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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다 찾아오는 선물 같은 순간들, 6인의 인연 지리산
1. 일자: 2024. 9. 14 (토)
2. 장소: 지리산
3. 행로와 시간
[백무동(04:08) ~ 하동바위(05:10) ~ (참샘) ~ 소지봉(06:40) ~ 장터목(08:30~09:55) ~ 제석봉(10:15) ~ 천왕봉(11:15 ~ 11:40) ~ 범계사 샘터(13:06~15) ~ 순두류(14:34) / 12.2km]
< 9월 지리산행을 준비하며 >
돌베개에서 2001년 출간한 책 <지리산>은 '역사 기행을 겸한 지리산 산행 완벽 가이드'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내가 읽은 등산 서적 중 이처럼 알찬 내용으로 구성된 책도 드물다. 오래된 책을 펴 들고 백무동과 대원사 코스를 살핀다. 여기에 더해 흐릿한 옛 기억을 더듬는다.
핸드폰 대문 사진을 천왕봉 정상석으로 바꾸고 행로를 하나 둘 탐구한다. 산행 일주일 전, 도팔산에 '지리산 산행 의논' 이라는 공지를 올린다. 각자 준비물을 나누고 등로를 의논한다.
* 코스 (백무동 출발, 순수 걷는 시간 기준 예상)
- 대원사 코스: 12시간 (22km 쯤, 도로 4km 포함)
- 중산리 코스: 9시간 (14km 쯤)
* 화대종주팀과 같이 가는 일정으로, 두 코스 모두 15~16 시간이 주어져 여유 있는 산행이 가능합니다.
* 우리가 갈 길은 당초 대원사 코스를 생각했으나, 무리 없이 가려면 충산리 하산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의논의 결론은 '천왕봉에서 결정하자' 였다. 지리산 할매가 우리의 길을 잘 점지해 주시리라 믿는다.
추석 전 나름 빠른 한 주를 보냈다. 버스가 28인승에서 31인승으로 변경되었고, 날씨가 여전히 덥다는 것 말고는 지리산행에는 이상은 없다. 지리산에 여러 번 올랐지만 9월에는 처음이다. 여름 더위가 남아 있고, 아직 단풍은 먼 계절의 천왕봉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기대된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백무동 ~ 장터목 >
백무동까지 긴 밤의 여로
밤 10시에 사당역을 출발한 버스는 다음 날 새벽 02:30에 화엄사에서 화대종주에 나서는 '아주 센자'들을 내려주고, 멀미나도록 지그재그의 긴 고개를 지나 3시가 조금 지나서 성중종주에 나서는 '역시 센자'들을 내려주고는, 4시 무렵 우리 일행과 젊은 처자 2명을 포함한 '나머지 떨거지'를 백무동에 내려놓고는 떠나버린다.
04:08, 행장을 정비하고 길을 나선다. 백무동 코스는 하동바위와 소지봉을 거쳐 장터목으로 오르는 천왕봉으로 향하는 최단의 지름길이다. 헤드 렌턴의 불빛에 의지해 먼 여로의 시작에 나선다.
낯선 만남
장터목과 한신계곡 갈림 앞에서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두친구(적당한 호칭인지는 몰라도 그리 불러 보기로 한다.)들이 길가에 앉아 있다. 이내 우리를 따라 걷는다. (뒤에 알았지만 초행이라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함께 갈 이들을 기다렸다 한다.)
해발 900m 하동바위까지 1시간 안에 걷는 게 일차 목표이다. 여기까지 걸어보면 나와 일행들의 커디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언제나 오리온의 삼왕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별이 밝은 걸 보니 오늘 산행의 조망이 기대된다. 걱정은 바람 한 점 없다는 게다.
두친구는 무척 잘 걷는다. 우릴 따라서, 아니 앞장 세워 갈 모양이다. 잘 되었다. 먼 길에 길동무가 생긴 건 반가운 일이다.
하동바위에서 전열을 정비한다. 오늘도 배낭이 돌덩이인 기영이 조금씩 처지는 게 마음에 걸린다. 고기에 얼음물에 각종 구급약에..... 여러 번 배낭을 가볍게 하라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
참샘에서의 짧은 쉼
하동바위에서 참샘까지는 길고 가파른 등로였다. 예전에 못 보던 계단이 몇 개 더 놓였지만 느낌은 그대로다. 별들도 구름에 숨고, 길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뚝뚝 떨어진다. 어렵사리 참샘에 도착했다.
오랜 만에 다시 찾은 참샘은 그새 데크와 벤치도 있는 쉼터가 만들어져, 쉬어가기 좋은 장소로 변해 있었다. 간식을 나눠 먹는다. 처자들은 수줍게 말을 건냈지만 붙임성이 좋아 보인다. 과일과 두유가 초반 행보에 에너지원이 되어 주었다.
기영 배낭의 짐을 나뉘어 진다. '이제 고기도 생겼으니, 버리고 간다'고 농담도 건낸다. 힘겨울 땐 농담도 힘이 된다.
소지봉 오름길의 힘겨움
참샘에서 소지봉까지를 장터목 코스에서 가장 난코스라 여겼는데, 역시 그랬다. 날은 조금씩 밝아오고, 간혹 부는 바람과 산새의 지저귐 소리 외에는 세상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는다. 산과 산에서의 경험을 나눈다. 놀랍게도 두친구는 지리산이 처음이란다. 무모함에 놀라고 도전에 응원을 보냈다.
기영은 처지고 그런 후배의 길동무를 하려는 듯 성종형이 뒤에 남고, 무석형과 두친구와 함께 소지봉에 오른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날이 훤하게 밝아온다. 새벽 어둠이 가득했던 오름을 걸어왔던 터라 눈 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평탄한 길은 무척이나 낯설다. 짧은 바람도 땀에 젖은 몸의 끈적거림을 잠시나마 잊게 해줄 만큼 상쾌했다. 조릿대 옆을 걷는다. 평지를 걷는다는 건 호사였다. 숲에 녹음이 짙어진다. 희미하게다마 가을의 예후들이 느껴진다.
말벌과의 전쟁
어디서 나타났는지 말벌 두 마리가 주위를 윙윙거린다. 무석형의 말에 의하면 외국에서도 단연 최강자로 생태계의 교란자가 되어 간다는 국내산 말벌은 특히 두친구 근처에서 맴도는데 무척 사나워 보인다. 기겁을 한다. 무석형이 그들을 안심시킨다. 노련하다. 한바탕의 소동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 사이 일출의 기운이 확연해 졌다.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식물만이 아니라 인간도 광합성을 한다고 믿는다. 햇살을 바라보니 확실히 힘이 난다.
드디어 장터목
쉬고 걷고 또 쉬고 하기를 되풀이 한다. 제석단에서 한 번 더 쉬고, 멀리 장터목대피소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가 보이는 언덕에 선다. 그 모습이 희망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어서 가 물과 가스를 사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려 마음이 급해져 걸음이 빨라진다.
<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에서의 만찬
생수와 이소가스를 사고 불을 피운다. 일행들이 식탁에 둘러 앉는다. 라면 물이 끓고 기영이 지고 온 불판에 소고기가 구워진다. 고기의 붉은 색이 연한 밤색 빛으로 변해 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작은 병에 담아온 코냑의 목넘김이 괜찮다. 장터목에서의 성찬이 시작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간 '꿈궈온 산장에서의 호사'가 현실화 된다. 처자들과 이젠 격의 없는 사이가 된다. 새벽을 함께 헤치며 먼 길을 걸어온 동지애가 식탁에서 더 살갑게 피어난다. 음식을 나누고 고기를 권하고 잔을 부딪히고, 오래 기억될 추억이 만들어진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연세대 서은극 교수의 행복론을 시청했다. 제목이 < 누가, 언제, 왜 행복한가? > 였는데 결론 중 하나는 '행복 = 좋은 사람 + 음식' 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밥 먹는 경험이 최고의 행복이란다. 무척 공감되는 말이다. 행복론에서는 환경변화가 마인드셋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꽤 인상적인 주장이었는데, 그 말이 참임을 장터목대피소에서의 조찬은 증명했다.
1시간을 훌쩍 넘긴 긴 만찬이 끝이 나고, 드립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우리가 함께 했음을 알리는 사진을 찍는다. 표정이 많은 걸 말해 준다.
연무 속 천왕봉 가는 길
아침 고기의 힘을 얻어 천왕봉을 향해 길을 나선다. 제석봉까지의 등로는 천왕봉 가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증명한다. 따가운 햇살과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돌투성 길의 끝에 제석봉이 있었다. 전망 데크에 앉아 먼 풍경을 살핀다. 멀리 지리의 우듬지를 향해 가는 등로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그 정점에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 정점 끝에 서 있는 우리 6명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잠시의 쉼에서 힘을 얻어 걸음을 이어간다. 고사목이 랜드마크였던 제석봉의 이미지도 이제는 새로 심은 나무들로 인해 변해가고 있었다. 연무가 짙어지더니 작은 언덕을 내려서 작은 공터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곳은 잠시 바람골이 된다. 한참 동안 서성이며 습기를 가득 품은 시원한 바람을 즐긴다. 이 느낌 역시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일명 바람골에서 잠시의 행복을 만끽했다.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으로 향하는 0.5km 등로는 홀로 걷던 내게는 늘 힘겨운 사투였는데, 오늘은 벗들이 있어 행복한 나눔의 길이었다. 먼저 천왕봉에 오른다. 멀리서 일행들이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아준다. 천왕봉 인증 샷을 위한 긴 줄이 이어진다. 얼른 찍고는 후미에 쳐진 기영을 기다리며 다른 이들의 인증샷을 찍어주는 찍새 노릇을 한참 동안 했다. 덕분에 늦든 친구의 샛치기에도 불만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즐거워 하는 모습에 나도 기뻤다.
대원사와 중산리가 나뉘는 갈림, 바위 위에 걸터 앉아 간식을 나누며 하산길과 뒤풀이 이야기를 한다. 비록 대원사행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지만, 다시 천왕봉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 천왕봉 ~ 중산리 >
법계사 샘터의 시원한 물
11:40, 예상 대로면 순두류에서 14:50 셔틀버스를 타고 중산리로 내려갈 수 있으리라.
긴 계단을 내려선다. 이곳은 굽어보는 막힘없는 조망이 압권인 곳인데, 오늘은 연무란 놈이 많은 걸 앗아간다. 하산 시작 1km가 특히 힘겨웠다. 씩씩하게 걷는 처자들의 표정에도 힘겨움이 묻어 난다. 애써 외면하고 앞서 간다. 단체 산행의 소요시간은 결국 후미에게 맞춰지게 마련인데, 앞에서 누군가 긴장감 있게 끌어줘야 그나마 무한정 늦어지는 걸 막을 수 있다. 조금은 미안했지만 법계사까지는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멀고 먼 중산리 하산 길
샘터에서 충분히 물을 보충하고 새수도 하고 잠시 쉬어 간다.
쉼도 잠시, 순두류를 향해 걷는다. 길이 조금 순해졌지만 여전히 돌투성이다. 칼바위 길이 이보다 몇 배 더 험하다는 걸 일행에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겠지만, 다독이며 걷는다. 그 길에 끝에서 만나는 조릿대가 호위하는 평탄한 흙의 발 밑 감촉은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순두류 등로 알림 이정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간 함께 한 동지애를 사진 한 장에 남기고 멀고 긴 지리산 산행을 마무리 한다.
모두에게 고맙고 행복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에필로그 >
순두류~중산리 버스는 만원이다. 차를 한 대 보내고 정류장 길가에 앉아 사진을 정리한다. 사진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다. 행복했던 순간만이 정지되어 영원으로 기억될 모습들로 변한 채 밝게 빛나고 있다.
거북식당에서 몸을 씻고 나니 날아갈 것 같다. 막걸리 한 잔에 다시 이야기꽃이 핀다. 술과 사람 좋아하는 기영이는 컨디션이 영 아닌가 보다. 빨리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친구들이 사 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고 차에 오른다. 대원사를 향해 버스는 출발한다. 어둠이 깃드는 대원사 주차장에는 놀랍게도 대원사에서 16시간을 걸어, 화대종주를 완주한 진정한 산꾼들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부러웠다.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박수를 보냈다.
버스가 서울로 출발한다. 참았던 졸음이 밀려온다. 눈을 감는다. 지난 10시간, 지리산에서의 새벽과 한낮과 어둠의 기억이, 장터목에서의 만찬과 천왕봉에서의 벅참과 함께 녹아 든다. 행복한 노곤함에 젖은 채 잠이 든다.
형들과 친구, 그리고 네 남자의 길동무와 말동무가 되어 준 두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가는 강물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연을 계기로 다시 살아나는 인연이라 했다. 오늘 동문들과 젊고 밝은 처자들과 함께 걸은 지리산 길에서의 추억은 오랫 동안 살아서 여러 이야기들을 실어나를 게다.
첫댓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새 기억이 아사무사한건 역시 공부를 하지 않는 탓인가? 그래서 대장의 글은 계속되야 한다에 한표 ㅋㅋㅋ 아무리 험난하고 땀 범벅인 산행이었으도 이런 글을 보면 누구라도 길을 나설 수 밖에 없지. 그래서 그 두친구 같은 분들이 무모하게(?) 도전하는 거고 ㅎㅎ 이번주는 추석이니 돌아댕기지 말고 집에 꼭 붙어있으슈 ㅋㅋㅋ ^^
어제는 몸이 무겁더니 오늘은 풀리네요.
이 또한 산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추석 명절 푹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