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헌李叔獻에게 답함 갑자년(1564, 명종19)
지난번에 손자 안도安道가 서울서 내려왔을 때 문안 편지를 받고, 또 잘못 성 징군成徵君의 지명誌銘을 쓰는 일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놀랍고 송구한 나머지, 보내온 행장行狀을 곧 돌려보내고 사양을 청하는 뜻을 갖추어 아뢰려 하였으나, 마땅한 인편을 만나지 못하여 회답이 지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뜻밖에 그 효사孝嗣 (아들 지칭)의 청을 받아 천리에 사람을 보내고, 또 제군諸君들의 간절한 글까지 내려보내 주어 이처럼 간절하게 억지로 맡기시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두렵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무릇 이분斯人의 독실한 행行과 높은 의義에 대해서 그것을 기록해 전할 책임을 어찌 가벼이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그 효사가 잘못된 의향이 있더라도, 제군들은 이 졸렬한 늙은이가 형편없는 것을 아는 터이니, 부탁할 수 없다는 뜻으로 분명히 깨우쳐 주어 효사의 정성을 그 글을 맡길 수 없는 사람에게 헛되게 하지 말고, 당세當世의 큰 문장의 손을 얻어 그 망극罔極한 정성을 풀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가만히 보내 주신 편지와 또 그 효사의 뜻을 생각해 보면, 내 글을 얻으려는 것은 내가 산야山野에 자취를 던졌기 때문에 숨어 사는 군자의 그 심정을 알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남의 마음의 자취를 알아서 선언善言과 덕행德行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그 글 짓는 사람의 풍의風義와 문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그가 조정이나 시골에 사는 것을 가릴 것이겠습니까.
만일 기어코 그것을 조정 가운데에서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보내온 행장行狀의 글이 넉넉히 잠긴 덕을 밝히고 그윽한 빛을 드러내었으니, 다만 거기에 다시 약간 손질하여 묘지墓誌의 체제로 만들고 그 밑에 명銘을 붙이는 것은, 아마 그대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로써 남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이로서 그것을 하기에 어려운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째는 문장이 졸렬한 것이요, 둘째는 움직이면 곧 비방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제 분수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정군鄭君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그것은 여러 친구들이 못 견디게 부탁하였기 때문에 정군과의 애오라지 옛 정을 기술한 것뿐으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간절히 바랐지마는, 이제는 제군이 다 알게 되었으니, 비밀을 지킨다는 것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하물며 청송聽松은 온 나라가 우러르므로 자취를 감춘 정군과는 달라서 한 번 찬술撰述을 하면 곧 사방에 퍼질 것이니, 잘못을 지적하여 헐뜯고 논란하는 사이에서 그의 고풍高風에 누累를 끼치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비방을 들을 염려가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히 승낙하지 않는 것이니 몹시 부끄럽습니다.
보내온 행장行狀은 즉시 되돌려 보내야 하겠지마는, 먼저 온 행장과 차이가 나는 곳을 교정하고 싶은 까닭에 아직 보류하였다가, 초가을쯤 집의 아이가 일이 있어서 서울로 가는 편에 부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보내 준 붓과 먹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 효사孝嗣에게 이 뜻을 전해 주면 못내 다행일까 합니다.
끝으로 다만 자중하며 날로 진보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李叔獻 甲子
頃者。安道孫還自都下。得奉垂問。兼承謬囑成徵君誌銘事。非所敢當。驚悚之餘。卽欲奉回來狀。具由請辭。未遇的便。久稽報音。不意今者。致誤孝嗣之望。千里遣人。來下諸君勤懇之書。丁寧强委如此。益使人恐懼羞汗。無地容措容措。夫以斯人之篤行高義。紀傳之責。豈可輕託。假使其嗣誤有意嚮。在諸君熟諳老拙之無似。尤當明告以不堪屬之意。庶不至虛致孝懇於不可强之地。而早得援控於當世鉅手。以遂其罔極之誠也。竊觀來諭。兼想孝嗣之意。所以欲得謬述者。豈不以滉投迹山野。似若知隱君子心事之所在者故耶。夫知人心迹。而善言德行。以傳於後世。顧在其人風義與文辭如何耳。豈擇其迹於朝野間哉。若必欲不求於朝中。則來狀之文。自足以昭潛德而發幽光。只可就此稍更裁鍊。以成誌體。而綴銘其下。恐高明自可任之。不得以推諸人也。如滉所難者非一。文拙。一也。動輒得謗。二也。不當不揣分。三也。向者鄭君碣文。苦被數君煎迫。聊述故情而已。懇祝勿宣。今則諸君皆已知之。烏在其欲密耶。況聽松。一國之所仰。非如鄭君之晦迹。一有撰述。便播四方。指點訾議之間。玷累於高風者必多。不但賤末得謗之可虞而已。以此不敢承諾。愧死萬萬。來狀卽當回上。緣欲校定前來狀異同處。故姑留。初秋間。兒子以事當西入。其時附還呈納。筆墨則不敢冒受。其孝嗣前。爲致此意。不勝幸甚。餘惟勉珍日進。不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