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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4절-9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역사는 전부가 구원역사입니다. 이 세상의 움직이고 자라가는 모든 역사는 구원역사라 그 말이요.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는 역사다.
하나님의 존재선택 이전에 사건선택이 있었는데 그 사건선택은 ‘이 좋은 곳을 누구랑 함께 누릴꼬’ 하는 그거. 나중에도 나오겠습니다만 그 다음에 이제 ‘아, 나와 같은’ 하고 ‘그런 자를 짓자’ 한 것이 존재선택이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으로 돌리면 사건이 교체되고 시대가 교체되고 하는 그 구원의 역사, 그 다음에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에게 입혀지는 구원역사도 그렇게 된단 말이요. 그러니까 사건을 동원시키는 그 분의 뜻이 우리 성도에게 구원을 입히는 역사라 그 말이요.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역사는 구원역사다.
그러면 우리 인간존재가 ‘세상에 살면서 구원목적으로 살아야지’ 하는 거기에 창조의 목적대로 갖는 거란 말이요. 그렇지요? 그런데 불신세상은 그런 목적을 전혀 모르잖아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목적은 모르지요. 그런데 불신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성경으로 밝혀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이 벌써 문서계시로 나온 지가 성문계시로 나온 지가 벌써 2천 여 년이 되는데 그 성경이 말하는 성도에게 입어지는 구원, 그런 면에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모르고 흐르고 있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구원을 말씀하신다는 분들이 좀 계시지만 그래도 그 머릿속에 진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 사상적으로 진하게 자기 삶의 주격으로 사상을 갖는 것이 그 말이요. ‘우리에게 입히시는 구원역사다 하는 그 면에 굉장히 강하게 느끼고 사는 기독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렇게 한 번 생각이 되어지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기본적으로 그 신앙사상을 가져야 하는 건데 그게 아주 희박합니다. 그게 없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단 말이요. 그런 믿음을 가지는 자가 너무나도 적다. 그런 면을 볼 때 오늘날 기독교 전반의 전체적인 면을 볼 때 기독교가 완전히 타락이 아닌가?
우리가 이제 잘 아는 바로 흔히 쓰는 구원이란 말은 물에 빠진 사람을 선행으로 건져올려야 만이 구원이라고 하는 그런 개념을 갖고 있지요. 일반적 개념인데 오늘날 그러한 개념을 그 사상을 기독교 안에서도 여실히 갖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 하는 거기에 생각을 잘 해요. 먼저 인간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이다. 그러니까 이거는 사전학적으로는 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의 선택적인 것이 선택적 구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독존재로 계시면서 그 행복한 기쁨을 타에게 주고 싶은 마음, 그게 이제 선인데 ‘이 세계를 이 좋은 곳을 나 혼자만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 행복. ‘다른 자에게도 누리게 하자. 참 이거 좋다. 다른 그 무엇에게도 이것을 주었으면’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이다 그 말이요. 용어를 붙인다면. 그걸 선택을 했다 그 말이요. ‘이 좋음을 누구랑 같이 누릴꼬’ 그 말이요. 그것이 속에서 발동이 됐다 그 말이요.
일반신학계에서 갖는 신학은 존재선택이 먼저 나오는데 거기에는 선택설이 있고 후택설이 나오지요? 그거는 존재선택입니다. ‘전택설, 후택설’ 하는 그것은 존재선택을 놓고 말하는 겁니다. 이제 말인즉 인간을 에덴에 영원히 살도록 했는데 그만 타락을 해버렸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에덴동산에서 장차 살게 하는 뜻으로 지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타락을 해가지고 이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 전부는 지옥으로 가게 됐다 그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애성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또 전부 다 천국으로 간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지공성이 또 절단 나버린다 그 말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다 가게 됐다고 그러면 하나님의 애성이 절단 나버리고, 전부 다 천국으로 올리는 것으로 된다면 하나님의 지공성이 절단 나버린다. 인간타락 전에 지옥과 천국을 갈 자를 여기에서 택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택 받은 자는 천국으로 가고 선택을 받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 거지요. 어떤 자는 택했고 어떤 자는 안 택했다 그 말이 되는 거지요. 이걸 그렇게 보니까 자동적으로 하후하박이 된단 말이요.
그 언젠가 얘기했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불공평이 되는데 예를 들면 열 명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와서 훌륭한 사람이 와가지고 다섯 명을 ‘너 너 너’ 뽑으면서 ‘너는 석방이다.’ 죄는 다 똑같고. 그러면 이제 다섯 명은 ‘우리는 왜 안 불러갑니까? 석방 안 시킵니까’ 그러니까 ‘아, 내 맘이지’ 그런단 말이요. ‘밖으로 끄집어 낸 것도, 석방 시킨 것도 내 맘이다. 그대로 두고 있는 것도 내 마음.’ 그런 성경구절을 들어서. 토기장이 성경구절을 끌고 나오지요? 그걸 끌고 와서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하지요?
그런데 몇 명은 석방시키고 몇 명은 놔뒀으니까 그게 유기라 그 말이지요. 버렸다. 나온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러지만 그 사건의 성질로 보아서 불공평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는 왜 끄집어내주고 누구는 왜 놔두느냐? 죄목은 다 똑같고 형은 다 똑같이 받는 건데. 나간 사람들이 석방시켜주는 사람과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건데.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내가 벌 받았으면 내 형대로 살지’ 지금 사건이 그렇게 돼 있지를 않단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식의 하나님이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후택설 전택설’ 하는 이게 우리에게 지금 안 맞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택설 후택설 꼭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화구원 사상에는 이게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드릴 것은 선택이란 용어가 지옥 갈 자와 천당 갈 자를 선택을 했다고 하는 그런 존재선택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무슨 선택? 무슨 선택을 말한다고 그랬어요? 사건선택.
하나님은 사고력을 가졌습니다. 인격자이십니다. 천국이 너무 좋기 때문에 선성과 당신의 그런 마음으로 예수 믿으니까 그렇게 좋다. ‘나 혼자만 좋을 수가 있겠느냐? 너도 좀 좋아봐라’ 하고 말이 건너가는 것이 전도지요. ‘진리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느냐? 나만 듣기 아깝다. 너도 좀 같이 듣자’ 그게 사랑의 마음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하는 이것이 일차적으로 당신이 기뻐하는 사건선택이다. ‘이렇게 하자’ 하는 것. ‘그 세계가 너무 좋으니까 이렇게 하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핑 하고 돌았단 말이요. 인간의 말로 표현하자면 순간적으로 이렇게 탁 잡히는 거. 지성성 지혜성은 ‘나처럼 느끼는 다른 존재를 짓자’ 그 말이요.
사건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사고력이 생김입니다. 그 사건선택이. 그러니까 디도서 1장에 보면 우리의 구원이 언제부터요? ‘영원 전’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로부터라 그 말이요. ‘영원 전’ 하는 그게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나온 사건선택이다. 그게 이제 이해갑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 전부터’ 하는 그 말이 뭘 말하려는 거지요? 사건선택이라고 하는 그 구원 그 말이요. 하나님의 존재적 영원이라는 그런 의미보다도.
첫째는 사건선택 후 그 다음에 존재선택이 나오는 겁니다. 존재선택은 누릴 자입니다. 존재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내정 수 14만 4천 명은 하나님의 상징 수. 액면 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존재선택에 있어서 한 사람만이 아니고 여러 사람. 이것이 구원 제 1 목적입니다. 여러 사람. 구원의 개념은 천국을 누리고 느끼고 활용하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 최종적 결과적 영원적 구원이다 그 말이요. 누림성에서 그렇고, 우리가 현세에서 그곳에서 누릴 수 있는 실력으로 자라는 것이 또 구원이다. 그게 선이고 구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최종적 결과적 영원적 구원의 그 누릴 수 있는 실력을 이곳에서 닦고 간다 그 말이요.
창조 이전에 그 구원을 입을 자는 이미 확정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또 이 궁극적 구원을 누리고 느끼게 하려면, 효력으로 누리고 느끼게 하려면 그 때만 하더라도 존재적으로 없으니까, 당신의 목적한 바대로 된 존재가 없으니까 만들어야 된다 그 말이지. 이제.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를 해야지’ 그렇게 되어 나온 것이 우리 인간이지요. 나다. 고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은 창조주는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처럼 누리고 느끼게 하려니 당신처럼 만들자고 한 것이지요. 창1:26-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다.
그러면 그 때 처음 지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본질적으로는 짓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원형이시고 인간은 모형적으로 지은 거지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2차적으로 이제 인간을 지으시는데 껍데기는 옛날의 껍데기라도 이제 알맹이는 하나님의 본질로 짓는 것. 그러니까 창세기의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짓자’ 한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어도 타락이 됐어도 하나님의 그 목적은 변질이 됐습니까, 그 목적대로 그대로 되는 겁니까?
어때요?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짓자’ 이래가지고 지었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지요? 그러니까 뭔가가 마음속에서 그게 실패가 된 것처럼 느껴지지요? 인간 보기에 실패된 것처럼 느껴지나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볼 때에 ‘당신이 모양과 형상대로 짓자’ 한 그것이 예수님으로 통해서 100% 착 이루어지면서 들어맞았습니까, 처음에 말씀하신 그 말씀은 딴 뜻입니까? 궁극적 의미가 없는 아담 하와가 죄 짓기 이전 그 때 그 당시에만 그 말씀이 효력이 된 겁니까? 타락 후로는 효력이 안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양과 형상대로 짓자’ 한 그것이 미래적 궁극적으로 그 말이 다 맞아들어 갑니까, 틀립니까? 에덴동산에서만 효력이 된 겁니까? 그 말이?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보면 인간 자기가 믿음이 있던 없던 어쨌든 범죄가 됐다고 그러자. 그랬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구원역사에는, 당신이 하시는 구원역사에는 하나도 어그러짐이 없이 모자람이 없이 당신의 계획대로 착착 다 진행이 돼요. 100% 다 맞아요. 참 어찌 그리 신비로운지 몰라. 당신의 구원계획에는 하나도 어그러짐이 없어. 그대로 그냥.
왜 인간만 유독 당신의 형상대로 지었느냐?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어떤 관계냐? 아버지라 부르면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이고, 신랑신부의 관계를 가졌다면 같은 사랑의 대상자로 돼야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신랑신부, 아내와 남편, 주님과 우리. 진리적인 사랑. 똑같이 통해야 돼요. 통하지 않으면 안 돼. 똑같은 사상으로 통하지 않으면 이건 진하지 못 해. 달라. 세계가 달라. 세계가 다르니 느낌도 다르고.
원형은 하나님 모형은 인간. ‘원형 모형’ 하는 이것은 인격성 속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많은 피조물 중에 오직 우리 인간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이 인간의 세계가 단편적이 아니고 아주 다양적이고 다면적이고, 또 그런 면에서 또 행락성이기 때문에 인간 이게 행락성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쾌락하고. 인간이 이래요. 인간존재가 그래요. 그것 빼놓으면 인간이 살맛이 나요? 짐승하고 똑같은 거지.
우리가 세상을 두고 세속적인 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향락성 누림성을 갖는 그런 존재입니다. 느낄 줄 알아야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느낄 줄 알아야지. 그래서 모든 것이 구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하려니까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짓는 거다 그 말이요. 만일 하등동물처럼 지었다면 그거는 하나님의 그 기쁨이 감소가 돼버려요. 우리에게 있어서 감소가 된다 그 말이지요.
우리 인간이 보면 남보다 점수를 많이 따면 쾌감이 있지요. 그렇잖아요? 짐승은 그런 게 없지요. 먹는 것도 아니고 촉감으로 느끼지도 않는 그런 건데 남보다 점수가 많으면 쾌감이 있어. 그걸 느낄 줄 알아. 그 참 이상하지. 왜 그러냐? 인격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래요. 쾌감 있게 하려니까 차등성은 자동적으로 생기는 겁니다. 또 하나님이 차등성 있게 당신이 주권적으로 지어놨으면 물론 될 수는 있지만 인격자들을 그렇게 지었다면 여기에는 항의를 할 수 있는 성격을 띠게 된다 그 말이요. 여기에서 자기 실력에 의해서 차등성이 되어지게 되면 이것이 값지다 그 말이요. 차등성은 자기가 만드는 겁니다. 자기에 의해서 되어지는 거요.
그리고 차등성이 있게 하려니까 이 세상에다 둔 겁니다. 그래서 경쟁을 해야지요. 많은 차등이 있게 하려니까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많은 사람이 있으니 많은 차등이 나고. 많은 차등이 날수록 또 일점 일점 최고로 올라갔어도 그 쾌감성은 깊고 굉장한 거지요.
성경에 보면 ‘잡혀죽기 위한 짐승 같은 사람이라.’ 그런 사람도 있지요. 우리가 성화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보면 ‘악하다, 좋지 못하다, 나쁘다’ 하는 그것이 그 전에는 그냥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봐졌는데 우리가 성화구원 면에 민감하게 느끼게 되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니고 믿는 사람인데 육으로 믿어나가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강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육으로 살면 불신자와 똑같은 거지. 그러니까 잡혀죽기 위한 짐승 같은 사람이라. 누굴 보고 하는 말이지요? 불신자들 보고? 아니지요.
제 1목적물, 도덕성자지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 이 제 1 목적물의 존재입니다. 두 번째는 제 2 목적물의 존재는 실력을 키우려니까 환경을 만들어야 되겠다. 대상자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니까 사람의 실력은 사람 속에서 만들어 가져야지요. 경쟁을 시키려니까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싸움의 대상자라 그 말이지요. 제 1 목적물을 영적 실력을 배양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제 3 목적물은 인간을 온전케 만드는데 필요하게 이용되는 물질이 되겠어요.
그런데 한두 가지만 짓지 않고 왜 다양하게 그렇게 많이 지었느냐? 그것은 천국의 누림에 각이한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비슷하게 써놨지만 강조점이 다르다고 그랬으니까 우리가 상하좌우로 보고 측면과 측면에서 보고 후면과 전면에서 보고 이렇게 다 가지라고 그렇게 해 놨다 그 말이요. 한 가지만 가지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아주 다양하게.
우리는 하루에 아주 다양적인 그런 사건을 만나고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성화구원의 다양성과 민감성 쾌감성의 다양성 쾌락성 이것이 존재와 사건이 많을수록 좋다. 평탄하게 잔잔하게 그게 안 좋단 말이요. 존재와 사건이 많을수록 좋다. 그러한 가운데서 내 구원을 이뤄가게 하는데 보면 제가 잘나서 구원을 이뤄갈 수 있고 지가 못나서 구원을 못 이루고 갈 수도 있으니 누구에게 원망을 할 필요가 없다. 구원 손해난 것은 누굴 보고 보상도 할 수 없고 요구도 할 수 없어요.
성령거역은 영원히 사함을 못 받지요? 성령거역은 예언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입니까? 오늘날 흔히 누비고 다니는 예언 방언 하지 말라고 막아버리는 것이 성령거역입니까? 그런 뜻은 아니지요.
성화구원에 있어서 물론 차등이 되기 전에 기본선이 있지요. 그게 이제 기본구원입니다.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그 라인에서 뛰는 거지요. 중생은 터. 그리고 이제 차등이 다양하게 나오는 것. 시간의 차이도 있고 정력의 차이도 있고 활동의 차이도 있고, 거기에서 이제 차등이 또 생기지요. 구원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으로 믿어나가는데 있어서 만약의 경우에 곁길로 들어서서 간다면, 곁길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옳은 노선이 아닌. 간구성도 다르고. 곁길로 들어서서 간다면 이것은 동참 죄 짓는 겁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라온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구원을 확정 시켜 놓고 가만 계시는 게 아닙니다. 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신경을 쓰시고. 숨으시지도 않고. 너무 가난해서 교회 안 나오고, 그렇지요? 웬만큼 가난하면 또 교회 나오고, 교회 나오다가 부자가 되면 그것 지킨다고 교회 못 나오고.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져갑니다. 미워서 가져간다 라기 보다도 그 사람의 믿음을 키워주기 위해서 가져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고 신경을 쓰신다 그 말지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입어지는, 그 구원이 입어지는 양만큼 둔감의 정도가 다르고 예민의 정도가 다르고 민첩의 정도가 다릅니다. 다 달라요. 민첩해야지요? 민감해야지요.
천국에 노래가 있어요, 없어요? 천국에 노래가 있지요? 성경에 보니까 어떤 노래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래가 있어. 그래, 이제 각 나라에서 믿다가 온 사람이 있을 거란 말이요. 그러면 아프리카에서 믿다가 온 사람이 있다면 자기들끼리 모여 있을까? 한국에서 믿다가 온 사람은 한국사람끼리 천국에서 모여 있고, 미국사람은 미국사람대로 무리지어 모여 있고 그럴까요?
천국에는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되어 있듯이 노래도 하나요 생각도 마음도 정신도 하나요, 청감성이 미감성이 후감성이 촉감성이 시감성이 모두 다 하나님의 그 오각과 오감에 맞도록 단일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것을 다 하나님 기준에 맞춰서 바꿔놓은 거, 맞춰놓은 거.
제 눈에 안 든다고 해서 천국을 뜯어 고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안 되지요. 그러니까 자기가 못 고치면 무슨 맛이 날까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표준하고 고치는 것이 성경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방법. 이거는 반드시 순종을 통하여 입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신의 성품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순종을 통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직접적인 요구는 순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권리를 가지고 ‘이 놈 저 놈. 이래라 저래라’ 하나님께 권위성에 순종 요구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기 위한 자원적 순종을 요구하는 겁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입느니만큼 영적 감각성이 예민해집니다. 그러니까 순종의 도수에 따라서 입혀지고, 또 순종의 도수가 어려워질수록 진하게 입혀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에 달 밝은 밤에 ‘얘야, 저 가게에 가서 뭣 좀 사오너라’ 하고 심부름 시키는 것과 소낙비가 내리고 번개 치는 그런 밤에 ‘얘야, 가게 심부름 좀 갖다 오너라’ 하는 그거와 순종의 차이가 그렇게 나요. 날씨 좋으면 ‘달도 밝고 하니 놀이 삼아 갖다 오너라’ 말이 그렇게 될 수 있고, 자기가 또 그렇게 달음질쳐 갖다 오지요. 그렇게 되는데 눈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고 그래놓으면 누가 쓱 나가려고 그러겠어? 그렇지 않아요? 그런 면의 순종이 진함이고 입혀지는 게 달라요.
아브라함은 뭘 쫓아갔다고 그랬지요? 말씀을 쫓아갔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에 의해서 순종으로 쫓아갔다 그 말이요. 말씀에 의한 순종으로 쫓아갔다. 가면서 고난이 올는지 축복이 올는지, 어느 게 먼저 올는지 아니면 다 같이 올는지 그거 전혀 모르고, ‘설령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간다’ 그 말이지요. ‘나는 그 말씀 붙잡고 간다.’ 멋있는 신앙 아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신앙을 신앙정신을 가지게 되면 어떻습니까? 눈앞에 막 번갯불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걸 자꾸 맛을 봐야 됩니까? 예수 믿어나가다가 뭔가가 눈앞에 이뤄지는 것도 보고 뭔가가 피부를 자극시키는 어떤 그런 사건이 일어나서 막 그냥 그렇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허황돼요. 그럼 그렇게 안 되느냐? 그건 모르지. 다만 우리가 신앙으로서 하고 가는 그 자세 그게 문제지요. 눈앞에 뭘 보려고 그러고 자극적인 맛을 보려고 하는 그거는 안 돼요.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갈대아 우르를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떠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이 아브라함을 들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제 저희들의 구원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구원이며, 지금까지 우리의 이 구원의 효력성이 어떤 건지? 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사건 환경을 들어일으켜서 잡아 돌리는 건지?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신앙사상적으로 인격적으로 얼마나 그것을 그 신앙사상이 주격이 되어 모든 삶의 그 목적을 그 기준에 놓고 그렇게 사상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고 돌아가는지 그 면을 생각해보면 저희들의 신앙이 너무나도 얄팍하고 깊지 못하고 얕은 것임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성령님이 진리와 영감으로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진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늘 감화 감동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에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했습니다. 현재적 저희들, 가나안 광야교회에 살고 있는 저희들에게 성령님이 진리와 영감으로 그 날에 들어갈 때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저희들을 권면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