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꽃
김 이 진 / 수필가
환이는 나의 고교 동기 동창인데다가 담임 선생님 깨병대 반 반창이다. 녀석은 유난히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나는 늘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초라해 보였을 지도 모른다. 녀석에게 단점이 있다면 얼굴 평수에 비해 코가 살짝 작은 것이 결점이라도 해도 뭐 사실 그 정도는 옥에 티 정도랄까. 크고 우수에 찬 그 큰 눈을 끔벅거릴 때 일종의 선한 기운마저 느끼곤 했다. 게다가 약간 금수저 급이니 노는 물도 좀 달랐다고나 해야 할지.
얼마 전 막내 딸 녀석의 책장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빛바랜 나의 일기노트를 발견한다. 훑어보는 몇 페이지 쯤 이름 없는 시(詩) 한편의 연필 메모에 눈길이 머문다.
어둠 속에서
어둠 저 너머를 생각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랑이의 포효소리
이윽고
인형들의 끈은 끊어지고
종이꽃은
지다
고2 어느 때 그가 뜬금없이 내게 건네 준 3연(聯)의 시 이다. 나는 물끄러미 시를 바라본다. 그 속에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그를 향해 날아간다. 그 곳은 그다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
어느 여름날 그의 초대로 집에 놀러가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고색창연한 한옥집의 넓은 마당이 보인다. 코딱지 만한 우리 집과는 비교 자체가 불능이다. 그의 부친은 D 대학 농경제학과 교수이다. 서재의 책장에는 수도 없이 많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고, 서고 한 쪽에는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을 비롯해 대중음악의 비틀즈 등의 LP판이 가득 들어 차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로 하여금 문화적 충격파로 압도한다. 어쩌다가 책장에 얹어진 그의 부친의 일기장을 훔쳐본다. 빛바랜 스프링 대학노트에는 펜을 휘갈긴 듯 악필에 가까운 기록들이 빽빽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악필은 처음 본다. 악필들은 일정하고도 경쾌한 리듬을 갖추고 있어서 오히려 정겹다. 뭐랄까 그것마저도 내게는 일종의 신비주의로 느껴진다.
녀석은 키가 큰 탓으로 교련복을 입을 때는 맨 앞줄, 검정 교복을 입을 때는 늘 교실 뒷자리에 앉는다. 로만 식 검정색 교복에 하얀 셔츠를 입은 모습은 마치 중세시대 봉쇄 수도원의 수도승을 연상케 한다. 말 수는 적다. 어쩌다 얘기를 할 때는 더듬거린다고 표현할 만큼 꿈 뜬다. 그러나 다른 친구와 달리 알 수 없는 깊이가 있는 듯해서 나 역시 내성적인 탓에 친화감을 느낀다.
수학시간이다. 녀석의 수학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미를 붙이는 것도 아닌 듯하다. 특히 시그마(𝚺) 공식이 나오면 수식을 계산하기 보다는 𝚺 기호에 몇 번이고 덧칠 하는 습관이 있다. 종이가 뚫어질 정도다. 정답풀이 과정과는 매우 무관한 행위로서 얼마 뒤 나도 이상하게 따라하는 버릇을 가지게 된다. 그 쯤 되면 수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적다는 뜻일 게다. 반면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나는 뜻하지 않게 녀석의 꼬봉이가 된 셈이다. 어딜 가자면 가고 뭘 하자면 하는 식이다. 그래도 싫지는 않다. 그 심연에는 일종의 향수와 친화력 같은 것이 있으니까.
녀석은 대학입시의 국 영 수 주요과목은 뒷전이고 쉬는 시간이면 두텁고 지루한 서양고전 서적을 교실 뒷자리에서 탐독한다. 사실 입시를 코앞에 둔 고교생으로서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더구나 <4당 5락>을 운운하던 시기에.
D.H 로렌스, 도스토예프스키, 칼 융, G. 프로이드, 프란츠 카프카, 알베르트 카뮈,....등,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책들은 대부분 지루하고도 어렵다. 카뮈의 <이방인>은 내가 훗날 다시 읽으면서 작품의 시나리오를 두고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떠올리곤 하던 책이다. D.H. 로렌스 <차타레 부인의 사랑> 속의 은밀한 대화의 여운은 상당히 혼란스럽게 남는다. 특히 프로이드 <꿈의 해석>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와 나 사이에 엄청난 간극의 절벽을 만나게 된다. 해박과 무식의 간격은 대화의 양이 많아질수록 더 넓어 진다. 그의 독서력은 거의 폭식과 잡식에 가깝다. 그러나 무질서 속의 질서로서 그의 평설은 대체로 논리적이다.
그래, 나의 눈에 띈 녀석의 책들 중의 하나는 헤르만 헷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던 안개의 시인 H. 헷세를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순간이다. 수레바퀴와 성장기(成長期)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문제를 얘기한다. 내게는 무척 어려운 얘기인데 불현듯 그렇다면 녀석의 수레바퀴는 어떤 모양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하고 억눌린 저울질을 하고 있다
3학년이 되면서 반이 갈리고 만다. 이별의 불만을 가질 틈도 없이 서로 대학입시 준비에 시달린다. 나는 사실 공부에는 관심이 적다. 친구들과 과외도 하고 친구 집 다락방에서 집중적으로 영어 수학에 매달려도 보았지만 성적도 잘 오르지 않는다. 절망적이다. 나는 방향성을 잃고 방황만 한다.
그 후 가물에 콩 나듯 녀석을 만나기는 하지만 점차 멀어져 간다. 마지막 입시준비에 그로기 상태다. 나는 재수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멍청할 정도로 여유롭다.
고교졸업 후 녀석이 모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듣는다. 그러나 자세한 소식을 뒤로 한 채 내 코 석자에 신경을 쓰는 동안 그의 행방을 거의 잃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망각의 불랙홀에 빠져버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다.
나비는 다시 나의 눈동자 속으로 돌아와 나풀나풀 날개 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속삭인다. 우리는 그의 시를 함께 읽는다.
어둠 속에서 / 어둠 저 너머를 생각하다 ..... 종이꽃은 지다
그의 시를 우물거리며 되새기는 순간나는 왠지 슬퍼지면서 또 한편은 알 수 없는 미안함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서 '어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나.
하얀 나비는 환이의 어깨에 사뿐히 앉아있다. 서로 친숙하더니 결국 하나로 오버랩된다.
얘 너는 왜 녀석의 그 어둠이라는 존재 속에 함께 하지 못했던 거야. 그것도 일종의 방관적 가해야. 남을 물리적으로 소외시 키거나 대 놓고 피격하는 것만이 잘못이 아니야. 바로 무관심 자체도 결국은 같은 거라고.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방관된 어둠의 정체, 그것은 어쩌면 그를 괴롭힌 끝없는 가해자였을 것이다. 바로 옆자리를 함께한 <또 다른 존재>였 던 나는 그 어둠의 행방을 예나 지금이나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럼 호랑이의 포효는 무슨 뜻이지?" 하고 우스꽝스럽게 나는 묻는다. 반면 그의 대답은 아주 시니컬했다.
"그건....강력한 힘 즉 내면의 에너지야. 나의 어둠을 제거할 수 있는....말하자면 일종의 구원의 소리지."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우문에 대한 경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네 게 있어서 인형은 뭐고 또 종이꽃은 뭐니?"
그는 이런 무식한 나를 최대한 배려하면서도 버릇처럼 입을 어물거리면서 눈조리개를 좁힌다. 어정쩡해진 나의 면전을 향해 더듬거리다시피 말한다.
"그건 말이야 허구(虛構)란 뜻이야. 난 인형처럼 살고 있어. 아니 난 지금 종이 꽃 같아. 제발 그 인형의 끈과 종이꽃을 무너뜨릴 호랑이의 포효소리를 듣고 싶어. 우렁찬 침묵의 소리를...." 그의 단정적이고 슬픈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적잖이 당혹스럽다.
난 다시 녀석의 무제(無題)의 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왠지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만 같기도 하고, 정체된 어둠을 몰아 낼 호랑이의 포효소리가 강력하게 울릴 때까지 도무지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다. 내 마음 속에도 아직껏 인형이라는 그리고 종이 꽃이라는 내재된 허상의 얼음이 깨어지지 않고 있나 보다. 언젠가 봄날의 하얀 나비처럼 날아가 그와 따뜻한 가슴으로 만나고 싶다.
그리고 무제의 시(詩)를 대신해 <종이꽃>으로 내가 이름을 달았다고 전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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