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10 - 법륜 스님
10. 억울함을 당해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한 마음을 밝히게 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억울함을 당하여 거듭 거듭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자꾸만 밝히고자 하면 상대와 나를 잊지 못하고
상대와 나를 두게 되면 반드시 원한이 무성하게 자라느니라.
억울함을 받아들여 능히 참고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면 겸허하게 바뀌나니
억울한 일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할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十,
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십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생)
是故聖人設化 以屈抑為行門(시고성인설화, 이굴억위행문)
내가 안 했는데 했다고 하는 억울함을 당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해명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한때는 억울함을 밝히는 것이 세상의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짓을 밝히는 것과 자기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내 억울함이라는 것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나름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자 약간의 억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말을 하면 아무리 잘 전달을 했다 해도 내가 말한 것과 상대가 들은 것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자기가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억울하지요. 내용은 같은데 의미 해석이 다르거나 아예 말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면서 억울함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억울함을 자꾸 밝히려고 하면 상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엉뚱하게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또 억울해서 자기가 들은 것이 정당하다고 밝히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서로 원한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세요. 내가 억울한 것을 밝히는 것은 나한테는 좋지만 거꾸로 상대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어떤 일이 있을 때 아내가 억울하다고 너무 밝혀버리면 남편이 상처를 입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속속들이 너무 밝혀버리면 상대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나로 인해 상대가 나쁜 인간이 되어버리고 내가 해명한다고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격이 되므로 다시 억울한 마음을 가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모순의 관계를 해결하고 양쪽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면 밝히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문제가 공부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명을 쓰고 어디로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고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올 때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썼습니다. 억울한 사람 데려다 고문한 그 사람들이 각서를 써도 용서를 할까 말까한데 결과적으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각서를 썼습니다.
이것이 한 시대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서는 그 사람들대로 잘한다고 했던 거예요. 전쟁터에 가면 군인이 잘한다고 상대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억울함이 한이 되면 누구 손해입니까? 한이 맺히면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반대로 억울함을 통해 공부가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가 필요하면 법적으로 대응을 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10년, 20년 노력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는데 부당하다고 재판을 해서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대학 측에서 채용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채용 안 해준 것이 억울하다고 재판을 해서 또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이 때문에 재임용 자격이 안 되고 20년간 재판하느라 논문을 한 편도 못 써서 또 재임용이 안 됐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억울함을 밝히는 과정에서 내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을 하면 희생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이 해결 되든 해결되지 않든 괴롭지 않습니다. 억울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원망이 쌓이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기 때문에 내가 호랑이를 죽인다면 살생입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듯이 더 많은 사람을 물어 죽이려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잡았다면 보살행이 됩니다. 내가 살생의 과보를 감수하고 중생을 구제했기 때문입니다. 살생의 과보를 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르지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떤 일을 밝힐 때도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 복잡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딱 받아들이면 확 뚫려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장애들, 여러 역경들을 이겨내는 것은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계에 부딪치면서 이겨내는 힘이 있으면 앞으로 어떤 것이든 해낼 힘이 있지만 그냥 온실에서 자란 것처럼 아무 일이 없기만 바라면 그것은 오히려 인생 공부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진을 하는 동안에 이런 저런 일이 자꾸 나타나면 어차피 받아야 할 일들이 닥쳐온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받아야 할 과보라면 빨리 받는 것이 좋고 갚아야 할 빚이라면 빨리 갚는 것이 좋습니다. 미루어 놓았다가 나중에 갚아야 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어차피 받아야 할 인연 과보라면 일찍 받자.’ 이런 마음으로 임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출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법륜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