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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득도와 출가 그리고 독일 박사
백성욱(1897-1981) 박사는 1950년 6.25가 나던 해 내무장관을 지내고, 53년부터 62년까지 만 8년간 동국대학교 2-3대 총장을 역임한 정치가요 교육자지만 본래는 승려로서 불교 수행자였다.
그는 서울 연지동에서 태어나 6세 때 당시 사립 초등학교인 호동(壺東)학교를 나오고 7세 때부터 글방(書塾)에서 12세 때까지 6년간 한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10년 13세가 되던 해 7월에 서울 정릉의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 선사를 은사로 득도(得度)한다. 승려가 된 것이다. 이렇게 출가한 백성욱 박사는 다음 해부터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의 유명 강원을 무려 6년 이상 돌면서 경전 공부에 몰두한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 먼저 한학(한문과 유학)을 익히고 다음 불문에 귀의하여 불학(佛學)을 배운 것이다. 백성욱 박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당시 전문대학 과정인 서울 불교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서 불교학을 전공하고 22세 때인 1919년에 졸업,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임시정부로 간다. 그리고 연이어 프랑스 보배고등학교를 거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28세가 되는 1925년 10월 논문 <불교순전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학위 논문 불교순전철학은 당시 우리나라 불교 전문 잡지인 <佛敎>지 제7호에서 14호까지 연재하여 국내에선 처음으로 발표 되었다. 승려로 출발한 20대 후반의 불교 철학자가 1920 년대에 가졌던 관심사가 대개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을 유추해 보기 위함이다.
백성욱 박사는 귀국 다음해인 1926년 29세에 드디어 모교인 불교 중앙학림의 교수로 부임한다. 졸업 후 불과 7년 만이다. 당시 중앙학림 교수에는 백 박사를 가르쳤던 은사도 있었다.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1884-1967) 선생이 대표적이다.
포광 선생에 따르면 중앙학림에서 백 박사는 철학을 강의 했다고 한다. 백성욱 박사는 중앙학림 교수 2년 만인 1928년 9월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自然景을 찾아서>(佛敎 지 48, 49호)란 글을 남기고 금강산(金剛山) 장안사 안양암으로 들어간다. 출가 후 몸에 배었던 산사의 만행(萬行)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아니 보다 더 철저한 성불의 길을 걷기 위함이었다.
이 때가 백 박사의 나이 31세로 안양암(安養庵)에 들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일곱자를 한 구절로 하여 실상염불(實相念佛)에 단신 몰입한다. 실상염불이란 화엄경의 법신불과 계합(契合)코져 하는 염불로서 ‘대방광불화엄경’ 을 끊임없이 소리 내어 암송하는 염불이다. 이 화엄 염불의 구경(究竟)은 화엄삼매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에 있다.
백성욱 박사의 이러한 화엄경 염불은 독특 하였다. 그래서 당시 불자들의 관심을 크게 사 장안사 안양암으로 많은 수행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백 박사를 따라 수행을 같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 때문에 백 박사는 3년 만에 안양암에서 지장암(地藏庵)으로 수도량을 옮긴다. 그리고 여럿이 같이 하는 회중會中 수도에 다시 들어간다. 지장암에서의 이 회중 수도는 무려 7년에 달했다. 안양암 시절과 합치면 10년의 세월이다.
▶백성욱 박사의 해인삼매
금강산에서의 ‘대방광불화엄경’ 10년-. 백성욱 박사의 이 10년 수도의 불과(佛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 박사와 1917-18년 사이 불교중앙학림 사제 관계였고, 그로부터 10년 후 백 박사가 중앙학림 교수였을 때는 동료 교수이기도 했던 포광 김영수(전술) 선생의 회고담을 통해 백 박사의 그 불과를 알아본다.
이처럼 백성욱 박사와 깊은 인연이 있고 한국 불교학계의 거두였던 포광 김영수 선생은 1960년 간행(동국대학교 刊)의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 논문집>에 게재한 논문 <화엄사상의 연구>에서 서두에 백성욱 박사와 자신의 학연(學緣)을 설명하고, 백 박사의 ‘10년 금강산 수도’ 정진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백 박사는 어떠한 각오 하에서 그랬던지 세상만사를 다 집어치우고 깊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일좌부동(一座不動)하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대방광불화엄경’ 7자 경명을 섭심(攝心) 대상으로 정하여 천성 만성 억 만성을 부르면서 전념근행을 하였던 것이다. 흡사 정토종 수행자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정근 하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은 ‘대방광불화엄경’ 전념 수행의 결과로서 백 박사는 어느 날 하루 천지 삼라만상이 소소역역昭昭歷歷(밝고 뚜렷함)하게 환연奐然(빛남)히 나타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解脫境界)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계에 도달한 백 박사는 그 옛날의 백 박사가 아니라 천양지판(天壤之判)으로 달라진 백 박사이다. 신상(身上)은 예와 다름없을지 몰라도 정신은 대각(大覺)의 세계에 들었던 것이다.(위 책 pp3-5)
포광 선생의 위 언명은 백성욱 박사가 10년 동안의 ‘대방광불화엄경’ 염불로 화엄의 ‘해인삼매’에 들어 부사의한 해탈경계를 이루고 불지(佛智)에 들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 포광 선생은 논문의 말미 결론 부분에서 백 박사가 ‘대방광불화엄경’을 천념(千念) 만념(萬念) 무량념(無量念) 무량성(無量聲)으로 정근한 것은 대오(大悟) 대각(大覺)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만일 백 박사가 이를 성취하지 못했으면 금강산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 백성욱 박사는 필경 변성정각(便成正覺)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포광 선생의 백성욱 박사 금강산 수도에 대한 평가와 찬탄에 따르면, 백성욱 박사는 1928년 금강산 입산이래 10년 동안 ‘대방광불화엄경’ 정진으로 성불의 경지 대각을 이룬 것이다. 이 때가 1938년의 일이니 백성욱 박사의 나이 41세이다. 봉국사에서 득도한 이래 28년만이다. 더욱이 금강산 ‘해인삼매’ 이후에는 신광(身光)까지 발하여 불자들은 백성욱 박사를 보고 ‘생불’이라 칭하기도 했다.
백성욱 박사의 금강산 10년 화엄성진도 실상(實相)인 비로자나 법신에 오로지 착득심두)着得心頭)하고 염도염궁(念到念窮)하여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백성욱 박사의 그 법력(法力)을 우러르고 육문상방(六門常方)의 신광을 경이로 보아 생불이라 일컫기도 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호칭을 듣던 도인(道人) 백성욱 박사는 금강산 지장암에서의 오도(悟道) 후 어떠한 가르침을 제자들과 산방 대중들에게 남겼는가? 이것 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백 박사 자신이 당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바 없고, 그 제자들 마져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어 금강산에서의 가르침을 찾아보기가 막막하지만, 딱 한분 제자 김기룡(金起龍) 선생이 1960년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회갑기념)으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사업회’에서 편찬 간행한 <白性郁 博士文集(제1집 동국대학교 간)>에 ‘內金剛 地藏庵과 白性郁 博士’란 글을 남겨 지장암에서의 백 박사 행적과 법문 등 여러 가지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정말 다행한 일이다.
이 문집에는 백성욱 박사의 독일 박사학위 논문 ‘佛敎純全哲學’과 각종 논설 수상 서간문 등이 다수 수록 되어 있는데, 김기룡 선생의 지장암 글은 맨 말미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이 글에 따르면 김기룡 선생 자신은 1930년대 초 금강산을 찾았다가 내금강 지장암에 훌륭한 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뵈니 그 분이 바로 백성욱 박사였다고 한다. 그래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어 ‘대방광불화엄경’ 독송을 선생님 따라 열심히 하면서 탐진치(貪瞋痴) 삼독을 녹이고, 예불 참선 울력(청소, 농사 일 등 사찰에서 단체로 행하는 각종 작업)을 하면서 수행정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나와서도 김기룡 선생은 평생 백성욱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살았다. 이와 같은 김기룡 선생의 글을 통해 지장암에서의 백성욱 박사 수도정진의 일면과 가르침(法門)을 간략히 살펴본다.
백성욱 박사는 28년 금강산 입산 이래 지장암에서의 수도를 마칠 때까지 산을 떠난 일이 없다. 30년대 중반 못 미쳐 서울 불교중앙전수학교(동국대 전신)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학생 대표를 백 박사에게 보내 학교 발전을 위해서 교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했고, 심지어는 어릴 때 조실 부모한 백 박사 자신을 돌봐 길러준 외조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외가에 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백 박사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야말로 불퇴전의 용맹정진이었다.
백성욱 박사의 매일 산중(지장암) 하루 일과 역시 새벽 4시 예불로부터 시작하여 밤 9시 취침 때까지 쉴틈이 없었다. 네시 예불이 끝나면 제자 및 산내 대중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큰 소리로 ‘대방광불화엄경’ 독송 정근을 하고, 아침 공양을 끝낸다. 그리곤 다음 사시巳時 마자摩旨, 참선 울력 법문 저녁 예불 등 잠시도 한가롭게 놀거나 휴식하는 일이 없었다.
▶백 박사의 가르침(法門)
▪부처님의 공덕
석가여래 부처님은 설산 고행을 하신 6년 만에 그 아래 부근 목장에서 소녀가 올리는 우유를 받아 잡수시고 몸을 양養 하시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대 진리를 각득(覺得) 하셨다. 지구상에 인류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부처님 보다 더 많은 복을 가지신 분은 없었을 것이요, 부처님 외는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무량대복을 가지신 부처님을 정성을 다해 시봉하고 공경하면 누구나 소원을 성취하고 복을 누린다는 것이 이론상으로도 긍정할 수 있다. 부처님은 한 없이 자비하시고 복덕은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일심으로 부처님 시봉 잘해야 한다.
▪일체유심조와 견물생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견물생심(見物生心)은 어떻게 다른가?
견물생심이란 육체가 주인이 되어 그 한 마음이 심부름을 하는 것이고, 일체유심조란 그 한 마음이 주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니, 그러면 나쁜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나쁜 일이 되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일체유심조 이기도 하지만 인습에 의하여 미래가 결정 되나니 일분일초를 헛되이 하여 허가(虛假)한 몸을 가지고 어찌 복福을 지을까 보냐!
▪마음을 닦는 자세
현재, 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는 완성되느니라. 한 마음을 닦는 자 윗목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뜯어 먹어도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물을 먹어도 양이 먹으면 젖이 되고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방광불화엄경’이 일곱 자 경 이름, 호명 정근을 일심으로 열심히 하면 밖으로 제 인연을 끊고 그 한 마음 속에 받은바 법을 지켜 안으로 헐떡거리는 불(火)을 끄나니 마음속에 잠재하여 무명(無明)을 짓는 업장(業障)을 집어내며 마음에 낀 티끌까지도 씻어 낸다. 그리고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하느니라.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쳐라.
‘내(我)’라는 놈은 언제든지 무엇이던 하나 붙잡아야지 그냥은 못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항상 부처님을 떠이고 간절히 생각할 때에만 한限하여 그 붙잡는 집착심이 없어진다. 때문에 중생은 부처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받쳐야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우리가 삼라만상을 대할 때에 ‘나’(아만-이기심)라는 놈이 부쩍 부쩍 크나니 오직 한 푼을 벌어도 부처님 전에 복 짓기 위하여, 무엇을 먹어도 오직 이 몸으로 부처님을 봉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쳐라.
▪원수(怨讐)를 짓지 말라.
다른 사람과 원수를 짓지 말라. 원수란 다른 사람과 서로 원한을 맺어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진심(嗔心)을 못 이기는데서 생겨나기 십상이다. 진심이란 탐진치(貪瞋痴) 삼독의 하나로 ‘성내고 화내는 마음’이다. 이런 진심이 사소한 다툼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원결을 맺어 결국 적으로 삼고 살게 된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리고 성내는 마음은 남과 원수를 맺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정신과 육체도 결딴낸다. 그러니 이런 성내는 마음, 즉 진심이 일어나면 즉시 부처님께 바쳐라. 그러면 진심은 소멸되고 부처님은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몸이 바를 때 마음도 바르다.
우리의 마음과 몸을 바르게 가질 때에 올바르게 되는 법이다. 물이 방원(方圓: 모나거나 둥근)의 그릇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이치와 같다.그러므로 몸을 함부로 가질 때에는 마음 또한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성정정일(性靜情逸 : 성이 고요하면 감정이 편안함)이요, 심동신피(心動神疲: 마음이 요동치면 정신이 피로함)니라.
백성욱 박사의 금강산 지장암(地藏庵) 생활은 일정이 빈틈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백성욱 박사는 언제나 한복으로 정장하고 그 위에 법복을 입었으며 앉을 때는 절대로 어디 기대지 않고 종일이라도 정좌 했다. 그리고 백 박사는 제자들에게 “몸이 단정해야 마음도 단정하고 바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글 :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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