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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사 신도비(문63호)와 비각(안동 서후 성곡리)1
안동권씨의 시조인 太師 權幸의 신도비로 능동재사 왼쪽에 있다.그는 후삼국시기에
고려와 후백제가 싸운 고창(안동)전투에서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함으로써 공신에
책봉되어 권씨를 賜姓받았다.1661년(조선 현종2년)권행의 24세손인 군수 權聖源이
비를 세웠으며 높이는 3.75m이고 좌대의 귀부위에 비신과 용머리의 비머리를 얹었
다.비문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眉叟 許穆(1595년-1682년)의 전서이며 비각은 19
71년에 세웠다.
權太師舊神道碑閣.高麗郎中安東權公仁幸遺墟碑2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 權幸.아들 낭중 權仁. 손자 권책. 증손자 권광한으로 이어졌다.
원래 권행은 경주김씨 김행인데 경애왕이 핍박을 받아 자살하게 되었기에 김행은
왕건을 도와 고창전투에서 승리하게되어 권씨를 사성받아서 김씨가 권씨로 되었다고 한다.
안동권씨 陵洞齋舍(追遠樓)(중민183호)(안동 서후 성곡리)3
삼태사 중의 한명인 권행의 묘제를 위해 마련되었다.1653년(조선효종4년)에 16칸을
건립하고,1683년(조선숙종9년)권시경이 누각7칸을 더지었다.1743년 불탄것을 다시
지었고 1896년 다시 화제를 입었다.그후 70여칸의 건물 중에서 임사청.전사청 등 몇
건물만 남았다.재사로는 보기드물게 큰 건물로 제례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안동권씨 능동재사4
고려낭중안동권공휘인행지단.고려낭중안동권공휘인행지단.夫人陽川許氏 祔5
낭중공 권인묘6
이곳의 석물들은 경북 청도 공암에 있었던 낭중공의 기적들로 2010년 5월07일
단소를 이곳에 새로 조성함으로써 선조 때부터 오랫동안 그곳에 기울였던 정성
과 애착이 담긴 것이라, 기념물로 남기고자 2012년 07월24일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동 권문의 2세 仁幸은 태사공의 독자로 관직은 낭중이고 양천허씨 시조 宣文公
의 따님과 혼인했다.권문은 낭중공의 묘를 실전하여 오던중 청도 운문면 정자동
에 속전하는 2기의 총이 있어 봉분을 수축했지만 증거는 찾지못했다.그후 운문면
에 있던 곳에 단소를 설치하고 1935년부터 봉사하여왔다.그러나 2총은 관련이 없
었지만, 壇所移壇은 追源報本의 崇祖精神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이를 계기로 吾
門은 화합단결하고 낭중공 음덕이 자자손손 면면히 미치어 융성하기를 기원한다.
安東張氏敬堂宗宅(사인보드)7
소요유적답사팀이 타고다닌 리무진버스8
안동 敬堂宗宅(안동 서후 성곡리)9
경당고택은 조선중기 유명한 성리학자 敬堂 張興孝((1564년-1633년)선생의 후손들이
살아오던 종가집이다.원래는 제월대와 광풍루가 있던 봄파리에 있던 것을 50여년전에
옮겨서 중건한 것이다.구성은 정침과 사당으로 되어 있다.팔작지붕 홑처마 민도리집
으로 정면6칸.측면7칸의 ㅁ자형의 집이다.이곳은 퇴계학파를 이끌었던 영남유학의
근간이 되는 곳이었다.어려서 경당은 鶴峰 金誠一(1538년-1593년)문하에 출입했고
西厓 柳成龍(1542년-1607년).寒岡 鄭逑(1543년-1620년)에게 배웠다.敬의 학문을 중
시한 선생은 책상위에 경자를 붙이고 생활의 신조로 삼았다.그의 학문은 외손 葛庵
李玄逸(1627년-1704년)에게 전해져 많은 제자와 문인을 길러냈다.특히 고택은 안동의
사임당으로 불렀던 정부인 안동장씨(張桂香)(1598년-1680년)이 태어난 곳이다.
장씨는 경당의 무남독녀로 石溪 李時明의 배필로 음식디미방(규곤시의방)(閨壼是議
方)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경당종택(현판)10
현판글씨는 김방걸(1623년-1695년)의 종손인 南井 金九稷의 글씨이다.
경당종택 한옥 스테이(사인보드)11
한국관광공사 인증
우수한옥체험 숙박시설이며,한전 사회봉사단의 고택지킴이 지정장소이다.
안동 경당고택(사당)12
경당고택 마을에서 본 말벌집13
멀리서 본 경당고택14
鶴峰 金誠一先生舊宅(文忠古家.淵源回歸家)15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학봉 김성일(1538년-1593)이 1582년 내앞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던 곳이다.학봉은 退溪 李滉의 高弟로 학통전수의 징표인 屛銘을 받았
다.그는 조선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렀다.그는 일본 통신사 부사로 다녀와서 민심을 우려해
금방 쳐들어올것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라고 보고했다.임란후 초유사로 관군.의병을 함
께 지휘해 진주대첩을 이끌었다.그후 진주공관에서 순국했으며 文忠이란 시호를 받았다.敬
과 義 실행을 중시하는 학봉의 학문은 훗날 독립운동의 자산이 되었다.학봉의 장손 端谷
金是樞(1580년-1640년)는 이이첨의 폭정을 단죄하는 영남유생만인소의 소수로 활동했고
종택을 건립하고 風雷軒이라 했다.호남 의병대장 霽峰 高敬命이 임란 때 이곳으로 와
가족과 같이 지냈다.11대주손 西山 金興洛((1827년-1899년)은 定齋 柳致明의 고제로 퇴계
학의 적통을 고수했다.조선의 마지막 山林이라 불렀다.1895년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해 안동의 을미의병을 창의했다.13대주손 汝見 金龍煥(1887년-1946년)은 항일의병전투
에 참전했고 의용단 활동으로 옥고를 치루었다.종택.종답을 매각해 만주 독립군자금으로
지원했다.이런 활동 은폐를 위해서 노름꾼.파락호로 위장했다.그후 해방다음해 생을 마쳤다.
서산과 손자2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지손15명이 독립유공 훈포장을 받았는데
여견 김용환의 딸인 김후옹이 훈장을 대신해서 받았다.학봉고택을 文忠古家.淵源回歸家로
불린다.보물503점을 포함 고문헌과 유물이 雲章閣.鶴峰記念館에서 항상 관람할 수가 있다.
안동 의성김씨 학봉종택(기112호)(안동 서후 금계리)16
이집은 鶴峰 金誠一(1538년-1593년)이 살았던 곳이다.학봉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1년)문과에 합격후 여러관직을 두루거쳤다.그의 학문은 영남학파 계승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오자 1762년(영조38년)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그후 1964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
두어 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안채는 오른쪽3칸이 대청이고,왼쪽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
다.이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종택으로서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양자로 이어간 13대 주손인 汝
見 金龍煥은 딸(김후옹)만 두었기에 14대도 양자인 金時寅으로 겨우 이어 나가고 있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사랑채(정침)17
의성김씨 학봉종택(현판)18
文忠古家.博約眞詮.風花雪月山館.전서 文忠古家의 현판들이 붙어있다.
문충고가는 학봉의 시호가 문충이기에 붙인 이름이며,박약진전은 널리 배우고
예로서 요약하라 라는 공자의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의성김씨 학봉종택(風雷軒)19
학봉의 장손 端谷 金是樞(1580년-1640년)가 풍뢰헌으로 명명했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사랑채(정침)20
의성김씨 학봉종택 안채의 현판 미수 허목의 글씨(光風霽月)21
광풍제월은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黃庭堅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말로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개인 날의 달처럼 가슴속에 맑은 인품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
의성김씨 학봉종택(재실)22
학봉은 퇴계 학풍의 징표인 屛銘을 받았으며, 그후 11대 주손 西山 金興洛이 다시 받아
2번이나 퇴계의 정맥을 이은 집이다.그리하여 당호가 학봉의
시호를 따서 문충고가.또한 퇴계의 학풍이 다시 돌아왔기에 연원회귀가로 부르기도 한다.
퇴계의 학풍은 鶴峰(金誠一)-敬堂(張興孝)-石溪(李時明)-葛庵(李玄逸)-密庵(李栽)-
大山(李象靖)-損齋(南漢朝)-定齋(柳致明)-학봉11대손 西山(金興洛)으로 퇴계의 정맥학파가
이어졌다.
서산 김흥락의 제자로는 석주(이상룡).일손(김동삼).기암(이중업).성재(권상익).공산(송준필)
대개(이승희).백하(김대락).소창(김원식) 등이 있었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보물각(雲章閣)23
운장각은 학봉선생의 유물각으로 1987년 개관했다.운장이란 저 높은 은하수처럼(倬彼雲漢)
하늘가운데에서 맑게 빛난다(爲章于天)라는 시경의 한구절에서 취했다.운장각에는 경연일
기.해사록. 등 친필유고와 사기.고려사절요 같은 전적56종 261점과 교지.간찰류.고문서 17종
242점 등 73종 503점이 국가보물로지정되었고 안경.벼루 등도 보관되어 있다.학봉은 내치외교
에 전력하였고 임란전에는 통신사부사로 다녀왔으며 임란 때는 招諭使.경상우도관찰사로 관군
의병을 총지휘하여 임란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1593년4월 병든 백성을 규
휼하던중 진주공관에서 순국했다.그후 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고 文忠 道德博聞日文 危身奉
上日忠의 시호를 받았다.유문을 함께 묶은 학봉전집이 전한다.
고재오님의 기념식수24
제봉 고경명 의병대장 13대후손 충효부대장 고재오(2004년 3월1일)
霽峰 高敬命(1533년-1592년)은 조선의 문신.의병장으로,본관은 장흥이며 시호는 忠烈이시다.
안동 소계서당(안동 서후 금계리)25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던 학자 정재 柳致明(1777년-1861년)의 문인 서산 김흥락의
가학지소인 서당이다.이 서당에는 서산이란 선생의 아호 현판과 족질후학
김정모가 지은 기문이 게첨되어 있다.김흥락은 제훈집설요람을 지었다.저서
로는 서산집이 있으며 서당은 정면3칸.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종택은 원래 지대가 낮아 8세손 김광찬이 1762년 소계서당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원래의 집이 있던 곳으로 옮겼으나 서당만은 남겨두었다.
학봉기념관26
학봉 김성일27
1538년(중종33년)안동 내앞에서 靑溪公 金璡의 4남으로 출생
1556년(명종11년)(19세)퇴계 이황선생에게 수학함
1566년(명종21년)(29세)퇴계께서 淵源 전수의 뜻이담긴 屛銘을 내림
1568년(선조원년)(31세)문과급제.사간원 정언시절 선조에게 요순(성군)도
될수있고 걸주(폭군)도 될수있다고 직간
1577년(선조10년)(40세)명의 사신으로 가서 대명회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음(광국공신원종일등)
1579년(선조12년)(42세)사헌부 장령으로 직언과 탄핵을 서슴치 않아 조정
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렀음.함경도 순무어사로 백성의 참상과 민심을
상소하고 국방을 점검함
1582년(선조16년)(45세)안동 金溪 현재위치로 이거하여 세거지로 자리잡음
1584년(선조17년)(46세)대동법 및 7개조를 상소함
1584년(선조17년)(47세)나무목사시절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
(경현서원)을 세웠음
1585년(선조18년)(48세)퇴계의 저술 성학십도.계산잡영.주자서절요.퇴계
선생자성록.향교예집(동자례).의례도를 나주에서 간행
1590년(선조23년)(53세)일본통신부사로 국위를 세우고 일본 근대 유학의
개조인 후지와라(藤原惺窩) 등에게 퇴계학을 전수함
1591년(선조24년)(54세)세번의 소를 올려 국방을 강화할 것을 주청함
1592년(선조25년)(55세)경상우도수군병마절도사.초유사로 의병을 총지휘
하여 진주대첩을 거둠(선무원종공신일등)
1593년(선조26년)(56세)진주공관에서 순국
1607년(선조40년)사림에서 학봉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임천서원 등 9개
공간에 위판을 봉안함
1676년(숙종2년)이조판서.대제학에 추증되고 文忠公의 시호를 받았음.
의성김씨종택.임천서원28
의성김씨종택(보540호)은 안동 임하 천전에 있으며
태어난 곳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587년 巴자형으로 직접설계하여 지었다.
臨川書院은 문충공 학봉을 주향한 서원으로 1607년 당시 안동부사로 있던
한강 정구선생의 주도하에 지었다.한강은 제문에서 충의는 골수에 박혔으며
도리는 심장에 가득하다는 옛 선현의 말을 공이 진실로 받았다.
(忠義骨髓 道理心腸 古人此語 公實承當)이라고 학봉의 精忠大節을 기렸다.
학봉의 촉석루 한시.석문정사(문34호)29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 마루위에 마주보는 삼장사)
일배소지장한수(一杯笑指長江)(한잔술로 웃으면서 장강을 가리키네)
장강지수유도도(長江之水流滔滔)(장강의 저물은 도도히 흘러가네)
파불갈예혼불사(波不渴兮魂不死)(저강물 안마르듯 우리의 넋도없어)
영남의 삼장사로는 학봉 김성일.대소헌 조종도(생육신 조려후손).송암 이로를 말한다.
임진순국 호남삼장사는 1593년 6월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자 진주성에 들어가 9일간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한
창의사 문열공 김천일.병마절도사 충의공 최경회.충청병마절도사 황진을 뜻한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효열공 준봉 고종후(제봉 고경명의 아들)를 삼장사로 본다.
학봉이 진주에 초유사로 도착하니 성은 텅비었고 감물만 흘러가네.
대소헌 조종도와 송암 이로가 찾아와 적의 칼날에 죽느니 빠쪄 죽읍시다.하니
학봉은 결연히 답한다.죽기는 두렵지 않으나 여러분이 도와 의병을 일으킨다면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이요,뜻데로 되지않으면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소
학봉은 시를 써서 세장사와 함께 결사항전할 것을 맹세했다.
石門精舍는 1587년(선조20년) 학봉이 건립했으며 안동 풍산 막곡에 있다.벼슬을
그만두고 퇴계의 유서를 잇고자 건립했던 정자이다.松巖 權好文.芝山 金八元.文峯
鄭惟一 등의 시판과 密菴 李栽가 지은 석문정사기문이 계판되어 있다.
서산선생문집목판.가죽신.각대(위).무이구곡도.말안장.철퇴(아래)30
각대는 관복을 입고 위에 두르던 띠로 학봉이 사용하던 것이다.
말안장은 학봉종가에서 누대로 사용하던 것으로 13대주손 참봉 김용환이 즐겨
사용하였다.1919년 1월 고종승하 소식에 문중사람과 함께 솟대거리에서 제상을
차려 향을 피우고 삼베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망골례를 올렸다.
망곡후 종가상방에서 말견대2개에 1원권 지폐를 꼭꼭 채워넣고 독립운동가
소창 김원식과 함께 석주 이상룡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전하러 만주로 갈 때
타고 갔던 말안장이다.
철퇴는 학봉이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경상우도감사로
활동하면서 지휘봉 및 호신용으로 사용했다.몸체에 은으로 용을 음각하였다.
유서통.인장31
유서통은 1592년(선조25년)4월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학봉이 왕의 유지를 넣어 가지고 다니던 통이다.양쪽끝으로 고리가 있어
등에 멜 수있게 만들었다.
왕명을 받든 문서가 들어 있어서 누구도 손댈수가 없는 불가침의 통이다.
인장은 학봉종가에서 사용하던 도장으로 문서나 서류에 사용하였으며 당호
호 등을 새겼다.서책에 찍어 소유자를 나타내기도 했다.
호패.학봉집32
호패는 신분증명서와 같다.조선시대 16세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니던 세로 모양의
패이다.호구를 명백히 하여 민정의 수를 파악하고 직업 계급을 분명히 하며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한 면에는 태어난 간지를 적고 그 뒷면에는 관아의 낙인이 찍혔다.
학봉선생문집은 시.서.일기.연보.행장 등과 학봉의 저술을 엮은 문집으로 목판본이다.
1649년(인조27년)학봉선생 문집7권을 여강(호계)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726년(영조2년)
학봉선생 연보와 1782년(정조6년)학봉문집속집5권을 호계서원에서 모두 목판으로
간행했다.1851년(철종2년)문집과 속집을 중간하면서 문집부록4권을 처음으로 편제에
넣어 임천서원에서 간행했다.또한 수백년 보관되어온 유초와 자료들을 일고4권과
일고부록3권으로 문집에 처음으로 합편하여 1972년 학봉전집으로 간행했다.1996년
국역 학봉전집 6권으로 완역 완간했다.
학봉학맥도.병명33
퇴계(退溪)(이황)(李滉)선생
한강(寒岡)정구(鄭逑).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월천(月川)조목(趙穆)
경당(敬堂)장흥효(張興孝).황여일.배용길.임흘.조정.유복립.유복기.권익창.김해.신지제.김용.최현
석계(石溪)이시명(李時明).김시온.김시추
갈암(葛庵)이현일(李玄逸).이숭일.이휘일.권태시.이상일.김학배.김방걸.유직
밀암(이재)
대산(大山)이상정(李象靖)
손재(損齋)남한조(南漢朝)
정재(定齋)유치명(柳致明)
서산(西山)김흥락(金興洛)
석주(이상룡).공산(송준필).일송(김동삼).의암(류인석)
우선생수제김학봉병명(右先生手題金鶴峰屛銘)
익익소심(翼翼小心)탕탕황극(湯湯黃劇).박약양지(博約兩至)연원정맥(淵源正脈)
퇴계선생께서 병명을 내리다.퇴계학의 적통 다시 학봉가에서 잇다34
도통전수의 징표
학봉은 29세 때 퇴계선생으로부터 요순이래도 성인이 전한 心法을 차례로 적은 80자를 손수 쓴
屛銘을 받았다.내용은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曾子.顔子.子思.孟子.周濂溪.徎明道.徎伊川
朱子 등 16성현을 그 심법의 핵심을 들어 찬양한 글이다.
요임금은 공경하셨고 순임금은 한결같았으며 으로 시작하여 博文約禮 두가지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
으니 도통연원의 바른맥을 이었도다(淵源正脈)라고 주자를 칭송하는 말로 끝맺고 있다.이 병명에
대하여 갈암 이현일은 경연에서 퇴계선생이 박약양지 연원정맥 여덟글자를 써준것은 스승의 의발
을 전수한 것(師門衣鉢之傳)이라고 말하였다.
퇴계학의 적통 다시 학봉가에서 잇다
西山 金興洛(1827년-1899년)은 학봉의 11대주손으로 정재 유치명 문하에서 수학했고 조선의 마지막
산림처사로 일컬어졌다.서산은 입학오도에서 학문방법을 立志.居敬.窮理.力行의 4단계로 체계화했고
경의 실천을 규명한 이상정의 경재잠집설을 도상화해서 경재잠집설도를 편찬했다.
영남3초 즉 萬初 李相龍.廣初 李中業.範初 金瀅模 서문3산 즉 晴山 權相翊.貞山 金東鎭.恭山 宋浚弼
등 700여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안동 을미의병을 지휘했으며 1899년 73세를 일기로 고종하였다.서산선생문집30권을 간행했고
권상익이 행장을 이만도가 묘갈명을 썼다.만제집15책이 있다.1936년 소계서당을 세웠다.
퇴계학의 적통을 잇다.당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35
퇴계학의 적통을 잇다
학봉은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자질이 매우 뛰어 났으며 큰 절개가 있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으며 주자의 글로 일신의 표적을 삼아 마음깊이 새겼다.
학봉은 짧은생애 공무와 전란으로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조정에 차(箚).소(疏).상(狀).계(啓)와 많은 시.초유문 등을 남겼다.
학봉은 유학과 퇴계학의 핵심인 克己復禮의 실천예학에 대한 깊은 연찬과
실천의식은 상례고증 등 예서의 저술,퇴계학의 문목 등으로 나타난다.
그가 남긴1500여수의 시중에서 백성의 아우성을 그린 적병행(籍兵行)과
쉬우면서 뜻이 미치는 평포홍창(平鋪洪暢)은 한유와 구양수의 경지였다.
맑고 담백하고 주밀한 충담리도(沖淡理到)는 도연명과 소동파의 시에
방불하다.
당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
사헌부 장령 때 임금의 형과 정승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殿上虎(조정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노릉복위 육신복작 종친서용소를 올린 후 115년이 지나도록 단종은 복위
되지 못하고,사육신도 관작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주청하지
못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그뒤 단종이 복위되고 금성대군이 신원된 것은
모두 이 상소에서 발단된 것이다.
진췌순국.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성일36
시호 文忠은 도와 덕을 널리 알았으니 문이요,몸을 바쳐 나라를 받들었으니 충이다.
임종 때도 사적인 일은 한마디도 하지않고 그 아들 또한 옆방에서 함께
병이 걸려 위독했으나 한번도 묻지 않고 오직 국사를 종사자들에게 면려하면서
진중에서 운명하니소식을 들은사람들이 모두 비통해 하였다.
아! 아! 성일은 옛날의 遺直이라 할만하다.향년56세 백성의 어버이로 1년 거룩한
생애를 군막에서 마치다.인재 홍진은 경연에서 만약 성일이 생존했다면 진주성도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서애는 학봉의 불행은 진주성 천만인의 불행이다
라고 말했다.한강 정구가 행장.우복 정경세가 신도비문.연보는 밀암 이재.문집서문은
용주 조경.발문은 학사 김응조.해사록 발문은 택당 이식.속집 서문은 대산 이상정
선생이 지었다.
진주대첩을 총지휘하다.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어쩔 수가
없다.충무공 이순신의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는 전략과 일치
했다.판관 김시민.최경회.곽재우.김준민.윤탁.정언충.조응도.정유경이 협력했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포위를 뚫고 남강을 건너 성안으로 무기를 공급하여 마침내
3만여 왜적을 격퇴한 진주대첩을 거두었다.진주수성승첩장을 조정에 보고했다.
목민의 이상을 펴다.목숨을 건 외교투쟁37
학봉은 함경.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 북풍한설 몰아치는 국경보루를 강행군 하며
윤관.김종서의 북방개척을 기리고 세금.부역.부정군역에 시달리는 농민을 살피고
진보.군기.창곡 등 국방실태를 점검했다.잘못이 있는 관리들은 책임을 묻게했다.
籍兵行.母別子 같은 시로 어미와 아들이 눈물로 헤어져야하는 아품을 함께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리기 위한 7개조를 상소하면서 大同法과 社倉法 시행을 주
청했다.또한 호남의 큰고을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직접 목민의 이상을 실천하려고
했다.동헌에 큰북을 걸고 원통한 일이 있는자는 북을 치라고 했다.이것으로 간사
하고 교활한 자들은 매우 꺼리나 백성을 편해졌다하며 상을 내렸다.이 지역 최초로
대곡서원(현 경현서원)을 창건해서 강론하고 5현을 향사했다.이런 호남과의 인연
으로 임란중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선생의 일가족 수십명이 학봉 본가에 와서 수년
간 살았다.그후 20년후 4남 고용후가 안동부사가 되어 학봉의 노부인과 아들 집공
을 관아로 불러서 잔치를 베풀면서 피난시절 은혜에 감사하며 울면서 헌수했다.
학봉은 1577년 중국 서장관으로 가서 조선 최고 외교 현안이었던 종계변무 즉 태조
종계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일을 약속받았다.1590년 일본 통신부사로 임명되자
박제상이 되기를 각오했다.당시 명이 만들었던 대명일통지 가운데 조선의 역사와
풍습 중에서 잘못을 바로잡은 조선국연혁 풍속고이를 저술하여 단군이 중국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바 있음을 지적했다.또한 일본
근대성리학의 개조 후지와라(등원성와藤元惺窩)에게 퇴계학을 전수하고 시를 나누
었다.
민심과 국가안정을 위하여.의병의 아버지38
학봉은 왜적이 사신들을 뒤따라 금방 쳐들어 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여 인심을 요동시키는
正使의 보고가 事宜에 어긋난다하여 이에 浮同하지 않았다(不見如許情形) 이것은 왜란의 가능
성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왜적이 오기도 전에 조야가 겁에 질려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한 것이니
꼭 잘못 주달한 것은 아니다.그후 황윤길과 김성일은 왜국사신을 만나 사정과 상황을 자세히 들었
으며 부산에 도착한 倭使가 吳億齡을 만나 내년에 왜가 쳐들어 올 것 이라고 했고 이를 왕에게 보
고 했다.그후 왜란이 발발하자 왕과 조정은 학봉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선생의 보고 때
문에 방비를 철수했거나 적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난이 일어나자 손을 쓸 수가 없던 것은 당시의
상황이다(이식의 해사록).학봉은 귀국뒤에 소차를 올려 인심이 흉흉하니 급선무는 내정개혁과
민생.민심 안정임을 강력히 건의했다(선조실록.학봉전집).
의병의 아버지로 임진왜란을 역전시킨 3대
전략은 의병봉기.의병과 관군의 합동작전.곡창호남을 적의 침략으로부터 막기위한 진수사수를 세
웠다.임진년 봄 왜적이 이르니 김성일은 동요하지 않고 보수계획을 세웠다.적이 웅천에 왔을 때
그는 말에서 내려 호상에 버티고 앉아 비장을 독촉해 왜적의 선봉장을 베니 이 때문에 조금 흉적
이 물러나게 되었다.임진왜란 최초의 승보이다.관군과 의병이 서로 다투는 일이 생겼지만 김성
일만은 영남의병이 그를 믿고 존중하여 패사하는 자가 적었다.의병장 곽재우는 학봉의 옹호로
큰전공을 세운반면 호서(충청도)의병장 조헌은 관군의 협조를 얻지 못하여 패전 전사했다.
학봉은 퇴계와 남명의 훈도를 받은 이곳에서 관군보다 민중에게 조국을 구하자 라고 호소하며
명의 원군만 기다리지 않고 의병과 관군을 잘 조화시켜 항전체제를 구축했다.전국의병 2만2천
가운데 반수이상이 학봉휘하의 의병이었고(1593년 1월) 곽재우 등 의병장과 민중을 영웅으로
탄생시킨 의병의 아버지로 숭배받게 되었다.
소요 유적답사회 59차 여행은 안동지역을 택했다.수차 안동을 갔지만 빠진 곳을 이번에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저도 안동을 여러차례 다녔으나, 소요답사회는 처음으로 참가했다.
天燈山 鳳停寺 一柱門을 배경으로 소요유적답사팀39
(2017.11.04)
첫댓글 안동권씨, 장씨의 고택들을 소요유적 답사 때 둘러 보았구나. 난 이곳에 가보질 못해 구경 잘 하였네. ' 말법집이 특이하도다.
안동은 역시 학봉 김성일선생의 문화재가 상당히 많았다네~특히
파락호로 이름이 높던 김용환은
전답과 집을 팔아 독립자금을 대기위해 위장을 했다고 한다.학봉의 후손들이 독립을 위해 많은 힘을 써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대단했음을 알았다네~
TV에서도 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네. 훌륭한 분들이지
학봉은 후손들에 의해 더욱 빛이 난 듯하네~물론 퇴계의 최고 수제자는 분명하지만 임란보고로
우리에게는 좀 다소 거부감이 있었지~~
그 당시 정세 판단을 잘 못한 건 다른 쪽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군
해설사 왈 황윤길은 직접 다니면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김성일은 정세파악을 못하도록
출입의 제한을 두었다는 말을
들었다네~학봉후손의 변명인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그러나 학봉의 후손들은 청사에 남을 독립운동으로 이 나라를 빛낸분들이 아니신가~높이 평가
해도 남음이 없다는 생각이든다.
학본 종택은 8-9년 정에 오천마을 갔을 때 함께 갔었는데 그 때 종택 사람들이 차와 떡을 대접하는 예절이 남다르더구나.
김성일의 오판이 흠이 있지만 그 후 임란에 임한 자세는 그 흠을 덮을 정도로 최선을 다 한 것 같구나.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임박하자 김성일은 김해 부사 출신의 서예원을 진주 목사로 임명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의병들을 불러 모으는 등 일전에 대비했다. 그러던 4월 29일, 그가 진중에서 전염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유성룡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분이 싸우다가 죽었더라면 더 멋진 삶이었을텐데...
송암 이로의 용사일기를 보면 1차 진주성전투에는 지략이 있는 김시민이 활약을 해서 승리를 거두었지만,2차전투에는 전략도 없는 서예원을 임명한 탓으로 몰살하다시피 했지...진주성혈전이 되어버렸지...지도자의 무지함이 여실이 나타났던 전투였다네...물론 의견이 하나로 투합되지 못했던 것도 패전의 원인이겠지만...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미래를 대비하는 마음을 가저야 되겠어요⚘
@박광길 안동 권씨가 경주 김씨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 ㅋㅋ
@박광길 학봉과 임진왜란을 보면서 항상 대비하는 자세로 나라를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댓글 감사합니다.
원래 김행이였지요~55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의 습격으로 죽음을 당했으니 고창(옛안동)전투에서 왕건편을 들었겠지요~왕건을 도운 3명
(삼태사)은 정말 충절로
고려를 도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