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눈 보기가 어려워지는 세상이 된 듯하다. 겨울 가뭄이 지속되어 그런지 흙길을 걷다 보면 트레킹화나 바지단에 흙먼지가 뽀얗게 쌓인다. 걸음을 끝낸 후 털어보면 풀풀 날릴 정도가 된다. 일기를 예보를 들여다보다 눈 소식을 접하면서 내심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데레사 총무님과 상의 끝에 2022년 첫걸음 여행은 남한산성으로 가는 것으로 의기투합을 한 후 수요일 10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놓고 일정을 잡기 시작하였다. 차량 동선을 중심으로 잡아 놓았던 계획은 당일 13시경부터 19시까지 적설량 1-5cm 정도의 예보가 있어 차량 동선 계획을 포기하고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다시 정하였다. 8호선 산성 2번 출구 남단 전주 약국 앞에서 10시 30분에 만난 후 버스를 이용하여 남한산성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동안 복정역 다음이 산성역 수순이 바뀌어 어리둥절하며 잠시 지하철에서 지상철로 바뀌는 지점부터 차창밖을 보니 제법 눈송이가 큰 함박눈이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다. 기상 관찰자가 기상도를 잘못 해독하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시야를 가릴정도의 눈 발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거침없이 클릭하니 익숙한 이름이 떴다. 빠르게 파란색의 수신 전화기 모양을 다시 클릭하니 산성역이 맞나요?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남한산성 역이 아닌가요? 하며 단정적으로 생각하며 성급하게 질문을 던져 왔다. 대부분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지하철 이용객은 산성역이 훨씬 편하다. 2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200m 이동하면 남한산성을 종점으로 삼고 운행하는 버스 번호가 각각 다른 3대가 각각 운행하는 버스정류장이 있어 환승하기 편한 것이다.
주먹을 들어 부딪치며 인사를 한 후 정류장 작은 공간에 몸을 세우고 눈을 피하며 운행 위치를 알려 주는 사인보드를 응시하고 서 있었다 처마가 짧다 보니 눈이 들이쳐 모자와 어깨와 배낭 위로 수북하게 눈이 쌓였다. 눈, 비를 또한 열기와 한기를 피하기 위하 방편의 시설물인데 그러한 기능은 무색하다. 보여주기 위한 시설물이란 생각이 들 적이 많은 시설물이다. 10여 대의 차량정보가 이 정류장에 접근하는 버스 접근시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유독 남한산 성행 버스들만 정보가 없다고 계속 떴다.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올라야 하는 곳이라 폭우나 폭설이 있는 날은 자주 결행되는 곳이라 의심하면서도 아직 결행할 정도의 적설의 모습은 안 보여 정상적으로 운행한다는 판단을 갖고 기다렸지만 도착한 버스에 오르려 하자 기사님이 단박에 거절하며 남한산 성해 운행은 오늘 안 한다고 말하곤 달아나 버렸다.
날씨 탓으로 남한산성 걸음 여행도 자동으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지금 혼란을 수습하고 있었다. 다시 계획을 완성한 후 앞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한 번의 환승을 선택한 후 5호선 종점역인 검단산 역에 도착하였다. 눈의 기세는 더욱더 커져 있었다. 신발 밑에서 뽀드 둑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리고 눈을 밟는 느낌도 세련되어 가고 있었다. 겨울 같은 계절을 오랜만에 경험하며 눈 쌓인 인도를 걸어 횡단보도를 건너 오늘 같은 날 날궂이에 좋은 청요리 짬뽕 집을 찾아갔다. 얼큰한 짬뽕과 굴 짬뽕을 섞어 시키고 곁들여 탕수육 소 자를 시켜 놓고 맑고 따듯한 찻물을 홀짝 마시며 주문 음식을 기다리다 먹은 후 다시 밖으로 나와 수변공원으로 접근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눈빛을 닮은 백로 한 마리가 한가롭게 시냇물을 거닐며 먹잇감을 잡으려다 인기척에 놀라 두미 강변으로 훌쩍 달아나 버렸다. 성큼 앞서 가 등을 돌려 바라보니 에스키모 여인을 닮은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가오면 더 멀리 달아나는 방법을 선택하여 반복적으로...
선택하며 원근법을 제대로 즐기곤 하였다.
다가서면
다시 멀어지려 하다
입춘의 기를 모으는 잡초를 발견하게 되었다. 빼앗긴 들에 다시 봄이 올 것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부하듯 실의 오르라기처럼 생긴 잡초에는 봄기운이 감돌았다. 생명의 빛을 보여주려는 초목들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흙속에 감춰진 생명의 근원인 뿌리는 잠시도 생명의 힘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가을이 오면 지상에서 보여주던 가을의 아름다운 여러 행색들은 낙엽에 묶어 전부 버린 후 잔여분의 양분은 뿌리에 숨어 그곳에서 다시 새 생명을 키운 후 봄과 더불어 새싹이나 꽃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는 늘 이와 같이 거룩하고 복된 과정을 거친다. 생명에는 귀천이 있을 수도 없고 차별을 두어서도 안된다. 오로지 생명은 나름대로 귀한 가치를 지닌 채 세상을 터전으로 삼고 어느 날 홀연하게 태어나 주어진 삶의 기간만큼만 더불어 살다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간다. 한 점으로 왔으니 다시 한 점으로 돌아가는 원칙을 지킨다.
강한 생명력을 보는 듯하여 풀의 존재성에 희열을 느꼈다. 세상을 품고 사는 생명들의 빛은 여러가지지만 생명의 빛이 품고 있는 가치는 참 숭고하다. 바탕이 순결하면 딛고 사는 것들도 순결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그래서 그럴까? 바탕색이라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뤄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자연적으로 취합되는 보편적인 결과물이다.
다가서자 주제와 부제의 역할을이 분명하게 다가 왔다. 삼각구도를 품고 있는 단순한 여백이 울림으로 다가 왔다. 그 공간을 채우고 난분하는 눈송이들의 자유로움은 정제된 삶과 비교되었다.
온 세상은 침묵 속에서 잿빛으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신분으로 변신해 가며 설원을 즐기며 걸었다.
휴식 점에 도착하면 함께 행동식을 나누며 겨울 풍경을 탐익하고 있었다.
장의자에 내려 앉은 눈 , 스틱으로 밀어낸 후 다시 휴지를 꺼낸 말끔하게 청소한 후 앉아 쉬었다.
원앙들이 자주 머물던 못이 얼어버리면 원앙과 그 밖의 철새들은 미사리 모래톱 주변을 타고 흐르는 물가로 이동한다. 세상이 험하다 보니 조류 인플루엔자가 염려되어 마음껏 조류에게 다가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과 자연은 일심동체였는데 문명이란 허울 아래 저질러 놓은 자연 파괴 원죄는 각종 몹쓸 병으로 되돌아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생활습관을 고 치치 않는 한 이러한 일을 더욱더 악화되고 확대되어 갈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 양근도 기운을 숨기고 겨울을 닮아 있었다. 겨울은 충만의 시간이 아니라 여백의 시간이다. 여백은 늘 사유의 그릇이 되어 진리를 기다리고 있다. 진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제공하는 최상위의 념이다. 자유도 그렇지만 평화도 진리 안에 수반된 올바른 철학의 소산이다. 마음공부를 통하여 끝없는 노력과 실천하는 양심의 소신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의로운 진리가 아닌가 한다. 병든 사회는 이러한 것을 잊은 채 구별할지도 모르고 분별력 조차도 잊힌 사회가 된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온갖 괘변으로 합리학 시키는 행태는 바로 위선이다.
수변 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 서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 전이 되어 왔다.
가을의 빛을 놓지 않고 겨울 내내 가을빛을 붙들고 있는 식물은 억새 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 억새밭 이름을 두미 평전이라 부르곤 한다. 억새풀 사이로 걸을 때 바람이 스치며 내는 사그락 소리가 듣기 좋고 쓰러졌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억새의 모습에서 희망의 꿈을 꾸기도 한다. 억새의 흙갈색 빛이 마음을 참 편안하게 이끌어 준다.
엄동에서도 가을빛을 잃지 않고 가을의 귀품을 지닌채 서 있던 억새가 자신의 본모습을 버리는 시기는 바로 새로운 생명의 새 물결을 이루는 봄이다. 소생은 세상을 새 것으로 바꿔 놓는다.
우리가 즐겨 생각하는 휴(休), 달콤한 의미의 휴식을 뜻하는데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서있는 것이 바로 휴식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자매님 옆에 나무를 심어드렸더니 외로움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메라 셧터 누름단추를 꾹 눌러 주었다.
한 사람 행색보다 두 사람의 행색이 안정적이다.
봄을 생각하며 겨울 길로 나서 보았다.
저 멀리 지평 아래 어딘가에 봄은 숨어 있을 것이다.
눈은 평등한 겨울을 그려내는 예술의 원천이다.
흰빛 침묵 ! 그 자체만으로도 겨울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받게 된다.
그래서 겨울이 떠난 자리에 새생명이 떠오르면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봄에 맞춰 꾸는 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봄은 일 년을 시작하는 출발 선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만의 소중한 꿈을 봄에 꾸며 계획하고 실천하며 번민과 고뇌를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낼 것이다. 그러나 간혹 수정의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탐하기보다는 노력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진실한 결정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결국 정의로움을 벗어나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명확함이 분명하게 익혀 왔었다.
지금 보고 느끼는 아름다운 설경, 그 존재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빛이 발현되면 금세 사라질 것이다. 빛을 제외한 것들은 변화의 과정을 거치다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숙명적으로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빛 아래에 내 세워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존치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진실 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선현들께서는 진실만이 모든 것을 지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거짓에서 새싹이 움틀 수 있다는 것 또한 위선이다. 진실의 조건에서만 새 싹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더욱더 거세진 눈은 거침없이 허공을 유영하며 자신의 계절인 겨울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만 걸음 여행을 접은 후 한가로운 공간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각자의 길로 나섰다. 고요해진 마음이 과연 얼마나 갈 것인지? 그것은 각자 마음 소견에 따라 다를 것이다. 평화~~ 마음 관리에 따라 구현되고 지속되고 단절되기도 할 것이다. 염원이 따르지 않으면 구원 또한 없다. 멈춰 선 후 열리는 문 사이를 빠져 나온 후 사선으로 이어진 이동식 계단에 발을 올리자 저절로 지상으로 동선이 이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