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말을 잃고 말을 얻다
조재형 수필집을 읽고
- 글/ 강병길 시인
질서(秩序)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차례 질과 차례 서의 겹말이다.사회에 필요한 올바른 차례와 그에 대한 규칙으로 풀이하였다.두 번이나 강조한 차례를 찾아보니,⓵둘 이상의 것이 앞뒤로 질서 있게 벌이어 있는 서로의 관계,또는 그 순서.⓶일이 서로 앞뒤 관계를 가지고 일어날 때 어떤 일이 어떤 사람 몫으로 일어날 상황으로 풀어 놓았다.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근본원칙이며 기본을 다룬 단어다.이 말은 암묵적 체득과 교육이 더해져 부끄러움을 알게 하며 양심을 기른다.대부분 사람들의 관계는 질서에 속해있다.물러서기도 하고 양보 받기도 하며 순서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질서가 어긋나는 경우 문제는 생긴다.경우(사리나 도리)를 몰라서 어기는 경우와 알면서 어기는 경우로 나누어 보면 후자의 사태가 크다.사람들은 그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법의 언어를 사용 한다.법은 예방의 기능도 있지만 징벌의 기능이 표면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그리하여 법의 언어는 대개 사후처리용이거나 사건의 접점에 쓰이는 언어들이다.법의 언어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여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점을 내포한 계량 가능한 언어로 구성하려 하지만 줏대의 평정을 이루기엔 적잖은 공력이 든다.간혹 법의 언어가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거나 자본에 휩쓸리면 사건의 본질이 진실과 멀어지는 오용의 결과도 낳는다.차례의 예가 무너지는 것이다.무질서다.
수필집‘말을 잃고 말을 얻다’의 표지를 보며 떠오른 단어가 질서다.무질서의 대책으로 만든 법의 언어에 대한 작가의 비감과 그 언어들을 버리고 대안으로 택한 문학언어를‘얻었다’고 표현한 제목이다.아마도 마음속에는 잃다 보다 버렸다가 꿈틀거렸겠지만 작가의 성품이 낳은 질서있는 순화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필자는 단어를 대할 때 능선배치법을 사용한다.산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단어를 어느 위치쯤에 두면 어울릴까 생각해보는 식이다.편의상 계량산으로 부르겠다.
본문의 앞부분을 어머니로 연다.어머니라는 단어는 산의 정상에 위치할 수 있는 단어다.그 어머니들의 통칭을 마리아라 불러도 무방하다.어머니는 그냥 그런 분이다.어머니는 법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의 단어가 아니다.법과 문학에서 다루는 어머니는 같은 의미이며 확고한 계량이 가능한 말이다.이렇게 조정 자체가 필요치 않은 관계의 단어는 계량산의 정상에 둔다.산의 정점에 속할 만 한 단어는 거룩한 언어일 확률이 높다.예를 들면 태양,공기,아버지 등과 같이9부 능선 이상쯤 배치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이런 방법으로 단어를 생각하면 우러러 보게 되는 말들이다.그 중에 어머니는 더 높은 곳에 위치시키고 싶다.시원 자체로 보면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에는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이다.무죄다.그리하여 책의 전면부에 배치되어 가사의 서사를 열어 보인다.변호의 변으로 어머니는 매우 호소력 짙은 단어다.다분히 의도한 배치다.
능선배치법으로 비교하여 몇몇 단어의 계량치를 가늠해 보자면,평화,자유,평등,공정,공평,정의,등 이런 단어를 필자는 계량산의5.1부 능선쯤 배치하고 싶다.민주주의 시스템의 한계를 그 정도로 설정하고 싶은 생각이다.그리고 행복,자비,사랑,박애,희생,이런 류의 단어는8부 능선쯤,국경,외교,과오,오류,비참,원망,비굴 등의 단어는2부 능선쯤 배치한다,그리고 전쟁,살인,폭력,핵무기,착취,등 계량조차 하기 싫은 단어들은 바닥에 둔다.이런 식으로 단어의 계량산을 쌓고 보면 모양 자체도 산의 형태를 띈다.아래쪽에 몰려있는 단어들이 많다.그곳에 법원의 문지방이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염두에 두고 목차를 읽어 본다.시효,공범,묵비권,내사 중지,현행범,살인,무기,흉기,범인,신분세탁,거짓말,사기꾼,전범,익명,유책,항소,복수,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지 말아야할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바닥을 친 단어들이다.물론 본문의 내용은 사뭇 휴머니즘이 바탕이지만 무시무시한 단어들의 소제목들은 위화감과 흥미를 동시에 끌어낸다.이러한 관계들의 얽힘이 일어난 단어들을 정돈하는 직업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하겠다.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수사관이라고 부른다.수사관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적용해야만 하는 말들이고,평범한 사람들은 모르고 살아도 불편하지 않은 말들이다.작가는 둘 사이의 간극을 잘 알고 있는 드문 경우의 시인이자 수필가다.
사물의 명사와 같이 명료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제외한 언어들은 대부분 관계맺음에 속해 있으며,계량이 모호한 단어들은 사람마다 해석의 편차를 지닐 수밖에 없다.입장의 차이 때문이며 법과 문학의 거리가 괴리로 다가오기도 하는 이유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법과 문학은 가깝지도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다.아니 때로는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본문에 밝힌 내용이다.언어가 법의 기능으로 사용되느냐 문학의 기능으로 사용되느냐의 쓰임에 따라 같은 단어라도 상당한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증언이다.그 거리감의 원인으로 작가는 사유와 무사유를 든다.질서의 이치를 깨닫는 사고를 사유라 해도 좋겠다.바른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바라보려는 사유의 길은 구도자의 길과 다르지 않겠다.그 반대의 경우를 무사유로 본다면 법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된다.
그러면 법의 언어 대신 문학의 언어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가능할까?다소 억지스럽지만,모든 사람들이 계량산8부 능선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유의 경지에 오른다면 가능하다. 8부 능선 이하의 단어가 필요치 않으면 가능하다.부제‘오늘을 사는 어제의 당신에게’를 차용하여,어제의 당신이 사용했던 단어가 아래로 아래로 굴러 내려갔던 말들이었다면,오늘을 사는 당신은 계량산 정상 부근의 말들만 쓰도록 한다면 또한 가능하다.사유는 마음먹기 달렸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단어를 보자!이 단어는 계량산의 어느 능선쯤 배열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계량산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말이다.선과 악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마음의 등고선은 등산과 하산을 부지불식간에 이룰 수 있다.변심이라고 부른다.본문“문전박대 당한 그 분”에 기술한 내용을 보면 허름한 행색의 노인을 대하는 작가의 심경 변화에 대한 고해가 들어있다.마음의 변화에 따라 법의 언어로 삶을 진행시킬 수도 있고,불쑥 찾아온 신을 알아챌 수 있는 삶으로 진행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바닥을 칠 수도 있고 높은 곳에서 시원스레 내려다 볼 수도 있는 것이다.작가는 후자의 길을 알아차렸으며 맑은 공기를 마실 자격을 스스로에게 주기로 하였다.마음을 잘 쓴 것이다.사유의 힘이다.이와 같이 사유의 변화로부터 발현한 마음 씀에 대한 일화가 수필집 전체를 이루며 내용을 풍요롭게 만든다.문학의 효용이 빛나는 이유이며 법의 말을 버린 이유다.작가의 마음가짐에 질서를 지키려 노력한 흔적이 수필집‘말을 잃고 말을 얻다’의 정수(精髓)다.
강병길 프로필
경기 이천, 2011 시집 (도배 일기) 2021 (소리가 다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