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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갈 3:15-4: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
I. 여는 말
1. 지난주에 본문을 너무 미세하게 들여다보았다가 강론과 설교의 측면에서 보면, 실패랄까, 지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고,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감동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2. 오늘 본문도 지난번과 마찬가지의 실수와 실패를 할 공산이 커 보인다. 해서, 큰 그림을 그리는데 주력하고, 세세한 것들은 넘어가고, 특히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II. 문맥
1. 지난 강론 요약
1)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또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인가? 라는 질문과 대답을 다루었다.
2) 그 대답은 이렇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다.
3)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 육체적 혈통과 혈연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받기로 한 그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4) 율법이 없는 시대의, 율법 이전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율법 없이도, 율법을 행하기도 전에, 할례를 받기도 이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2. 지난 주에 이은 오늘의 요지 : 율법
1) 율법은 무엇을 못하게 하지만, 무엇을 하게 하지 못한다.
2) 율법은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를 수 있게 하지 못하고,
3)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라는 사회적 경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교회를 분열시킨다. 교회의 하나됨과 보편성을 훼손한다. 사회적 구분을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할례가 유대인화, 민족주의화, 인종주의화라고 했던 것과 동일하다.
4) 그것은 악한 세대의 모습이고, 악한 세대의 다른 말인 ‘세상의 초등학문’이 여기서 등장한다.
3. 성경 읽는 법 혹은 오늘의 요지
1) 나는 전에 성경을 읽을 때,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활동에 대한 언급이 있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 구절의 앞뒤 본문을 해석하라고 했다. ex) 하나님은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다.
2) 나의 성서 해석 원칙 중 하나는 분명한 것으로 불분명한 것을 해석하라, 그래도 안 되면 유보하라, 이다.
3) 그 실례가 마가복음 13장이나 종말론에 관한 본문들이다.
4) 오늘 본문을 수차례 읽으면서 뚜렷해지거나 맑아지기 보다는 더 혼란스럽다. 율법에 관한 바울의 논의도 알 듯 말 듯 한데, 십 수권의 주석을 읽으면서 아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 아이코, 바울이 이렇게 복잡하게 말한 거야? 이렇게 어려우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해했겠어? 등등.
5) 이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명시적 고백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3:20),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하나(3:28)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6)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우리 모두는 그의 사회적, 인종적, 경제적 차이와 차별을 넘어서 하나이고, 자녀라는 큰 그림, 큰 틀에서 본문을 해석하면 별 탈 없이 잘 읽은 것이 된다.
7) 그런 맥락에서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아빠, 아빠, 라고 코맹맹이 소리로 애교를 부리게 만들기 보다는 엄하고 무섭고 딱딱한 분으로 만들고, 자녀 보다는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III. 약속과 율법(3:15-20)
1. 약속이 율법 보다 더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더 나아가 율법이 줄 수 없는 생명과 의를 약속이 줄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례를 찾아내서 설명한다.
2. 바로 유언장이다(15절). 유언은 당사자가 아니면 고칠 수 없다. 수정하는 데도 상당히 까다롭다. 확정하고 공증을 받으면 변경 불가이다. 430년 뒤에 태어난 율법이 유언, 곧 약속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가 없다(17절). 그러므로 율법을 기준으로 언약을 해석하면 안 되고, 율법은 언약에 입각해서 설명해야 마땅하다.
3. 일상의 경험을 예로 들었던 바울은 다시금 성경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문법적인 측면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개인이다. 그러기에 후손도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기되었다.
⑴ 이것을 바울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그 후손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⑵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수, 곧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가족, 공동체일 수 없다.
4.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율법으로는 아브라함의 단일 후손과 단일 공동체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약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거저 은혜다!
5.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왔다.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약속이 있는데도 굳이 율법을 만드셨냐는 것이다.
6. 여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분석하면 몇 가지로 세분할 수 있는데, 큰 덩어리만 잡으면, 즉 가장 굵직한 줄기 두 개를 붙잡아 올리면 하나는 범죄들 때문에, 이고, 다른 하나는 후손이 오실 때까지, 이다.
7. 내가 정말 어려웠던 것이 바로 ‘범죄들 때문에’이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이유와 목적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범죄를 일으키기 위하여, 라고 목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범죄가 일어났기 때문에, 라고 할 수 있다.
1)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유로 해석되는 말을 한다. 율법의 용도는 범죄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2) 어찌 보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명(롬 ?:?)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은 황당해 보인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을 알아도, 인간이 죄를 행하도록 조장하는 하나님을 나는 알지 못한다.
3) 질문을 바꾸어 보자. 죄가 먼저일까? 법이 먼저일까? 죄가 먼저다. 죄를 해결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졌다. 그 이후에 법은 죄를 죄라고 말하고, 죄 지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죄는 그 법을 이용해서 또 다시 죄를 짓는다. 죄를 통제하기 위한 법이 죄의 빌미가 된 것이다. 이것이 ‘범죄들 때문에’라고 한 것의 뜻이 아닐까?
8. 여기서 한 발 자국 더 나아가자. 법 혹은 율법(nomos)은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가?
1) 아주 간단한 실례를 들어보자. 우측통행이라는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은 좌측으로 통행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우측통행한 사람을 의인/선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2) 이것이 율법으로는 사람이 의롭게 되지 못한다(3:11)는 말이다.
9.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 주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었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죄목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고발자인 멜레토스에게 묻는다. 누가 젊은이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가? 멜레토스는 ‘법률’(nomoi)라고 답한다. 그러자 얼른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묻는 바는 법을 아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질문을 보다 명확히 한다. 그러자 멜레토스는 재판관이다, 협의회 의원이다, 등등을 열거한다.
10. 나는 처음에 멜레토스가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소크라테스의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봤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따라가면, 그의 말에 말리게 되어있고, 지게 마련이다. 역시 이름 그대로 미련한 사람이군, 그러고 말았다.
11.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그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어, 그게 아니구나.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에는 애시당초 법률, 우리는 율법이라고 하는 그 법률이 소크라테스의 머리에는 없었던 것이다. 법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소크라테스는 ‘법률’을 처음부터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의 목록에서 제거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법률의 이름으로 소크라테스는 사형 당했다.(예수는 법률에 의한 살해를 당했지만, 그의 재판은 불법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외양적으로는 합법적이었지만 말이다.)
12. 여하튼 율법, 법률은 사람을 선하게 하지 못하고, 본래의 의도대로 규칙을 잘 지키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법률이 죄를 짓게 만들 수도 있다.
13. 율법의 용도가 한편으로 인간의 범죄 때문이고, 다른 한편은 일시적/잠정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교사(새번역), 초등교사(개정)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말하자.
IV. 종과 아들(3:21-29)
1. 이상의 바울의 논법은 얼핏 보면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앞에서 명시적인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기준으로 읽으라고 말했다. 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하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약속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가 아닌 둘로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하의 내용은 율법과 약속이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초점이다.
2. 21절에서 율법은 의롭게 하지 못한다, 즉 율법/법률로는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위에서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을 인용한 부분에서 다룬 바 있다.
3. 율법이 약속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개인교사’이다.
1) 당대의 문화에서 개인교사(파이다고고스)를 간단히 설명할 것.
2) 부정적 기능을 한다.
3) 그러나 성인으로 자라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그러니까 개인교사는 미성숙한 어린 아이가 성숙한 성인이 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한다.
4) 그러나 어른이 된 다음에는 더 이상 개인교사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
4. 율법은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하지만, 상대에 대한 신뢰(믿음)와 기다려주는 신실함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한다.
5. 26-28절은 율법과 달리 믿음이 일으키는 실제적 효과를 기술한다.
1)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2) 침례를 통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3) 그리스도를 옷 입는다.
6.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는 것을 계속 다루었으므로 넘어간다.
7. 침례의 의미는 로마서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1) 물 속에 들어가는 동작을 통해 예수와 함께 죽고!
2) 물 속에서 나오는 동작을 통해 예수와 함께 살고!
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연대/연합한다.
4)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도 침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
8. 옷 입었다는 말은 위의 침례와 비슷하다. 옷이 상징하는 바,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표현한다. 예수라는 옷을 입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9. 놀라운 선언인 28절을 먼저 읽어보자.
10. 이 세 개의 쌍은 무작위적으로 추출한 것이 아니다.
1) 유대인의 저주 기도를 뒤집은 것이다. 나는 이방인/여성/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2) 일명 차별 금지법이다.
⑴ 구원에 있어서 민족과 인종적 차별은 없다.
⑵ 사회 경제적 계급에 따른 차별은 없다.
⑶ 성적 차별도 없다.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구원과 교회에서 어떤 장애가 없어야 한다.
3) 그러니까 지금껏 바울이 율법과 칭의라는 어렵고도 복잡한 논의의 최종 결론은 구원과 교회에서 막힌 담을 세우지 말라는 것, 즉 사회적, 경제적인 세상의 장벽을 교회 안에서 허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11.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 상속자는 믿음, 곧 율법이 아니라 믿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점을 쐐기를 박는다. 서두에서 요약한 대로, 아브라함처럼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
12. 생각해 볼 문제
여성 목사 안수
V. 양자됨과 유업(4:1-7)
1. 문맥
1) 위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법을 부연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복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2) 이번에도 일상적 경험을 유비로 든다.
2. 아이가 어려서 부모가 죽으면 후견인이 일정 기간 동안 재산을 관리하고 양육을 책임진다. 상속자라도 미성년이면, 후견인의 돌봄과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더 이상의 후견은 필요 없다. 이것이 1-2절이다.
3. 바울은 다시 새로운 용어를 사용한다. ‘세상의 유치한 교훈’이다. 우리가 세상의 유치한 교훈의 종노릇했다고 한다. 이게 뭘까?
1) 일단 맥락 속에서는 율법의 다른 이름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서 종노릇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2) 문자적으로는 어떨까? 이것은 상당히 논란이 되고, 논쟁이 되는 단어이다.
⑴ 세상의 기초 원리 혹은 기초 원소라는 말이다. 고대 철학자들을 끌어들여 말하면, 이 세상의 아르케가 뭐냐, 라는 물음에 그들은 물이다, 불이다, 라고 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기초 원리/원소이이다. 그렇지만 이 맥락에서는 맞지 않다.
⑵ 세상의 지배 원리를 말한다. 이쯤에서 나의 강론을 충실히 들었다면, 당신은 갈라디아서 1장 4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핵심 구절이라고 했던, 악한 세대 운운하던 그 구절 말이다. 5절을 읽어보라. 1장 4절의 같은, 그러나 표현만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⑶ 이것은 ‘정사와 권세’를 말한다. 월터 윙크와 존 요더를 통해 ‘구조’ ‘이념’ ‘제도’로서의 정사와 권세를 말할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것.
4. 할례와 같은 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정사와 권세의 대표적 케이스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으로 난 지 팔일 만에 남자 아이들은 모두 할례, 곧 포경수술을 받았다. 그것 받았다고 의로워지는가? 하하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지 이면적 혹은 심층적 차원에서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곧 다루게 될 ‘특정한 날’을 중요시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이 되어 우리가 종이 되는 것, 바로 그 힘을 세상의 기초 원리, 정사와 권세라고 한다.
5. 다시 ‘아바 아버지’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왔다. 무슨 말인가?
1) 아바(abba)는 ‘아빠’라는 갓난 아기의 언어이다.
2) 아바 아버지와 성령이 같이 나오는 경우 : 로마서 8장 15-18에서처럼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한다. 갈라디아서도 마찬가지다.
3) 율법이 아닌 -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일 뿐이다. 잠시 동안 후견을 맡았을 뿐이다. - 성령이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게 한다. 즉 올바른 관계, 곧 의롭게 만든다.
4) 예수의 혁명 중 하나는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게 한 것.
5) 여기서는 하나님을 아빠로 모신 한 가족이라는 것이 초점이다.
6) 율법은 하나님을 엄한 분(눅 19:21) 굳은 분(마 25:25), hard man(NIV)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아니다. 아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다. 그냥 아빠 하며 달려가 안길 수 있는 그런 착한 분이다.
6. 아들이니 아버지의 재산을 받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7. 나는 여기서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 형과 동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8. 나는 아들로(사랑으로) 하나님을 믿는가? 종으로(의무) 하나님을 믿는가?
VI. 닫는 말
1. 나는 종인가, 아들인가, 를 점검해 보자.
2. 다음 주는 4장 8절부터 5장 1절까지이다. 갈라디아서 강론의 중반을 넘어섰다. 다시 열심을 내서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