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간암공의 상소문' 마지막 편⑤]
其六曰收人才盖人才之作成亶在人主之倍養而第培養失其宜收拾不均則才俊所聚之地其愁沮寃菀之歎勢耶必有試以兩南言之在惜別聖朝培養收拾之日賢才輩出文武蔚興做事做工賁飾治道者凡幾人矣而及至近來寥寥無稱者此非人才之全然無可用者實由於收拾作成之道不古若也其有才而不見用者宜乎抑菀之甚而伏况屢經灾亂以後南土人心尤爲渙散有莫可底定之象在朝家尤宜收用才以爲撫悅激勵之地而惟彼嶺南則近年以來猶被朝家之申飭收用獨於湖南則全然抛棄未蒙一視之恩人才亦安得無遺廢之歎哉臣愚之意則自今兩南一依西北例各別收用以盡撫摩之方亦有合於培養作成之道也伏願留神焉是所謂收人才在湖南爲亦一急務也臣旣以鄙俚之淺見敢効條進之忱而竊伏惟人主出治之本端在於建極而立志去俗而務實則向上耶陳抑是區區之未務臣又以一實字敢此仰勉而其目有七實敬天以省圖治之幾實典學以端趨治之道實勤政以盡講治之術實納諫以開嚮治之門實破黨以藥病治之源實崇儉以祛蠹治之根實愛民以鞏保治之基也天雖敬而不以實則圖治之幾無以省矣學雖典而不以實則趨治之道無以端矣政雖勤而不以實則講治之術無以盡矣諫雖納而不以實則嚮治之門無以開矣黨雖破而不以實則病治之源無以藥矣儉雖崇而不以實則蠹治之根無以祛矣民雖愛而不以實則保治之基無以鞏矣殿下於斯七者盖嘗有志矣非徒有志亦有其名矣非徒有名臨御十載治化著明遠邇感聳皆謂唐虞三代之降庶幾可觀而第伏念殿下每當灾異之作避殿減膳以盡責躬之道則其於敬天可謂實矣而天之降灾去而益甚每當機務之暇講習不停以盡自修之道則其於典學可謂實矣而士之趨向猶未底正每當臣僚之接反覆論究以盡爲邦之道則其於勤政可謂實矣而修擧之典尙未悉行每當規戎之進虛心開受以盡弗咈之道則其於納諫可謂實矣而讜言之路猶未恢張每當傾軋之際務歸同寅以盡蕩平之道則其於破黨可謂實矣而朋比之習猶有前套每當奢費之害務遵減約以盡節省之道則其於破黨可謂實矣而朋比之習猶有前套每當奢費之害務遵減約以盡節省之道則其於崇儉可謂實矣而俗尙侈靡猶未知變每當施措之間愍念疾苦以盡如傷之道則其於愛民可謂實矣而衆獘蝟起猶未釐祛顧此七者殿下皆以爲實而實欠尙未下究者其於固立志建出治之工或有所一毫未實而然歟臣又以實立志三字爲七者出治之本伏願殿下益加猛省焉噫臣之私心蘊結固非止此而若其關係時政之大者則顧以公麽之賤蹤雖不敢覶縷而六條陳獘七事仰勉只出於爲君父貢愚忱而則此實感殿下求言之盛意出尋常萬萬有不德終始泯嘿而其干冒宸嚴不避僣妄之罪自知難逭臣尤不勝主臣之忱伏乞聖明察其愚忠而恕其狂儧焉臣無任屛營祈懇兢惶踧踖之至謹昧死以聞
英祖大王批答曰省爾六條疏陳深嘉應旨之誠其令備局確議稟處而以七實字勉戎者尤爲切實其令政院抄書以八以爲省覽之地焉 下備邊司
※고딕체는 옥편 및 컴퓨터에서 찾지 못한 글씨임.
〈해설〉
여섯째는 인재의 양성과 수용입니다. 인재를 만드는 것은 주인된 사람의 배양능력(培養能力)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마땅한 재목감을 골라 배양하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시험 삼아 영남과 호남 등 양남(兩南)의 경우를 말한다면 옛날 열성조(列聖朝)*에서 배양하여 수습(收拾)할 때는 현재(賢才)를 많이 배출하여 문무가 흥위(興威)하거나 공부하여 치도(治道)를 아름답게 꾸민 분이 몇 사람 있습니다.
* 열성조 : 여러대의 임금의 시대
근래에는 안타깝게도 배양된 인재가 없습니다. 이는 쓸 만 한 인재 감이 없어서가 아니고 양성하는 방법이 옛날과 같이 않은데 연유합니다. 그만큼 재주 있는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러 번 재난을 겪은 이후 남토(南土)의 인심은 안정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는 인재마저 써주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영남에서는 호남과는 대조적으로 조정에 많이 진출하는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호남은 포기상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결 같이 은혜를 입지 못하니 인재가 배양(培養)되겠습니까.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은 지금부터라도 양남에도 서북(西北)의 예(例)에 따라 인재를 수용하여 준다면 다 같이 무마(撫摩)의 방법이 될 것이며 또한 그 길이 인재를 배양하고 작성(作成)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으로 여깁니다. 호남인재(湖南人材)의 수용은 호남의 급무(急務) 중 하나입니다.
신(臣)은 이미 촌스런 천견(淺見)으로 감히 조목(條目)으로 진언(進言)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사람의 주인은 출치(出治)의 근본이요 단서(端緖)는 왕위(王位)에 오르는데 있습니다. 입지(立志)하여 세속적인 식견을 버리고 실질적인 일에 힘쓰신다면 앞서 말씀드린 바는 자질구레한 말무(末務)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臣)이 또한 실자(實字)로써 감히 앙면(仰勉)하옵니다. 그 조목은 7개조입니다.
그것은 경천(敬天)의 도(道)로 다스림을 도모하고, 전학(典學)으로 학문을 떨치시고, 근정(勤政)으로 다스리는 기술을 강마(講磨)하시기를 다하시고,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기 위해 문을 여시고,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파당(破黨)하여 병든 정치를 바로고치시고, 검약(儉約)을 숭상하여 낭비의 뿌리를 제거하여 주시고, 애민(愛民)하여 정치의 기본을 든든히 보존하셔야 나라를 바로 세우실 수 있습니다.
비록 하늘을 공경하나 실로써 아니 하면 다스림을 도모하는 효과를 살릴 수 없을 것이요, 배움이 떳떳하나 실로써 아니 하면 다스리는 도에 이르는데 단정함이 없을 것이요, 정사에 부지런하나 실로써 아니 하면 정치를 강의한 기술을 다함이 없을 것이요, 간언을 받아들이나 실로써 아니 하면 정치의 문을 향하나 열림이 없을 것이요, 당을 없애나 실로써 아니 하면 약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정사는 실(實)이 아니면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검소함을 숭상하나 실로써 아니 하면 정치를 좀먹은 뿌리를 제거하지 못할 것이요, 백성을 실로써 보치(保治)하지 않으면 바탕을 굳세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일찍이 7자(者)에 뜻을 두셨기에 단순한 뜻만 아닐 것입니다. 즉위(卽位)하신 지 10년의 치화(治化)가 저명(著明)*하여 멀거나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감동하여 모두 당우삼대(唐虞三代)의 융성(隆成)을 거의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 저명 : 두드러지게 뚜렷함
다만 전하께서는 재이(災異)가 일어나면 전각(殿閣)을 피하시고 수라도 줄이고 스스로를 꾸짖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하늘의 도를 공경(恭敬)함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재앙이 갈수록 심하고 마냥 기무(機務)의 틈을 맞아 강습(講習)을 멈추지 아니하고 스스로 수양하는 도리를 다하신 것입니다. 학문에 종사하심에 있어서도 가히 사실이라 이르겠으나 선비의 추향(趨向)은 오히려 바르지 못합니다.
언제나 거료(巨僚)를 접견하실 때마다 반복하여 의논(議論)하고 연구하여 나라를 위한 도리를 다하시니 그 근정(謹政)에 이를 것이나 바르게 천거하는 법이 미비합니다. 그러므로 규계(規戒)의 진언을 받으면 청취하고 간언을 받아드리신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고 곧은 말은 오히려 넓게 수용되지 못하고 질투와 간책을 농(弄)하여 남을 모함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이는 탕평(蕩平)으로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자기편만 두둔하는 붕당의 습관도 타파해야 합니다. 붕당은 치도를 그르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치스런 소비풍조도 검소함을 숭상하게 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적지 않은 폐단이 척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아뢴 7개 사항을 보시면 전하께서도 모두 인정하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폐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밑에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출치(出治)의 공정을 세우는 데 혹시라도 비리가 개입됐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신은 실입지(實立志) 3자로써 7자 출치의 근본을 삼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더 맹성하시옵소서. 신은 보 잘 것 없는 적종(賊蹤)으로 감히 자세히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술한 6조(六條)와 7사(七事)를 우러러 힘쓰시도록 한 것은 다만 군부를 위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리석은 정성을 바치오니 이는 실로 전하의 구언의 위의(威意)에 감동하여 나왔으나 절대로 입을 다물 수 없어서 아뢰는 것입니다.
엄한 궁궐을 피하지 않고 범하여 참람(僭濫)하고 망령(妄靈)된 죄 스스로 도망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신은 신의 정성을 주장함을 참지 못함을 엎드려 비오니 성상(聖上)께서는 어리석은 충심을 살피시고 경망(輕妄)되고 참람함을 용서하옵소서. 신은 참으로 황송할 뿐이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굽어 살펴주시옵기 바랍니다.
英祖大王의 批答(영조대왕의 비답)
그대의 육조(六條) 상소문(上疏文)을 살펴보니 나의 뜻에 응한 정성이 참으로 아름답다. 비변사(備邊司)에 명령(命令)하여 대책을 확정하여 올리라 하였고 7실자(七實字)로써 힘쓰라고 경계한 것도 더욱 절실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명령하여 초서(抄書)가 끝나면 들어와 성람(省覽)토록 하라고 하였다. 비변사에 하명(下命).
《문집 표지》
(144-052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51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51일차에는 '간암공(위세옥)의 상소문(上疏文)' 마지막 부분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 주1)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일부 내용에 음을 달거나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 주2) 52일차에는 '임계탄의 저자는 누구인가?'가 계속 이어집니다./ 무곡
간암공은 상소문 마지막 여섯번째 주제로 호남인재의 수용을 강력하게 건의하는 등 인재의 배양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임금에게 직접 상소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목숨을 내놓고 하지 않는 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진가가 무한대인 것으로 사료됩니다./ 무곡
간암공의 상소문 등에 힘입어, "영조나 정조는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민생을 시찰하거나 직접 듣고 많은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도 이 시기에 활약하였다. 심지어 배고파서 잡혀온 도둑들을 불쌍하게 여겨 담금질등 가혹한 고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런 정책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영조의 균역법(군포 2필에서 1필로 감)과 정조의 신해통공(금난전권을 폐지)이었다. 이들 제도는 조선 후기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에서 발췌, 표학렬)/ 무곡
※위두량종친께서 47일차 밴드 댓글에 올려주신 내용과 함께 살펴보시면, 더욱 의미가 클것 같아 오늘도 첨부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간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암공上疏文
https://m.blog.naver.com/wdr462/222671650323
인재의 양성과 등용에 대한 상소군요. 결국 과거문제와 결부가 되겠네요./ 벽천
인재등용 방법 중 천거제도도 잘만 운영이 되면 참으로 좋은 제도입니다. 과거제도만 고수하다보면 정말 인재를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데 잘못되면 정실 인사가 되는 등 객관성이 부족하게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ᆢ
참으로 인재 발탁 제도는 어려운것 같기도 합니다.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우고 뒤에 제의 제후가 된 강태공이나 삼국지의 제갈공명, 봉추 등도 사실 추천으로 등용된 케이스죠. 물론 삼고초려나 추천서 등의 변수도 있었습니다만 ᆢ/ 무곡
위윤기 님
지금도 특허청의 특허심사관을 선발(사무관, 서기관등)하는 경우 등 일부 직렬은 관련분야 석사, 박사 논문 등 주요 경력과 실적을 심사하여 경채로 채용하는 제도를 공채와 병행하여 운영하기도 합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