이 그냥 지나치는가 싶더니
어느 현수막 주한미군철수운동단체의 현수막을 찍을 때
이미 미녀 응원단들의 예천으로의 행사는 정해 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지도 못했기에 그들의 그날의 행위에 대하여
한가지도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고 본다.
그러나 만약우리들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양궁장 대회에서의 사건은 없엇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20대 전후의 그녀들이 전투 하는 듯이 현수막 걷는 작업을 본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연약해 보이고 순수하기만 해 보이던 그녀들에게서 그런 행동들이 일시에
진행되는 것을 보고 나 자신은 참으로 초라하다는 것을 그녀들의 행위에서 강하게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에게는 농사지으라고 꼬시 놓고는 나는 도시로 와서 산다는 것이 너무나 죄송스럽다.
그때 함께하던 친구들 선후배들 그중에 전교조 초대회장님 그리고 안동대 김영균열사의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유기농사를하고있는 후배친구가 생각이 난다.
나는 농민운동의 변절자 였다는 지역운동을 포기한 ===
언제나 그런 죄 의식 속에서 산다.
첫댓글 만정형님 께서 좋은글 올려놓으셨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만정님! 정론직필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