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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파조(派祖) 양경공(良景公) 휘(諱) 희계(熙啓) 할아버지
양경공 할아버지는 시조로 부터 49세, 중시조로부터는 8세 이시다. 1348년(고려 충목왕 4) 3월 18일, 개성북안동(開城北安洞; 현 개성시 남대문 연복사 근처)에서 아버지 월성군(月城君) 휘(暉)와 부원군(府院君) 광산(光山) 김심(金深)의 딸 화평군부인(化平郡夫人) 김씨(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시었다(참고 1).
1369년(공민왕 18)에 진사 문과에 합격하고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참고 2), 우왕(禑王, 1375-1388) 때 최영(崔瑩,1316-1388)의 막하에 들어가 서북면 도수문을 거쳐 밀직사(密直使)가 되고(참고 3), 1382년 밀직상의(密直商議)가 되었다(참고 4).그뒤 1383년(우왕 9) 김화(金化) 전투에 참전하여 왜구와 싸웠으며(참고 5), 1388년 8월 추성좌리공신봉익대부밀직사사상호군(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司事上護軍)을 거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시고(참고 6), 1390년(공양왕 2)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초(李初). 윤이(尹彛)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한때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참고 7).
다시 1392년(공양왕 4)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오르고 문하평리겸응양위상호군(門下評理兼鷹揚衛上護軍)으로 이해 7월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등 52명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왕위에 추대 조선(朝鮮)을 개국케하여 순충분의좌명개국1등공신(純充奮義佐命開國一等功臣), 참찬문하부사팔위상장군(叅賛門下府事八衛上將軍)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하였다. 이때 밭 170결(結; 1결은 지금의 6,813평에 해당함)과 노비 20명을 하사(下賜) 받았다(참고 8).
또 그해 11월 태조왕(太祖王)이 내정에서 격구(擊球)를 할때, 팔위판사인 할아버지께서는 판개성부사 유만수(柳蔓洙) 등과 함께 참석하셨으며, 1394년(태조 3) 2월 태조 임금께서 연복사(演福寺)에 들러 문수법회(文殊法會)를 참관 하고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가실 때 할아버지 댁을 들르셨다.
수도(首都)가 개성(開城)에서 한양(漢陽)으로 옮겨지자 할아버지께서는 1395년(태종 4) 9월 사택(私宅)을 개성 북안동(北安洞)에서 한양(漢陽)창의문(彰義門; 현 서울시 종로구 창의동 자하문) 밖으로 옮기셨으며, 윤9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2품으로 지금의 서울시장)에 부임하시어 한양축성(漢城築城)을 하시다 과로로 병을 얻으시어 완성을 보지 못한채, 1396년7월12일 49세의 나이로 재임 중에 돌아가셨다.
이에 임금께서는 조회(朝會)를 중단하고 유사(有司)에 명(命)하여 예장(禮葬)토록 하였으며, 뒤에 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판예조사겸첨의찬성도평의사사(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判禮曺事兼僉議賛成都評議司事), 오위도총부도총관계림부원군(五衛都摠府都摠管鷄林府院君)에 추증(追贈)되셨다.시호(諡號)는 양경(良景)이고, 특시는 무열(武烈)이시다(참고 9).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6년이 지난 1407년(태종 7)9월에는 한양 창의문 밖 사제(私第)를 태종께서 매입해 한 아들로 하여금 살게하였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416년이 되는 1812년(순조 12)은 조선개국(1392) 8번 째 회갑을 맞는 해이다. 이에 임금께서는 이해를 기념하는 기념행사의 하나로 개국 1등 공신 15인에 대한 유제(諭祭) 행사가 있었다. 이에 순조께서는 안성군수(安城郡守) 박종경(朴宗敬), 용인현령(龍仁縣令) 한철유(韓喆裕), 음죽현감(陰竹縣監) 박창수(朴昌壽), 영화찰방(迎華察訪) 박종산(朴宗山), 중림찰방(重林察訪) 최종문(崔宗文), 지제교(知製敎) 정조영(鄭祚榮) 등을 할아버지의 사당이 있는 안성의 송정리(松井里)로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참고 10). 이로써 사당은 불천위(不遷位)의 부조묘(不祧廟)가 되어 우리 정문(鄭門)의 정신적 도량(道場)이 되었다. 또한 할아버지는 후손으로 부터 파조(派祖)로 추앙(推仰) 되었다.
할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서원염씨(瑞原廉氏)로 영문하부사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의 딸이다.
재배(再配) 할머니는 문하좌시중(門下侍中)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 영산(靈山) 신귀(辛貴)의 딸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염씨할머니 사이에서 아들 길상(吉祥), 딸 하나를 두셨고, 신씨할머니 사이에서는 아들 효상(孝祥), 설상(契祥), 그리고 딸 둘을 두셨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번지에 있다. 신씨할머니는 맨 위 할아버지와 함께 모셔졌고, 염씨할머니는 원래 개성에 있었으나 60년 뒤 할아버지 산소 아래로 옮겨 모셨다(참고 11).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로는 <양경공(휘 희계) 묘갈명>, <양경공(휘 희계) 신도비명>, <양경공(휘 희계) 공신록>, <계하사목>,<양경공(휘 희계) 열성조수교>, <제공신회맹문>, <충경공매헌선생충효록>, <경모재기>, <양경공 정희계의 생애와 행적> 등이 있다(참고 12).
<참고 1>
1.경주정씨 중앙종친회, <경주정씨대관>,서진출판사,473-492, 2010
2.종약원, <경주정씨 양경공파세보> 1권 손록 19-20,1996
<참고 2>
1.<고려사> 41권, 세가41 - 공민왕 4-18-27-1396
癸未賜柳伯濡等及第
2. <고려사>73권 지(志) 27-선거(選擧) 1, 과목(科目), 1-48
恭愍王十八年六月, 興安伯李仁復,知貢擧 三司左使李穡, 同知貢擧取進士,賜
柳伯濡等三十三人及第.
3. <양경공파세보>(1996)와 <양경공 (휘 희계) 묘갈명>에 '공민왕 29년'은 '공민왕 18년'의 잘못임.
<참고 3>
<두산세계대백과>
정희계(鄭熙啓,27살)는 공민왕 23년(1371) 9월에 왕이 갑잡스럽게 시해 당한 뒤에 최영(崔瑩) 휘하의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서 변방의 수비에 힘을 썼다.
<참고 4>
이색,< 충경공신도비> (<목은문고>15권),1382
우왕 8년 염제신의 3째 사위인 "밀직사(密直使) 정희계(鄭熙啓)의 아들 길상(吉祥)은 중랑장(中郞將)이고, 그의 딸 은 아직 어리다"(密直使生男曰吉祥中郞將, 女幼.)란 기록이 있다.
<참고 5>
1.<고려사절요>32권 신우3, 계해 신우 9년
우왕 9년(1383) 9월에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에 침략하고 또 회양부와 평강현을 침략하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의 정병을 불러들여와 호위케 하였으며, 전정당상의 남좌시, 지밀직 안소, 밀직상의 왕승귀, 왕승보, 밀직상의 정희계, 인해, 개성군 왕복명, 판개성부사 곽선 등을 보내 그들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화에서 싸워 패전하였다.
2.<고려사>135권, 열전 48, 신우 3에도 같은 내용이 보임
<참고 6>
1.<고려사절요> 34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1388)으로 최영(崔瑩)이 실패한 뒤에 실권을 잡계되자 정희계가 인친을 고려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되었다.
2.<태조 건원릉 비문>
무진년(1388, 우왕 14)에 시중 최영이 권간(權奸)들을 주륙(誅戮)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3.<서울600년사>
이성계가 최영을 타도하고 실권을 잡자 강씨(康氏, 이성계 아내, 조선개국 후 신덕왕후, 현비)의 도움으로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되었다.
<참고 7>
1.<고려사>137권, 열전 50,'김저(金佇)의 옥사(獄事)'
창왕(昌王) 1년(1390)에 김저(金佇) 등이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로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당시 폐출되어 있던 우왕(禑王)으로부터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밀지(密旨)를 받고 곽충보(郭忠輔)와 접선, 팔관회날 이성계를 암살할 계흭을 꾸몄으나,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밀고함으로써 계흭이 실패하고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 옥사로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2.<동사강목>17권 하, 공양왕 2년, 갑오조, <동사강목> 45권, <야후백과사전> 등에도 이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3.<고려사> 46권, 세기 46, 공양왕 2, <고려사절요>제35권, 공양왕 2,
1391년 1월에 우인열, 이인민, 정희계, 이숭인, 하륜, 권근, 윤사덕, 유염, 이빈, 노빈, 이행, 원상 등을 사면하여 서울 밖에 편히 거주하도록 했다.
(乙巳以國大妃生日宥禹仁烈.李仁敏. 鄭熙啓. 李崇仁. 河崙. 權近. 尹師德. 柳琰. 李彬. 盧贇. 李行. 元庠 等皆許京外從便)
<참고 8>
1.<고려사> 46권, 세가 46, 공민왕 2,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
공양왕 4년(1392) 4월 계유에 심덕부를 판문하부사로, 이성계를 문하시중으로, 이원광을 정당문학으로, 정희계(鄭熙啓, 45살)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癸酉以沈德符判門下府事, 我太祖爲門下侍中, 李元絃爲政堂文學, 鄭熙啓判開城府事...)
여기서 공양왕 4년인 1392년은 '癸酉'년이 아닌 '壬申'년이며, 또한 '癸酉'년은 '1392년'이 아닌 '1393년'이다.
2.<국조보감> 제1권, 태조조, 임신 1392년 참조
또 <양경공(휘 희계) 공신록>(良敬公 諱 熙啓 功臣録), <개정공신록>(改定功臣録), <계하사목>(啓下事目), <양경공(휘 희계) 열성조수교>(良敬公 諱 熙啓 列聖朝受敎)등을 참조할 것.
<참고 9>
1.<태조본기> 태조 4년 1395년 6월
태조 4년 6월6일에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치고, 초대 한성부 판사로 성석린(成石璘)을 임명하였으며, 제2대 판사로는 정희계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부임 년월일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다만 이임년월일(1392년 7월12일)만 나타나 있다.
2.<태조실록> 태조 5년
태조 5년 7월12일에 한성부판사 계림군 정희계(漢城府 判事 鷄林君 鄭熙啓)가 사망하였다. 등창이 나서 죽으니, 태조가 조회를 쉬고 담당자에게 지시하여 규정에 따라서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 시호를 내리는데, 봉상시에서 안황(安荒)으로 시호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보시고 고치도록 지시해 '良景'(양경)이라 시호하였다.
예장(禮葬)으로 양천 남면 죽동 손좌(陽川南面竹洞 巽坐, 현재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150-1)에 장사를 치루었다.
여기 '竹洞'은 원래 '댓골'을 한자화 시킨 것으로 본래의 뜻과는 다르다. 즉 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궁동에서 동북쪽 양천구 신정3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댓골이라 불렀다. 그 까닭은 이 고개를 넘으면 '큰 마을'이 있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댓골'은 조선 태조가 개국 1등공신 양경공 정희계에게 내린 사패지(賜牌地)로 넓이가 20만 평이 넘는다. 원래 큰골이 대동(大洞)- 댓골 - 죽동(竹洞)으로 변한 것이다.
3.<태조실록>'태조본기', 채조 5년(1396) 2월 28일
판한성부사 정희계와 흥인문
1396년(태조 5) 2월 26일 동대문에는 지세가 낮아서 밑에다 돌을 포개어 올리고 나서 그 위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그 힘이 다른 곳보다 배나 들었다. 안동부(安東府)와 성산부(星山府) 사람들이 그 역사를 맡았으나 기일내에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경상도 관찰사 심효생(沈孝生)이 "동대문의 역사는 10여일은 더 두고 마치게 하여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하옵소서"하고 청했다. 그러나 판한성부사 정희계가 아뢰였다. "백성들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근간에 분부가 계시기를 '씨 뿌릴 때가 되었으니, 모두 돌려보내어 농사를 짓게하라'하시어 듣는 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만일 안동과 성산 사람만 남겨 두면 그 민심이 어떻겠습니까? 마치지 못한 것은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라 지세가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정부사의 아룀'을 옳게 여기고 함께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므로 흥인문 부근에는 공사가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성문도 겅설하지 못한 채 일단 공사를 끝냈다.
<참고 10>
1. <순조실록> 32권 임진 4월 참조
<承政院日記> 순조 12년(1812) 7월 16일
(원문)
徐能輔以禮曹言啓曰; '"傳曰, '是年是月, 卽我聖祖開創正位之八回甲也. 南殿酌獻,己命大臣攝行, 以而予小子寓慕之誠, 其時佐命諸勳臣, 不可無酬酹之擧. 開國一等功臣諸人, 令該曹訪問其祠版所在, 遣官致侑, 以示逢此日曠感之意事, 分付'事, 命下矣. 開國一等功臣爲十五人, 而益和君金仁贊祠版在京祀孫家, 致祭祗受日字,從速涓吉事知委, 而益安大君芳毅, 門下左侍中裵克廉, 平壤府院君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 興安君李濟, 義安大君和, 鷄林君鄭熙啓, 淸海伯李之蘭,宜城君南誾, 花山府院君張思吉, 西原君鄭摠, 漢山君趙仁沃, 宜寧府院君南在, 淸城府院君鄭擢祀孫, 散在各道鄕邑云. 祠版之在於各其祀孫家與否,詳問報來之意, 今方發關於各該道守臣處. 而待其探報, 鱗次擧行之意, 敢啓.', 傳曰; '知道'"
(번역)
서능보(徐能輔)가 예조의 말로써 아뢰기를, "'이해 이달은 우리 성조(聖祖)께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신지 여닯 번째 되는 회갑일(回甲日)이다. 남전(南殿)의 작헌례(酌獻禮)는 대신이 섭행하도록 명하였는데, 내가 추모하는 정성으로 당시 정권을 보좌한 여러 훈신(勳臣)에게 제향(祭享)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개국일등공신들에게, 해조(該曹,즉 예조)로 하여금 그 사판(祠版)의 소재를 물어서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함으로써 이날을 맞아 일어나는 큰 감회를 보이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개국 일등공신은 15인입니다. 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의 사판은 서울의 봉사손(奉祀孫) 집에 있으니 치제(致祭)를 공경히 수령할 길일(吉日)을 속히 택하라고 알렸습니다.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배극렴(裵克廉).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의안대군(宜安大君) 이화(李和).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 청해백(淸海伯) 이지란(李之蘭).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 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은 그 봉사손들이 각도의 향읍에 흩어져 산다고 합니다. 사관이 각각 그 집안 봉사손의 집에 있는가를 상세히 묻고 보고하라는 뜻으로 금방 각 해도(該道)의 수신(守臣)들에게 관문(關文)을 보넀습니다. 그들의 탐보(探報, 정보)를 기다려 차례로 거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룀니다."하니 ,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2.<양경공 사당 및 재실 중건기>
<참고 11>
<경주정씨대관> 40쪽 상단
양경공(휘 희계) 묘소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9번지)
<참고 12>
<경주정씨대관> 40쪽 - 42쪽
사진
1.양경공(휘 희계) 신도비(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9번지)
2.정경부인(서원염씨) 묘소(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150-9번지)
3. 양경공(휘 희계) 부조묘(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송정리 115번지)
4. 이산묘(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등촌리)
5. 건원능비(경기도 구리시 동구능내)
문헌
6. 양경공묘갈명( <경주정씨대관> 474-476)
7. 양경공신도비명(<경주정씨대관> 476-478)
8. 양경공 공신록(<경주정씨대군> 478-481)
9. 개정공신록(<경주정씨대관> 481-482)
10. 계하사목(<경주정씨대관> 482-483)
11. 양경공 열성조수교(<경두정씨대관>483)
12. 제공신회맹문(<경주정씨대관> 483-484)
13. 충경공매현선생충효록(<경주정씨대관> 484-491)
13. 경모재기(<경주정씨대관> 491-492)
13. 염태호, <양경공 정희계의 생애와 행적>, 양경파종약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