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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그는 무라카미 류[村上龍],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에서 한 세대를 풍미한 작가다. 서구권에서 본인 작품 대부분이 번역 출판된 몇 안 되는 일본인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대체로 평이하고 친숙한 편이다. 다만 그의 정교한 은유적 구사는 한 마디로 독자들을 ‘뻑’ 가게 하기에 충분하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대체로 ‘쿨’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제 자체가 무겁고 초현실주의적인 경우가 많다. 실례로 『해변의 카프카』 등 그의 작품 대부분에 오컬트Occult(신비적이며 초자연적 초현실적인 현상) 적 요소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상실의 시대』만 예외다.
잡문雜文(잡스러운 글이 아니라 에세이류를 말함)에도 아주 능하다. 무엇보다 술술 읽힌다. ‘소설의 하루키와 판이한 하루키’라고 할 정도로 위트가 넘치기 때문이다. 특히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를 출간할 정도로 재즈에 해박하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전공투 분쟁으로 한때 학교가 폐쇄되었을 때 도쿄에서 ‘피터 캣Peter cat’이라는 재즈까페를 경영하기도 할 만큼 서양 대중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다.
‘전공투全共闘’란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약자로, 1960년대 초 미일상호안보조약 체결을 반대했던 일본 내 대규모 학생운동이다. 처음에는 80년대 전대협을 주축으로 한 우리나라 학생운동과 유사했다. 학원비리 척결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대학 내 문제의 테두리를 넘어 ‘학생과 국가권력 사이의 싸움’으로 치달으면서 전 대학으로 확장 전개되었다.
부패척결이라는 모토로 잠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일본판 ‘주사파’라고나 할까? 일본의 공산주의화를 표방하는 과격 세력인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이 지도부를 장악하여 주도권을 잡고 폭력적 성향을 띰으로써 전공투 투쟁은 대중들의 지지에서 이탈하게 된다.
특히 70년대에 들어 조직 내의 갈등에 의해 100명 이상을 서로 죽고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슬슬 도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하늘이 경기하고 땅이 울렁울렁 요동치는 일이 발생했으니, 조직 내 급진세력인 적군파赤軍派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공항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요도 호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대중과 학생들의 지지를 급속도로 잃고 전공투는 붕괴하고 만다. 이는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나라 학생운동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전공투가 그러했듯 초기의 ‘반독재투쟁’이라는 순수성에서 벗어나 사상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양대산맥이라면 NL과 PD일 게다. 그리고 그중 NL에서 북한 동조세력이 많았고, 투쟁방법이 비교적 적군파와 유사한 과격파였다. NL은 ‘Ntional Liberty’ 즉 ‘민족해방파’로 우리나라를 미국의 식민지 반半자본주의사회로 보는 데서 시작한다.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다, 외세 즉 남쪽의 점령군인 미군이 철수하고, 민족의 합의에 의해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김일성의 ‘주체사상론’을 받아들여 이른바 ‘주사파’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은 사라진 ‘통진당’ 세력과 ‘민노총’ 세력이 이에 해당한다. 임종석, 임수경, 하태경 등이 당시 NL 계열이었다.
PD는 People's Democratic ‘민중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로 보는데서 시작한다. 우리나라를 자본에 의한 신식민지로 보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모순을 타파하자는 세력으로, 마르크스 사상을 추종했다. 당시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이재오, 김문수 등이 PD계열에 속했다.
그러나 90년대 접어들면서 PD 진영에서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이론을 폐기함으로써 현재의 좌파 본류로 남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하태경, 이재오, 김문수 등은 우파로 전향했으니 공식적으로는 NL과 PD의 굴레에서 벗어난 셈이 되었고, 남아 있는 당시 PD세력으로서 활동 중인 사람은 조국, 유시민을 비롯 심상정 노회찬 등 정의당 주축세력이다.
아직까지도 ‘주사파’로서의 이념을 고수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임종석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다만, 구 통진당이나 민노총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정부가 성공적이기를 바라지만 다소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 곳곳 요직에 NL과 PD 계열 인사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진정 민중을 위하여 일할 것인가, 아니면 이념수호를 위해 자신의 힘을 작용시킬 것인가 하는 기우도 있다. 역사로 보자면 민중혁명이 성공해도 단 한번도 민중의 행복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아무튼 하루키의 경우, 그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아예 이념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회색분자, 좋게 말하자면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리버럴리스트였던 셈이다. 글로 보건데, 그는 이념보다 예술을 사랑했던 것 같다. 재즈 오타쿠オタク(소수의 특정 취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오타쿠라 하여 나무랄 일은 아니다. 대중음악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트롯 음악을 ‘뽕짝’이라 폄하하고 까대는 사람들처럼 예술성으로만 가치를 판단하는 그의 오만과 편견이 좀 거슬릴 뿐. 예를 들어, <헤이Hey>와 <나탈리Nathalie>로 유명한 스페인계 미남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Julio José Iglesias가 그로부터 ‘뜬금포’를 맞는다.
‘저 느끼한 목소리, 이글레시아스는 다들 싫어하지 않나?’ 같은 표현으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입장에서는 참 억울할 일이다. 이는 송대관이나 현철의 노래를 무조건 천박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설마 그가 대중음악의 특성을 모르고 한 말이었을까? 대중음악은 본디 그런 특징을 전제로 한 음악이다. 고학력의 고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음악이 아니라, 잔바람에도 일렁일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고단한 심사를 노래하는 것이 바로 대중음악이다. 그래서 직설적일 수밖에 없다. 느끼기에 따라 천박해 보일 수도 있다.
허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폄하 그것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듣기 거북하다면 듣지 않으면 된다. 그의 노래를 꼭 찾아 듣지 않는 내 취향 역시 어쩌면 하루키와 비슷하다. 톰 존스나 앤디 윌리엄스, 성시경처럼 달달한 음색이 내 취향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걔네들 노래 누가 듣겠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루키의 생각과는 달리, 훌리오 이글레시아의 팬 분포는 실로 거대하며 글로벌하다. 그의 감미로운(느끼한) 목소리에 사로잡혔던 우리나라의 5,60대 여성 팬 층도 아직까지 견고하다. 그가 한때 스페인에서는 지금도 그를 국민적 가수로 추앙하고 있다.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태생부터 금수저였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명망 높은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공부까지 잘했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특별 과외라도 받았나, 아니면 천부적으로 피지컬이 좋았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공과 관계없이 스페인의 명문 프로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 CF의 2군 팀 AD플루스 울트라에 입단한다. 그것도 주전 골키퍼로.
명망가 출신에 명문대 졸업… 그런데 이게 과연 ‘레알’? 비록 2군팀이지만 명색이 레알 마드리드 아닌가? 그것도 주전이었다니. 하지만 이때 훌리오를 시기하던 쫌팽이 남성들에게 낭보가 날아든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샘 많은 수컷들이 “쟤, 이제 끝났어!” 하며 쾌재를 부르는 순간, 이런! 경천동지할 일이 따로 있나? 병실에 갇히어 지내던 그에게 신께서는 또 다른 능력을 깨우쳐 주신다. 병상에서 간호사가 심심풀이나 하라고 건네준 기타를 뚱땅거리다가 노래를 하나 만든다. 그 자작곡을 들고 뜬금없이 ‘스페니시 송 페스티발’에 나가서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도 화려한 꽃길로만. 암컷들이 그에 열광한 반면, 수컷들은 다시 절망한다. 그에게만큼은 신이 공평하지 못했다. 훤칠한 키, 우수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빼어난 외모, 감미로운 목소리 등등…
“아, 어찌하여 신은 그에게 그 많은 것들을 다 주었을까?”
남자들은 다 저마다 이렇게 한탄했고, 여자들은 모두 그의 빼어난 외모와 달달한 음색에 광분했다.
그의 음반은 14개 언어로 80장이나 발매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무려 3억장의 음반이 팔려나갔다. 소니뮤직 발표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 5명 안에 든단다.
자, 이야기를 우리 대표 대중가요인 트롯으로 되돌려 보자. 과연 현철이나 송대관의 노래 가사는 다 저질스럽고 천박한가? 반면 서양의 대중음악의 가사는 다 고상한가? 만만의 콩떡 같은 소리다. 서양 팝뮤직에는 마약, 불륜 등 각종 범죄를 고무하는 내용, ‘F’로 시작되는 쌍욕이 등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큰 울림을 주는 가사도 많지만, 말도 안 되는 가사도 부지기수이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로 시작되는 현철의 <봉선화 순정>이 수십 배로 시적 여운을 준다. 우리의 하루키가 영감을 얻고 책 이름으로까지 내세운 비틀즈의〈Norwegian Wood(부제-새는 날아가 버리고This Bird Has Flown). 가사만으로 보자면 하찮기 그지없다. 어쨌기에? 어디 제작 배경과 가사를 한번 훑어나 보자.
한때 난 어떤 여자를 알고 지냈지.
아니, 그녀가 한때 날 알았다고 해야 할지도 몰라.
그녀가 자기 방에 날 들여놓고선 이렇게 말하더군.
‘이만하면 쓸 만하죠?’
함께 밤을 보내자고 하면서 우선 아무데나 편하게 앉으라고 하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엉덩이 걸칠만한 의자 하나 없었어.
난 긴장을 풀고 카펫에 주저앉아 그녀가 건네는 포도주를 받아마셨지.
우리는 새벽 두 시까지 얘기를 나누었어. 그녀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이젠 자야해요. 내일 일해야 하거든요.’
난 ‘내일 하루쯤 쉬어도 되잖아?’ 하면서도 잠자리에 기어 들어갔지.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고, 새는 날아가 버렸더군.
난롯불을 지피면서 중얼거렸지.
‘뭐, 어때? 비록 ‘노르웨이 산 싸구려 송판 벽으로 된 방[Norwegian Wood]이긴 하지만’
존 레넌이 작사하고 폴 매카트니가 곡을 썼다는 이 노래는 존의 혼외정사 사건과 관련이 있다. 작곡을 맡았던 폴은 존과 바람피운 여자가 기타 세션 연주가 피터 애셔의 애인이라고 추정했다. 즉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고상한 번역 타이틀 뒤에는 친구의 여친과 불륜을 다룬 추잡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아, 물론 청춘들의 원색적인 욕망과 상실감도 은유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의 한 배우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가 된통 당했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문득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탔다. 노르웨이의 숲에 오니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 그때 잡았던 너의 따스한 손길... 내 어깨에 살짝 기댄 너의 머리 내음...함께 거닐던 어두운 숲속에서 잠깐씩 마주쳤던 너의 눈빛....”
당연히 다음과 같은 댓글이 가차 없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관종.”
‘관심종자’ 남들의 관심이 그리운 자의 준말 신조어.
“over share!”
지나치다는 뜻의 ‘over’와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를 뜻하는 ‘share’가 결합한 조어.
“무식한 놈. 가사 뜻이나 알고 올렸나? 허세 쩐다.”
허세는 ‘∼척하기’ 쩐다는 ‘최고, 끝내준다’의 뜻.
“클라스가 오짐”
하는 짓거리가 오지다는 뜻.
왜 그런 댓글이? 노래에서 언급된 ‘Norwegian Wood’란 당시 영국에서 대중적이던 ‘싸구려 송판’이란 뜻으로 씌었기 때문이다. ‘값싼 송판 벽으로 둘러쳐진 허름한 방’ 즉 친구 피터 애셔의 조악한 침실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다.
가사 어디에도 ‘노르웨이의 숲’은커녕 노르웨이란 나라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사실, 일본인들의 지나친 서양문화 동경은 도를 지나칠 정도로 심한 편이다. 스스로 미개한 아시아에서 벗어난 ‘탈아시아 민족’이라 칭하는가 하면, ‘아시아의 백인’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강조하곤 했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하루키 역시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것 같다.
대중음악에 관한 그의 글을 보면 온통 재즈나 영미 팝음악에 대한 찬사가 넘쳐난다. 자국 음악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없다. 하긴, 우리 젊은 날에도 그랬었다. 까닭없이 우리 가요를 폄하하고 자랑삼아 팝뮤직을 즐겨듣는 친구들도 많았다.
무릇 대중음악이란 고상해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설 자리가 줄어든다. 미국에서 재즈가 그러했다. 하층민이었던 흑인 노예와 노동자들이 절박하고 서러운 처지를 단순하게 표현했던 재즈가 화성학을 배운 먹물 백인들에 의해 고상함(클래식화)이라는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고, 대체 노르웨이[Kingdom of Norway]는 어떤 나라인가. 덴마크와 스웨덴의 속국이었다가 게르만족의 일부인 노르드인들이 세운 입헌군주국이다. ‘노르웨이’ 라고 하면 대체로 달력 사진에서 보여주는 곧고 높은 침엽수림이 연상된다. 핀란드·스웨덴과 함께 목재 수출국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영국 등 서구사회에서는 노르웨이 산 목재를 싸구려로 취급했나 보다. 하긴 저가 다이DIY 목재가구로 유명한 IKEA도 같은 스칸디나비안 국가인 스웨덴 태생이 아닌가? 지금은 고세율을 피해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기긴 했지만.
역시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묽은 밀가루 반죽에 팥소만 들어 있을 뿐이다.
하루키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상실의 시대』의 원제목은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エイノ森)’이다. 이 소설에서 숲은 물론이고 노르웨이라는 나라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제나 소재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정한 제목 ‘상실의 시대’가 오히려 적절하다.
하루키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을 굳이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지었을까?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물론 이 제목이 대안으로 존재했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비틀스의 노래를 차용한다는 저항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키에게 ‘노르웨이의 숲’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머리에 박혀 있어 다른 어떤 제목도 와 닿지 않았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기 전, 하루키는 마지막으로 아내 나오코에게 어떤 제목이 좋을까 하고 물어보았다.
“노르웨이의 숲이 괜찮네요."
결국 제목은 그렇게 정해졌다.
소설 초반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공항의 기내에서 우연히 삼류소설 가사 같은 비틀즈의
첫댓글 늘 좋은 글과 음악 감사...
가내 평안하고 건강한 한해가 되기를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