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 자료)
나는 마흔 여섯 살의 노처녀이다. 여태 결혼을 못한 근본적인 문제는 물론 본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대기업의 하청업체 사장으로서 부를 이룬 분이고 어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름다운 미인이시다. 나 역시 부잣집 딸인데다 어머니의 수려한 외모를 빼닮았으며 명문대학교 석사학위까지 받아서 뚜 마담들에겐 물망에 오르는 신부 감이었다. 내가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던 시절엔 우리가족 모두 눈높이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웬만한 혼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전문직이 아닌 평범한 직업을 가진 청년을 소개하면 어디 감히 그런 사람에게 견주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한번은 법관을 소개 받고 사귀었는데 술을 마시고 밤중에 전화 한다고 아버지께서 극구 반대를 해서 퇴자를 놓아버렸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청년은 부장판사로 승진해서 부모님과 나는 두고두고 후회 하고 있다. 하나 사십대 중반이 넘도록 시집을 못간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로 인해 속을 끓이며 살고 계신다. 어머니가 할머니 댁에 가면 유난히 깔끔하게 굴어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이고 큰어머니, 큰아버지, 삼촌, 숙모, 고모 등 모두가 불편해 하셨다. 밭을 매는 할머니의 손은 아주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잡은 문고리가 더럽다고 따라다니며 행주로 닦고 마루와 방도 몇 번이고 닦아야만 겨우 앉는 성미였다. 밥숟가락도 가지고 다녔으며 재래식 화장실에선 아예 용변을 못 보는 신경 과민증 환자이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장례식 때도 귀신이 붙는다고 참석하지 않아 친척들 간에 말이 많았다. 부부사이에 금이 많이 생겼다느니 곧 이혼할거라느니 마을 사람들의 입질에 수없이 오르내리곤 했다. 그래도 나는 문제없는 가정이 어디 있남. 한 평생 살려면 평탄한 길만 갈 수 있으랴 스스로 위로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총각시절엔 대기업에 근무했고 어머니와는 중매로 만나셨다. 어머니의 반듯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몸매에 반해서 망설임 없이 결혼을 승낙하셨다. 신혼 몇 년간 깨가 쏟아지게 살며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의 부하직원이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사모님이 매달 저희 집사람에게 돈을 빌린답니다.” 그건 아버지에겐 황당하고 아주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고액 연봉을 고스란히 맡겨주고 살뜰히 살겠거니 믿고 있었는데 뜬금없는 소리에 적잖이 놀라셨다 한다. 지금쯤 예금통장이 두둑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사대가 갖고 두뇌가 명석했다. 남들처럼 부를 이루고 싶고 동생들을 배움의 전당으로 보내고 싶어 자신을 희생 시킨 분이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낮엔 공장에 다니고 밤엔 검정고시 학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그러면서 전국 기능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집념이 강한 분이다. 큰 포부를 품었기에 눈빛은 항상 반짝거렸고 아주 창의적인 분이셨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으로 주목 받아 국가에서 굴지의 기업체에 추천을 해주어 시험 없이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당당하게 입사하려고 기어코 공개채용에서 시험을 치르셨는데 역시 우수한 성적을 거두셨다. 유명대학교 출신들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발탁 되셨다.
평생을 움막 같은 집에서 칠 남매를 기르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당신의 부모님께 기와집을 지어드리고 새끼 칠 암소를 사드렸으며 용돈을 푹신하게 드렸던 효성 넘치는 분이다. 정신이 똑 바르고 희생적이며 의로운 아버지를 나는 늘 존경하며 자랐다. 서울에 계신 큰아버지가 자식들 데리고 셋방을 전전하고 계신 게 마음 아파서 엄마 모르게 건물을 사드리기도 하셨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이 어머니 귀에 들어갈까 해서 지금까지도 가족들에게 입조심을 시키신다. 아버지라고 욕심이 없겠는가. 어머니의 사치하는 병에 돈을 퍼 붓느니 차라리 형제에게 도와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신 게다.
내가 알기로 알뜰히 살아보자고 을러도 보고 달래도 봤으나 어머니의 고질적인 낭비벽은 고쳐지질 않았다. 매달 새로운 의상과 구두를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고 사흘돌이 고급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해야 했다. 과일가게에선 제일 씨알 굵은 걸 싸고 생선가게에서도 선도가 싱싱하고 큼지막한 갈치와 돔을 싸 먹어야 한에 찼다. 씀씀이가 헤프니 상인에겐 호구였다. 어머니가 상가에 나타나면 인기 독점이었다. 외모가 수려하고 멋쟁이 의상을 입은 손 큰 사모님이 나타나니 오죽 반가울까. 어머니는 상인에게 값을 깎으면 인격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외가로 어머니를 쫓아 보내기도 했지만 사흘이 못되어 외할머니를 앞세우고 돌아왔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였지만 아버지는 고민을 많이 하셨다. 자식이 두 명이나 달린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고 데리고 살자니 살림을 갉아 먹는 애물단지였다. 그때부터 경제권을 아버지가 쥐기로 했다. 시장비와 공과금, 아이들 병원비 등등을 조목조목 적어서 꼭 필요한 경비만 지급했다. 펑펑 기분 내키는 대로 살던 어머니가 남편의 관리 하에 살자니 오죽이나 갑갑했을까. 그때부터 시들시들 우울증이 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국산 전자제품의 성능이 외제보다 떨어지던 시절에 일본에 갈 때마다 카메라와 녹음기와 오디오, 그리고 전기밥솥 등등 고가의 제품들을 어머니에게 사다 주셨다. 그건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해소 시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어느 청명한 가을날에 회사직원들의 가족체육대회가 있었다. 사택을 비우고 온종일 운동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더니 집안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집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고가품들이 놓였던 자리가 휑하게 비어 있었다. 도둑이 든 것일까? 믿기지 않아 허둥지둥 집안 곳곳을 뒤져봐도 어머니가 아끼던 모든 전자제품들이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외가에서 자라지 않았다. 이모와 외삼촌은 외가에서 자랐고 어머니만 외외가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외가에서 자랐던 게다. 어머니가 자란 부유한 외외가엔 부엌일 하는 가정부와 일꾼 몇 명뿐 가족이라곤 없었다. 저택에 사는 연세 많은 외외할머니가 어머니를 공주처럼 키우셨다. 일하는 분들이 등하교를 데리고 다니면서 시켰고 어머니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주셨다. 안 된다는 건 어머니에겐 불문율이었다. 어머니는 성 안의 공주처럼 자라서인지 정신력이 나약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웬만한 충격을 받아도 참아낼 수 있는데 어머니는 그러질 못했다. 제어 장치가 고장 난 물탱크처럼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며칠 뒤 말문을 닫는 실어증이 온 것이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밥도 하지 않고 우리 남매를 돌보는 일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무슨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 남매도 고생이었지만 아버지의 고생도 많았다. 회사에선 중책을 맡아서 바쁘신데 집에 돌아오면 밥하랴 빨래하랴 청소하랴 우리들 숙제 돌보랴 쉴 틈이 없었다. 우리 두 명을 목욕 시키고 어머니의 약 챙까지 챙겨 먹여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반찬이 없어서 날마다 김을 먹었기에 지금도 나는 바싹한 김구이를 무척 좋아한다.
나중에는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과 함께 아버지 회사식당으로 가서 저녁밥을 먹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멍하게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불쌍하면서 무서웠다.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버지 침대에서 함께 자곤 했는데 세 명이 한 침대에 자는 게 불편해서 동생과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아버지 곁을 차지하곤 했다.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더디어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가 올라 오셨다. 우리를 돌보고 가사 일을 하셨는데 그때부터 아버지는 퇴근 후 매일 어머니를 데리고 D시에 있는 큰 병원을 다니셨다. 정신질환은 쉽게 낫는 게 아니어서 온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쳐드렸다. 고모, 외할머니, 이모 등이 교대로 우리 집에 와서 가사 일을 돌봐 주셔야했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자 할머니는 무속 인을 불러 굿을 했는데 집에 있는 모든 것에 귀신이 붙었다며 자질구레한 것을 죄다 태우고 심지어 아버지가 받은 대통령상장까지 불태워 버렸다.
아버지의 정성으로 십여 년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정신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계시되 부재중이나 마찬가지인 생활은 긴 터널 속이었다. 모처럼 밝은 어머니를 되찾은 우리 가족들은 물 만난 생선처럼 퍼덕거렸지만 한편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어머니의 병이 재발할까봐 살얼음판을 걷듯 지내야 했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가 요구하는 것은 죄다 들어주셨다. 명품구두, 명품가방, 명품 옷, 수입 차 등 무엇이든 사주셨다. 70평 아파트에 일하는 아줌마 두고 호텔수영장 티켓 끊어서 몸 관리하게 해주셨다. 광역시 여성단체 사무국장을 맡아서 청와대까지 들락거리며 돈을 뿌리고 다녔다. 우리 집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걸려있는 사진이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방문객이 오면 대단한 여성경제인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어머니가 한 달 쓰는 생활비가 자그마치 기천 만원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모으려고 애를 썼지만 어머니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건강이 제일이라는 걸 깨달으셨다. 그래서 이제 돈을 모으는 꿈은 포기 하신 듯하다. 그냥 회사를 경영해서 어머니의 욕구를 채워주는 게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버지가 참으로 안쓰럽고 불쌍하다.
아버지는 솔직히 어머니가 싫어도 우리 두 명 때문에 이혼을 못 하시는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한번뿐인 인생인데 저토록 사치와 낭비가 심한 아내를 위해 희생하는 게 합당한가 싶어서다. 우리 두 남매가 사십이 훨씬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는 것도 부모님의 결혼생활을 보며 느끼는 점이 많아서이다. 서로가 행복하려고 결혼을 하는데 상대의 앞날을 망치고 가슴에 쐐기를 박는 배우자가 될까봐 염려스러워서 미루는 점도 없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말부부이다. 아버지는 멀리 K시에서 회사를 경영하신다. 몇 십 년간 헤어져 살면서도 주말이면 남편의 의무를 하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 오신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시는 건 싫어하신다. 어머니를 K시로 데려가서 따뜻한 밥 얻어 드시며 오순도순 지내면 좋을 텐데 극구 반대하신다. 가끔 어머니가 K시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찾아가면 이틀 밤만 자면 본인이 직접 데리고 집으로 내려온다. 식사쯤은 문제가 아니라는 게다. 토요일 오전에 내려오셔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으신다. 아파트에서 40km쯤 떨어진 시골집으로 가서 돌아가신 부모님 체취 맡고 형제들과 살 부비며 지내던 방에서 그리움을 마셔야 쌓인 피로가 풀리신단다. 가끔은 첫사랑과 거닐던 강변길을 거닐면서 옛 생각에 잠기기도 하신다고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둑해지면 집으로 돌아가신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을 받는 게 아니라 호텔식당으로 함께 외식하러 가는 것이다. 명목은 어머니가 밥을 산다는데 그 돈 역시 아버지의 돈이다.
아버지는 지지리도 처복이 없는 분이다. 친척 고모는 “ 너희 아버지가 저렇게 사는 건 모두 자업자득이다. 예쁜 여자 좋아하더니 너의 엄마 같은 여자 만났다.”고 핀잔을 주곤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 싫다. 왜 우리 엄마는 가정에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애물단지일까? 범절 반듯하고 본바있는 당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면 좋은 본만 닮아도 많을 텐데 왜 사치하고 낭비하는 습관이 생겼을까?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아침 열시쯤이면 시작된다. 해변에 우뚝 솟은 호텔 수영장으로 향한다. 명목은 몸 관리한다는 건데 실은 부잣집 사모님들과 어울려서 명품 정보 주고받는 게 좋아서이다. 다이어트 한다고 아침을 허술하게 먹은 탓에 점심은 거하게 먹는다. 암소갈비 집이나 일식집으로 가서 식욕을 채우고 나면 일행들이 함께 백화점으로 향한다. 명품관에서 신상품 점검하고 마음에 들면 가격에 구애 받지 않고 현찰로 사버린다. 카드 끊으면 점원들에게 환대를 못 받기에 고개를 곧추세우고 빳빳한 신권으로 계산을 한다. 점원들의 칙사 대접을 뒤로하고 vip커피숍으로 향한다. 차 한 잔씩 시켜놓고 방금 쇼핑한 옷과 보석을 잘 샀느니 못 샀느니 옴니암니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혹은 어느 집 가정사를 놓고 입심 좋게 씹어대다가 해가 설핏할 무렵이면 차를 몰고 설설 집으로 향한다.
70평 아파트에 식구는 단 한 명 어머니뿐이다. 노처녀인 나는 서울에서 작은 자영업을 하고 아버지와 노총각인 동생은 남도에서 회사를 경영하신다. 어머니가 집 밥 먹는 건 아침 식사 한 끼이다. 밥이 아니고 견과류에 남국의 과일 망고 한 개와 떡 한 조각이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같이 편한 여자도 흔하지 않을 게다. 남편을 챙기나 자식을 챙기나, 심지어 아파트 바로 앞 요양병원에 외할머니가 장기 입원해 계셔도 일 년에 서너 번 찾아뵙는 게 고작이다. 노인들이 계시는 병원에 가면 병균 옮는다고 철저히 기피하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초상 칠 때는 물론이고 오죽 귀신을 무서워하면 젊은 외삼촌이 돌아가셔도 귀신 붙는다고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는 승강기도 혼자서는 못 탄다. 혼자 탔다가 승강기 줄이 끊어지면 지하에 홀로 떨어져 죽을까 봐서다. 승강기 앞에서 기다려 누구든지 한 사람이 타야만 발을 들여 놓는데 타고 올라가다가 그 사람이 내리면 함께 내려버린다. 무서워서 혼자 갇혀 있질 못한다.
요즘은 아버지 회사가 경영난에 허덕여 경제가 원만하지 못하다. 해서 어머니 생활비를 많이 줄였다고 한다. 그래도 천만 원으론 모자란단다. 엊그제는 어머니가 돈이 부족해서 신경을 썼더니 혈압이 190으로 올랐다며 밤에 난리가 났다한다. 응급실에 가야하니 빨리 오라고 천리 밖에 계시는 아버지를 불러 들였다. 장가 잘 못 든 죄로 평생을 마누라 뒷바라지 하시는 아버지가 가여우시다. 칠십 중반의 노인이 오밤중에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려오시다니.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께 평생 애물단지이고 자식들인 우리에게도 짐 덩어리다.
나는 모전여전이 될까봐서 결혼을 기피한다. 나의 내면에는 무서운 가족력이 도사리고 있기에.
*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