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뿔산을 향하여 산죽밭을 헤치며 완만하게 올라간다.
▲꾸준한 오르막길을 올라 빽빽한 산죽밭 사이 등로를 지나 오르다 보면...
▲등로 우측에 횃불 모양의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자리하고 있는 곳을 지나는데, 일명 '소뿔바위'로 불리는 곳이다. 국방부표지석(#245)이 주변에 박혀있다.
▲소뿔바위. 좌측으로 우회한다. 노란말뚝군표지석(#245)이 주변에 박혀있다. 원추모양의 큰바위가 나타나는데 횃불바위라고도 하는 소뿔바위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새는 달라진다. 바위 하단은 작은 받침돌만 의지하고 있어서 흔들바위라고도 부름.
▲저 멀리 가리산이 보이는데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이다. 긴 능선으로 이어진게 마치 ‘뫼 산(山)’자처럼 보이는데 두촌면에는 가리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춘천과 홍천의 경계에 있는 산이지만 홍천 가리산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홍천에서 인제 가는 44번 국도에서 가리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가리산 줌
▲능선에서 바라본 블루마운틴C.C와 백우산895m의 모습(홍천군 두촌면 소재)
▲소뿔산(1118m). 산패 이정표(범의터3km, 등산로아님. 지방도408호(달음재)4.8km) 지맥 은 우측 범의터 방향으로 간다.
▲소뿔산(1,118m):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괘석리와 인제군 남면 갑둔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 로 산 아래 마을에서 보면 ‘소의 뿔과 같이 2개 봉우리가 봉긋 솟았다’해서 그런 이름을 얻 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홍천군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있고 1시 방향으로는 갑둔리로 향하는 뚜렷한 임도가 있지만 홍천(춘천)지맥 길은 좌측으로 이어진다.
▲소뿔산(1,108.8m)에서 우측으로 키 작은 산죽밭을 지나 내려서고..
▲1,080m봉. 앙증맞은 입석바위와 고목이 어우러진 봉우리. 바위 우측으로 내려간다.
▲계속 이어지는 키 낮은 산죽밭 사이 등로를 따라 내려서서
▲가파르게 올라가니 군작전 도로의 가드레일이 보인다.
▲작전도로가드레인을 넘어 도로에 올라서서 우측 통신탑으로 올라간다.
▲통신탑으로 올라오는 길을 뒤돌아
본다.
▲군통신탑정문. 통신탑팬스 우측 등로 따라 이동한다.
▲통신탑 우측으로 지나가며 뒤돌아본다.
▲1118.2m봉(개념도1,122.7m)헬기장. 헬기장 끝 삼각점 있는 곳에서 좌측 바위사이로 급하게 내려간다.
▲좌측대각선 방향 끝지점에 있는 삼각점(어론430/2005재설)
▲1122.7m봉 헬기장에서 본 가마봉과 백암산(우측뒤)
▲헬기장에서 동쪽 응봉산과 설악산 방향을 바라본다.
▲1118.2m봉(개념도1,122.7m)헬기장. 홍천(춘천)지맥 중에서 최고봉임에도 불구하고 지명을 부여받지 못했다. 정상에는 육군 과 학화 전투훈련단 기지가 정상을 점령하고 있고 경고판도 붙어있다.
▲오늘 구간 중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절벽 비슷한 급경사 암릉 내리막길이지만 군용 로프를 잡고 내려서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 Y길(1099m)능선분기점. 넓은공터 우측길이 뚜렷하고 시그널도 보이지만 좌측으로 급 하게 내려가야 한다. 주의
▲오미자고개임도(오미자-광암리고개) :임도(930m): 우측은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인데 내려가는 임도 따라 내촌면과 두촌면계가 갈린다. 좌측은 오매자골인데 예전에 커다란 농장이 있었던 곳이고 그 너머로 숯구네미 고 개가 있는데 김부대왕이 수레를 타고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국가정보원 지도에 의하면, 이 임도에서 삼면이 갈리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우측이 홍 천군 두촌면에서 내촌면으로 바뀌고 좌측은 계속 인제군 남면으로 이어져 간다. 우측은 윗괘석리와 황병고개로 우회하여 이어지는 임도고, 좌측이 호원 오미자 농원이 있는 오매자골로 이어진다. 오매자골은 수구너미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오미자가 많이 자생했다고 하며 지금도 오미자 농장이 있다.
▲ㅓ자갈림길(1000m). 바위2 좌측길은 뚜렷하며 솔구내미고개로 이어지는 능선길이고 지맥길은 우측 바위사이로 간다.
이곳의 우측은 홍천군 내촌면이나 좌측은 인제군 상남면에서 남면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동향으로 이어오던 맥길이 남향으로 바뀐다. 북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술구네미고개'로 이어진다.
술구네미(수구네미) 고개는 인제군 남면 갑둔리 서낭거리와 김부리 사이의 큰 고개로, 마의태자가 왕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수레로 이 고개를 넘어 다닐 때, 고개가 하도 험하고 칡넝쿨이 많아 수레를 두고 걸어 넘어 고개 건너편에 둔 수레를 갈아 타고 다녔기에, 수레를 남겨 두었던 고개 양쪽을 수레너머라고 부르던 것이 고개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술구네미는 '수레너머'의 사투리란 말도 있다.
▲황병고개: 황병고개는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를 이어
주는 고개로 이 지역에서는 지명을 따라 '김부리고개' 또는 '광암리고개'로 부른다고 한다.
13 황병고개(930m) 시멘트임도 좌측 인제군 남면 김부리, 우측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
황병고개(930m):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에서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 경계에 있는 고
개로 김부리 남쪽 골짜기에 황병나무가 무성하여 연유하여 명명된 지명이라고 하나 갑둔향
토사적연구회에서는 싸움에서 항복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김부대왕 통치 체제에 의한 싸움
으로 유래된 지명일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원래는 황병골이란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군사용
도로인지 군사용어들이 표기가 되어있고 주위에는 두릅과 엄나무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우측 고개 아래에 있는 김부리(金富里)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이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 재건을 이룩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 양병(養兵)을 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부(金富)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56대)의 이름으로 신라가 패망하자 마의태자가 이
곳에서 신라의 국권수복운동을 벌이면서 이곳의 지명이 “김부리”가 되었다고 한다. 흔히 마
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서 은둔했다고 역사적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왕건이 마의태자의 세
력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지어낸 소문이며 실제로 마의태자는 이곳 김부리로 들어와 군대를
양성했으며 설악산의 한계산성에서도 주둔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마의태자(痲衣太子:912~?)는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황자로서 경순왕의 5남인 김분과
함께 고려에 귀순하려는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라의 수도인 경주
를 떠나 금부리에서 충신,지사, 일민들과 함께 조국 광복의 숭념을 발의하였다. 國之存亡必
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 마의태자는 경
순왕에게 나라의 존망의 천명에 달려 있기는 하지만 충신(忠臣), 의사(義士)와 민심을 수습
해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그만 두어도 늦지 않습니다. 어떻게 천녀의 사직(社稷)
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넘겨줄 수 있답니까 (三國史記에서)
결국 경순왕의 뜻대로 나라는 왕건에게 넘겨지만 마의태자는 어머니 죽방왕후를 모시고 자
신을 따르는 충신 열사들과 처자를 거느리고 개골산에 들어가 망군대와 한계산성을 쌓고 조
국 신라의 광복 투쟁에 전념하였다. 신라 유민들에 의해 대왕으로 추대된 태자는 나라가 망
한 것을 자책하고 조국광복의 결의를 굳게 하기 위하여 삼베옷을 많이 입었으므로 마의태자
또는 마의대왕이라 하였다.
항려 유적지 한계산성, 갑둔의 5층 석탑, 김부리의 옥새바위, 대왕각, 대왕정, 술구미재, 다
물 장병 총 등이 지금까지 남아 공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승하하시자 유민들
은 신전대왕각을 세워 위패(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년이나 계속됐다.
황병고개는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우측홍천 내촌길은 군시설로 통행금지이나 좌측 인제 상남 방향으로는 소형버스는 다녀도 될 듯하다.
황병고개에선 우측 광암리나 좌측 김부리로 내려오는 넓은 임도길이 있고 어느 쪽이든 군부대관할구역이다.
▲오늘 지맥산길의 종착지 황병고개로 내려서고 지맥길을 탈출하여 좌측 도로 따라 김 부리 방향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